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지구를 품다 - 과학잡지 에피Epi 21호 과학잡지 에피 21
이두갑 외 지음 / 이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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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께 『에피 21호』를 추천합니다😀

1️⃣ 기후위기와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고,
특히 『녹색 계급의 출현』과 브뤼노 라투르에 흥미가 있는 독자

2️⃣ 과학과 인간, 과학과 예술,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고 싶은 독자

3️⃣ 조예은 작가의 팬!


『에피 21호』는 ‘지구’라는 큰 주제 아래 열여섯 편의 글을 묶었다. 나는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녹색 계급의 출현』,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구매하고 (어렵지만😂) 브뤼노 라투르의 글에 관심이 생겼는데, 마침 에피 최신호에 『녹색 계급』 리뷰와 북토크(를 글로 옮긴) 내용이 실린다고 해서 서평단을 신청했다.

조예은 작가님의 신작 SF소설이 실린 점도 한몫했다. 과연 「안락의 섬」은 눈물나도록 좋은 이야기였고, 「쉽사리 죽지 않는 기계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하여」, 「어쩌다 남극에 가게 된 사회과학자의 현장연구」를 읽으며 기계와 예술, 남극에서의 사회에 대해 알게 되어서 흥미로웠다. 과학 잡지에서 과학계 최신 트렌드뿐만 아니라 인문 분야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게 진입장벽을 낮춰 주는 듯해서 좋았다


『에피 21호』의 핵심은 ‘녹색 계급’이다. 브뤼노 라투르가 제안한 이 개념은 고전적인 계급(자본가/노동자)과는 달리 ‘기후위기가 닥친 지구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제로웨이스트를 목표 삼고 채식을 하는 여러분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리뷰한 「살아있음에 벅찬 감동을 느끼는 나는, 녹색 계급이다」와 북토크 「녹색 계급은 어떤 계급인가?」는 브뤼노 라투르의 철학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272쪽) 이제 기후위기 문제가 우리의 생존 문제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래서 라투르는 지구에서 살아남는 것을 녹색 계급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분배를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하는 투쟁이 이제는 정말 중요하죠.

「기후와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것이다. 나는 『파란하늘 빨간지구』로 조천호 선생님을 처음 접했는데, 「기후와 나」는 기후위기를 다루면서도 위의 책보다 한층 더 개인적이고 문학적인 글이라서 읽는 맛이 있었다.

🔖(250-251쪽) 인류는 넘치도록 생산하는 데는 천재적 재능을 보여 왔으나, 함께 나누는 데는 무능의 극치를 드러냈다. 기후위기는 ‘가진 자’들의 과잉 소비로 일어나지만, 그 위험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집중된다. 우리가 서로 돌보고 나누는 세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기후위기가 이 세상을 무너뜨릴 것이다. 기후위기는 가려져 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해 불평등과 과잉이 지배하는 이 낡은 세상을 탈바꿈시킬 수 있다. 뒤틀리고 짓밟힌 우리 공동체를 뒤바꿀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기후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57쪽) 시민 연대는 기후위기 해결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우리에게는 파국적 위험 그 자체보다는 홀로 그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 공포다.


※ 이음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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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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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과학
키워드 #이주노동자 #캄보디아 #인권

☑ 독서 계기
#책읽아웃 #황정은의야심한책 듣고 관심 책 목록에 적어뒀다가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 얼른 집어옴!

☑ 표2 저자 소개 및 카피
그 많은 깻잎은 누가 다 키웠을까?
삶이 투쟁이 되는 깻잎밥 이주노동자 이야기

☑ 표4 카피 및 추천사(최은영 소설가)
우리 밥상 위의 인권을 위한 치열하고도 다정한 투쟁기!

✅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우리는 코로나 ‘이후‘를 논의하기 전에 코로나와 ‘함께‘ 오는 것들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는 공존, 곧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함께 살아가는 대상에는 미등록 이주민도 예외가 아니다. (238쪽에서 발췌)

머리말
10. ˝우리는 노예가 되기 위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로서 자유롭게 일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2장
51. 오랜 기간 임금 체불을 당했다고 하면 일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버텼냐고 되물으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의 잘못을 탓하는 부적절한 반응이다. 문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재구성해야 한다. 어떻게 고용주는 이주노동자에게 3년 넘게 월급을 주지 않고 붙잡아놓을 수 있었을까? 왜 그동안 이주노동자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까?
76. 어떤 사업주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월급 적게 벌어 가야 한다며,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한국 돈이 유출된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94. ˝그래요? 우리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최저임금의 절반만 준다고요? 그럼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세금도 절반만 낼게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음식 값도, 버스 값도 절반만 낼게요. 그러면 될까요?˝

3장
128.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4장
133. 깻잎 농사는 1년 내내 일거리가 있는 노동집약도가 높은 일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노동자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5장
164-165. 일부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악랄한 방법을 썼다. 여권 압수가 대표적인데 (...) 여권뿐만 아니라 월급 통장을 빼앗기도 했다. (...) 또 다른 사악한 방법으로는 몇 달 치 월급을 일부러 주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밀린 월급이 아까워 사업장에 남는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더구나 미등록 노동자는 불안정한 체류 자격 때문에 임금 체불을 신고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사업주도 있었다.

6장
188-189. 찌아 씨는 고용주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도망친 것이었다. 만약 성희롱이 인정되면 사업주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업장을 옮길 수 있지만 찌아 씨는 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신고하면 고용주가 찾아와 해코지할까 봐, 여기저기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까 봐, 성희롱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될까 봐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사업장 이탈로 신고당해 ‘불법 체류‘ 상태가 될지언정, ‘도망‘치는 것이 적어도 고용주의 지속적인 성폭력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7장
218. ˝사장님이 ‘새끼야, 새끼야‘라고 해요.˝
222. 법무부와 통계청에서는 ‘불법 체류‘를 체류 기간이 지났는데도 출국하지 머무는 상태로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유엔,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유럽연합 등 국제 사회에서는 초과 체류한 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을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혐오를 조장하기에 ‘미등록‘ ‘비정규‘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써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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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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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면부족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절어있었다. 와중에 혼절하듯이 졸면서도 이 책은 놓지 않았다. 흡인력이 엄청나다! 이런 수식어는 천선란 작가님에게는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그래도 사실이니까, 꼭 말해야겠다🥺💙


『노랜드』의 인물들은 자꾸만 무언가를 상실한다. 가까이 여기던 존재를 잃고 자기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늑대인간이 된 명월이 우주로 떠나고, 「제, 재」에서 한 몸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는 두 인격 ‘재’와 ‘제’가 등장한다. 「이름 없는 몸」에서는 ‘나’가 기괴하게 변해버린 마을 사람들을 맞닥뜨리고,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져 사라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상실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작가는 솟아날 구멍, 맞잡을 손을 작품 속에 심어두었다. 멸망에 이른 세계에서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어떤 상태가 되든, 어떤 곳으로 이동하든 결국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점이 나에게는 위로로 다가왔다.


특히 「이름 없는 몸」과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가 좋았다. 이 두 작품과 분위기가 정반대인 「우주를 날아가는 새」도, 한 소설집에서 편중되지 않고 여러 층위와 방향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스포하지 않는 선에서(어렵다…) 밑줄 친 문장들을 적어본다.


「흰 밤과 푸른 달」

🔖(25쪽)그것은 늑대의 본성이라기엔 너무 파괴적이었고, 인간의 본성이라기에 너무 순애적이었다.


「옥수수밭과 형」

🔖(117쪽)만약 푸코랑 다르게 생긴 애가 본인이 푸코라고 하면서 푸코의 기억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애를 푸코라고 생각할 거 같아. 사람이든 로봇이든 강아지든 기억이 같으면.


「이름 없는 몸」

🔖(231쪽)너는 희멀건 입술과 뿌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질문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답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네가 내 어깨를 파먹는다고 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프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너와 함께 드디어 이 마을을 나갈 수 있겠다는 얕은 상상을 했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288쪽)부처님 다리를 빌린 그 새는 다리가 꺾인 상태로 기력 없이 효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어새였다. 이 행성에 더는 살지 않는다고 했던.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375쪽)제가 궁금한 건 왜 어떤 사람은 그 무기를 맞고 안개처럼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육신이 남느냐는 거예요(…) 왜 벤은, 제 눈앞에서 흩어졌을까요.

🔖(379쪽)어쩌면 그들은 우리와 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안개 속에서 헤맬 때 무언가가 우리에게 이 안개를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줬거든. 다른 병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들었어. 딱, 딱. 소리를 내며 유인하는 것을. 그것들 모두가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는 건 아니야. 모두가 적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우리처럼.


+ 편집자/작가는 이 소설집의 제목을 왜 '노랜드'로 정했을까?

'노랜드'는 「두 세계」에서 인공지능 '아락스'가 탈출하고 싶어하는 세계다. 어디론가 떠나고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방향과 이미지를 이 단어에 압축해서 담아낸 걸까 싶다.


+ 만듦새

400쪽에 달하는 분량은 '견장정(하드커버)' 제본방식으로 제작하기에 충분했다. 표지에 맞추어 가름끈도 새파란 색인 게 '고급진' 느낌이라 마음에 든다. 표지 이미지는 손정희, 전체 디자인은 형태와내용사이(홍지연) 담당.


+ 스포 아닌 스포

「옥수수밭과 형」, 「-에게」는 어쩐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419쪽에서 「옥수수밭과 형」은 《2035 SF 미스터리》, 「-에게」는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에 실렸음을 확인하고 궁금증이 해결됐다...!



※ 한겨레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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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희귀종 ‘읽는 사람‘의 일원인 제가 또 다른 ‘읽는 사람‘인 당신을 생각하며 이 책을 씁니다. - P4

책이라는 미디어를 사람들이 좀더 빈번하게 접할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서점이 책 속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헛헛함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 P30

아뿔싸.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이 시간 차이! (...) 저의 세점은 대학과 사회를 잇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공간, 사회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생활인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P33

니은서점을 설계할 때 누군가의 서재에 놀러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서점을 만들고 싶었어요. - P66

책을 꽤 많이 읽은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입고할 도서 선정은 식은 죽 먹기일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독자로서 필요한 책을 그때그때 주문하는 것과 서점의 판매용 책장을 채우는 일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 P73

니은서점의 서가에는 판매용 책 사이에 ‘공유서재‘라는 스티커가 붙은 책이 꽂혀 있는데요, 제가 읽은 책들입니다. 공유서재는 큐레이션 서점 니은서점 속에 숨겨진 또 다른 큐레이션인 셈이에요. 공유서재의 책을 펼쳐보면 밑줄 그어져 있고, 메모도 쓰여 있고 포스트잇도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공유서재의 책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띠지에 적힌 문안이나 유명인의 추천사와는 다른 마스터 북텐더의 솔직한 감상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 마스터 북텐더의 메모는 책방이라는 소우주를 여행하는 또 다른 여행자가 참고할 수 있는 발굴기인 셈입니다. - P81

독립 서점은 카페를 겸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서점이 카페를 겸하다보면 가끔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서점들이 어떻게 운영되나 살펴보려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카페를 겸하는 서점은 손님이 스무디라도 주문하면 믹서기가 마치 폭격기라도 된 듯 왱왱거리는 소음을 내며 책을 폭파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카페라테를 만들기 위해 우유 거품을 만드는 소리도 몰입을 방해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습니다. 우리가 서점에서 기대하는 고요함이 사라지는 순간이죠.
그래서! 책만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P86

결국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핑곗거리로 내세우는 시간 부족이 아니라 독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독서 자체를 아예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책책책을 읽읍시다"라고 캠페인을 하든, 노동 시간을 줄여서 좀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든 책 읽는 사람은 결코 늘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을 겁니다. 왜 어떤 사람은 독서를 그렇게 싫어할까요? 독서라는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왜 그리 낯설기만 할까요? - P103

제 인생의 서점들이 없었다면 사회학자가 된 저도 없었을 것이고, 니은서점도 없었을 것이니 세상은 이렇게 이어져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내나봅니다. 어떻게 하면 ‘서점 없음‘이 디폴트인 이들에게 서점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과제가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 P125

책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책을 읽으면서 내 뇌가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그 흔적을 기록하기 위한 출발점은 책 구입입니다. 책 구입은 대량생산품인 책을 오롯이 나만의 것, 세계에서 오직 한 권만 존재하는 책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지요. 책을 구입해서 책의 소유권이 내게 있다면, 그 책에는 나만의 능동적 독서의 흔적을 마음껏 남겨도 됩니다. - P143

망겔이 전자책과 종이책을 비교하면서 전자책에 대한 사랑이 플라토닉하다면 종이책에 대한 사랑은 에로틱하다는 비유를 사용했는데, 그 문구를 읽으면서 ‘와, 절묘한 표현이다‘라고 생각했어요. - P155

책의 물성이 이렇게 유혹적이라면 그 매력이 철철 넘쳐 흐르는 종이책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서점입니다. - P161

책 원고는 교정 교열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책은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면 편집자들이 그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하죠.
내용적 검토뿐만 아니라 문법적 검토도 이뤄져요. 이 과정에서 한국어는 다듬어지고 자랍니다. 즉 한국어로 쓰인 책이 많이 출간되면 될수록 한국어라는 언어는 어린 언어에서 성숙한 언어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 P169

출판 산업이 없다면, 출판산업을 구성하는 각 행위자들의 헌신이 없다면 한국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한국어가 사라져도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일부 극단적인 주장처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경제적 편이성에서는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영어 공용어 주장에 찬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윤동주 시의 아름다움, 박완서 소설의 조근조근한 말투, 김서령 산문의 맛깔스러움도 사라질 테니까요. 여러분이 한국어로 된 한국 작가가 쓴 책을 구입하신다면, 아직은 어린 언어인 한국어가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 P171

실패 없이 성공에 바로 도달하려 하기에 사람들은 이른바 필독서 리스트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죠 이건 ‘읽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읽는 사람‘은 자신을 믿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다소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지만, 제 경험에 기반해서 좋은 ‘읽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절대 ‘○○대학교 추천도서 100‘ 따위의 추천 리스트를 참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정말 많은 대학이 추천 리스트를 제시하고 있어요. ‘서울대학교 추천 도서 100‘ 리스트를 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그 리스트 중에서 몇 권이나 읽었는지를 체크해봤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제가 사회학자이고 대학교수이고 책도 꽤 쓴 사람이라 저는 그래도 평균 이상의 독서가일 테니까요. 그런데 그중 제가 읽은 책은 겨우 10여 권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리스트에 있는 책을 마저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 P185

우리는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기에 정말 많은 텍스트를 접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텍스트를 읽지 않아요. 대신 스캔하죠. 우리는 이렇게 읽기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채로 디지털 스캐닝의 태도를 갖고 책상에 앉아 있으니 독서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 P203

두 시간을 다 함께 읽으면 각자의 손에 쥔 책은 마치 승리의 트로피처럼 느껴집니다. 낭독회가 시작되었을 때 약간 서로 어색해했던 사람들도 공동체에 대한 경의를 서로 눈빛으로 표현하며 미소 짓지요. 우리 모두는 낭독회를 통해 승리한 다비드가 된 거니까요. - P206

고수들은 읽으려고 책을 사기도 하지만, 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책을 사기도 합니다. 저 역시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모두 다 읽었냐"는 질문을 꽤 자주 듣습니다. 대답하기에 살짝 까다로운 이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먼저 "설마요!"라고 한 뒤에 "책은 읽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합니다. 누가 제일 먼저 이 근사한 답을 생각해냈는지 모르지만 책을 수집하는 사람을 위한 정말 환상적인 자기방어 논리 아닌가요? - P228

니은사잠의 북텐더는 단순 노동만 하지 않습니다. 서점에서 가장 까다롭고 또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이 입고하는 책을 고르는 것인데요. 그 일을 저 혼자 해내는 것보다는 북텐더가 함께하면 니은서점에 입고되는 책의 스펙트럼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더 넓어질 수 있거든요. - P228

서로 출신도 다르고 졸업한 학교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기에 니은서점이 없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니은서점을 통해서 ‘읽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확인했습니다. 그 공통점에 더 좋은 책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작지만 언제나 북적이는 니은서점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P233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출세지상주의로부터의 독립, 시장만능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독립 서점의 정신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 P254

니은서점은 이렇게 책이 되었으니 니은서점이 언젠가 사라져도 책이 된 니은서점은 사라지지 않겠지요. 책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거 아니겠어요?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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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게임 마니아가 ‘드래곤 퀘스트‘의 숨겨진 기술 찾기에 열중했던 것처럼, 어른 문학 마니아가 얼마나 ‘하루키 퀘스트‘에 열중해 있었는지 그 발자취를 잠시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P16

확실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작품=하루키 랜드에는 다방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주택가 한적한 곳에 위치한, 누구나 마음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작은 다방. 거기에는 다방 주인과 손님이 ‘기분 좋다‘고 느낄 만한 인테리어 소품이 놓여 있습니다. 해외 문학(데릭 하트필드), 색 바랜 사진 "그것은 내가 코닥 포켓 인스터매틱으로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진이었다. 쥐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격추왕처럼 보였다."), 핀볼 게임기(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같은 것들. 물론 그곳은 다방이기에 마실 것(차가운 맥주)과 먹을 것(샌드위치, 스파게티)이 있고 실내에는 기분 좋은 음악(스탠 게츠)이 흐르고 있습니다. - P19

이것은 주인장이 보내는 중대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낸 이들은 주인장과 같은 세대=베이비붐 세대 비평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방에 붙어살며 게임기를 가지고 이리저리 놀아보다가 곧 다방의 게임 속에 1970년‘, ‘전공투‘, ‘상실‘, ‘소외‘, ‘자폐‘, ‘다른 세계‘, ‘죽음과 재생‘ 같은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숨겨져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태평하게 낙서장에 끄적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루키 랜드의 존재 이유는 게임 속에 숨겨져 있다. 그렇게 판단한 그들은 집에 돌아가 ‘게임 해설‘에 관한 상세한 책자를 열심히 만든 후, 태평하게 앉아 있는 손님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나누어 주기 시작합니다. 쓸데없이 복잡한 ‘본격적 비평 시대‘의 개막입니다. - P21

게임 다방으로 변한 하루키 랜드의 손님들은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게임 해설에 목숨을 건 소수의 마니아와 다방 분위기를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대다수의 손님으로. - P22

게임 해독 열풍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버립니다. 게임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손님들은 냅킨 한 장부터 테이블 다리에 이르기까지 하루키 랜드에 있는 거의 모든 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퍼즐 해독자가 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 P25

무라카미 문학은 사실 게임 소프트웨어 그 자체였습니다. - P30

다만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기로 텍스트의 게임성, 퍼즐성을 깨달으면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기분이 들어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 - P31

아!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직 하루키 랜드가 다방에서 오락실로 변한 것을 모르는 고상한 손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태엽 감는 새』는 그런 손님들을 당혹케 했습니다. 그리고 평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하다‘고 무책임하게 칭찬하는 사람들과 ‘이런 엉망진창인 다방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다‘라며 격분한 사람들로. - P34

복잡기괴하고 이리저리 뒤엉킨 『태엽 감는 새』는 마지막 불꽃놀이가 되어 사라졌고 1990년대 후반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박한 시대로 회귀‘합니다.
다음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두 손을 비비며 기다리던 독자 앞에 하루키가 내놓은 작품은 『언더그라운드』(1997)와 『약속된 장소에서』(1998)라는 두 권의 논픽션이었습니다. 더욱이 『언더그라운드』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 약속된 장소에서는 그 가해자 측인 옴진리교 신자를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현실과의 접점이 없다고 여겨졌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한 일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 P38

무라카미 작품은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렉티브 텍스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혹은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무라카미 문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수수께끼 푸는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난 젊은 비평가들이게 하루키는 최상의 재료를 제공해주었던 것입니다. - P39

무라카미 하루키를 둘러싼 비평 게임은 ‘오타쿠 문화‘의 시작이 아니었을까요? - P40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의 동료들, 즉 하루키 랜드는 시종일관 ‘보쿠‘라는 일인칭으로 상징되는 ‘남자아이들의 세계‘였다는 점을 떠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여자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이런 게임 공략이 가능했을까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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