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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야기에 새로 구입한 샤프가 반에서 없어졌다. 분명 누군가 들고 갔는데 범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도 그대로 지나갔다. 분명 가져간 아이는 다음 날 조마조마하게 지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내가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해서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칠 거라고 예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그다음 날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날은 덥지만 맑고 바람이 불어 시원한 날이었다. 토요일에는 3교시까지 수업을 했다. 토요일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니까 청소를 하고 난 다음에 우리는 학교에서 놀기로 했다. 당시 교무실 앞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때라 우리는 각자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 놀기로 했다. 이순신 동상 앞 로열박스에는 천막이 쳐 있어서 그늘이 있고 그 밑에는 시원했다. 토요일에 우리의 자산은 흘러넘치는 시간이었다.


청소를 일찍 끝내고 이순신 앞의 로열박스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음료와 과자도 준비했다. 슈퍼에 파는 제대로 된 과자가 아니라 문방구에서 산 불량식품이었다. 최애 쫀드기부터, 쪽쪽 빨아먹는 아폴로와 콜라 맛이 나는 사탕을 먹으며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여자애들의 무서운 이야기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는데, 내가 외할머니에게 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했을 때 여자애들은 정말 무서워했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외가가 있는 불영계곡의 작은 학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일제강점기에 그곳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잡아서 발목을 자르고 고문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이야기였다. 폐교가 된 학교에 가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나는데 그 귀신의 소리다. 그래서 무서워 책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발목만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을 말하자면.


여고생에서 대학생이 된 담력이 좋은 스무 살 친구 두 명이 소문이 있는 학교를 찾아갔다. 동아리 취재차 찾아간 것이다. 그 소문이 돌던 교실과 일본도를 휘두르고 있던 운동장의 뒤쪽도 구경하면서 무서운 이야기의 장소를 탐방했다. 학교마다 있는 무서운 전신 거울을 두 명이서 쳐다봤다. 그때 친구가 옆에서 웍 하면서 놀라게 했다. 다른 친구가 그러지 말라고 한다. 두 사람은 발목이 돌아다닌다는 그 문제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는 아직 당시의 책상과 걸상이 있었다. 저학년 아이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책걸상이었다. 두 사람은 더운 여름에 학교를 찾아갔기에 땀을 흘렸다. 산 속이라 해가 빨리 떨어진다고 해도 아직은 밝은 날이어서 두 사람은 덜 무서웠다.


두 사람은 걸상에 앉아서 음료를 마셨다. 땀이 많이 났다. 여름이고 계곡에 위치한 학교라지만 걸으면 더운 법이다. 넌 이렇게 더운 날 왜 스타킹을 신고 왔어? 덥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야. 그렇게 말을 하며 친구는 샌들을 벗어서 발바닥을 주물렀다. 샌들을 신고 불영계곡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발이 아팠다. 너 발이 몇 미리야? 스타킹을 신은 친구가 말했다. 나? 한 230?라고 대답했다. 좀 안 맞겠는데? 자기 발을 주무르던 친구가 뭐?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을 주무르던 친구에게 스타킹을 신은 친구가 내가 좀 주물러 줘?라고 말했다. 그리고 샌들을 신었던 친구가 스타킹을 신은 친구에게 발을 내밀었다. 아, 시원해. 발을 주무르던 친구가 손바닥으로 발을 재더니, 나 스타킹 입고 온 이유가 뭔지 알아? 그러면서 가방에서 칼을 꺼냈다. 나 사실 발목 밑으로 발이 없어.


웍! 하면 정희와 여자애들이 꺄악하며 혼비백산을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쫀득이도 아폴로도 다 던져 버렸다. 여자애들은 정말 무서워했다. 그렇게 깔깔 거리며 재미있게 놀다가 저녁이 되어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제 곧 방학이다. 점점 더워진다. 청소를 하느라 흘린 땀은 다행히 식었지만 샤프를 잃어버려 속상한 마음은 식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목에 골목이 있다. 골목을 지나치는데 골목의 코너에서 누군가 쑥 나왔다.


현주였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얼마나 있었는지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나는 양손으로 가방 끈을 잡고 있었다. 현주는 그런 나의 앞길을 막아서고 내 얼굴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뭐라도 말을 해야 했지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뭔가 잘못 말을 꺼내면 울어 버리거나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자애가 폭발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다. 하지만 울어버리면 대책이 없다.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서 여자애가 우는 자리에는 없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현주도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언어를 꺼버린 인형처럼 그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려봤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얼마쯤 서 있었을까. 현주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나에게 쓱 내밀었다. 그건 나의 샤프였다. 나는 그걸 천천히 손을 올려 받아 들었다. 그때 현주의 얼굴이 조금씩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 순간 현주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입술을 빨아 당긴다든가 혀를 밀어 넣는다든가, 그런 행동은 없었다. 그저 입술이 맞닿았다. 그 정도였다. 그 짧은 입술 맞댐이 첫 키스라고 한다면 그것이 첫 키스였다.


어떻게든 울음을 터트리려는 현주를 막아야 했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짝지로서 친해진 다음 어쩌면 짝지 그 이상으로 친해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표 내거나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로만 알 수 있는 거였다. 정희와는 저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 몇 번 되었다. 현주는 6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고 짝지가 되었다. 학기초에는 서로 의지가 꽤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클럽활동으로 하고 있었는데 둥화 부여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고 어딘가에 가서 취재를 해서 그걸 발표하기도 했는데 두부집 취재도 현주와 같이 가곤 했다. 그런 일들을 주로 현주와 함께 했다.


그러다가 내가 돌아가면서 하는 6학년 선도위원의 순번이 되고 다른 반에서도 한 명씩 오게 되었다가 남자애들은 다 나가고 여자애들하고 한 조가 되어 매일 청소를 하고 같이 놀고, 짜장면을 먹었다. 그 속에 정희가 있었고 정희의 샤프와 내가 새로 산 샤프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일들이 현주의 어딘가를 아프게 한 모양이었다. 입을 맞추고 난 후에 현주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작고 따뜻했다. 골목을 지나 우리 둘은 우리 집으로 가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태양 밑에 조금만 있어도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는, 그럼에도 따뜻한 작은 손을 잡고 걸었던 여름이었다.


처음이라는 건 그저 순식간에 지나가고 큰 의미를 둘 수 없을 만큼 초라하거나 슬프거나 아프다. 처음이라는 건 늘 그렇다. 첫 키스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같은 것이다. 뭐든 처음은 서툴고 실수투성이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 실패하거나 실력이 된다.

현주와 함께 저 대문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동네는 개발에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전에 이 달동네의 추억을 잡고 싶어서 다 부서진 동네를 한 컷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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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8-13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악....스타킹..발목...넘 무섭잖아요^6;;

교관 2021-08-14 12:02   좋아요 0 | URL
무서운 얘기는 무서워야 맛있죠 ㅎㅎ :)
 

첫 키스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할까. 첫 키스라는 건 뭐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이유나 근거 따위가 될 때 쓰는 접속 부사’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첫 키스는 마치 ‘그러니까’ 같은 것이다. 대체로 서로가 키스를 부르는 입술을 보며 아밀라아제를 서로에게 공급하며 혀를 꼬아서 하는 키스가 아니라 앞과 뒤의 이유나 근거 따위로 그저 이어주는 아무 기묘한 행위인 것이다. 느닷없이 일어날 때도 있고, 서로가 합일 하에 하지만 그저 허무하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한쪽은 첫 키스인데 또 다른 한쪽은 흥, 나는 아니거든, 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에 첫 키스를 떠올리면 그 경험을 첫 키스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때는 6학년. 반초나 완초가 아닌 완국 6학년 때였다. 완초가 무엇이냐면 요즘의 줄임말로 반초는 반은 초등학교 반은 국민학교를 말하는 것이고, 완초는 전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이다. 나는 완국이니까 죽 국민학교였고 6학년 때의 일이다. 국민학교라는 단어는 마왕 신해철을 생각나게 한다. 신해철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도 국민학교를 나왔으니 그렇게 자신은 부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6학년이 되면 돌아가면서 선도위원을 맡는다. 6학년들이 때가 되면 각 반에서 한 두 명씩 돌아가면서 선도위원이 되어 아침에 교문 앞에서 저학년 아이들이 지각을 하는지, 이름표 같은 건 제대로 달았는지 검사를 한다. 조금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선도 위원 하기를 싫어했다. 오전에야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걸, 권력을 합법적으로 휘두르지만 모두가 다 하교 한 다음 학교에 남아서 청소까지 해야 했다. 학교 구석구석 곳곳을 다니며 쓰레기도 줍고 화단도 정리하고, 뭐 그런 잡다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선도위원 따위 하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특히 남자애들은 더더욱 하기 싫어서 갖은 핑계를 대고 오후에 빠져나갔다.


그런데 나는 참 이상하게도 모든 아이들이 하교 후 학교 곳곳을 청소하는 건 재미있었다. 그래서 다른 반 남자애들이 나에게 부탁을 하면 나는 대신 청소를 했다. 리어카 같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학교를 온통 청소를 한다. 보통 6명이 한 조가 되어 청소를 하는데 처음에는 남학생, 여학생 비율이 반반이었다가 남학생들이 점점 빠지더니 결국 5명이 여학생이고 나 혼자 남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청소가 끝나면 다 같이 앉아서 공기놀이도 하곤 했다. 공기놀이를 하게 된 건 내가 여자애들보다 더 잘해서 나와 편을 먹으려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공기놀이의 관건은 마지막 5단계에서 공깃돌을 잘 모으는 게 중요하다. 그때 나와 주로 편을 먹은 여자애가 정희였다. 정희는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가 6학년에 서로 반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돌아가면서 각 반에서 선출하는 선도 위원이 되면서 우리는 같이 만나게 되었다. 청소를 다 끝내면 우리는 학교 앞에 있는 길림성에서 짜장면을 한 그릇씩 먹었다. 학교의 청소를 다 끝내고 다 같이 지저분한 테이블이 있는 길림성에서 먹는 짜장면은 꿀맛이었다.


정희는 약국집 딸내미로 피아노도 잘 치고 공부도 잘했다. 무엇보다 동그란 얼굴이 예뻐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청소를 하면서 수레를 끌 때 수레가 무거우니까 정희와 여자애들이 뒤에서 밀면서 꺄 하는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탄력이 붙으면 여자 애들이 한 명씩 수레에 올라탔다. 그때는 꺅하는 소리가 더 커진다. 그러다가 뒤의 무게가 무거우면 나는 힘을 뺐다. 그러면 시소처럼 내 몸이 약간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학교 안에 그런 내리막길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청소를 했다. 그런 게 재미있었다. 한창 소리 지르고 노는 걸 좋아하는 십삼 세인 것이다.


6학년 때 짝지가 있었다. 대부분 짝지는 여학생과 남학생이었다. 그때는 무엇 때문인지 남자애들은 남자와 짝지가 되고 싶었고,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성이라든가 그런 것에 눈을 뜨기 전이라 그랬는지 동성이 짝지인 녀석들을 부러워했다. 뭐가 재미있는지 동성끼리 짝지가 된 아이들은 늘 행복한 얼굴이었다.


나의 짝지는 여자애였는데 이름이 현주였다. 나와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그런 사이였다. 부등호를 굳이 따지자면 좀 친한 쪽으로 기울었다.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이 나눠먹기도 하고 두부공장(라고 해봐야 시장의 작은 두부 집)에 콩물로 두부를 만드는 것을 취재하러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기억은 없다. 오히려 다른 반이었던 약국집 딸내미 정희와의 대화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짝지인 현주가 좀 이상했다. 나를 따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바로 뒷자리에 앉은 애들과도 친했는데 그들과 현주가 나를 따돌렸다. 당시에는 유행하는 샤프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그렇게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유행하는 샤프가 나올 때마다 구입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아버지가 유행하는 샤프를 사주었다. 아마 그때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가 부흥기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그때 집도 방 한 칸에서 두 칸짜리로 이사를 했다.


샤프의 모습을 기억하자면 요즘도 쓰고 있는 제도 샤프처럼 날렵하고 유행타지 않는 유행의 샤프였으면 좋겠지만 이런 샤프가 아니라 솜사탕을 비틀어 놓은 것 같은 샤프였다. 스크류바처럼 손잡이 부분이 비틀어져 있고 파스텔톤의 샤프였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다른 샤프들보다 월등히 비쌌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샤프가 가지고 싶다고 그만 이야기를 해 버렸고 아버지는 샤프를 사주었다.


잠깐 딴 이야기로 요즘은 키보드나 폰으로 문자를 입력하니 샤프가 거의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요즘도 샤프의 세계는 그야말로 바다처럼, 아니 우주만큼 넓다. 엄청난 샤프의 유혹이 쇼핑몰 안에서 끌어당긴다. 특히 우리나라 동아 샤프는 종류도, 컬러도 다양해서 주문을 하고 싶어 죽을 것 같다. 게다가 개당 가격이 700원밖에 하지 않는다. 눈이 번쩍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보다 더 저렴하다.


다시 돌아가서, 아버지가 사준 유행하는 샤프를 들고 학교에 갔을 때 현주는 왜 그런지 나와 대화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분이 안 좋은 건 뒤에 앉은 아이들과 현주는 잘 놀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거기서 제외된 것이다. 이유를 물어야 하지만 나는 그만 이유를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서는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싫어졌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각 반에서 모여든 아이들과 함께 학교의 청소를 했다. 물론 거기에는 정희가 있었다. 정희는 수업이 끝나고 내가 데리고 갔을 때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아마 그때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나는 당시에 그 연주의 앞부분만 들어봤지 완곡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정희가 완곡한 엘리제를 위하여는 너무나 멋진 곡이었다. 청소하러 가자고 불러야 했는데 그만 부르지 못하고 연주를 다 할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박수를 쳤다. 미소 짓는 정희.


우리는 또 신나게 청소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길림성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거기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가 사준 샤프를 자랑했다. 그때 정희도 필통에서 자신의 샤프를 꺼냈는데 나와 똑같은 색의 똑같은 샤프였다. 하늘색 파스텔톤의 샤프였다. 어쩐지 신기했다. 정희는 5학년 때에도 많이 이야기를 한 만큼 학교 청소를 하면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현주와는 더 서먹하게 되었다. 나는 현주와 뒤에 앉은 친구들 틈에 끼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을 나가서 정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유월이 지나고 칠월이 되었다. 여름이 되었고 여름방학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아직 이성에 눈을 뜨기 전이라서 그런지 정희와 친하게 지냈지만 말 그대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건 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친구 하자, 남자 친구 하자, 같은 뉘앙스가 우리에겐 없었다. 그냥 남자애들이 노는 식으로 정희도 껴서 놀고 나도 공기놀이를 하면서 놀곤 했다. 그러다 보니 현주와 아이들이 나를 따돌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샤프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샤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내 경우에 비쳐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걸 보고 쉬는 시간에 잠깐 나가서 화장실에 갔다가 정희를 만나고 들어왔을 뿐인데 없어진 것이다.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샤프는 없어졌다. 이런 일로 선생님까지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사준 유행하는 샤프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아까워서 속상했다.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샤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대로 없어진 것이다. 분명 누가 가져갔지만 그 누군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학교 청소를 하면서 정희와 여자애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여자애들은 누가 가져간 게 분명하니까 내일 선생님에게 말을 하자고 했다. 선생님을 불러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 감고, 그런 과정을 거쳐 샤프를 찾았다고 해도 샤프를 가져간 아이가 나온다면 그 녀석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 힘들 거라는 게 가장 먼저든 생각이었다.


(2부는 내일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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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되었다. 세상에 봄꽃이 모든 거리를 점령했다. 봄을 느낄 새도 없이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냐고 울먹인다. 유치원에도 가기 싫다고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이가 보챈다. 한동안 잠잠했는데 또 보채기 시작했다. 엄마가 퇴근하고 올 때 맛있는 거 사 온다고 해도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한다. 그냥 엄마만 종일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거나, 타이르거나 달랜다. 하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다. 아이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매달린다.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시간이 엄마를 회사에 늦게 나가게 만들어 난처하게 한다는 것을, 어렸지만 알고 있었다.


 스타킹의 올이 나갔다는 걸 몰랐다. 팀장에게 실적 때문에 한 소리를 들었다. 서류를 건네는데 손톱에 생기가 빠져나갔다는 것이 보였다. 누구도 내 손톱에 대해서 뭐라 하지는 않지만 마치 한 겨울의 죽은 나무껍질 같았다. 단백질이 빠져나가 줄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에 왠지 모를 결락이 마음을 잠식했다. 거울을 보니 낯선 여자가 있었다. 머리도 푸석해서 할 수 없이 묶었다. 그동안 어깨가 아프더니 목 길이도 달라졌다.


 회의하는 도중에 아이의 유치원에서 전화가 자꾸 왔다. 받을 수 없는데 전화가 끊어지지 않고 온다. 낭패지만 나는 회의 중에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였다. 평소에 그러지 않는데 아이가 하루 종일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있어야겠다고 한다. 회의실에서 나를 찾는다. 내가 설명할 차례다. 전화에서는 아이가 끝없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운다. 이 위치,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었다 너무. 전화기 너머로 아이가 나를 찾는다.


 아이는 나에게 안겨 떨어지지 않고 있다. 환절기라 그런지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 때문에 아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안 된다. 회의 도중에 나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이가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등에서 자꾸 땀이 났다. 냄비에 물이 끓고 있다. 엄마는 밥해야 해,라고 하지만 아이는 더욱 품으로 파고든다. 아이를 겨우 달래 내려놓고 일어나려는데 자꾸 덥다. 등에서 땀이 많이 나서 옷이 축축해졌다. 숨 쉬는 게 가쁘고 눈앞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나를 부르는 거 같은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가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카레를 끓이고 있었는데.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몸이 휘청거린다는 것을 알고 나는 더듬더듬 폰을 찾아 119를 불렀다. 구급차가 왔고 아이가 옆에서 울고 있다. 응급실에 갈 때까지 나는 어렴풋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 같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아이가 내 옆에서 울고 있어서……. 

 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나는 이대로 무너지는 것일까. 

 그대로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일까.


 응급실에서 감기라고 했다. 감기에 탈수가 겹쳤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탈수현상이라니. 의사는 병실에서 주사를 맞고 좀 잠들었다가 일어나라고 했다. 아이는 병원 측에서 봐준다고 했다. 병실로 옮겨지는 침대에 누워 병원 복도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봤다. 어쩐지 모두가 하나씩 불행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병원에 오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병실비, 병원비, 약값……. 그때 눈물이 나도 모르게 핑 돌았다. 하지만 눈물을 삼켰다. 독감도 아니고 감기에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는 것에 더 비참했다.


 병실에 옮겨져 누웠을 때 주사 기운 때문에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아이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이가 잡은 내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봤다. 엄마,,,, 많이 아팠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순간 다짐했다. 유리가 깨지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해도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너를 지켜야겠다고, 비록 내 몸은 부서지기 쉽지만 너 만은 지켜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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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는 No Surprises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김해경 선생을 라바짜 커피 전문점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커피가 맛있습니다.라는 말에 김해경 선생은 알았다며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띄우시는 거 맞으시죠?라고 나는 김해경 선생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김해경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이 탄 커피를 마시고 김해경 선생은 레몬이 들어간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한잔 마셨다.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가만히 듣던 김해경 선생은 고개를 미세하게 살짝 움직였다. 김해경 선생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역시 커피에 대해서 학식이 높다고 생각이 들 때 우리가 앉은 자리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왔다.

내가 먼저 하루키를 알아보고 이쪽으로 안내했다. 멜빵을 하고 체크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한껏 멋을 냈지만 핼쑥한 김해경 선생에게 하루키는 손을 내밀었다. 전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합니다. 잡은 김해경 선생의 손이 유약했고 아주 작았다.

김해경이라 하오. 모두들 나를 ‘이상’이라 부르오.

하루키는 자신의 가방에서 두부를 꺼내서 이상에게 권했다.

커피와 잘 어울릴 겁니다. 우레시노의 두부라서 꽤 부드럽고 입안에서 골고루 퍼집니다. 간장을 찍어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은 고개를 끄덕하며 두부를 한 젓가락 떠먹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하루키 씨가 나를 보자고 했소?라고 쉰 목소리의 이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렵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소설을 씁니다, 이제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김해경 선생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상은 자세를 좀 더 하루키 쪽으로 당겼다. 김해경 선생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제 소설에 좀 쓰고 싶습니다. 음, 하는 쇳소리가 이상의 다문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전 또스또에쁘스끼를 좋아하오. 그 사람의 글을 아주 많이 읽었다오.라고 이상이 말했다.

저도 악령 정도는 아주 좋아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사회주의자여서 사형선고까지 받고 시베리아 유형 동안 그 자신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악령의 근본은 니힐리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라고 하루키가 천천히 말했다.

자멸적 궤변과 괴변이 니꼴라이 쁘레볼로또비치 스따브로낀에 있었는데 말이오. 리자, 리자는?라고 이상이 말했다. 리자가 말했습니다.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 그건 가혹하다, 너무도 가혹하다.라고 하루키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질척이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사이를 라디오 헤드의 ‘노 스프라이즈’가 흘렀다. 하루키 씨? 나는 이미 죽었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이상이 물었다. 하루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한 번 만진 다음 이상에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모든 격렬한 싸움은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싸움터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패배합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존재고 결국은 패배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이기는 방식보다 어떻게 지느냐 하는 패배하는 방식에 따라 최종적인 가치가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하루키의 말을 듣고 마른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자신 앞에 앉아있는 일본의 한 소설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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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 비빔밥

그로서리 쇼핑을 위해서 오밤중에 자주 마트에 들른다. 나는 카트 기를 밀고 다니지 않는다. 노란 장바구니를 옆에 들고 손으로 필요한 물품이나 식료품을 집어서 쓱 담는다.

요즘은 멍게에 푹 빠져있기 때문에 해산물 코너에서 많이 서성거린다. 멍게가 아주 싱싱하면 좋겠지만 난 아주 싱싱한 멍게와 마트의 진열장에서 절 좀 데려가 주세요, 라며 하루 동안 싱싱함과는 거리가 먼, 널브러져 있는 멍게의 맛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멍게가 보이면 따져보지 않고 노란 장바구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멍게는 두 팩 정도 사는 게 적당하다. 손질이 되어있기 때문에 집으로 가지고 와서 뜯어서 그냥 먹으면 된다. 하지만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먹는다. 그러면 맛이 더 좋다. 싱싱하지 않더라도 멍게를 먹으면 입 안에 가득 감도는 그 멍게 향은 짙고 강하고 참 좋다.

멍게를 씹는 맛은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는 식감과 맛이기에 무척 반갑다. 게다가 그렇게 돈이 듬뿍 드는 음식도 아니기에 멍게에 맛을 들인 나 자신이 마음에 든다. 정신이 쏙 나가버린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말이다.

나는 멍게를 초장에 찍어 먹지 않는다. 초장은 멍게 맛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냥 그대로 입안에 넣어서 오물오물거리면서 씹어 먹는다. 그리고 한 팩은 멍게비빔밥을 해 먹는다. 제철인 채소와 함께 멍게비빔밥을 해 먹는 것이다.

미나리와 부추를 씻어서 양념간장을 부어놓고 현미밥에 부추와 미나리를 잔뜩 얹는다. 밥은 따뜻하면 좋겠지만 식은 밥도 괜찮다. 멍게를 부추와 현미밥에 부은 다음 가위로 조금씩 자른다. 미나리가 있으면 좋다. 당근이나 여타 채소가 있으면 넣어도 무방하다. 참기름이나 양념장은 전혀 필요 없다. 그런 것은 멍게 향과 맛을 헤칠 뿐이다.

그리고 쓱싹쓱싹 비비면 밥과 부추 사이에 멍게의 노오란 향과 맛이 배고 스며들어 입안에 넣어서 먹으면 정말이지 신날 수밖에 없다. 통영의 바다까지는 아니지만 마트의 수족관이 입안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렇게 해서 멍게를 자주 사 먹는 편인데 마트의 해산물 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비닐 속에서 꼬물대는 개불을 발견한다.

개불.
이름마저도 ‘개불‘스럽다. 눈으로 들어오는 모양은 정말이지 초현실 영화 속의 진액을 흘리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모습처럼 보인다. 촉수를 잔뜩 숨겨둔 곧 공포로 바뀌는 해저 괴물의 모습 그대로다. 개불이야 말로 지구 상에서 존재하는 생물 중에서 징그럽기는 최고일지도 모른다. 눈도, 손도, 발도, 귀도, 콧구멍도 없다. 정말이지 기이하게 생겨먹은 생물체이다.

 하짐만 멍게만큼이나 맛이 좋은 해산물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엉망진창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맛이 난다는 게 더욱 기이하기만 하다. 잘게 썰어서 기름장에 찍어서 입에 넣어서 야무지게 씹어 먹으면 그렇게 고소할 수 없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여느 때처럼 개불이 있는 곳에서 이 개불 저 개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조 밖으로 나온 개불이 점점 불어나서 그 몸뚱이가 커져왔다. 개불은 그 덩치가 사람만큼이나 커져 버렸다. 곧 꿈틀꿈틀 거리 더니 지렁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옆에서 멍게가 노오란 물을 뿜어내며 진돗개만큼 커져 있다.

맙소사.
지렁이처럼 커져 버린 개불과 강아지만큼 불어난 멍게는 오즈의 마법사 티브이 버전에 나오는 땅을 파며 모든 걸 집어삼키던 그 거대한 왕꿈틀이처럼 보였다. 센과 치히로의 가오나시처럼 마트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우걱, 우걱.
거침없었다. 마트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먹는 속도가 무섭도록 빨랐다. 개불과 멍게는 서로 다른 색을 지니고 같은 것들을 왕창 먹어 치웠다. 진열되어있는 모든 식품을 먹어 삼켰다. 그리고 사람도 집어 먹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저렇게 느릿느릿한 개불과 멍게가 다가오는데도 왜 재빠르게 도망가지 않지? 그러면서 나는 사람들이 개불과 멍게에게 서서히, 머리부터 천천히 개불과 멍게의 입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사람들은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약간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개불과 멍게의 한 지점에 뚫린 큰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불과 멍게는 엉금엉금 천천히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듯, 그런 느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흥! 어림없지. 하는 생각으로 약간씩 거리를 두면서 개불과 멍게의 사진을 찍으며 대치했다. 찰칵찰칵.

개불의 얼굴은, 얼굴은 설명하기 어렵다.
멍게의 얼굴도 설명하기 애매하다.
그저 부드럽고 폭신하고 축축한 노랗고 붉은 생명체가 다가오는 것이다. 개불과 멍게의 얼굴을 생각하는 동안 문득 개불과 멍게를 먹기만 했지 개불의 몸속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생각이 들어 버리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격렬하게 개불과 멍게의 몸속이 궁금했다.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갈증처럼 타올랐다. 개불의 몸속에 안착되어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곧 개불과 멍게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엉금엉금.
그때 마트에서 앙리꼬 마시아스의 ‘녹슨 총’이 흘러나왔다.

저는 태양이 바다를 불태우는 것을 보았어요.
화산이 땅을 갈라지게 하는 것도요.
사막에서 사라진 거대한 묘지와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내는 것도 보았어요.
저는 별들이 하늘을 성당으로 바꾸는 밤들을 겪었어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피해를 면한 무너진 돌담에서 자주 간청을 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래 전이 돌연 생각이 났다. 앙리꼬 마시아스의 녹슨 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던 오래전. 그때의 그 커피 향과 함께 우리가 앙리꼬마샤스라고 불렀던 앙리꼬 마시아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부르는 노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어느 날인가 한 병사가 그의 집이 있는 마을로 달려가기 위해
어두운 수풀 속 어디엔가 놔두고 왔던 녹슨 총보다도 말이에요.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북을 치는 이 세상에서
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더 좋아할까요.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이젠 결코, 소용이 없을 거예요, 결코 말이에요.

당시에 우리는 노래에 빠져들었다. 후에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개그 프로그램의 개그맨을 닮았다. 외국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젊었을 적에는 죄다 촌스럽지만 늙으면 너무나 멋지다는 것이다. 앙리꼬 마시아스뿐만 아니라 숀 코네리도, 조지 클루니도 알 파치노도 잭 니콜슨도 늙어 버린 후가 훨씬 더 멋있고 정력도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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