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베이비 붐>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엔 단순히 추억을 되새기려던 마음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 영화는 1980년대에 발표가 되었지만, 나는 1990년대 말 대학생 시절 처음 이 영화를 접했다. 그 당시, <베이비 붐>은 단순한 코미디 영화 그 이상이었다. 예일대와 하버드 MBA를 통해 성공한 커리어 우먼 J.C. 와이어트의 이야기는 나에게 당시 여성으로서의 삶과 선택을 깊이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J.C.는 맨해튼에서 성공적인 경영 컨설턴트로 활약하며 세련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영국의 먼 친척으로부터 14개월 된 아기 엘리자베스를 양육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커리어와 모성이라는 갈림길에서 J.C.는 혼란을 겪고, 결국 버몬트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J.C.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경험한다.
영화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경력과 모성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을 비판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J.C.의 여정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Ken이라는 동료가 J.C.의 혼란을 틈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은, 여성이 성과를 축소 평가받거나 가로채이는 현실을 보여준다.
Ken의 행동은 크리스틴 델피가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에서 설명한 여성 억압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델피는 가부장제를 단순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여성의 무급 노동을 착취하며 유지되는 물질적 생산 양식으로 보았다. 그녀는 가사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노동력 재생산을 담당하면서도, 여성의 자연스러운 의무로 여겨지는 점을 비판한다. J.C.의 사례는 이러한 분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능한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성을 선택한 순간 회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Ken은 사장의 편애를 등에 업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며,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가 어떻게 여성의 성과를 지워버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캐런 윌슨-부터바우의 [아기 퍼가기 시대]는 J.C.의 경험을 분석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윌슨-부터바우는 현대 사회가 여성을 모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이를 강요된 선택으로 만드는 과정을 비판한다. J.C.가 엘리자베스를 돌보게 된 것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녀의 변화는 모성이 여성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정의할 수 있는 영역임을 보여준다.
클레어 혼의 [재생산 유토피아]는 J.C.가 보여주는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J.C.는 버몬트에서 유아식 사업을 시작하며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성취를 넘어, 여성의 독립적 삶과 경력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혼은 사회가 양육과 가사 노동을 여성 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이를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C.의 여정은 사회적 지원 없이 홀로 싸워야 했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여성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도 전한다.
<베이비 붐>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성이 직면하는 커리어와 모성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 틀을 넘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J.C. 와이어트는 단지 한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정의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혜미 기자의 [잠정의 위로]는 J.C.의 여정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자기만의 방]에서 시작된 버지니아 울프의 사유처럼, [잠정의 위로] 역시 온전히 자신으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지, 안정과 자유, 돌봄과 경력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잠정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이혜미 기자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공표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도 정말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J.C. 역시 자신의 선택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볼 때, J.C.와 이혜미 기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정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경력 단절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1980년대의 J.C.에 비해 분명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낡은 인식, 경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J.C.의 이야기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혜미 기자의 이야기가 책장이 덮인 후에도 우리 곁에 남아 계속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J.C.는 완벽하지 않다. 그녀의 선택은 때로는 주저함과 혼란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닮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혼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아갔다. "경력과 모성, 일과 돌봄 사이에서 여전히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 시대의 수많은 J.C.들과 이혜미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이비 붐>과 [잠정의 위로]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분명하다. 더 이상 여성들이 혼자 돌봄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 '부모의 공동 양육'이라는 인식의 확산, 그리고 가족 친화적 기업 문화를 조성하는 일이 절실하다. J.C.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결국, 더 평등한 사회로의 도전이 될 것이다. <베이비 붐>과 [잠정의 위로]는 여성들이 자신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