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서점 ‘가문비나무아래‘가 문 열기를 기다린다.멜버른 커피하우스의 샹들리에 크기는 사람 세명도 모자랄 듯 크게 번쩍거리고 이집의 예가체프는 유달리 시큼하다.아트홀 가죽 카우치에서 대형스크린 아래 피아노 비지엠. 책 읽거나 멍때리기 최적인 듯. 육천원의 호사다.우연히 가져온 ‘야간비행-생택쥐페리‘.머나먼 파타고니아에서 우편항공기를 지휘하는 리비에르. 임무와 독선과 사람에 대한 고민.앙드레지드가 머리말에서 ‘인간의 행복은 자유속에 있지않고 의무를 받아들이는데 있음을 밝혀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적었다. ‘가문비나무아래‘는 한참 후에나 갈 듯하다.
늘 그러는 듯 열심히 몰두하면 월급이 미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보이게 할 수 있다. 머리를 단지속에 들이밀고 눈에 힘 주고 뇌를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훌륭하게 보일 수 있다. 이것이 몰두의 의미다.몰입은 다르다. 내가 문제의 단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되어 보는 것. 그들이 되어봐야 무엇을 어떻게 빠르게 천천히 하나씩 한번에 가능과 불가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몰두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평가받고 성과를 누릴 수 있지만 지나친 몰입은 오지랖 나댄다고 오해받기 십상이다.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강조하였지만. 자칫 가벼울 수 있는 이책은 기획의 자세와 삶의 처세까지 언급하므로 가볍지 않다.이제부터라도 몰입은 그만하고 몰두만 하고 살까보다.<기획자의 독서, 김도영>을 읽으며... 잠시 눈을 쉰다.
오우오우. 양파에 창찬과 욕설을 대비하면 다르게 자란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는 것은 보았지만. 생기를 억제당한 쌀 가열되어 음식으로 변한 ‘밥‘도 그렇다니 정말로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 인듯. 물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그 곡의 주제에 따라 결정체 모양이 아름답고 다양하게 달라진다는 것 까지는 뭐 어느정도 믿는다치고.각 나라의 각기다른 단어를 물이 읽고 의미에 따라 선악 구별의 결정 모양을 보인다는 지점에서는 쫌 심한 듯하다.끝까지 믿거나 말거나.
영화도 티비도 음악도 실패했던 적이 있다. 보고 들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머리 속 잡념 그 걱정거리들은 치명적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육체의 병을 더욱 깊게 만들어 갔고 의학박사님들은 이구동성 생각을 버리라고 말했었다.나에게 생각을 버리는 현실적 방법은 하얀바탕에 이미지 없이 나열된 텍스트. 그걸 눈으로 읽고 머리 속으로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그것 밖에 없었다. 간단한 방법 같아 보이지만 복식호흡 연습보다 훨씬 힘들다. 문단 간격이 넉넉한 편집. 광활한 중원 억새를 가로지르는 일진광풍이 떠오르는 분위기가 잡힌다면 그날은 성공이었다. 그렇게 도달한 숙면은 하늘을 날아 천국으로 향하는 위대한 모험으로 꿈을 짓는다.나의 병은 그렇게 안정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상상하기를 상상하는 것. 그것이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