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같은 말도 어떻게 적어내는가에 따라서 단 몇 줄이지만 아주 묘한 뉘앙스를 뿌리게 된다.


사진은 하루키의 단편으로 같은 단편의 영문판과 한글판이다. 내가 영문판을 읽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미국에 살고 있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한글밖에 읽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키의 한글 번역본만 보지만 영어 번역과 한글 번역을 전부 습득한 친구와 하루키의 이야기나,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한국어로 ‘그리고 그것은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를 영어로 번역된 문장은 ‘그리고 그것은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만 한다’이다.


~~ 아니면 안 된다.
와,
~~ 여야만 한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루키는 영어 번역에서 있어서는 본인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루키는 많은 영문학을 일본 번역본으로 번역한 번역자이기도 하니까 자신의 글이 영어로 번역되는 것에 개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일본 번역 작업에 일본어를 잘하는 영어 원작자가 와서 여기는 말이죠, 라며 개입을 한다면 하루키는 그만 손을 놓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하루키는 온전하게 한국 편집자와 한국 번역가를 믿고 맡겼을 것이다. 한국에 하루키를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이 문학사상의 임홍빈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1930년 생으로 지금은 회장으로 남아 있다. 임홍빈이 하루키를 번역해서 들여온 당시에는 서점에서 일본 작가의 문학책을 판매하는 것이 부적절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속도로의 트로트 테이프처럼 잡지책 가판대에서 하루키 소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키를 싸들고 서점에 가서 입점시키고자 하면 반려되기 일쑤였다. 보통은 그 정도면 포기하고 다른 책에 전념을 할 텐데 임홍빈은 하루키 문학을 한국에 알리고자 노력을 했다.


지금의 하루키스트들은 어쩌면 임홍빈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루키도 임홍빈에 대해서 언급한 글이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찾으면 다시 글을 올리고 못 찾으면 할 수 없다. 아무튼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하루키는 서서히 대학생들에게 읽히기 시작하면서 물수제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김영하 소설가도 말하는 것이지만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이기는 것보다 ‘나’ 자신에게 지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을 지치지 않고 죽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원이 되는 것 같다.


소설가 이외수가 말하는 ‘존버’ 정신, 헤밍웨이도 우리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당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끝까지 버티는 것, 그 말은 지지 않는 것이다.


하루키의 저 위의 번역된 글을 보면 한국어로 번역된 저 문장이 훨씬 하루키답고 힘이 있고 기호성이 짙게 보인다. 순전히 우리(나와 친구)의 생각이지만.


단편 소설 속 주인공 준페이는 독백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꼭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을 쓰겠다고 독백을 하는데 하루키의 마음을 말하는 것 같다.


하루키도 이 단편이 너무 좋아서 후에 길게 늘어트려 장편으로 써냈다. 이 단편은 무엇이고 길게 써낸 장편 소설을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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