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에게, 특히나 당대의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은 인문교양 편집자에게 일과 사적인 삶을 분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P54

나이를 먹어 가면서, 생의 국면이 달라지면서 보이는 세상, 만들 수 있는 책이 달라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그러니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삶을 저 뒤로 밀쳐 둘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지키고 돌보아야 한다.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고,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식물을 가꾸는 일은 책 만드는 삶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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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승섭 지음 / 난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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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에 대해 기억하는 게 거의 없다. 특히 생존자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 어쩌다보니 진보 성향을 가지게 되어서 세월호 관련 기사나 책은 종종 찾아 읽었는데 천안함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막연히 언젠가는 공부해야지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주변의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괜히 눈치보일 때가 있다. 다들 세월호'만' 이야기한다. 그게 불편했다. 진영 논리에 갇혀서 천안함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게 분명하다. 천안함과 세월호가 '리트머스지'처럼 작용하는 한국에서 나는 천안함 사건과 생존장병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아주 공손한 높임말로 쓰였는데, 그 어조가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민감한 주제를 들고 왔으니 어떻게든 독자를 자리에 앉혀놓고 조심조심 말하려는 의도가 짐작된다. 자기 말이 진리이며 정답이라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연설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호감이 간다. 차분히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일단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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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폭침 사건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바로 58명의 생존자이다. 천안함에서 희생된 46명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을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


🔖(47쪽)천안함의 침몰은 생존장병들에게 전우들을 잃고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남긴 비극적 사건인 동시에, 일터와 생활공간이 동시에 무너진 재난이었습니다.


저자는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폭침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과 장애를 입었고, 이것을 트라우마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 환자가 회복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다. 2010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를 짊어진 생존장병 돌보기를 기꺼이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생존장병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안함 사건 직후 조사를 받느라 제대로 치료 받지도 못하고 천안함을 청소하는 데 동원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 트라우마로 인해 전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을 받는 등 국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나는 당시의 보수 정권에서 당연히 전사자와 생존자 모두 예우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천안함에서 돌아온 생존자들은 '패잔병'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실상은 군 지휘부의 실패인데 그걸 장병들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셈이다. 생존장병 인터뷰를 읽고 있노라면 그들이 겪었을 모욕적인 상황이 상상되어서 미안하고 부끄러워진다.


🔖(90쪽)패잔병 호칭에는 전쟁에서 지고 온 군인이라는 무능함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함께하기 어려운 재수없는 존재라는 뜻이 묻어 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두 생존장병이 배 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상사가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너네는 둘이 붙어서 이야기하지 마. 배 또 가라앉는다"라고요.


🔖(108쪽)천안함 생존장병들은 주어진 지시에 따라 성실히 일하다 자신의 과실과 무관하게 트라우마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그 상처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대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결국 그들이 전역을 선택하도록 방치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본 군인들에게 유사시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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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천안함 생존장병의 PTSD를 논할 때 장애학의 관점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전에 『장애의 역사』(동아시아, 2020)를 번역한 경험을 적극 활용한 듯하다.


🔖(82쪽)장애라는 영어 단어는 부재를 뜻하는 dis와 능력을 뜻하는 ability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장애인의 삶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검토한다는 일은 매 시기 '능력 있는 몸(ablebodiness)'을 누가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묻고 어떤 사람들이 그 범주에서 배제되었는지를 따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86-87쪽)천안함 생존장병이 군생활을 하며 감당해야 했던 낙인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트라우마를 겪고 정신과 진료를 받는,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에 대한 편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계에 실패하고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군인으로서는 불명예인 패잔병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무능함, 위험함, 나약함. 이는 군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생존장병은 천안함 사건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열등한 몸'을 가진 군인이 된 것입니다.


🔖(93쪽)사망한 46명의 장병들은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영웅적으로 산화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 시간 같은 배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다가 살아남은 58명의 장병은 낙인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군은 천안함 생존장병뿐만 아니라 2006년의 피우진에게도, 2020년의 변희수에게도 이런 압제를 그대로 관철시키려 했다.


🔖(119쪽)(피우진은) 2006년 11월 군인사법상 '양쪽 유방 절제'는 심신장애 2급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강제 퇴역 처분을 받습니다. 업무에 어떤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수술로 유방을 절제했다는 이유로 퇴역 처분을 받은 것입니다. 가지고 있을 때는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던 유방이, 암에 걸려 절제 수술을 받아 없어지자 퇴역 처분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125쪽)심신장애 3급을 받는다고 해도 무조건 강제 전역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평가를 통해 전역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지요. 소속 부대는 변희수 하사가 계속 부대에 근무하면 좋겠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2020년 1월 20일 전역심사위원회는 강제 전역을 결정합니다.


나는 이런 사례를 맞닥뜨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군은 분명 '비장애인 남성 이성애자'를 '능력 있는 몸'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몸을 서열화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군입대한 적이 없는 20대 여성으로서, 군대라는 문제의 주변부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피우진의 소송으로 2007년 군인사법의 시행규칙이 개정"된 것, 변희수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PTSD로 인해 힘들어했던 날을 이야기할 때 함부로 조롱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군대도 사회도 점점 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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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천안함과 세월호는 어떤 사건의 피해자를 위로하는지, 혹은 어떤 사건의 피해자를 조롱하는지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지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하고 선택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과연 성숙한 시민의 자세일까.


🔖(168쪽)피해자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저열한 비난을 하는 사람 자체는 소수였을지 몰라도, 우리 편의 고통만을 선택적으로 공감하고 우리 편에 유리한 근거만을 선택적으로 취합하는 성향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177쪽)한 재난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말하려 다른 재난의 고통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만난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 생존자 중 누구도 자신의 고통이 다른 재난 생존자를 더 아프게 하는 데 사용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86쪽)정부가 결정한 두 사건의 보상금을 비교하며 세월호 피해자들을 욕하는 일이 과연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 명예를 회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요? 아닐 겁니다. 그건 세월호 피해자들의 고통을 증폭시키고, 천안함 장병들의 아픔을 호기심 어린 화젯거리로 만드는 일입니다. 피해자의 상처를 정치적으로 소비할 뿐, 그들을 위한 어떠한 현실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을 함부로 정치적으로 소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말을 가로채지 않고 일단 끝까지 듣기, 곁에서 함께 서 있기. 그게 진짜 연대의 첫 걸음 아닐까.


🔖(259쪽)트라우마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해주고 그 고통을 비하하는 사람들에 맞서 함께 싸워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자의 몸속에서 고통의 에너지로 머물던 사건은 언어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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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개인으로서 연대의 행렬에 참여할 때 국가는 공동체로서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가? 저자는 천안함 사건을 산업재해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4부에서 소방공무원 연구를 예시로 들어 설명한다.


천안함은 으레 안보 문제로 여겨지는데, 그런 맥락을 걷어내고 산업재해라는 키워드를 붙이려는 시도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이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195쪽)천안함은 산업재해 사건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군인들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고 다친 일이니까요(...) 천안함을 산업재해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면 우리는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 군인의 삶을 중심에 두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2015년 진행했던 「소방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일하다 다친 경험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소방공무원의 우울증상 유병률"이 달랐다. "부상을 경험한 적 없는 소방공무원에 비해 부상을 당했던 이들의 우울증상 유병률이 1.83배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인데, 다친 소방공무원들이 "공무상 요양에 지원했는지, 지원 결과 승인을 받았는지 여부에 따라" 분석해보니 "공무상 요양 심사에서 불승인을 받았을 경우 승인을 받았던 공무원에 비해 우울증상이 1.56배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하다 다쳐서 우울증상이 발생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욱 우울해져서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결론 뒤에 묵직한 한 마디를 던졌다.


🔖(227쪽)저는 이 소방공무원 연구가 천안함 생존장병이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하고 불승인이 나는 과정에서 느꼈을 고통을 짐작하게 해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생존장병 인터뷰를 되새겨 본다.


🔖(200쪽)"우리에게 국가유공자 등록이란 '국가의 인정'입니다. '나라를 지키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았구나. 여전히 고통받고 있구나' 그걸 인정받고 싶을 뿐이에요."


🔖(234-235쪽)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자리에서 일하던 이들이 다쳤을 때, 그들을 지키는 것은 사회의 몫이어야 합니다(...) 생존장병들에게 상이연금 지급과 국가유공자 등록은 한국 사회가 그들의 노동에 대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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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26일은 천암한 피격 사건 12주기이다. 당신도 이 책을 통해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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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번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고 그러한 비극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 P39

패잔병 호칭에는 전쟁에서 지고 온 군인이라는 무능함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함께하기 어려운 재수없는 존재라는 뜻이 묻어 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두 생존장병이 배 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상사가 지나가듯이 말했습니다. "너네는 둘이 붙어서 이야기하지 마. 배 또 가라앉는다"라고요. - P90

2021년 5월 저는 당시 국방부 앞에서 시위중인 최원일 함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한 군인이어도 누가 욕하고 때리면 아픈 인간일 텐데, 도대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틴 거냐"라고요. 생존장병들이 발령지에서 상사로부터 "함장이 죽었어야 니들이 보상금을 받는데, 걔가 살아 있어서 니들이 못 받는 거다" 같은 말을 듣는 그 모욕적인 상황을 어떻게 견뎠는지 물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최원일 함장이 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배와 함께 죽지 않아 다행이다. 앞뒤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내가 죽었다면 아마 사고 처리를 해버렸을 것 같다. 그럼 우리 생존장병들은 얼마나 억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겠나. 살아남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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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면 독자 대중, 그러니까 그 시대의 집단적인 정신의 총합에 대해서 대단히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하고 취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편집자들의 소양이자 미덕이라고 믿는다. 시비와 선악을 넘어선 이런 흐름에 대한 인식은 계몽적인 태도를 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독자의 선택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기존의 세계관이나 상식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서둘러 부정하고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이 ‘있다‘는 사실에 좀더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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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캄캄한 객석에 있지만 무대에서는 관객의 반응을 모두 다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 가끔 관객석이 한 배우의 팬들로 채워진 공연에서는 관객이 ‘내 배우‘를 좇느라 다른 배우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 순간 다른 배우들은 빛을 잃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배우들에게 더 잘하자고 말한다. 제대로 잘해서 관객을 뮤지컬 자체의 매력에 흠뻑 빠뜨리자고, 어느 한 배우가 아니라 뮤지컬 자체를 즐기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 보자고, 처음에는 단지 누군가의 팬이었던 관객이 뮤지컬 팬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명의 배우를 보러 왔다가 점점 다른 배우가 보인다면, 무대가 보이고 음악이 들린다면 그걸로 성공이다. 그렇게 무대 위모두에게 박수를 보내주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공연이 된다. 그래서 연출진으로서, 뮤지컬인으로서 뮤지컬 저변 확대에 기여하는 스타 배우도, 그의 팬덤도 사실은 무척 고맙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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