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집도 나온 지가 꽤 되었다. 잡문집을 읽을 때 책을 들고 다니며 읽기가 버거워 챕터 별로 오려서 테이프로 붙여서 들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잡문집은 종합 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실제 종합 선물세트는 겉은 번지르르 한데 속은 빈 강정 같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잡문집은 하루키의 여러 장르가 골고루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종합 선물세트는 어린이였을 때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나 받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 돈 주고 사 먹지 않으니 선물의 개념이 확실한 것이 종합 선물세트라서 알차든 그렇지 못하든 받게 되면 기분이 붕붕 떠 다녔다.


잡문집을 읽다 보면 헐렁헐렁 읽어 넘길 수 있는 챕터가 있고 꽤 고심하며 읽어야 하는 챕터도 있다. 그중에서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 대해서 적어 놓은 하루키의 글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안자이 미즈마루와 하루키의 조합을 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렇게 점, 선, 면으로 하루키를 가잘 잘 표현하고 하루키에게 한 방 먹이는 재미있는 작가가 없다는 게 어쩐지 비현실적이다. 하루키스트들은 다 알겠지만 안자이 미즈마루의 본명은 와타나베 노보루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쩌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하루키가 이렇게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을 소설에 등장시키게 된 계기가 어쩌면 미즈마루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를 만나고 보니 자신과 닮은 구석이 없는 이 사람에게 호감이 가기 시작하고 이후부터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을 소설에 등장시켜 버린 것이다.


단편 소설인 ‘코끼리의 소멸’에도 와나타베 노보루가 나왔고, 어떤 고양이 이름에도 와나타베, 갑자기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여동생 애인으로 와타나베 노보루가 사용됐고 태엽 감는 새에도 등장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 연관이 있던 없던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이 그렇기에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와타나베 노보루가 등장하면 자동으로 안자이 미즈마루가 떠오르며 연이어 점, 선, 면으로 그린 무표정의 하루키가 떠오른다.


하루키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술렁술렁한 사람인데 언제나 매의 눈초리로 주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잡문집에서 말하고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하는 규정이 최근 몇 년간 점점 더 불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고, 어떤 때는 작가이자 문장가 안자이 미즈마루고, 또 어떤 때는 그저 해 질 녘 평범한 안자이 미즈마루다.라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는 저녁에 술 한 잔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고향에 가면 담벼락인가 방파제에 그가 그려 놓은 삽화가 가득하다고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도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의 삶을 살다가 죽었지만 하루키는 자신보다 연배가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를 친구처럼 대하면서도 경외심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어차피 한 번 죽지만 그래도 하루키에게 이러쿵 저러쿵 소리를 들어가며 허허실실 재미있게 한 평생 살다가 죽는다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풍성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과 와타나베 노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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