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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가 지나간다. 아무 일 없이,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평온하게 하루가 지나간다. 그래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른다. 허기를 느끼며 따끈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을 생각에 집으로 가는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선셋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와인 잔을 부딪힐지도 모른다. 오늘 행복하다고 해서 내일도 행복하라는 보장이 없다. 오늘 절망 속에 있더라도 내일은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안다. 행복이라는 것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찰나의 행복한 순간이 왔을 때는 전부 소진해야 한다. 소리 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당신이 나의 곁으로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가슴의 떨림을 느끼고 손을 뻗어 격렬하게 당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내 그림자가 빛에 얼마나 밀려났는지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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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골목길에서 하늘과 골목의 모습을 찍었는데 꼭 나를 닮은 것 같다. 정확히는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을 들여다봤을 때 들었던 감정이 들었다. 불안하고 더 이상 쓸모없어진 느낌. 어쨌든 '흐린 날의 오래된 골목'은 나를 닮았고 이 풍경을 담은 사진은 메리 엘렌 마크를 닮은 것이다. 어딘지 다양한 모순이 가득하고,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그렇지만 자연스럽고 예리한 자연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 한 장은 십 분 이상 쳐다보게 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11년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록 비극적이게 보이는 것일까. 이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 한 장에는 수많은 생각을 불러내게 한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확장판 같은 기분이다. 메리 엘렌 마크는 죽은 지가 고작 5년 전이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작가이지만 그녀의 사진에는 친밀함이 잔뜩 묻어있다. 그 속에는 ‘휴머니티’가 사진 속 인물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역시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에도 그러했듯이.


그녀의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은 중화 단계 없이 어른으로의 항해 같은 느낌이 강하다. 빨리 어른이 되고픈 아이들의 모습이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그렇고. 


남아있는 골목의 모습도 변화 단계 없이 그대로 신도시로 바뀌어 버릴 것 같다. 그렇게 보기 싫었던 전봇대와 전깃줄도, 벽의 금도, 아차 하는 순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날까지 흐려 음험하고 불우한 기운이 있다. 그 꼴이 정말 나 같다. 이런 기운은 메리 엘렌 마크의 사진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의 딱 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 속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밀착된 비관은 없다. 우리는 아주 건강한 존재야, 우리는 생동감을 가지고 삶에 임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 


식물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지를 잘라내면 된다. 그래야 식물은 더욱더 성장을 한다. 메리 엘렌 마크는 사진을 잘라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녀는 프레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장은 사진을 잘라내지 않는 것이 식물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과 흡사하다. 골목은 쓸쓸하고 불우하지만 골목의 방 안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꿈을 키우던 적이 있었다. 인공 불빛은 밝고 따뜻하게 보이지만 광합성이 없고 자연광은 생명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눈과 피부에 좋지 않다. 모순은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불편한 진실이고, 이 모든 것이 역설이며 그 속에서 맛있는 음식 하나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덜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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