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유령이 되었군요.
가만히 나를 보던 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 P146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자 조가 복숭아 맛 젤리를 손바닥 위에 툭툭 쌓아주었다. 언제부터 베팅에서의 승패와 상관없이 주전부리를 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더불어 거절할 타이밍 또한 모르는 새에 놓치고 말았다. 나는 반투명한 분홍색 젤리를 하나 입에 넣었다. 약의 목적이 치료에 있다면 젤리도 일종의 약이랄 수 있었다. 쓴맛이 감돌던 입 안에 복숭아 향이 퍼지면서 답답하던 속이 편해졌다. - P150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택하는 과정은 젖은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멈추기 전에는 발을 말릴 수 없었다. - P163

나는 진통제를 복용하듯이 덕질을 했다. 아이돌, 배우, 유튜버, 캐릭터 상품 등등 좋아하는 감정에 한 발이라도 걸치면 전부 덕질의 계기가 되었다. 돈이 들기는 했지만, 원래 사원이 있던 시절부터 치료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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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뮤지컬을 본 날이었다. 혜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덕질하던 아이돌이 공연하는 뮤지컬을 같이 보라 갈 사람을 팬카페에서 찾다가 약속을 잡았다. - P43

김 약사가 상대하는 손님은 주로 순하디순한 단골이었고, 까다롭고 낯선 손님은 대체로 조의 몫이었다. 인간적으로는 흠이 될지 몰라도 고용주로서는 크게 흠이 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이 없을 때가 문제였다. 김 약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조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단골에게 친절한 이유가 장삿속보다 수다를 떨 대상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P45

- 우유식빵으로 사와야 돼.
김 약사가 신신당부했다. 조는 옥수수식빵을 좋아하고 김 약사는 우유식빵을 좋아하고, 혜는 치아바타를 발사믹 소스에 찍어 먹는 걸 좋아했다. 나도 앙버터라든가 오후 3시면 품절되는 크루아상을 찾아다니며 먹고는 했는데 이제는 호빵이라도 상관없었다. 깔끔한 단맛과 진득한 단맛을 구분하던 때가 아득했다. - P55

최저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92

나와 다르게 조는 유령이 된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것 같았다. 원하지 않는 자리로 돌아간 기분을 짐작해보았다. 한쪽에 구겨놓았던 우울을 펴보니 모양새가 비슷하게 겹쳤다. - P111

술자리를 즐기기는 해도 폭음은 하지 않던 혜였는데 그날은 혀가 꼬일 정도로 마셨다. 새벽까지 마시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혜를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물어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골목의 빌라였다. 도어록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났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혜를 부축해서 침대로 데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을 피해 눕혀주었다. 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자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왠지 울적해져서 문에 한참 기대서 있었다. 센서등이 꺼지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 P129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으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ㅡ듣고 있는 거야?
ㅡ응.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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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 P12

전화를 끊고 모로 누워 SNS 앱을 열었다. 혜의 계정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시회와 카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내 계정을 언팔하지는 않았다. SNS 앱을 닫고 커뮤니티 앱을 열었다. 교통사고가 났어. 게시글을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위로와 병원에 가보라는 조언이 댓글로 달렸다. 게시글에 달린 댓글을 수시로 확인하며 답글을 달았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할게. 깜박 졸아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눈을 감았다. 몸을 뒤척이다가 미지의 생물이 파도를 헤치는 소리를 들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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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똑같이 모두 다르며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 당신과 내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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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과 김치가 각자 둔중한 힘으로 팽팽하게 마주하고 있다면, 미나리는 그 사이를 찰방찰방 헤엄치며 가르고 지나간다. 깊은 산 사이에 흐르는 청량한 계곡 같고, 어른들의 지리멸렬한 문제들 앞에서 까르르 웃어버리는 아이 같다. 묵은 엄숙하고 강건해 보이는 색깔과 달리 쉽게 뭉개지는 나약한 음식이지만, 미나리와 함께라면 그특유의 가벼움에 의지해 본래의 침착한 역량을 다 펼쳐내는 것 같다. - P12

그 고사리를 먹을 때면 내 삶도 조금은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고, 크고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막 태어나 빨갛고 작은 몸으로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누군가 내 몸의 일부를 소중하게 품고 산을 오르고 언 땅을 팠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P15

모두에게 점심이 편안하고 당연한 권리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점심을 거르게 되고어쩌다 아프더라도 괜찮다고, 조금 느리거나 완벽하지못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회에서 살수 있기를. - P27

이 책에서 맘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라면 집에서 점심때 혼자 두부를 먹을 것 같다는 니시 가나코의 말이었다. 두부를 다 먹고 나서 낮잠이라도 한숨 잘 태세로 누우면 고양이가 목 위로 올라와 그르렁거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할거라고 했다. - P34

뷔페에 갈 때마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 몫의 접시를 들고 조심조심 걸으며, 관심 가는 음식만 쏙쏙 골라먹는 우쭐한 시간. 그곳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똑같이 줄을 서야 하고, 어른이라고 해서 더 좋은 걸 먹고,
아이라고 해서 더 싱거운 걸 먹을 필요가 없었다. 뷔페에서는 모두가 버젓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고심 끝에 떠온 음식은 떡볶이나 잡채, 떡 같은 것이었기에 내 접시를 본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뷔페 와서는 이런 거 먹는 거 아니다." 뷔페에서는 그런 잔소리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내 맘인데요? 내 맘대로 먹을 건데요?
크고 나서도 뷔페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어서 여행 갈 때마다 조식 뷔페를 먹을 수 있는 숙소로 고른다. 약속 장소를 호텔 뷔페나 샐러드 뷔페식당으로 잡기도 한다. 생각만큼 많이 먹지 못해도, 기대한 만큼 메뉴가 다양하지 않아도 괜찮다. 준비된 음식 중에 원하는 것만 원하는 만큼 선택해 먹는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다. - P43

나는 독서로 뭔가를 정말 크게 얻었다. 그 흔적은 지나치게 명료한 것이라 애써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거북목과 항상 긴장되어 있는 승모근이다. - P74

독립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교정용 젓가락을 구매했다. 누가 식탁에서 내 가정교육을 지적한 건 아니고, 중국인들 때문이었다. 원래 쓰던 방식대로 것가락을 쓰면 11자로 달라붙었다. 나는 한국 쇠젓가락 중에서도 길쭉한 직육면체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싸구려들을 선호했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젓가락은 빈틈이 생겨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식집의 젓가락은 항상 그렇게 가늘어지는 형태의 젓가락이었고, 나는 중식 면이나 자차이 따위를 질질 흘리면서 먹어야 했다. 나는 내 몫의 음식을 내 입안으로 제때 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 P87

그러나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자 우리 엄마 딸이었다. 그 흔한 물집 한번 잡히지 않고, 파스 한 장 붙이지 않고, 어떤 부상도 없이 순렛길을 완주했다. 어떻게 그게가능했냐면…… 역시 별것 없다. 오래달리기의 기술을 오래 걷기에도 적용했을 뿐이다. 절대 잘하려고 욕심내지 않고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설렁설렁.
돌이켜보면 애초에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게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 같기도 하다. 걷는 게 너무 힘들어 욕을 할 기운조차 없다가도 이따금 눈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완주보다 더 중요한 건 그날그날의 바람과 햇살과 풍경을 충분히 느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퍼붓는 세찬 비까지도. - P126

재혼이나 출산을 권하는 말에 한동안 "근데 전 지금이 좋은데요"라고 답했지만, 별로 믿지 않는 눈치여서 이제는 그런 말도 잘 안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혼을 하고 나면 상처가 깊을 거라고, 삶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행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 같다. 이혼까지 할 정도면 얼마나 자기 삶을 사랑하는 건지, 인생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다시 설계해보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 건지에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는 듯하다. - P136

‘이제 나이가 됐으니까‘ (상대가) 이만하면 적당하니까‘ ‘집에서 나가려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다 하니까‘ ‘아이를 낳고 싶어서‘ ‘늙으면 외롭다고 하니까‘……… 하는, 세상에 그런 결혼은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혼을 통해 알게 된, 결혼에 대한 많은 진실 중 하나다. - P127

한 남자가 입방체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는 차와 사람으로 혼잡한 도심 한가운데와 비교적 한가한 뒷골목 등 일상의 공간을 두루 지난다. 어떤 이는 남자를 흘깃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내지만 대다수의 행인은 무심히 갈 길을 간다. 남자 혼자 끌기 버거워 보일 만큼 묵직했던 얼음은 점점 작아져 조각이 됐다가, 마침내 녹아 없어진다. 도로 위에 남은 물 얼룩마저 사라지고 나면, 이제 얼음은 완전히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된다. - P147

<실천의 모순〉과 〈1평조차>는 헛된 일을 열심히도 해대는 어떤 이의 일상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바보 같아 보이고 ‘가성비‘라고는 제로인 행위를, 그들은 참 부지런히 수행한다. 나같이 효용을 따져 묻는 속된 인간이 있다면, 그들이 대변하는 건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자신에게는 중요한 어떤 것을 온몸을 던져 지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남들의 시선이나 판단으로부터 이미 자유로운지도 모른다. - P152

서른다섯의 나이에 정규직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두어 달을 고민했고 업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날은 미친 짓 같고 또 어떤 날은 아닌 것 같고 갈팡질팡하는 나날이 이어졌는데, 어느 시점이 되자 이렇게 긴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망조 같았다. 정규직이 무슨 만능 종신보험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벌써 이렇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나. 내가 언제부터 정규직 해봤다고, 태어나서 처음이면서. 이 자리가 줄 수 있는 안정감보다 앞으로 내가 느낄, 아니 이미 느끼고 있는 상실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는 안전망도 없지만(사실 나는 그 철책도 임시 대여라 생각한다) 통제하는 울타리도 없는 삶,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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