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만남을 합성해봄 ㅋㅋ



무라카미 라디오 43회에서는 패티 스미스의 노래도 하루키가 들려준다. 제목은 ‘Rock N Roll N Nigger’이다. 최근 애플뮤직에서 이 노래는 삭제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제목의 니거와 내용 때문이다.


패티 스미스는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아무리 봐도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패티 스미스가 부른 노래가 나이를 먹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무대 위 광기 어린 퍼포먼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글이 나이를 전혀 먹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언더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밴드들이 자유를 갈망하고 울부짖으며 공연을 하고 몸부림을 보여주는데 패티 스미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건 어떻게 생각을 해도 몹시 신기한 일이다. 패티 스미스가 멋있다는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면 스타일이 확고하다는 것이다. 그 확고함이 독보적이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패티 스미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찌리릿 정신적 영향을 줘버린다. 어어? 하는 와중에 그녀의 노래와 몸짓 그리고 글에 빠져들고 만다. 만약 28살에 요절한 제니스 조플린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전 세계는 패티 스미스와 함께 나란히 덱체어 같은 곳에 앉아서 지는 노을을 보며 독한 위스키를 홀짝이며 독창적인 그녀들의 목소리로 예전에 라떼는 말이야, 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제니스 조플린이 살아 있었다면 지구의 반은 이쪽에서 조플린의 주렁주렁 쇠 갈리는 목소리의 공연을 미친 듯이 볼 것이고, 또 다른 지구의 반은 하얗게 변한 길고 긴 머리를 늘어트린 패티 스미스의 흐느적 몸짓과 상대방을 일갈하는 듯한 표정의 공연을 볼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하루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패티 스미스와 만나서 식사를 한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키는 참 유명한 사람을 많이도 만나고 다닌다. 약속을 정해서 만나는 일도 많지만 어딘가 클럽에 갔더니 그녀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던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 라든가,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다.

[다음은 패티 스미스의 '록 앤 록 니거'를 부릅니다. 제목이 엄청나죠? 저는 한 번 패티 스미스 씨와 베를린에서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 노래 '록 앤 롤 니거' 이야기가 나와서 "어,,, 제목이나 내용이라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나요?”라고 물어봤습니다. “물론이에요”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많은 방송사에서 방송금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대 위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역시 펑크의 여왕 패티 스미스 멋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클럽에서 이 '록 엔 롤 니거'를 부르고 있는데 맨 앞자리에 흑인 아저씨가 앉아서 얼굴을 몹시 찡그리고 인상을 쓰며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제임스 브라운이었다고 해요.

“그때는 정말 깜짝 놀랐네”라는 거였어요. 패티 스미스도 제임스 브라운 앞에서는 쫄아버리는구나. “그렇죠, 제임스 브라운이잖아요.” 스미스 씨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들어주세요. ‘Rock N Roll N Nigger’] 라며 그녀의 노래를 튼다.


이 노래 제목의 니거가 흑인을 비하하는 깜둥이라는 말이다. 쪽발이나 조센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 애플 뮤직에서 삭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패티 스미스는 배위의 반어를 통해 하고픈 말을 한다고 본다. 한 블로그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좋은 글을 발견했다. 주인장은 몹시 글을 잘 쓰는데 블로그에 대한 어떤 수식도 없다. 그저 자유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그런 블로그인데 링크를 걸어 둔다. 그 블로그에 이 부분에 대한 글이 있다. https://blog.naver.com/nh5584/222936228025[최근 지워진 노래의 가사는 그런 “깜둥이”를 말 그대로 백인 여성이 노래 부르고 있을 뿐 흑인의 인권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노래다. 잭슨 플록도 니그로, 너네도 니그로, 추방되고 기쁨을 잃은 우린 니그로, 일본인에게 너네도 죠센징이다라고 소리 지르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해보자. 뭐가 잘못되었나? 패티 스미스는 그런 쓰레기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전복하여 이용하고 있다. 패티 스미스는 단어의 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누가 그녀의 노래를 인종차별적이라고 짓밟는가. 심지어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시대착오적인 건 그 말을 입에 담고 있는 사실밖에 없다. 진정 니그로라는 표현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니그로들이다]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 소울의 대부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브라운도 죽은 지가 꽤 되었다. 성룡의 영화에도 나올 정도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던 사람이었다. 노래는 들어보면 대부분 아? 할 정도로 많은 노래를 불렀다.


패티 스미스는 펑크 록의 대부, 대모로 불리고 있다. 패티 스미스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로버트 메이플소프(이하 메플소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메플소프는 사진작가이다. 사진을 좋아했던 나는 한때 메플소프의 사진에 빠져서 그의 광기에 먹혀 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적이 있었다. 메플소프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이걸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포르노라고 해야 할지 어렵고 애매하다. 그의 사진은 미국에서 조차 논란이 끊임없이 되고 있다.


메플소프의 꽃 사진 시리즈 역시 감각적이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빠져나오기 싫다. 1분 이상 보고 있으면 사진 속의 꽃이 움직일 것만 같고 스멀스멀하더니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과도 다르고, 아라키 노부요시의 피 같은 꽃 사진과도 다르다.


메플소프와 패티 스미스의 이야기는 패티 스미스가 책으로 젊은 날의 모습을 쓴 ‘저스트 키즈’가 있다. 두 사람의 세계는 일반인들이 들여다볼 수 없는 광기와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세계는 넓은 것 같으면서도 협소하고 그러면서 깊고 우울하지만 새롭고 반짝인다.

이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너무나 위안이 된다. 6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은 한없이 부럽다. 그들은 자유롭고, 자유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대로 해버렸다. 팔을 벌려, 하는 모든 것이 시작이 되었으며 부르는 노래는 시가 되어 하늘에 한 글자 한 글자 아로새겼다. 미지근하지 않았다. 뜨겁게 타오르면서 차가운 온도를 유지한다.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그 힘은 바로 상상력과 환상 그리고 사랑을 벌리고 나오는 사랑 그것이었다.


록의 대모이지만 시인이었던 패티 스미스는 메플소프를 떠올리며 시를 써주고, 메플소프는 앨범 커버 사진을 촬영해 주었다. 두 사람은 가난했지만 그들의 야망과 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바로 60년대의 청춘을 힘 있게 보내고 있었다.


[어떤 날은 미술관에 갔다. 티켓 한 장밖에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한 명만 들어가 전시를 보고 나와 어땠는지 이야기해주곤 했다. 어페이스트사이드로 자리를 옮긴 새 휘트니 미술관에 간 날은 내가 들어갈 차례였다. 미안해하며 들어가서 전시를 봤지만, 지금 내 기억 속에는 그날 미술관 건물의 거대한 창 너머로 건너편 주차 미터기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로버트의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전시를 보고 나와 전철역으로 걸어가던 길에 로버트는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저 미술관에 들어가는 날, 그날은 우리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거야.”] - 저스트 키즈 중에서


황망하게도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눈물이 주룩 흐르고 있었다. 60년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울부짖고 분노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며 다 태운 에너지의 그을음으로 2000년대까지 살다가 그 그을음이 다 했을 무렵 코로나 직전에 눈을 감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두 사람을 보면 앤디 워홀과 그의 뮤즈 에디 세즈윅도 떠오른다. 앤디 워홀을 너무나 동경했던 메플소프. 하지만 앤디 워홀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패티 스미스. 예술은 혼돈이며 비규정적이다. 이는 인간과 흡사하다. 영화 ‘팩토리 걸’에서 시에나 밀러는 그야말로 에디 세즈윅이었다.


패티 스미스는 글도 무척 잘 쓴다.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은 미시마 유키오, 앙드레 지드, 장 주네의 작품들을 읽으며 키웠다. 패티 스미스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그 흔한 약에 손을 댔을 것 같지만 전혀 약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점이 지금까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책을 쓰고 예술을 할 수 있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패티 스미스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존나 멋지다.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록을 한다. 그녀의 노래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것뿐이다.


Patti Smith의 Rock 'n' Roll Nigger를 들어보자. 물론 라이브. 1979년.https://youtu.be/LNnC8hYOmlw


2009. 지산록페에 와서 환하게 한국 팬들에게 인사를 했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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