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겁쟁이라서 그런지 눈을 감기가 무섭다. 어둡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깜깜한 어둠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컴컴한 어둠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어둠이 자꾸 보인다. 눈을 감으면 칼 날 같은, 빛처럼 밝은 어둠이 선명하게 살아있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내 주위의 어둠은 추워서, 너무나 추워서 내 몸을 자꾸 찌른다. 이렇게 추운 건 처음이다. 나는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잠이 와서 잠을 정말 자고 싶은데 눈을 감아도 어둠이 계속 보여서 잠이 들 수가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을 알 수 있다면 지금이 몇 시인지 알겠지만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저 느낌으로 낮이 지나고 밤이 오는 것 같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감각마저 무의미하다. 그래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혼자라서 정말 무섭다. 친구들을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눈을 뜨고 있어도 어둠이 보이고 눈을 감아도 어둠이라는 게 보여서 나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계속 울었다. 눈물을 닦고 싶은데 어둠이 짙어서 바로 앞의 내 손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보지만 닦인다는 느낌이 없다. 눈물이 났을 때 눈물을 닦았던 그 행동을 하고 있는지 분간이 없다. 그저 허공에 내 손이 왔다 갔다 하는 느낌, 그것뿐이다. 잠이 오는데 어둠이 눈앞에 잘 보이니까 잠이 들 수도 없고 무서워서, 너무 겁이 난다. 어둠에 갇히기 전에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떠올렸다. 잊는다는 것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아무렇지 않은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잊고 싶지만, 아무렇지 않고 싶은데,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처음 어둠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그 공포가 매일 계속되고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게 안 된다. 눈을 감으면 더 똑똑하게 보이는 이 어둠. 이제 더 이상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죽고 싶은 것이다. 제대로 죽고 싶다. 살려주세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죽여 달라고 말한다.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이제 이 무서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어둠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러니 이제는 정말 죽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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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시골로 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시골에 들어가는 순간 시골만이 가지는 냄새를 맡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시골냄새를 맡으면 기묘하지만 편해진다. 도시에서 시달리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시골만의 그 냄새가 있다. 그 냄새가 족쇄를 풀어헤친다.


뜨거운 태양열을 잔뜩 받은 풀냄새, 솥에서 나는 냄새, 소똥 냄새 같은 냄새가 풍기면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끄고 차 창문을 열고 달리게 된다. 거기에 외할머니가 해주던 음식 냄새, 시골집에서 나는 냄새, 시골의 개울가에서 나는 시골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그대로 무장해제가 된다. 냄새만으로도 인간은 그렇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로마 향을 피우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짓이라 나무라지 말자. 그 사람은 아마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을 해내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시골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내 속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안심이 된다. 시골의 냄새는 여름에 집중된다. 학창 시절에는 7번 국도를 늘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서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온 동네방네 정류장에는 다 들렀다. 그 재미가 있었다. 포항을 지나면서 대체로 비슷하지만 다른 시골의 풍경이 이어지는데 그 풍경을 멍하게 보면서 가는 재미가 좋았다. 7번 국도는 포항을 지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바다를 끼고 달리게 된다. 내가 사는 곳도 바닷가지만 7번 국도를 따라 보이는 바다와 느낌은 다르다. 그건 일상이 배제된 일탈의 바닷가라 그럴 것이다.


버스에서 차창이 열리는 곳은 뒷자리라 늘 뒷자리에 앉았다. 완행 버스는 올라타서 얼마 가지 않아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로 앞부분에 사람들이 많이 앉았다.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주로 할머니로 압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포항을 지나면서부터는 급격히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에어컨이 너무 춥다 싶으면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후끈한 바람이 들어오는 동시에 시골 냄새도 딸려 들어왔다. 흠흠, 하며 그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였다. 뜨거운 열기를 잔뜩 받은 풀냄새, 바다에서 나는 짭조름한 미역 냄새와 포구에서 나는 짠 내.


출발 전에 햄버거를 사들고 올라타서 경주와 포항을 지나면 밖의 풍경을 보며 야금야금 먹었다. 완행 버스에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사람들은 각자 먹을 걸 꺼내서 냠냠 먹었다. 영해 같은 작은 도시의 정류장에서 정차를 했을 때에는 어떤 할머니가 내리면서 운전기사에게 삶은 감자를 두 개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 늘 하는 인사인지 “할매 올도 잘 묵겠심더”라고 했다.


울진까지 가야 했지만 한 번은 포항 터미널에 잠시 정차했을 때 그냥 내린 적이 있었다. 포항 터미널로 들어가기 직전의 포항의 모습이 그냥 좋았다. 내 나름대로 포항으로 접어들었을 때 저쪽으로 가면 포항 공대, 저쪽으로 가면 성모병원, 저쪽은 다운타운이 입력이 되어 있었다.


포항 성모병원은 큰 이모가 살아있을 적 자식이 없어서 크게 다쳐 입원을 했을 때 내가 병실을 며칠 지킨 적이 있었다. 그때 고1 방학인가 그랬는데 같은 병실에 엄마 간호를 하러 온 여학생과 찌리릿 같은 것이 있었다. 둘 다 쭈뼛쭈뼛거렸는데 서로 병문안 오면서 받은 음료와 빵을 나눠 먹으며 친해졌다. 그래서 방학 동안 병실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막 터졌을 때 큰 이모는 성모병원에서 마지막 생을 다 했다. 그리고 거기서 장례식까지 치렀다. 당시에 포항에서 코로나 환자들이 속출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분위기가 있었고, 장례식 같은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했다. 그때 작은 이모와 이모부, 사촌 누나 두 명과 사촌 형과 나 그리고 모친이 전부였다. 코로나 덕분에 정말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래서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은 큰 이모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사람들이 오지 않아서 장례식장이 쓸쓸하다든가 초라할 것 같은데 그런 분위기는 또 없었다. 결혼식이나 사람들이 많은 장례식장에서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큰 이모는 자식이 없어서 어떻든 우리가 큰 이모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큰 이모는 불영계곡의 작은 집에서 아파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아코디언처럼 몸을 웅크리고 아픔을 견디다 쓰러졌다. 나와 모친밖에 없는 이곳으로 오라고 해도 고향이 좋다며 그곳에서 김치를 담그면 늘 나 먹으라고 보내 주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큰 이모가 살던 집에 모여 장례식장에 들어간 비용 같은 것을 엔 분의 1로 나눠서 내기로 했다. 그래서 큰 이모의 우체국 통장을 확인해 보니 내가 10년 전부터 매달 용돈으로 5만 원에서 10만 원씩 보냈는데 그 돈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통장 안에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눈물이 너무 났다. 그 돈으로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을 처리했다. 큰 이모의 장롱 속에는 곱고 예쁜 옷들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생들(나의 모친과 작은 이모)에게 나눠주려고 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큰 이모는 생활을 어떻게 하며 보냈을까.


외가에 가면 외가만의 시골냄새가 있다. 그 냄새를 맡기 위해서 여름이면 늘 외가에 가곤 했다. 최정례 시인의 ‘4분의 3쯤의 능선에서’가 생각난다.


언덕길 4분의 3쯤 내려오다가

문득 산딸나무 생각하는 것

전에 살던 동네 공원길

거기 4분의 3 능선에 산딸나무 있었다고

이러는 것, 이러는 것은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다


지금은 산딸나무 꽃 피었겠다

꽃이 아니라 꽃받침 같았던 꽃

산딸나무 없는 아파트 숲에 살면서

그 동네 떠나온 것, 후회하는 것

공허를 옮기는 일이다


마트에 가서 애써 푸른 사과를 찾아내고

그 사과 3등분으로 쪼개면서

그 색깔 그 향기에 손 넣어보며

대신 사과를 먹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

그것도 그렇고


산딸나무 꽃과 사과의 내부가

푸른 기미의 미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가 산딸나무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어디에든 정붙여보려고

산딸나무 꽃 지나는 것과 사과 쪼개 먹기를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대책 없는 어거지인데


꽃받침이 꽃이 되고

앞이 꽃받침을 꽃인 줄 알고 받들어 올리고

그래서 꽃받침이 바로 꽃이라고

텅 빈 생각을 피워보려는 것도 그렇고

산의 딸이라서 산딸나무인가봐

그 생각도 말장난일 뿐이고


십자 모양으로 피는 네장의 꽃잎

산딸나무를 사과나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면

제정신 버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의 4분의 3 능선에서 피어나 흔적 없이

사라질 것에 걸려 넘어져서는

머뭇거리는 것, 이러는 것


시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시골의 냄새가 있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온 나를 위해 연탄불에 양념돼지고기를 구워 주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부는 개울이 보이는 외가의 마당에서 먹는 탄내가 입혀진 양념돼지고기. 그 냄새가 가끔 생각이 난다. 집에서 해 먹으면 전혀 그 냄새가 나지 않지만 해 먹는 동안 그때를 생각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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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하야토 스미노를 좋아하세요? 하야토의 쇼팽 에튀드를 소개하는 제목에 ‘듣고 눈물 났습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들어보면 정말 눈물이 날 뻔, 합니다. 좋다는 말이지요.


그 어렵다는 쇼팽 에튀드를 재해석하여 연주하는 ‘New Birth’를 듣고 있으면 음악에 대해서, 클래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 같은 인간도 그대로 빠져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야토의 연주를 몇 시간 듣고 있으면 가끔 왜 일본 사람을 듣습니까? 우리나라 걸 들어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 그 사람은 하야토 스미노의 연주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임윤찬이나 백건우의 연주 또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백건우의 연주를 꽤 여러 번 가서 봤는데 특히 리스트의 단테를 연주할 때에는 노인네가 노인네 같지 않고 마치 전장에 뛰어든 전사 같은 힘이 흘러넘쳐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멋졌습니다.


가끔 하루키를 열심히 읽고 있어도 그런 말을 듣습니다. 왜 쪽발이의 소설을 읽냐고. 역시 하루키의 글을 읽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난징학살과 일본 우익의 신문매체에서도 역사적으로 일본이 잘못한 일은 사과를 받아줄 때까지 한국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솔비가 미술로 떠오를 때 비난을 하고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정우, 하지원도 그림을 그리고 있고 조영남도, 이번에 강원래도 작품전을 했습니다. 비난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왜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하느냐였습니다.


좀 재미있는 건, 의사가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를 하거나, 화가가 소설집을 발표하거나, 엔지니어가 소설로 상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들이 그들을 비난하거나 밥그릇 운운하지 않습니다.


하루키는 이를 두고 오히려 새로운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소설을 발표했기에 읽어 보니 괜찮더라, 고 했습니다.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건, 하루키가 보기에,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야토는 엄청난 피아노 연주가이지만 피아노 전공자도 아닙니다. 게다가 공대생 출신입니다. 오히려 이런 이력 때문인지 하야토는 주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세계가 놀란 것은 그의 실력입니다. 또모라는 클래식 예능 유튜브 채널을 종종 보는데요.


거기에서 우리나라 고퀄의 피아노 교수님들을 하야토가 나와서 속입니다. 입시생의 연주를 지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앞의 3명은 정말 입시생이 연주를 하고 교수님들에게 독한 소리를 듣고 마지막 하야토가 장막 뒤에서 연주를 할 때 교수님들의 얼굴 표정이 샤랄라 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 영상은 조회 수가 천만 회를 넘었습니다.


바닥이 다 보이는 롯데타워 118층 통유리에서 연주하는 하야토의 쇼팽에튀드 New Birth 좋습니다. 요즘에 필요한 건 정말, 꺾이지 않는 마음! 그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연주할 때 하야토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Sumino Hayato - New Birth https://youtu.be/D38U96O7rA0


하야토, 교수님들 몰카 https://youtu.be/WTPlp90Dv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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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때 사진부였는데 1학년 때에는 잔심부름을 많이 해야 한다. 심부름이라 하면 사진부 암실을 청소하고 물약을 정리하고 인화지를 제자리에 두고 주말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단속을 하는 것이다. 토요일에 심부름을 다 끝내고 선배들이 빠져나간 암실의 한편에서 조용한 것을 확인했다. 토요일의 점심시간이 지나면 학교는 마치 고요한 호수의 수면과 비슷하다. 그 떠들썩하던 남자 고등학교의 함성과 냄새가 빠져나간 직후는 그야말로 적요했다. 정리를 다 끝내고 암실의 한편에 앉아서 헤드셋으로 크게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을 들으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좋았다.


이래서 모두가 메탈리카 메탈리카 하는구나. 다른 밴드에 비해 라스의 드럼 소리가 미친 듯이 귀를 때렸다. 드럼 소리가 이렇게 멋지게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력하고 또 강력한 이 드럼의 소리에 절대 밀리지 않는 게 제임스의 보컬이었다. 전율이란 이런 것이구나.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은 메탈리카 최고의 앨범이라 한다. 모든 노래가 육체와 정신을 살짝 분리시켜 놓았다. 시작의 앤터 샌드맨부터 세드 벗 트루를 이어서 낫띵 엘스 메럴까지. 메탈리카는 메탈리카 특유의 소울이 있었다. 그 부분이 오리지널리티 또는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아니라 대번에 이건 메탈리카야!라고.


막사는 거 같은데 그 속에는 자신들만의 어떤 규칙이 있어서 벗어나되 벗어나지 않는, 텅 비어있되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리하여 흔들림 없는 확신보다는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 같은 걸 보여주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뭔가를 표현하고 말하고 싶은데 그게 제대로 잘 안 되는 시기에 메탈리카의 앤터 샌드맨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래서 메탈리카의 메탈리카의 앨범을 듣고 있으면 이들은 태생적으로 난봉꾼기질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천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인슈타인이 살아있을 때 폴란드 시인 폴 발레리가 아인슈타인을 인터뷰를 했다. 그때 “착상(창작의 실마리가 되는 생각, 구상)을 기록하는 노트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온화하지만 진심으로 놀라는 표정으로 “아, 그럴 필요가 없어요. 착상이 떠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라고 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인 콜드 블러드(읽다가 죽는 줄 알았다, 신문 사설을 읽는 기분이었다)’로 유명한 소설가 드루먼 카포티는 사실 기자로 더 유명했다. 그의 스타일이 녹음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받아 적는 일도 없었다. 그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눈을 보며 진심으로 들어줄 뿐이었다. 그렇지만 카포티의 기사는 적확했고 맹점을 관통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 말을 새삼 떠올리게 했는데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이 꼭 그랬다. 이런 앨범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이후에는 이런 앨범은 나오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 앨범은 그저 모여서 노력을 한다고 해서, 연주를 준비한다고 해서, 경험이 많아서 작곡을 이렇게 저렇게 고쳐가며 한다고 해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비틀스를 뛰어넘는 밴드가 현재까지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메탈리카의 이야기는 역시 유튜브에서 전문적으로 다루는 채널이 많다. 메탈리카니까 얼마나 많은 록 마니아 채널에서 메탈리카를 파헤치고 난도질해 놨을까. 그곳을 이용하면 메탈리카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소식은 메탈리카는 2008년부터 음반 제작을 담당해 온 레코드 공장 ‘퍼니스 레코드 프레싱’을 사버렸다. 우리의 음반을 레코드로 찍어 내는데 무슨 터울이 이렇게 많아? 그냥 우리가 사 버리자. 우리 그 정도는 되잖아. 그래서 우리의 앨범을 레코드판으로 실컷 찍어내자. 그렇게 공장을 사 버린 메탈리카는 메탈리카의 앨범을 엘피로 공장에서 열심히 내놓고 있고 미국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모든 노래가 좋지만 가장 전율을 받았던 노래가 더 언포기븐이었다. 요즘은 르세라핌의 언포기븐이 먼저 떠오르지만 메탈리카의 더 언포기븐은 대단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후에는 더 언포기븐 2(더 후에 더 언포기븐 3도 나왔는데 사람들에게 좀 외면을 받았다)가 나왔을 정도로 이 노래는 전 세계를 휘어잡았다. 그 육중하고 굉장한 무게감이 주는 매력에, 아니 마력에 빠져서 학창 시절의 토요일에 모두가 떠난 사진부 암실에서 메탈리카의 더 언포기븐을 들었다.


이 터질듯한 감정을 가지고  늦은 오후에 학교를 나와서 음악 감상실에 갔다. 그곳에 가면 나와 비슷한 놈들이 한 두 명씩 있었다. 우리는 마음을 모아 메탈리카의 더 언포기븐을 신청했고 디제이는 뮤직비디오를 무척 큰 화면으로 틀어 주었다. 그걸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영화도 열심히 보러 다녔지만(더스틴 호프만의 졸업이나, 리차드 기어의 아메리칸 지골로나 주성치의 영화) 메탈리카의 뮤직비디오를 이렇게 큰 화면으로 보는 것 역시 너무 좋았다.


분명 강력한데 처절하고 슬펐다. 가사와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겠지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것이고, 주먹보다 작은 심장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며 그 유지를 위해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을 겪으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흔한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느끼게 하는 것 같았던 노래가 더 언포기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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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에 물씬 가까워졌다. 아직은 싱그러운 바람이나 색감이 어울리는 유월이다. 지금은 해가 엄청나게 뜨겁지 않다. 곧 이글거리는 태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무더운 여름이 온다. 해가 이글거리는 7월이 되면 해변에 나가 실컷 살을 태우는데 백신을 맞은 이후로 피부가 뭐랄까 긁거나 어디 쇠붙이 같은 것에 닿으면 부풀어 오른다. 어떤 사람은 코로나가 걸린 후로 피부를 건드리면 부풀어 오른다고 한다. 두드러기처럼 긁으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게  눈에 보인다. 신기하면서도 짜증이 난다.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오염수를 방류하고 난 후 몇 년 뒤에 해산물 같은 것도 수입이 되고, 생물이야 사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뭐 캔식료품이나 어묵이나 오뎅, 햄 같은 것에 들어간 건 먹을 수밖에 없는데 피부가 더 뒤집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닷가 근처 사람들이 전부 피부가 뒤집어져서 좀비처럼 다니면서 내륙에 사는 사람들과 마찰이 일어나고 정부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는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을 거야.


코로나 이전에 맞이했던 여름과 코로나 시기에 접어들면서 맞이하는 여름은 다르게 느껴진다. 오늘 이전까지 내가 사는 바닷가의 여름은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 시기니까 축제 같은 것도 없고, 모여 있는 것도 안되고 하니 그래서 바닷가 사람들은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이 바닷가를 찾아야 먹고 살아가는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바닷가 사람들은 고민이 심해졌다. 오늘 이후 올해 여름은 하루하루 축제가 이어지고 사람들은 많지만 오염수 방류 때문에 어민들의 고민이 더해져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싱그럽고 푸르른 유월이어야 하는데, 먼지 많고 요 며칠 계속 흐리고 소나기가 내린다. 유월 초에(벌써 중순이라니) 해가 쨍쨍할 때 오전에 한 번 바닷가에서 한 시간 정도 살을 태웠다. 보통 태양에 피부를 실 것 태우면 살균이 되는지 모기도 달라붙지 않고 가렵지도 않다. 그런데 백신을 맞고 나서인지 좀 태웠지만 피부가 더 예민헤진 것만 같다. 칠월에 실 것 태워야겠다. 여름에는 역시 까무잡잡한 피부가 좋다. 코로나 전에는 허여멀건 피부가 태양 빛을 한 껏 받고 나서 탄탄해져 저녁에 맥주를 홀짝이며 시원한 배추에 강된장을 발라서 먹는 것을 즐겼다.


이번에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을 보면 코로나 시기에 대해서 잘 나온다. 코로나 시기를 견딘 사람들이, 즉 상인들이 버텼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상권이라는 게 한 번 죽으면 그 이전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이전에 했던 것처럼 열심히 영차영차 한다고만 해서 코로나로 인해 오지 않던 사람들이 우르르 오지는 않는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이상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어제는 친척이 나에게 와서 천만 원을 빌려갔다. 그 친척 집은 몹시 부자로 이번에 전원에 땅을 사서 집도 목수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가서 직접 지었다. 사촌 형님은 차도 두 대나 있다. 한 대는 아우디 세단이고 한 대는 렉서스다. 그 정도로 여유와 돈이 많은데 나에게 와서 천만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수동기어차를 20년 정도 몰고 다닐 정도로 돈도 없는데 빌려줬다. 천만 원을 실제로 본 적도 없는데 폰으로 터치 몇 번으로 통장에서 통장으로 휙 넘어간다는 게 몹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람들도 날씨도 우리의 일반 상식에서 조금씩 이탈해가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시원한 배추 잎이 있어서 강된장에 밥을 싸서 먹었다. 짭조름하고 달달한 맛이 배추와 파와 함께 씹힌다. 싱그러움이 온 입안에서 퍼진다. 이 맛있는 맛은 이전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먹는 게 가장 맛있었던 건 어릴 때 외할머니 따라 밭일을 하고 점심을 먹을 때 집으로 와서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떤 날은 국민학교의 운동장 그늘에 앉아서 배추쌈을 먹었을 때였다. 외할머니 밭에 사촌누나들과 형들이 같이 나갈 때는 밭일을 하고 집에서 들고 온, 참에 먹을 점심을 학교 그늘에 앉아서 먹었다. 뭐 특별한 음식도 없다. 배추쌈에 강된장 그리고 밥과 얼음이 들어간 물이 전부다.


그렇게 먹으면 김밥이 없어도 꼭 소풍을 온 기분이 들었다. 시골에는 맑고 깨끗한 바람이 많아서 한 번 쏴아 하고 불면 운동장에 심어 놓은 미루나무가 노래를 불렀다. 외할머니가 싸서 입에 넣어준 배추쌈을 오물거리며 옆의 미끄럼틀에 가서 놀고 있으면 사촌누나가 와서 나에게 밥을 먹였다. 그렇게 강된장에 배추쌈 싸 먹는 맛이 좋았다.


여름이었다.

바람이 좋은 여름이었다.

미세먼지 같은 건 없었다.

창문만 열어 놓으면 바람이 불어 방 안도 상쾌해졌다.

어쩐지 다시는 이런 바람을 맞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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