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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게으르거나 나태해지는 것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노인이 말한 걸 생각해봐도 그 당시에는 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했다.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아무리 생각한들 원은 중심이 하나이고 그 중심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이 모여들어 둥근 원둘레를 가진 형태뿐이었다. 컴퍼스로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노인이 말하는 원은 내가 생각하는 원과 정반대의 원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노인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이 나를 가지고 놀리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노인은 나에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다시 그 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생각은 아무런 진전 없이 돌고 돌았다. 어떻게 원의 중심이 여러 개면서 원 일 수 있을까? 고급스럽게 확장된 철학적 비유일까? 나는 그만 포기하고 눈을 떴다. 단서 같은 것들이 좀 더 필요했다.


 눈을 떴을 때 노인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처음부터 그 노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원에 어떤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내가 상상해낸 인물인 것일까? 노인은 나의 환상이 아니었다. 노인이 내 앞에 있었고 수호신 같은 우산 손잡이처럼 생긴 지팡이를 단단하게 쥐고 조용히 말하면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사라졌다.


 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느라 나는 차분하고 정상적인 일정한 호흡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저기에 있던 급격한 물살은 사라졌다. 항구 위 두꺼운 층의 구름 사이가 벌어져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빛줄기가 신의 계시처럼 나와서 정확하게 한 곳을 겨냥하듯 크레인 꼭대기에 있는 알루미늄 형체를 비추었다. 나는 그 신비로운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원을 생각하는 동안 과호흡에서 되돌아온 것이다.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이 나에게서 일어난 것을 확인시켜주듯 셀로판지에 포장된 빨간 꽃다발이 옆에 있었다. 이 꽃다발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다가 벤치 위에 그대로 올려두기로 했다. 그게 꽃다발의 입장에서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서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멈춰있던 구름이 흩어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늘 그렇다는 것처럼.


 내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약간의 시간의 공백을 가졌다가 후배가 말했다. “이해가 안 돼요.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어요? 뭐 어떠한 의도나 써먹을 수 있는 계기나 발단이 있었어요?”


 그 당시 늦가을 일요일 오후에 고베의 산꼭대기에서 내가 경험한 기묘한 경험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후배는 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가 하는 질문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후배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결론이 없었으니까.


 “나도 지금까지 여전히 이해가 안 돼.” 그건 사실이었다. 후배의 말처럼 나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고대 수수께끼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경험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했다. 정말 나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18살이었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멈추었던 스트레스성 과호흡 증상이 도래했었다. 나는 그 일로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뻔했다.


 “그렇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어.” 나는 말했다.


 “노인이 말한 중심이 없는 원의 원리나 의도가 핵심이 아니었어.”

 나의 말에 후배는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그 일이 전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후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가 형이었다면 말이죠.” 후배는 말했다. “결말이 없는 게 거슬려서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 저였다면 그랬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나도 그때는 몹시 신경이 쓰였지. 또 굉장히 상처를 받기도 했어. 근데 시간이 지난 후 조금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니까 별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화낼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꼈지.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였어."


 “인생의 크림.” 후배가 따라 말했다.


 “이런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잖아.”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고 비논리적인 일들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 거슬리는 그런 일들이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 있잖아. 어쩌면 그런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이해하려고 파고들지 않아도 돼. 그런 기묘한 일들은 그냥 대체로 눈을 감고 있으면 그대로 휙 넘어가는 일들이야. 거대한 파도가 치지만 물속에서는 평온한 것처럼 말이야.”

 후배는 아마도 나의 말에 큰 파도가 피는 평온한 바닷속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숙련된 서퍼였기 때문이다. 파도 그 속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후배가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게 또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맞아 정말 힘들지.”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노인이 말했다.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이론을 확고하게 설명하듯 반박할 수 없는 신념에 차서 말을 했었다.


 “중심점은 많은데 원둘레가 없는 원.”


 후배가 물었다. “결국 답은 찾았어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 나는 말했다.


 과연 나는 찾았을까?


 나의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일어날 때마다 나는 노인이 말했던 원둘레는 없고 중심점이 여러 개인 원을 떠올린다. 그때, 그 당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정자 벤치에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던 끔찍했던 18살 때로.


 그러다 보면 가끔씩 그 원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심도 있는 이해는 나의 주위에서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그 원은 아마도 단단하고 실제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심층적인 원일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상대방을 깊이 공감하거나 이 세상이 어때야 한다는 이상향을 가지고 있거나 신념을 발견하면 그때 그 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원은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머리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기묘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원둘레가 없는 원은 그런 것이니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원이었으니까.


현명함은 어려운 것들에 봉착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크림이 된다. 그 외에는 다 지겹고 의미가 불투명한 것들 뿐이다. 그게 백발의 노인이 그 당시 늦가을의 흐린 일요일 오후 고베의 산 정상에서 꽃다발을 손에 쥐고 심장박동에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말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신경 쓰이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그 특별한 원과 지겹고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 독특하고 유일한 크림이 내 속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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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가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노인은 조용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의 시선은 단 한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뾰족한 시선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안했다. 남의 정돈된 뒤뜰에 허락도 받지 않고 마구 돌아다니다 들킨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정자를 빠져나가 버스정류장에 최대한 빨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을 뗄 수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 말고 벤치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힘이 좋은 어떤 무엇인가가 나를 꼭 거기에 붙들어 놓은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 갑자기 노인이 말을 했다.


 “중심이 여러 개인 원.”


 나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이마는 무척이나 넓었고 코는 새 부리처럼 끝이 뾰족했다. 나는 노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노인이 조용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중심이 여러 개인 원.”


 당연하지만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노인이 기독교 확성기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근처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리는 없다. 목소리가 아까 들었던 소리와 달랐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훨씬 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미 녹음해 놓은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트럭을 몰며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생선장수처럼 말이다.


 “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못해 물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에 나는 예의를 갖추어서 정중함이 묻어 나오게 물었다.


 “중심이 너무 많아. 아니 어쩔 땐 무한대의 숫자야. 이 원은 원둘레가 없는 원이야.”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의 주름을 깊게 만들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당한 상황이 주는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노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서 몇 가지를 생각했다. 원인데 중심이 여러 개이고 원둘레가 없다.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런 원이 형상화가 될 리가 없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었다.


 “이해가 안 돼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더 나은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노인은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수학 시간에 수학선생님들은 그런 원에 대해서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아요.” 조용하게 덧붙여 말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럴 테야. 그 원에 대해서 너도 잘 알다시피 학교에서는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잘 안다고? 노인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런 원이 진짜 존재하긴 해요?” 나는 물었다.


 “당연히 존재하지.” 노인이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원은 진짜로 존재해.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알겠어?”


 “볼 수 있다구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한 질문이 어색하게 공기 중에 잠시 동안 매달려 있다가 곧 희미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들어봐, 너 스스로 상상해봐야 해. 네가 가진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 보는 거야. 원둘레가 없고 여러 중심점을 가진 원을 말이야. 만약 네가 피땀을 흘리는 것처럼 엄청난 노력을 들인다면 그 원이 어떤 건지 선명해질 거야.”


 “어렵게 들립니다.”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어렵겠지.” 노인은 말했다.


 마치 딱딱한 무엇인가를 뱉어내는 듯한 소리로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듯 노인은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지 네가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 어려운 걸 얻어낸다면 그건 네 인생의 크림이 된다는 것이지.”


 “크림이요?”


 “프랑스 말에 이런 표현이 있어. crème de la crème. 무슨 말인지 아나?”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크림 중의 크림. 그 말은 최고 중의 최고란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그게 crème de la crème 야. 알겠어? 나머지는 다 지겹고 쓸모없는 거야.”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노인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생각해봐” 노인이 말했다.


 “눈을 감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봐. 중심점이 여러 개인, 원둘레가 없는 원. 우리의 머리는 어려운 걸 생각하고 고민하려고 만들어진 거야. 네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게 끔 돕기 위해 머리가 있는 거라고. 귀찮아하거나 내버려 둬선 안 돼.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지난 과거나 닥쳐올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말이지. 왜냐하면 지금이 너의 머리와 마음이 동등하게 형체를 이루고 단단해지는 순간이거든.”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그 원을 그려보려고 했다. 지금 당장 상상을 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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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시간이 오래 흘러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 시나리오를 짜서 계획하고 괴롭히려고 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째서 그런 일에 에네지를 쏟아부으려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트려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도대체 사람의 속마음이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단순히 나쁜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초대장은 제대로 된 엽서였다. 이렇게 엽서 하나를 만드는 것조차 꽤나 공을 들여야 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사람이 나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여자애가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할 정도의 짓을 나는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애에게 수치심을 느낄 만큼 잘못한 일은 전혀 없었다. 고작 연주를 할 때 건반을 잘못 두드린 것이 그렇게 그녀를 지금까지 화나게 한 것일까.


 온통 의문투성이었다. 질문은 가득하지만 답은 전혀 없는 것들 뿐이었다. 뉴스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인간 전반에 관한 것들을 돌아보면 가끔씩 고의가 아니어도 타인의 감정을 짓밟기도 하고, 자존심을 긁기도 하고, 기분을 상하게도 한다. 나는 나에게서 그러한 가능성을 추측해보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증오의 상황에 대해서 어쩌면 예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오해에 대한 것들을 나는 떠올리려 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 생각을 잡아당겨도 납득할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수확도 없이 이 감정의 미로를 방황하고 있을 마음이 삼하게 부는 강풍에 마구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숨이 막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증상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나에게는 일어나곤 했다. 스트레스성 과호흡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새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고 몸이 느끼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엇인가로 인해 당황하게 되면 목구멍이 꽉 조이고 그 때문에 폐로 충분한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된다. 급물살에 쓸려 익사해버릴 것 같은 패닉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그대로 몸은 굳어버린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웅크리는 것뿐이다. 눈을 감고 몸이 다시 리듬을 찾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린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로 시간을 들여 리듬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증상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멈추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증상도 멈추었다. 그 여자애와 피아노 연습을 하던 10대에는 그런 문제들로 나는 꽤 힘들었다.


 사라졌던 증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정자 옆 벤치에 앉아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숨을 못 쉴 정도의 이 막막함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오 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 십오 분이었을 수도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잠깐의 시간에 나는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다. 기묘한 패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거품 같기도 했고 거품이 원을 그리기도 한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패턴의 형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번쩍 하며 보이는 패턴의 개수를 샜다.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정상적인 심박수에 가까워지려 애쓰며 패턴을 수를 세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내 심장은 어떤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속도로 요동쳤다. 갈비뼈 안에서 겁에 질린 쥐가 미친 듯이 경주를 하는 것 같았다.


 패턴의 수를 세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어떤 사람이 나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앞에서 누가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심장은 아직도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한 노인이 맞은편 벤치에 앉아서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노인의 나이를 눈으로 가늠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 버린 노인의 나이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 노인은 다 비슷하게 보였다. 60대나 70대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떻든 그들은 나이가 젊지 않다는 게 내가 말하고픈 전부다.


 노인은 푸른 끼가 도는 회색 울 카디건에 갈색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남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옷과 신발은 상당히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관리를 잘한 것 같았다. 꼼꼼한 성격인 것이다. 노인의 차림새에서 누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굵고 뻣뻣해 보였다. 귀 위의 머리숱이 목욕할 때 새들의 날개처럼 솟아 있었다. 돋보기 같은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노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앞에 있었는지 몰랐지만 시간을 들여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노인이 나에게 “이보게 괜찮은가”라는 말을 건네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어떤 문제가 있어 보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나는 그러했다. 앞의 벤치에 앉아서 나를 꼼짝없이 바라보는 노인을 봤을 때 제일 먼지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노인은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굳게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박색 목재로 만들어진 지팡이처럼 보이는 우산의 단단한 손잡이를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마치 우산의 손잡이에 의지하듯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노인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나는 저 노인이 근처에 살고 있다고 추측했다. 노인은 혼자였고 노인의 옆에는 노인을 보호해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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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은 공원에서 툭 튀어나온 정자에 올라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항구가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수많은 컨테이너 선박들이 교각에 정박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꼭대기에서 보면 철제 컨테이너들이 쌓여있는 모습이 꼭 책상 위에 놔둔 동전이나 클립을 넣어두는 작은 통으로 보였다. 모든 풍경이 실제가 아니고 꾸민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돌처럼 정자에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가 겪은 이상한 경험에 대해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자연스러웠지만 일반적으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확성기를 통해 퍼지는 증폭된 소리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뚜렷한 일시정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고요한 바이칼 호수의 수면처럼 어떤 감정의 굴곡적인 선도 없이 매우 정확하게 전달했다. 소리는 무척 중요한 사실을 가능하면 아주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이 모든 게 나에게, 나에게만 보내는 개인적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는 전혀 하지 못할 생각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어떤 이유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만큼 이미 지쳐있었다.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그 목소리는 점차 커지면서 점점 알아듣기 쉬워졌다. 그 소리는 서두르지 않고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왔다. 느리게 움직이는 자동차 위에 달린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기독교 메시지를 방송하는 차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침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을 겁니다. 이는 누구도 죽음이나 죽음 뒤의 심판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죽고 나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죄로 강력하게 심판받을 겁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메시지를 들었다. 복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기쁘지 않은 메시지였다. 그건 사실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들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곳에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이 산꼭대기 지역에 와서 전도사 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저택에, 자동차도 여러 대 가지고 있고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풍족하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죄의 구원을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구원을 외치는 기독교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렇지만 인간이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수입과 지위는 죄와 구원과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주님으로부터 그 죄를 사함 받을 것이라. 지옥불에서 벗어날 것이라. 하나님을 믿으라. 그를 믿는 자만이 죽음 뒤에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지라.”


 확성기를 단 기독교 차량이 내가 앉은 벤치의 앞 도로에 나타나서 죽음 뒤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기다렸다. 지금 나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의 의미나 뜻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듣고 싶었다. 내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명쾌한 소리를 나는 기다렸다. 차가 내가 앉은 벤치 앞으로 지나가면 더 확실하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는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천천히 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점점 조용해지더니 멀어졌다.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자동차는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다가 내 쪽에서 멀어져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음에 틀림없었다. 어째서 곧장 이 도로로 오지 않는 것일까. 차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그 여자애가 다 만들어 낸 사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게 되었다. 그 여자애는 나 같은 인간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계락을 짜고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보내서 일요일 오후에 외딴 산꼭대기로 나를 오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애와 피아노를 연습할 당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한 어떤 행동이 그 여자애로 하여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으로 빠지게 하는 앙금을 만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이유 없이 내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와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동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분노를 계속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가 시간이 흐른 후 존재하지도 않는 연주회 초대장을 보내는 것으로 분풀이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고소하다며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 곳에서 그간의 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식의 일을 꾸며서 나를 속여 내 꼴이 우습고 꼴불견일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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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착각했나? 재킷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다시 한번 정보를 확인했다.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초대장의 지도를 자세히 봤다. 그러나 내가 잘못 본 것은 없었다. 지도에 있는 그대로 나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도로도 맞고, 버스정류장도 맞고 시간과 장소 역시 맞았다. 나는 침착하려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걸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단 연주회장으로 가서 피아노 연주를 보는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해 가면서 산 정상으로 올라서 드디어 건물에 도착했다. 제대로 도착은 했지만 연주회장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강철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두꺼운 체인으로 문이 둘러져 있었고 무거운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 난 작은 틈으로 꽤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자동차는 한 대도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보도블록 사이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주차장은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입구에 있는 큰 명패가 말해주었다. 이 장소가 내가 찾고 있는 연주회장이라는 것을.


 나는 입구 옆에 있는 인터콤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힘 있게 버튼을 다시 눌렀다. 인터콤은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음성이 나와야 할 곳에서 정적만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연주회는 15분 후에 시작이었다. 꽉 다문 커다란 문은 전혀 열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문에는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졌고 녹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왔다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묘한 곳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라는 것에 도달하면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한 번 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인터콤 버튼을 조금 길게 눌렀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침묵은 드러내 놓고 계속 이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11월의 차가운 문에 기대어 십분 정도 서 있었다. 곧 누가 나타날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졌지만 역시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의 안쪽이든 밖이든 도대체가 미미한 움직임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조금 전의 적막처럼 지저귀는 새도 없었고 짓는 개도 없었다.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회색 구름이 담요처럼 적막을 덮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포기해버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도 할 수 없았다. 이런 불운하고 기분 나쁜 깜깜함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거리의 뒤쪽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피아노 연주 같은 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어나서 꽃다발을 들고 그대로 집으로 가는 것뿐이다. 집에 가면 엄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 꽃다발은 뭐야?"라고 묻겠지. 그러면 나는 또 변명 같은 말을 하게 되겠지.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일 발자크를 읽을 때처럼.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봤다. 생기를 다 빼앗겨버린 조화 같았다. 이 꽃다발을 역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꽃다발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비싼 꽃다발이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아늑하고 작은 공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 한 채가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공간의 공원이었다. 공원은 질 좋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곳을 공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들었다. 흔한 분수대도 없었고 놀이기구도 하나 없었다. 있는 거라곤 중간에 툭 튀어나온 듯한 작은 정자가 있을 뿐이었다. 정자 벽면은 기울어진 격자모양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이 돌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수풀도 보였다. 바닥에는 납작한 정사각형 디딤돌도 있었다. 이 작은 공원은 적어도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공원에서 벗어난 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공원은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나무와 풀들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주변에 잡초나 쓰레기도 없었다. 언덕 위로 올라갈 때는 공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올라왔는데 내려오는 길에 비로소 눈이 들어왔다.


 나는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서 정자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여기에 앉아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저기 위의 연주회장은 도대체 언제 연주가 열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이 물고 서로 연결된 하나의 꽈리처럼 엉켜 있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집중을 하면서 생각에 빠져 연주회장까지 걷느라 나는 몹시 지쳤고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실은 좀 기묘한 힘듦이었다.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특이한 종류의 고단 함이었다. 분명 나는 지쳐버린지가 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 시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기분은 앞으로 살면서 또 여러 번 겪을 것이라는 사실과 이런 종류의 힘듦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계속]


직역: 김가은

인스타그램  @kankim.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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