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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한창 담으러 다닐 때 순간포착이 가장 중요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사진을 담으면 안 된다. 요즘의 순간포착은 몰카이기 때문이다.


셔터를 누르고 가서 이런이런 사진을 촬영을 함부로 했다. 이런 용도로 사용을 하고 싶다. 그러니 이 사진을 사용을 해도 되느냐. 이런 합의가 이루어지면 요즘에도 순간포착의 사진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지치게 된다. 프로가 되지 않으면, 그중에서도 신념을 가진 프로가 되지 않으면 매일 일일이 사진 허락을 받으며 촬영을 한다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사진은 숭늉 한 그릇을 마시고 잠시 앉아 있는 아저씨의 모습을 담았다. 손 부분만 크롭을 했다. 아마 얼굴까지 나왔다면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손톱에 낀 때와 양손을 슬며시 맞잡고 있는 모습에서 여러 이야기가 떠오른다.


꽤 오래전에 담은 사진으로 그때 때가 탄 손을 위주로 사진을 담았다. 그런 사진이 여러 장이었다. 손이라는 건 늘 남에게 내 보여야 하는 신체라 대부분 깨끗하려고 노력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인데 청결을 유지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보내는 생활로 인해 손이 갈라지고 때가 타고 더럽다는 건 그만큼 삶에 애착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름다워 보인다.

예쁜 건 금방 질리지만 아름다운 건 쉽게 질리지 않는다.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건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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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간에 바닷가에 나와서 서 있으면 기분이 황홀하다. 좋아하는 시간 오후 다섯 시. 바닷가에 오후 다섯 시가 서서히 밀려오는 게 느껴지면 바다와 나는 시가 된다. 바다에 오후 다섯 시가 내려앉으면 이제 곧 따뜻한 어둠이 펼쳐진다.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시간, 바닷가 오후 다섯 시. 오후 다섯 시는 금요일 같은 시간이다. 바닷가에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콜먼 호킨스가 연주를 한다. 바디 & 소울이 수평선을 향해 간다.


오후 다섯 시를 기다렸다가 등대로 오른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하늘에서는 매직 아워가 드러나고 빛은 수십만 개의 포자가 되어 허공에서 무화된다. 지정할 수 없는 색, 오후 다섯 시는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림이 된다. 그건 생과 사, 소멸하는 것과 생성되는 것의 동시 존재의 시간이다.


오후 다섯 시.

바닷가의 오후 다섯 시.


누군가 옆에서 담배를 피운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담배는 생을 단축시키는 일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말했다. “매일 살아가는 게 생을 단축시키는 짓이야” 쓰으, 후. 담배연기가 매직 아워의 화면을 부옇게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이것이 혁명이야,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혁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혁명이 이루어지면 생은 아름답다. 생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지만 ‘생‘이 아름답다면 ‘사’ 역시 해 볼만해.


좀 더 추상적이었으면 좋겠어. ‘생과 사’는 너무 촘촘하고 계획적이거든. 생과 사는 오후 다섯 시 같아졌으면 좋으련만. 좀 더 은유적으로, 바닷가의 오후 다섯 시의 빛들이 수십만 개의 메타포로 비처럼 바다에 쏟아졌으면. 그런 오후 다섯 시가 되었으면. 나도 모르게 콜먼 호킨스의 음악에 몸을 흔든다.


바닷가에서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매직 아워 너머에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은유적인 사람, 은유적인 얼굴을 하고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면 심장은 펌프질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생각하자. 지구에서 벗어난 곳은 그 사람의 오후 다섯 시. 나는 다리 사이에서 태어나기도 전의 아름다운 오후 다섯 시를 만난다.


안녕,


안녕.


오후 다섯 시의 인사에 나는 클리셰 적인 인사를 했다. 안녕 보다 더 괜찮은 인사는 없을까. 좀 더 친밀하고 내제적인 인사말이야.


담배를 피우던 누군가를 나는 불렀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누군가의 얼굴에 눈과 코가 없다. 이빨이 없는 퀭한 구멍으로 담배연기가 후 나올 뿐이다. 이것이 혁명이야. 모든 것이 제자리일 뿐이다. 해가 지고 나는 바닷가에서 집으로 온다. 등대를 빠져나온다.


늦은 밤.


바다와 하늘의 색이 구분이 가지 않는다. 따각따각 따각따각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십만 개의 빛의 메타포가 바다로 들어가 조개가 되어 울고 있다. 수천수만의 조개가 아가리를 버리고 달을 보며 울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조개는 생과 사를 노래한다. 따각따각. 조개는 콜먼 호킨스의 음악을 연주한다. 따각 따 각. 조개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 사람의 오후 다섯 시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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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2




바닷가가 한껏 잿빛으로 뒤덮였다. 킬리를 잃어버린 타우리엘의 마음처럼 온통 잿빛으로 들어차서 바다 전체가 우울하다. 마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그림처럼 보인다. 특히 1880년 ‘녹튼 인 블루 앤드 실버’의 느낌이 든다. 휘슬러의 그림은 고독하고 우울하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휘슬러의 그림에 잔뜩 취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의 우울함 따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휘슬러의 그림을 보며 토스트에 고추냉이를 듬뿍 발라 먹고 칼스버그를 마신다.



어느 날 이곳에서 그녀가 말했다. 여자는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화내는 게 아니에요. 화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거예요.



여자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다. 인간이 바다를 정복하려 하지만 그게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여자의 마음은 바다와 같다. 저 끝을 보며 칼스버그나 마신다.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뷔페를 갔는데 그곳의 뷔페는 하루키를 닮았어. 무리카미 류를 닮지 않았어. 예전에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나서 이런 대화를 했어. 나는 열 명 중에 한두 명이 나의 글을 좋아해 준다면 족하다고 하루키가 말했지. 하루키 씨는 대단하네요. 나 같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좋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쁠 텐데,라고 무라카미 류가 감탄하며 말했어. 자 칼스버스나 마시자.



헤밍웨이는 어느 곳에 이렇게 썼다.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를 이루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다, 투우를 한다, 책을 쓴다, 아들을 낳는다.라고 했다. 나는 도대체 뭔가. 전정한 남자에서 거리가 너무 멀다. 그저 진정 한 남자일 뿐이다. 그렇게 잘 난 헤밍웨이는 자신의 글로 구원을 받지 못해 총구멍을 머리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이 가끔 꿈에 나타나고 나는 그 앞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다. 세상은 뭔가 불공정한 공평이 있다.



그녀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같은 눈빛으로 나를 봤다. 칼스버그나 마시자고.







Nocturne in Blue and Silver - James Mcneill Whistler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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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명절 기간에 일행과 함께 바닷가를 어슬렁거렸다. 코로나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와서 바닷가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바닷가에 스며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며드는 건 좋다. 영화 ‘안경’을 보면 스며드는 것에 대해서 잘 나온다. 영화가 이래도 돼? 할 정도지만 영화에 스며들어 버리고 만다. 사람이 풍경에 스며들어 하나의 배경이 된다. 내 모습도 누군가의 배경이 되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집 근처의 바닷가는 모래사장이 있는 해안과 방파제뿐이라 여기서 조금 떨어진 포구 쪽으로 간다. 거기는 아직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기 좋다. 누군가 저기서 추운지 이소룡의 스텝을 밟으며 허공에 대고 펀치를 날리고 있다. 바닷가에는 냄새가 있다. 바닷가 냄새는 계절에 따라 다르며, 비가 오는 날이나 습기가 많은 날, 흐린 날 다 다르다.


몇 해 전에는 이곳에서 일행과 함께 돗자리를 깔고 건방지게 누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를 읽었었다. 살인자의 시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무척이나 불쾌하고 기분이 이상해지는 이야기. 무엇보다 미국식 이야기. 불쾌함을 벌릴수록 문학이란 꼭 따뜻하고 온후함을 주는 것이 문학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좀비 영화 중에서 재미있게 봤던 윌 스미스의 ‘나는 전설이다’에서 네빌은 홀로 살아있다. 여기의 세계관 속 좀비는 낮에는 뱀파이어처럼 나다니지 못한다. 밤이 되면 출몰하는 좀비들 때문에 네빌은 욕조에서 샘을 끌어안고 가만히 밤을 지새운다. 낮이 되면 네빌은 자유해서 모든 물품을 가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완전히 자유하지만 마네킨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네빌은 외롭다. 오로지 곁을 지켜주는 샘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후에 샘은 좀비 개들에게 물려 좀비가 되려 할 때 네빌의 손으로 죽이고 만다. 그 세계관 속 네빌은 어쩌면 좀비 떼들과 상대하는 것보다 이 망망한 세계에서 홀로 지독하게 고독한 외로움을 더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문을 열고 나가면 밖에는 사람들이 왕창 다니고 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없고, 내 편도 없고, 가족이 있어도 내가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느끼면 고립되어 외롭다고 느낀다.


이렇게 걷다 보면 똥강아지들을 본다. 어미는 묶여 있지만 새끼들은 풀어놨는데 사람만 보면 신기하고 좋아서 우르르 달려든다. 그 짧은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댄다. 내가 어릴 때에도 집 마당에 개를 키웠다. 강아지 이름은 깜순이. 깜순이 집에는 잠에서 갓 깨어난 다섯 마리의 새끼들이 막 일어났다. 깜순이 새끼들이 집을 나와 마당을 뛰어다니고 화단을 망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잘못 건드린, 처음 본 사마귀의 당랑권을 받은 한 마리의 새끼 강아지는 앞발로 사마귀에게 덤비다가 혼비백산을 한다. 아버지가 마당을 나가면 나머지 네 마리가 뒷다리로 땅을 딛고 대문에 매달렸다. 얼굴만 내밀고 꼬리를 흔들며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동시에 몸을 들려 마당을 경기장 삼아 지치지 않고 레슬링을 한다. 새끼 강아지 입에서는 기분 좋은 비린내가 머물러 있다. 그러다 우유를 데워 놓으면 자석처럼 머리를 맞대어 얼굴을 박고 까만 코가 하얗게 되면서 그릇을 핥는다. 깨끗하고 기분 좋은 비린내가 새끼 강아지들 입 안에 가득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끼 강아지들은 또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어린것들은 뭐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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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 속에 갇힌 사람들


시계의 초침 소리,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 더러운 바닥에 신발 바닥이 닿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신음 소리.


이런 익숙한 소리보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는 울고 웃는다. 한 25년 전 야후를 필두로 인터넷이 세상이 도래한 이후 사람들은 자판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 시진핑이 중국의 주석이 되기까지 이 인터넷이라는 것이 시발점이 되었지 싶다.


당시 갇혀있던 중국의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리커창을 데리고 인터넷의 원천봉쇄를 시진핑이 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다. 중국은 워낙 거대한 나라라 7인 체재로 이어가다가 시진핑이 최고의 권력을 잡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인터넷이 막혔다가 애플을 통해 스마트 폰이 보급이 되면서 폰의 자판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을 중국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야후가 나왔을 때 생각해보면 이 검색엔진이라는 게 어마어마한 인력과 기술력이 동원된다. 검색엔진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몇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야후 코리아 이외에 네이버, 다음, 엠파스, 라이코스, 파란 등 수많은 검색엔진 기업이 등장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 회사를 가진 나라도 전 세계에 몇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동차 회사도 여러 곳이나 되고 지금은 그 기술력이 100년이 넘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차들과 다를 바 없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어떤 사람들은 노트북을 구입할 때 자판의 키감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노트북에도 키보드가 있지만 따로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하여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도취되기도 한다. 특히 글을 작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타닥타타타타닥 하는 소리는 꽤나 듣기에 좋아서 계속 두드리고픈 욕망까지 든다. 그래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지치거나 파이팅이 부족할 때는 키보드를 새것으로 구입하면 또 한 동안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다. 이를 안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적극, 까지는 아니지만 권장을 한다. 조깅을 매일 하다 보면 이상하다 잘 안 달려진다,라고 생각이 드는 날이 주욱 이어질 때가 있다. 그때 새 운동화를 하나 구입해서 신으면 이상하지만 그 전까지의 생각들이 싹 날아가고 영차영차 잘 달려진다. 헤밍웨이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에는 타자기를 새것으로 구입했다. 그러면 한 동안 굉장히 글이 잘 써진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또 일어서서 타자기를 치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미국의 배우이자 모델 드리 헤밍웨이가 헤밍웨이의 증손녀인데 검색하면 굉장한 초현실 누드 사진을 볼 수 있다.


어플 중에서 타자기처럼 눌러지는 어플이 있다. 소리도 타자기와 똑같이 난다. 그 어플을 톰 행크스가 개발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재미있어서 그 어플로 자판을 틱틱 티티티틱 하며 쳐보기도 했다. 폰처럼 화면의 자판이든, 기계식 자판이든 우리는 매일 자판을 두드린다. 스벅에서 글을 쓸 때의 묘미라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커피를 홀짝이며 앉아서 여기저기서 타 다다타타타타다닥 하며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그 소리들이 모여서 마치 자판 소곡집을 이룬다. 여기에서 변주를 주면 저기에서 받아서 타 다다다닥 한다. 자판 소곡집으로 15분의 환상의 연주가 완성된다. 짝짝짝.


하지만 자판 속에 갇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5년 전에도 똑같이 비슷한 내용의 말을 자판을 통해서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5년 후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다.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판을 두드리다 나중에는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마치 립반 윙클처럼 군인을 따라갔다가 숲에서 잠시 잠들고 나오니 머리가 하얗게 변한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자판 속에 갇히면 선과 악이 불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악'이라 하더라도 악에 빌붙는 인간들도 많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선'이 훨씬 숫자적으로 많지만 그들은 그렇게 반대의견을 내지 않는다. 오로지 ‘악’에 붙은 사람들이 많은 소리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악마적인 말이 선의에 가깝다고 느끼게 되고 ‘그럴 것이다’가 ‘그렇다’가 된다. 선과 악은 포르노와 같다. 포르노를 싫어하는 사람 치고 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위의 사진은 한창 ‘교관 사진 전시회'를 할 때 작업한 사진 중 하나다. 그룹전으로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룹전은 여러 명이서 같이 전시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 풍경사진이나 인물사진을 전시하는데 나만 늘 초현실 사진을 작업한 것이라, 이게 뭐랄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사진협회 사람들이 있고, 사진학회 사람들이 있다. 협회는 말 그대로 직업 선전에 뛰어들어 업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학회는 사진을 학업으로 공부하여 전공하고 심지어는 유학까지 갔다 온 사람들, 그렇지만 꼭 사진을 업으로 하지는 않지만(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사진에 대한 퀄이 높고 자존심이 강해서 말이 많다. 자신의 말이 일단 맞으니까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여기에 끼면 늘 귀찮고, 저기에 끼면 풍경사진 – 해 뜨는 사진, 호수 사진, 왜가리 사진 같은 늘 보던 사진들이라 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했다. 아니 끼지 않았다.


같이 전시회를 하면 좋은 점은 당연하지만 비용이 적게 든다. 대관료도 다 같이 내니까 좋다. 하지만 나는 작업해 놓은 초현실 사진들이 많고 초현실 사진 하나하나에 대한 스토리가 가득해서 그냥 혼자서 늘 전시회를 했다. 보통 자주 가는 카페의 사장님과 딜을 봐서 오랜 기간 동안 전시를 하지 않고 한 3일에서 4일 정도만 했다. 왜냐하면 이런 초현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시회 사진들을 왕왕 올릴 텐데 뭐야? 이게? 하는 사진들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나의 전시회의 특징이라면 첫날 왔던 사람들이 매일 와서 오랫동안 죽치다 간다는 점이다. 카페니까 테이블에 의자도 있으니까 느긋하게 음료를 홀짝이며 초현실 사진과 초현실 이야기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이런이런 초현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소설들이 책으로도 나오고 곧 밀리의 서재로도 나온다. 그걸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초현실 이야기는 늘 나의 마음을 잡아끈다. 초현실은 비현실인 것 같지만 실제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고다르의 영화는 대체로 초현실적이다. 지정된 게 없고 마구잡이인 것 같은데 그 속에 질서가 있다. 그야 봤자 네 편 정도를 봤을 뿐이다.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알파빌’은 여러 번 봤다. 60년대의 흑백영화로 눈물을 흘리거나 사랑을 하면 처형을 당하는 미래도시로 간 사립탐정 레미의 이야기다. 알파빌에서도 고다르의 뮤즈 안나 카리나가 나온다. 알파빌은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속 중심이 되는 모텔 알파빌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아주 초현실 적이며 몹시도 초현실 적이다. 그 안에서 폭력에 관한 현실을 직시한다.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역시 초현실적이다. 마치 초현실 그림과 사진, 오브제, 독일의 플럭서스의 예술을 보는 것 같은 영상이 2시간 내내 이어진다. 예술과 예술 사이에 모순 같은 메타포가 가득하다. 현실도피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광적인 도주를 하다 결국 망상과 절망으로 인해 파국으로 끝나버리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물론 안나 카라니가 나온다. 안타깝지만 피에로의 장 폴 벨몽도는 작년에 작고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 배우일지라도 우리에겐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인생이 초현실 그 자체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고다르의 영화 중에서는 대체로 대중적이었다. 영화 속에는 벨라스케스, 르누아르, 리히텐슈타인 같은 화가들도 피에르의 입을 통해 자주 등장하며 소설가들 역시 자주 나온다.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미국 영화감독 사무엘 풀러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여 말한다.


영화는 전쟁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랑이며,

증오이고,

행동이며,

폭력이고,

죽음이다.

한 마디로 감정이다.


자판이 그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든다. 자판 속에 갇히게 되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게 되니까. 심지어 사랑까지도. 한 마디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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