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과 김치가 각자 둔중한 힘으로 팽팽하게 마주하고 있다면, 미나리는 그 사이를 찰방찰방 헤엄치며 가르고 지나간다. 깊은 산 사이에 흐르는 청량한 계곡 같고, 어른들의 지리멸렬한 문제들 앞에서 까르르 웃어버리는 아이 같다. 묵은 엄숙하고 강건해 보이는 색깔과 달리 쉽게 뭉개지는 나약한 음식이지만, 미나리와 함께라면 그특유의 가벼움에 의지해 본래의 침착한 역량을 다 펼쳐내는 것 같다. - P12
그 고사리를 먹을 때면 내 삶도 조금은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고, 크고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막 태어나 빨갛고 작은 몸으로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누군가 내 몸의 일부를 소중하게 품고 산을 오르고 언 땅을 팠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P15
모두에게 점심이 편안하고 당연한 권리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점심을 거르게 되고어쩌다 아프더라도 괜찮다고, 조금 느리거나 완벽하지못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회에서 살수 있기를. - P27
이 책에서 맘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라면 집에서 점심때 혼자 두부를 먹을 것 같다는 니시 가나코의 말이었다. 두부를 다 먹고 나서 낮잠이라도 한숨 잘 태세로 누우면 고양이가 목 위로 올라와 그르렁거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할거라고 했다. - P34
뷔페에 갈 때마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 몫의 접시를 들고 조심조심 걸으며, 관심 가는 음식만 쏙쏙 골라먹는 우쭐한 시간. 그곳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똑같이 줄을 서야 하고, 어른이라고 해서 더 좋은 걸 먹고, 아이라고 해서 더 싱거운 걸 먹을 필요가 없었다. 뷔페에서는 모두가 버젓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고심 끝에 떠온 음식은 떡볶이나 잡채, 떡 같은 것이었기에 내 접시를 본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뷔페 와서는 이런 거 먹는 거 아니다." 뷔페에서는 그런 잔소리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내 맘인데요? 내 맘대로 먹을 건데요? 크고 나서도 뷔페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어서 여행 갈 때마다 조식 뷔페를 먹을 수 있는 숙소로 고른다. 약속 장소를 호텔 뷔페나 샐러드 뷔페식당으로 잡기도 한다. 생각만큼 많이 먹지 못해도, 기대한 만큼 메뉴가 다양하지 않아도 괜찮다. 준비된 음식 중에 원하는 것만 원하는 만큼 선택해 먹는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다. - P43
나는 독서로 뭔가를 정말 크게 얻었다. 그 흔적은 지나치게 명료한 것이라 애써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거북목과 항상 긴장되어 있는 승모근이다. - P74
독립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교정용 젓가락을 구매했다. 누가 식탁에서 내 가정교육을 지적한 건 아니고, 중국인들 때문이었다. 원래 쓰던 방식대로 것가락을 쓰면 11자로 달라붙었다. 나는 한국 쇠젓가락 중에서도 길쭉한 직육면체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싸구려들을 선호했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젓가락은 빈틈이 생겨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식집의 젓가락은 항상 그렇게 가늘어지는 형태의 젓가락이었고, 나는 중식 면이나 자차이 따위를 질질 흘리면서 먹어야 했다. 나는 내 몫의 음식을 내 입안으로 제때 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 P87
그러나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자 우리 엄마 딸이었다. 그 흔한 물집 한번 잡히지 않고, 파스 한 장 붙이지 않고, 어떤 부상도 없이 순렛길을 완주했다. 어떻게 그게가능했냐면…… 역시 별것 없다. 오래달리기의 기술을 오래 걷기에도 적용했을 뿐이다. 절대 잘하려고 욕심내지 않고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설렁설렁. 돌이켜보면 애초에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게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 같기도 하다. 걷는 게 너무 힘들어 욕을 할 기운조차 없다가도 이따금 눈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완주보다 더 중요한 건 그날그날의 바람과 햇살과 풍경을 충분히 느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퍼붓는 세찬 비까지도. - P126
재혼이나 출산을 권하는 말에 한동안 "근데 전 지금이 좋은데요"라고 답했지만, 별로 믿지 않는 눈치여서 이제는 그런 말도 잘 안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혼을 하고 나면 상처가 깊을 거라고, 삶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행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 같다. 이혼까지 할 정도면 얼마나 자기 삶을 사랑하는 건지, 인생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다시 설계해보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 건지에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는 듯하다. - P136
‘이제 나이가 됐으니까‘ (상대가) 이만하면 적당하니까‘ ‘집에서 나가려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다 하니까‘ ‘아이를 낳고 싶어서‘ ‘늙으면 외롭다고 하니까‘……… 하는, 세상에 그런 결혼은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혼을 통해 알게 된, 결혼에 대한 많은 진실 중 하나다. - P127
한 남자가 입방체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는 차와 사람으로 혼잡한 도심 한가운데와 비교적 한가한 뒷골목 등 일상의 공간을 두루 지난다. 어떤 이는 남자를 흘깃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내지만 대다수의 행인은 무심히 갈 길을 간다. 남자 혼자 끌기 버거워 보일 만큼 묵직했던 얼음은 점점 작아져 조각이 됐다가, 마침내 녹아 없어진다. 도로 위에 남은 물 얼룩마저 사라지고 나면, 이제 얼음은 완전히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된다. - P147
<실천의 모순〉과 〈1평조차>는 헛된 일을 열심히도 해대는 어떤 이의 일상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바보 같아 보이고 ‘가성비‘라고는 제로인 행위를, 그들은 참 부지런히 수행한다. 나같이 효용을 따져 묻는 속된 인간이 있다면, 그들이 대변하는 건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자신에게는 중요한 어떤 것을 온몸을 던져 지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남들의 시선이나 판단으로부터 이미 자유로운지도 모른다. - P152
서른다섯의 나이에 정규직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두어 달을 고민했고 업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날은 미친 짓 같고 또 어떤 날은 아닌 것 같고 갈팡질팡하는 나날이 이어졌는데, 어느 시점이 되자 이렇게 긴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망조 같았다. 정규직이 무슨 만능 종신보험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벌써 이렇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나. 내가 언제부터 정규직 해봤다고, 태어나서 처음이면서. 이 자리가 줄 수 있는 안정감보다 앞으로 내가 느낄, 아니 이미 느끼고 있는 상실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는 안전망도 없지만(사실 나는 그 철책도 임시 대여라 생각한다) 통제하는 울타리도 없는 삶,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 P1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