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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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로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11세기 말 십자군은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9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발발한 두 전쟁은 묘하게도 닮았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의도에서 이 만화가 출간되었다.








옛날, 서쪽 사람들은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모여 살았다.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이태리 반도의 로마,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 등은 모두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는 법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같은 시대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의 격돌을 벌렸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에 로마가 패망 직전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로마인들은 근처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살았는데,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자 값싼 농산물들이 배로 운송되어 로마 본토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1년 내내 바겐세일이었다. 그래서, 농민층이 몰락하고 말았다. 당초 로마인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현상은 로마의 위기였다. 로마 정치가들은 지혜를 짜냈다.



귀족들이 불법 취득한 토지를 빈자들에게 나눠 주자고 개혁을 제안한 그락쿠스 형제들이 귀족들에게 살해되고 이 모든 혼란이 전쟁 때문이므로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논리에 휩싸여 로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늪에 빠져 들었다. 기원전 137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3차례의 노예전쟁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3차 노예전쟁에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여 한때 로마 정규군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전쟁의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점령한 다음 군사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군사독재자가 바로 로마 황제이고 이때가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힘에 의존하던 로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힘이 약해졌다. 더 이상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할 재간이 없자 결국 동과 서로 제국을 나누고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다. 395년부터 동과 서는 아예 남남이 되어버렸다. 동로마 황제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동생 호노리우스가 책임지게 되었다.



"야만인들의 침략이 성공했던 것은

제국 내부에서 소수의 부자들과 유력자들이 하층민들을 점점 더 압박했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불공평과 잔악성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낯선 관습을 가진 야만인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였다"

-자크 르 고프 (33 쪽)



한편, 사회 내부의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자 로마의 하층민들은 오랫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로마 귀족보다 차라리 게르만족을 맞아들이기를 원했다. 하층민과 죽이 맞은 게르만족 침입자들은 쉽게 로마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제 제국은 해체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후, 지중해의 세계는 게르만족 계열의 앵글로족, 색슨족, 프랑크족, 서고트족에 의해 고만고만한 나라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유목민에 의한 아라비아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크게 변하고 만다. 신에 순종해야 한다는 마호메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아랍인들이 무슬림이 되었다. 메카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처음엔 이슬람교를 박해했지만, 무슬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박해자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라비아 반도가 짧은 시간에 이슬람화되었던 것이다. 모하메트 사후에는 칼리파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이슬람'이란 말은 본디 순종한다는 뜻이래요"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래요!" (37 쪽)



정복자 아랍인들의 동기는 너무도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정복지에서 세금을 받고 싶어서 정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세금만 내면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어도 괜찮았다. 로마에 정복당했던 그 땅의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거두던 세금보다 싸므로 부담이 없었다.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이 아예 면제였다. 그러자, 웃기는 촌극이 발생한다. 아랍인들은 세수가 격감하자 할인 혜택의 폐지를 검토한 것이다.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금도 더 적게 거두었기에

피정복지 주민들은 종종 옛 지배자보다 새로운 지배자를 더 환영하곤 했다"

- E.M.번즈 (43 쪽)



결국 이슬람의 세계는 급격한 확장이 가능하여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에스파니아 등 유럽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는 이슬람이 칼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코자하는 융화와 관용성의 자세를 취한 탓이다. 이슬람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동로마 제국의 레온 황제가 아랍의 수군을 격퇴한 것이다. 서기 717~718년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이슬람이 저지되면서 지중해의 세계는 서유럽, 이슬람, 동로마의 셋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동로마가 이슬람 견제에 힘쓰는 동안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서기 800년 카를로스는 황제에 올라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죽자 서유럽은 다시 군웅할거의 난세에 빠진다.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기사들도 보호를 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빵을 뜯었다. 기사와 농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서유럽 사회는 귀족과 하층민의 대립도 극에 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를 중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삼위계의 질서가 잡혔다.



한편, 교회는 강력한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상 기사집단은 오랫동안 혼란과 폭력이라는 부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기사들의 반발로 이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전사들의 야성을 길들이려고 노력하던 서유럽 교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기사들이 서유럽 세계 밖에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간의 적대 관계를 조장한 셈이다. 서유럽도 처음엔 이슬람의 세계를 존중했다. 따라서, 누군가 주장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신의 적들인 이교도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경건한 일로 생각되었다"

- 조르주 뒤비 (59 쪽)



1095년 서유럽, 당나귀를 탄 노인이 꿈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노인이 바로 은자 피에르다. 피에르는 바로 베드로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그 노인은 '지난 꿈에 또 베드로 성인을 뵈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얘기의 골자는 이슬람의 손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간지 400년이 넘었던 성지였다. 이는 전쟁을 하자는 말과 같다.



은자 피에르는 잘나가던 지식인이었다. 내로라는 명문 귀족의 가정 교사로 초빙되고, 고위 정치인의 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 여행을 갔다가 꿈에 성인을 본 후 그의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정말로 베드로 성인이 꿈에 나타나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을 명했을까? 아무튼 광신도의 꿈을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다. 여행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낮에는 전쟁을 호소하고, 밤에는 노숙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기행은 이미 유럽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서방의 실력자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교황청은 그를 데려가 예루살렘의 침공을 위한 여론 몰이로 이용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는 여론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슬람 세계로의 원정을 선언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서방의 명성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한편, 모인 사람들의 의복에 십자가를 새기도록 하면서 이들은 십자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원정을 발표하다

1096년 5~6월 유럽 각지에서 군중십자군이 일어나 유대인 학살을 자행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거쳐 바다를 건넘

1096년 10월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의 반격으로 군중십자군이 니케아 근교에서 전멸



1096년 봄, 공식 일정이 가을로 잡혔지만 은자 피에르와 가난한 사람들끼리 먼저 전쟁의 길로 출발했다. 일부 귀족들은 기마대를 이끌고 군중을 따라갔다. 모험심을 즐기는 기사들도 대열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흥분한 군중들의 행렬이 유럽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한 방향인 독일로 갔다. 십자군은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후 헝가리 농촌 마을을 지나면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분노한 헝가리 왕은 기병대를 보내어 십자군에게 화살을 퍼부어 보복했다. 전력이 반으로 줄고 말았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주민 4천 명을 학살하고, 강 건너 텅 빈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모조리 약탈하고 니시로 향했다. 니시는 베오그라드 주민들이 피난간 곳이었다. 동로마의 자랑인 기병대에 의해 십자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와 생존자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앞에 집결했다. 동로마는 골치아픈 십자군을 배에 태워 투르크 땅에 무단 투기하기로 결정한다. 십자군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근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니케아로 진입했다. 투르크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그들의 만행을 목격하고선 기병을 출정시켰지만 십자군의 수에 밀려 고전한다.



1096년 10월, 약탈로 수많은 전리품을 취하자 강경파 기사들이 은자 피에르를 왕따시키고 군중들을 대부분 흡수하여 크세리고르돈 요새로 향했다. 이곳에는 술과 고기, 곡물 등 온갖 물품이 풍족했다. 십자군들은 술에 취해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목마른 기사들이 샘으로 물마시러 갔다가 무장한 투르크인들에 의해 가는 길이 봉쇄되었다. 봉쇄는 8일이나 지속되었다. 물없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프랑크 원정대의 우두머리인 기사 라이날드가 투르크에 투항했다. 10월 21일,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투르크의 매복에 걸려들어 끔찍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다. 은자 피에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의 구원군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군중십자군이 전멸하자 알렉시오스는 불리해졌다. 그들의 패배는 분명 황제가 배신한 탓이라는 것이다. 알렉시오스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은자 피에르를 꼬드겨 동로마 제국의 정권 교체를 계획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새로운 지도자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의도였다. 이제 본격적인 1차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게 된다.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이 중엔 보에몽 공작도 포함되어 있다.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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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첫번째 컴퓨터 + 인터넷 책 - 윈도우 7
양재봉 지음 / 한빛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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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컴퓨터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이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접하고 작동하는 법도 일찍 배우게 된다. 반면 어르신들은 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새로이 접했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오는 증세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작동법이 서툴고 혹시 잘못 만져 고장날까 조바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르신을 위한 컴퓨터 학습서로서 컴퓨터가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존재임을 알도록 쉽게 가르쳐 준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책에서 지시하는대로 따라하면 된다. 하다보면 왜 진작 컴퓨터와 친해지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이내 들게 된다. TV 드라마에 나온 '야동 순재'를 따라하려고 컴퓨터를 배우는 어르신이 많이 늘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굳이 야동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정보 등 유익한 콘텐츠가 컴퓨터 속에 풍부하므로 쉽게 어르신의 친구가 될 것 같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방법, 마우스를 다루는 방법, 키보드를 사용하는 방법 등의 초보 과정에서부터 사진 또는 동영상 보기, 문서 출력하기 등의 중급 과정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핑, 이메일 보내는 방법, 인터넷 지도로 길을 찾는 법, 인터넷 뱅킹 등의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학습에 유익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가족과 문자로 대화를 하거나 화상 채팅을 하는 법 그리고 심심할 때 즐길 수 있는 컴퓨터 게임 등도 소개되어 있다.



컴퓨터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그리고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인쇄를 하는 장치인 프린터와 소리를 들려주는 외장 스피커도 있다. 내부의 주요 부품으로는 CPU, 마더보드, 메모리, 하드디스크, 시디롬 드라이브 등이 있다. 전기 기계는 전원을 공급해야 작동을 하듯이 컴퓨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먼저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서 켜고 본체의 전원을 켜면 모니터 화면에 글자 또는 그림이 나타난다. 이 과정을 '부팅'이라고 한다. 약간의 시간이 걸리므로 조금 기다려야 한다.









종료시에는 모니터 화면 왼쪽 하단의 윈도우 로고 위에 화살표를 올리고 마우스 왼쪽을 누르면 메뉴판과 비슷한 화면이 나타난다. 메뉴판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스템종료'를 마우스 왼쪽 단추로 눌러서 끈다. 컴퓨터를 끌 때 절대로 전원 단추를 누르거나 전원 코드를 뽑는 식의 방법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사용하는 자신의 컴퓨터를 치장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윈도우 바탕화면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바꿀 수 있다. 나도 이를 배워서 노트북 바탕화면에 내가 좋아하는 야생화 사진으로 바꾸었다. 바탕화면에서 마우스 오른쪽 단추를 클릭하면 메뉴판이 나타난다. 메뉴에서 [개인 설정]을 선택한다. 컴퓨터의 시각 효과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아래쪽에 있는 [바탕 화면 배경]아이콘을 클릭한다.



바탕 화면 배경 선택 창이 나타난다. 배경화면으로 지정할 사진을 불러오기 위해 '사진 위치'메뉴의 <찾아보기>단추를 클릭한다. 폴더 찾아보기 창이 나타나면 [사진]폴더를 클릭하고 <확인>단추를 클릭한다. [사진]폴더에 있는 모든 사진들이 선택된 상태이다. 원하는 사진만 선택하려면 <모두지우기>단추를 클릭한 후 원하는 사진만 클릭하고 <변경 내용 저장>단추를 클릭한다. 다시 컴퓨터의 시각 효과 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맨 위쪽에 있는 [X]단추를 클릭하면 창이 닫히고, 변경된 바탕화면이 나타난다. 멋진 바탕화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취미생활도 할 수 있다. 영화를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에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자신의 컴퓨터에서 DVD로 감상하는 것도 별미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저렴하게 즐길 수도 있다. 윈도우 7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비디오 파일을 실행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탐색기를 실행한 후 [라이브러리]-[비디오]-[비디오 샘플]폴더로 이동한다. '야생'이라는 샘플 비디오 파일이 있다. 이를 더블 클릭한다. 비디오 파일 재생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동영상이 재생된다. 멋진 동물의 모습들이 담긴 영상이다. 비디오 파일은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전체화면 보기 아이콘을 클릭한다. 한편. DVD를 컴퓨터에 넣으면 자동 실행 창이 나타난다. [DVD 동영상 재생]을 클릭한다. DVD타이틀이 재생되면 메뉴에서 [영화보기]를 클릭한다.









이 책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거나 이미 접했더라도 활용법을 잘 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가 창피해 그동안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마치 컴퓨터 가정교사를 만난 기분이 든다. 따라하기를 하다보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늘고 활용하는 방법도 쉽게 배우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부쩍 늘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386세대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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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5가지 습관
아타라시 마사미 지음, 이은희 옮김 / 이너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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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행복한 인생을 향유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단 한번 뿐인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소위 '333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취업을 위해 노동시장에 나가서 3개월 안에, 현재 연봉보다 30% 인상된 조건으로, 3개사로부터 콜을 받는다면 상품성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은 1%도 채 안된다.

 

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신이 인간에게 평등하게 부여한 것은 죽음과 시간이라고 한다. 돈 많고 실력있는 사람의 하루도 마찬가지로 24시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시간의 활용은 자신의 습관에 의해 좌우된다. 이 소중한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습관은 나무 껍질에 새겨놓은 문자 같아서

그 나무가 자라남에 따라 확대된다"

- 새뮤얼 스마일스

 

이 책의 저자 아타라시 마사미는 32살에 '45살 이전에 기업의 대표가 되자'라는 목표를 세운 뒤, 세부 계획을 수립 이를 차근차근 실천하여 42살에 존슨 앤 존슨 상무로 경력 입사하고 45살에 목표대로 이 회사 사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이 책의 핵심은 좋은 습관 5가지를 실천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자는 것이다.

 

습관 1 살아있는 목표를 세워라

습관 2 이기는 습관을 들여라

습관 3 장점과 친해져라

습관 4 기본을 연마하라

습관 5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라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평소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꾸준히 관찰한 결과이다.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면 이는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을 향상시키려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함, 신중한 분석태도, 자기 나름의 판단기준, 유연한 사고방식 등의 습관을 길들이도록 훈련하면 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 니체

 

사고력의 배양을 위해서 학습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독서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 우리는 밥을 먹는다. 독서는 건강한 정신을 위해 지식을 먹는 것이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이로운 법이다. 몸으로 배우는 교육은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저자 강연회 또는 주제 토론 세미나 등에 참석한다면 지식이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올 것이다.

 

일일불독서日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 안중근

 

아무리 식견이 풍부해도 실천력이 중요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란 구절이 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미리 정하고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이 때 목표는 현실적이어야 하고 숫자로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목표는 메모해라.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이직 경험자 중 14%만이 '이직하기를 잘했다'고 응답했다. 굳이 이직을 원한다면 지위, 수입, 그리고 회사의 수준 등이 향상되는 발전적인 이직을 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을 확립하여 남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이기는 습관이다. 신발 세일즈맨 2명이 아프리카 오지로 출장을 떠났다. 한 명은 '현지인은 모두 맨발이므로 신발을 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냥 다음 비행기 편으로 돌아가겠다'는 반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발을 팔 가능성이 무한대이므로 빨리 신발 5만 켤레를 보내라. 현지인 모두 맨발이다'라고 본사로 연락했다. 여기서 신발을 보내달라는 사람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집안이 가난해 교육을 못 받은 식료품 점원이 있었다. 그는 근무 중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몰래 법률 책으로 틈틈이 공부를 했다. 그가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 박사는 이를 인간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설명했다.

 

중국 고대 역사서 '정관정요'에는 군주를 칭찬하려면 '60은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나머지 40은 듣기 싫은 말을 하라'고 언급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개성이 강한 상사를 만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 거북한 상사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요구된다. 미국의 정신교육학자 브로드벤트 박사도 상대에게 사랑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세일즈에 뛰어들어 첫해에 20대, 다음 해에 70대를 팔더니 이젠 한 해에 300대를 판매하는 베테랑 세일즈맨이 있다. 처음 세일즈를 시작할 때 매일 카탈로그와 명함을 들고 오전 20군데, 오후 30군데를 방문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50장을 전부 뿌릴 때까지 결코 영업소로 퇴근하지 않는다는 기본을 지켰다. 이것이 그의 성공적인 영업비결이다. 

 

즐겁고 기쁜 상태에서 업무를 하면 능률이 올라간다. 반면에 미간을 찌푸려가며 심각하게 업무에 매달리면 능률이 오를리 없다. 그런데, 기분좋게 일하려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배우려면 스스로 여유로운 마음자세를 가지며, 긴장을 풀고, 회사업무 외의 자기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재난과 행운이 몇 번씩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며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따라서, 행운이 자신에게 오도록 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운을 내 편으로 만들고, 운이 왔을 때는 용기를 갖고 이를 붙잡아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좋은 습관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배우 바람직하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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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박 볼케리아는 1972년 마리아수녀회에 입회하여 40년 가까이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수녀이다. 또한, 1984년부터 지금까지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인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을 맡고 있다. 2011년부터는 소년의 집 모든 출신들의 관리와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저자의 구술을 원고로 정리한 윤진호 씨는 '말아톤', '마이 파더'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현재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10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영세를 받고 동네 친구들과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회비를 매월 꼬박 꼬박 거두자 돈에 부담을 느껴 성당에 발길을 끊고 있었다. 1960년대 촌동네에 살고있는 집안 형편으론 눈치가 보여서다. 태어나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난 적이 없었던 저자는 22살에 경북 상주에 소재하는 '대한생사조선견직'에 취직했다. 이후 다니던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잡지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녀회'라는 문구와 함께 '마리아수녀회'의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에 마음이 끌렸다.

 

1971년 여름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수녀회가 있는 부산 송도를 찾았다. 입회를 원한다면 면접후 한 달간 함께 생활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시 상주로 돌아가서 준비하여 한 달 뒤 정식면접을 신청했다. 여전히 면접대기자가 많았다. 최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 대면했다. 합격이었다. 6개월 진행된 면접에서 최종 12 명이 선택되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입회 허락을 받았다.

 

"이제 집에 가자......" (28 쪽)

 

부모님의 동의는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 허락없이 수녀원에 입소했다. 한 달째 첫 면회에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안된다고 부인하자 그냥 면회실을 떠났다. 지원기 1년,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을 거쳐야 정식 수녀가 된다. 입회하고 한달 쯤 지나자, 원장 수녀님이 아이를 돌보는 지원자를 찾았다. 손을 들어 자원했다. 거리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들만 사용하는 은어도 이해가 어려웠고 심지어 툭하면 이탈하곤 했다.

 

처음엔 미사 반주를 위해 합주부가 만들어졌다. 당장 아이들의 악기 지도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부터 안유경 선생님을 모셨다. 그녀는 당시 부산 시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79년 3월 미사 시간에 처음으로 현악기가 등장했다. 아직은 서툰 솜씨였지만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현악기의 선율이 미사 시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기엔 중학생 중심의 현악합주단의 형태였다. 1996년 관악기를 포함하는 정식 관현악단이 되었다. 합주부는 미사 반주가 주목적이었기에 레슨도 주 1회 정도였다. 그런데도 합주부는 창단 2년 만인 1981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현악부 우수상을 받고, 개천예술제에서도 현악합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84년 초, 전임 수녀님이 필리핀으로 소임처가 발령나면서 얼떨결에 저자가 합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340 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었기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1988년~1990년까지 내리 3년간 부산복지시설 음악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자 이 대회가 없어지는 해프닝도 생겼다. 다른 팀들이 들러리만 선다고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합주부의 변신이 요구되었다.

 

이쯤되니까,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생각났다. 1975년, 총소리만 난무했던 어느 허름한 차고에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들은 총 대신 악기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음악을 연주했다. 이 음악교실은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11명이었던 회원이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으로 물들었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오늘을 선물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엘 시스테마'였다. 국내에서 영화도 상영되었고, 금년 3월엔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도 했다.

 



 
1991년 자선연주회를 시작했다. 부산 소년의 집의 정신적 지주격인 소 신부님이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신부님이 수녀회에 실내수영장 건축이라는 숙제를 주었다. 재원 확보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자선연주회였다. 전문 공연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 연주회 장소의 대관부터 팜플릿 제작까지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일을 보면서 하나씩 일들을 배워 나갔다. 

 

후원자를 모집하는 공연이므로 레퍼토리를 늘려야 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모짜르트의 세레나데 중 13번,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등을 준비했다. 연습 시간이 배 이상으로 늘자, 중도에 탈락하는 중학생의 자리는 졸업생이 대신했다. 티겟판매는 수녀들의 몫이었다. 막상 공연일이 다가오자 불안하여 관람석 빈자리는 학생들이 채운다는 계획까지 짰다.1991년 6월 9일, 우려와 달리 시민회관 대강당은 대만원이었다. 소 신부님은 필리핀에 계셔서 공연 참관을 하지 못했다.

 

1992년 3월 16일, 소 신부님은 선종하셨다. 신부님은 195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부산 송도에서 보육원으로 출발하여 이후 부산 소년의 집, 부산 구호병원, 부산 마리아구호소, 서울 은평 마을사업, 서울 소년의 집, 서울 도티기념병원 등을 일구어 냈다. 1985년부터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멕시코, 콰테말라, 브라질 등 해외 구호 사업에도 나섰다.

 

1993년 제 3회 자선연주회는 두 달 보름에 걸쳐 서울, 부산, 창원, 진주, 대구 등 무려 5개 도시를 돌며 연주했다. 당초 대구는 계획에 없었는데, 진주 행사가 끝난 후 우리를 후원하는 자매님이 대구 MBC 편성국장님을 소개하면서 성사되었다. 대구 행사에서 효성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한 홍춘성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1994년 홍춘성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구여성가톨릭합창단과 부산 소년의 집 합주부와 협연을 가졌다. 이듬 해에는 부산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연주했다. 두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에 사비를 보태어 관악기 2 관씩 구매했다. 드디어 합주부가 관현악단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부산로터리클럽 제 3660지구로부터 현악기 40여 점을 기증받기도 했다.

 



 

1999년 3월 초, MBC 이채훈 PD 한테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연주하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가는데,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사라 장이 합주를 원하는 악보를 보내왔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곡이라 어렵다고 투덜댔다. 이 사실을 전하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곡을 알려 달래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 웨이', 그리고 노사연의 '만남'을 선택했다. 드디어 사라 장이 MBC '생방송 화제집중'팀과 함께 학교로 왔다. 열렬한 환호속에 체육관에서 합주부와 함께 세 곡을 연주했다. 사라 장의 아버지의 즉석 제안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들을 사라 장과 함께 연주했다. 이런 인연으로 예술의 전당(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2001,2002년)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아이들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2004년 멕시코 공연 일정이 잡혔다. 8월 18일 출국하여 9월 3일 입국하는 스케쥴이었다. 인솔자를 포함하여 총 125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통령궁 공연을 포함하여 총 다섯 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멕시코 일정 중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버스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악기며 짐을 모두 다른 버스로 옮겨야 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선생님이 우리 합주부를 위해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7년 기금마련음악회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공연 뒤 서울 소년의 집 합주반 아이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해준다며 부산에서도 참여하면 좋겠다고 연락와서 첼로 파트 4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공연은 CMI에서 기획했는데, 이 회사의 대표가 바로 정명훈 선생님의 큰 형인 정명근 사장이었다.

 

그 해 8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년의 집 기금마련연주회를 가졌다. 1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베토벤의 고향곡 '운명'을, 2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아들인 정민 씨가 지휘를 맡고 정명훈 선생님은 피아노를 첼리스트 송영훈 씨와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 씨와 함께 베토벤의 '3중 협주곡 Op.56'을 연주했다. 이들 부자와의 인연은 2010년 카네기홀 공연으로 이어졌다.

 

2010년 2월 8일 저녁 8시 비행기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현지시간으로 8일 저녁 8시 조금 못 되어 뉴욕 JFK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재학생 42 명, 졸업생 54 명, 객원 연주자 15 명, 수녀 5 명, 사무실 직원 5 명 등 123 명의 대이동이었다.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9기 졸업생 성철이가 유럽에서 날라왔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린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는데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동유럽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벨기에의 한 교향악단에 단원으로 활동 중이란다.

 

뉴욕의 겨울이 유명한 것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바로 폭설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이미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들어 눈이 잦아들었지만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당사자인 우리도 우리도 움직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관객들이 찾아 오는데 불편한 것 같아 큰 걱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센트랄파크에 놀러갔다. 누군가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자 우리 일행은 삽시간에 눈싸움으로 번졌다.

 

2010년 2월 11일 카네기홀 공연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날씨는 따뜻했다. 나들이에 무척 좋은 봄 날씨였다. 어제만 해도 카네기홀까지 가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오후 3시부터 리허설을 가졌다. 주어진 시간에서 단 1분만 초과해도 추가비용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다. 공연 전 호른을 부는 준호가 마우스피스를 조이는 나사를 분실하여 이를 찾느라고 한바탕 해프닝을 벌였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며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윤진호 작가님이 이번에 함께 동행했는데

리허설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담다가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265 쪽)

 

공연장을 찾은 분들은 대개 근거리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그들의 미국인 지인들 같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족 중에는 누님과 그 자녀들이 찾아왔다. 서울 도티기념병원을 기증하신 도티 씨 가족도 항공편이 없어 참석을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할 분들이 폭설오 인해 참석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정민 씨가 지휘를 맡았다. 첫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서곡이었다. 1부는 베르디의 특집 같았다. 2부의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고향곡 5번이었다. 안단테로 시작한 1악장부터 장엄하고 화려한 4악장 피날레까지 거침없이 연주했다. 관객들이 기립했다. 터져나오는 함성, '브라보! 브라보!'로 장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수녀님들의 눈시울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출처:Joins.com

 

1960년대 부산의 거리는 넝마를 줍거나 구걸을 하거나 병들어 떠도는 고아들 천지였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소년의 집을 짓고 학교를 세워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쳤다. 축구부, 육상부, 스키부 등을 만든 것도 모두 자립심 강한 동량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합주부를 지도하시는 안유경 선생님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피고용인들을 채용할 때 '아이들 중심'이라는 원칙에 충실했기에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의료진의 선발도 개원 당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면서 실력있는 의사와 직원을 채용했다.

 


올해 초, 대우증권에서 보내온 초청장



 

고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만남은 평범한 20대 직장녀를 수도자의 길로 걷게 만든 계기였다. 아이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뿌리치고 '엄마 수녀'의 길을 선택한 박 볼케리아 수녀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요즈음 조그마한 텃밭에 감자, 고구마, 무우, 배추, 생강, 벼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다보니 수녀님들 사이에는 농사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오늘도 텃밭을 가꾸며 아이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엔 이들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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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3세 대해부 - 매경 기자들이 현장에서 전하는 주요 그룹 오너 3세 이야기
매일경제 산업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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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업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세대별로 특징이 나타난다. 창업세대인 재계 1세대는 '맨땅에 박치기'격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 땅에 설탕, 섬유 등의 공장을 세우고 이후 반도체 공장까지 만든 삼성그룹, 헝그리 정신과 불굴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중화학 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현대그룹 모두 우리나라 재계의 대부인 셈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으로 대변되는 재계 2세대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공을 세웠다. 세계 1등 품목이 대거 양산되고 그들의 화두는 '글로벌'이었다. 재계 1세대들은 근검, 절약으로 대변되는 헝그리 정신으로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졌다면, 2세대들은 뛰어난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기업과 한 판 승부를 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3세대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이다. 기업인으로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아 유능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물론, 노블리세 오블리주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예전에는 선두를 추격하는 추격자(Fast Follower)였으나 이젠 선두주자(Leader)의 입장으로 변모했다. 예로부터 '부자 3대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부를 유지, 계승하는 것이 어렵다. 이들 3세 중 가장 활발한 인물의 활약상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삼성그룹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삼성 로고의 간판을 만난다. 삼성은 일제시대인 1938년 대구에서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던 소년이 2010년 12월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마침내 사장으로 승진했다.

 

1968년 생인 이재용 사장은 경복고등학교 재학시 모범학생으로 통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4년 내내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삼성 초기에 사용하던 낡은 갈색가방을 들고 다닌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검소한 생활습관을 읽을 수 있다.

 

"키가 크고 한류스타처럼 잘생겼으나 전혀 위엄을 부리지 않는다.

생각이 유연하고 젠틀맨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닛케이비즈니스, 2011년 1월 3일자> 중에서

 

이 사장은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시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브라질, 러시아, 인도, 독립국가연합,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주요시장을 다니며 거래선과의 폭 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앨 고어 전 미 부통령,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등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도 각종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인 '삼고초려'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엔 좋은 인재를 널리 구하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인재 욕심은 재계에서 이미 유명했다. '인재중시'경영은 이건희 회장을 거쳐 3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중시하고 이런 인재를 불러 모아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겠다는 삼성 오너가의 경영철학인 셈이다.

 

한편, 그는 오래 전부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왔다. 2007년에는 두 차례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 두움을 주고, 2005년에는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이 예산부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월급에서 일정액을 떼어내 사비로 매달 낡은 PC 10대를 교체해 주었다. 기부 습관이 몸에 밴 그는 2010년 12월 승진한 임원들의 명의로 정신지체인을 위한 지역사회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잘 키울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2011년 4월 12일, 한복 디자이너 이모 씨가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의 부페 식당을 찾았다가 입장을 거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이부진 사장은 직접 이모 씨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후 네티즌들 사이에는 호텔 직원의 미숙한 대응을 대표이사가 나서서 직접 사과하고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2010년 12월 3일,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 발표를 보고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가 부사장을 건너 뛰고 사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인사 스타일에서 이런 파격 승진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 사장과 삼성물산 상사 부문 고문도 겸하는 인사발령이었다.

 

"이부진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꼼꼼하고 똑 부러졌다.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스마트하기 때문에 사업도 잘할 것이다" (40 쪽)

 

1970년 생인 이부진 사장은 연세대학교 아동학과를 졸업했다.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시에도 조용하고 검소한 여학생이었다. 아동, 복지, 문화 등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의 전공도 아동학이다. 1995년 삼성복지재단 기획지원팀에 입사하여 1998년 6월부터 1년간 삼성일본 본사담당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당시 평사원인 임우재 씨(현, 삼성전기 전무)와의 결혼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호텔신라와의 인연은 2001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전사기획 담당부장으로 입사했다. 그녀의 부임이후 호텔신라는 긴장감과 더불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호텔신라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경쟁사인 워커힐호텔에 직접 투숙까지 하면서 참고사항을 점검했다. 업무의 시스템화를 시도했고, 2006년에는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 연회장 등을 리모델링했다. 2년에 걸친 꼼꼼한 공사로 호텔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3~6 층에 신설된 '라이프스타일존'은 호평이었다.

 

이 사장이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은 2009년 9월 삼성에버랜드가 당시 호텔신라 이 전무를 자사 경영전략담당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에버랜드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것이었다. 주력사업인 테마파크의 경우 2005년 입장객 865만 명을 정점으로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 사장은 철저한 현장주의자이다. 모든 것을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에대한 욕삼과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이 업계의 평판이다. 에버랜드의 명물인 사파리 스페셜 투어도 직접 체험한 결과, 차량 보호망의 색깔이 은색이어서 승객이 바깥을 관망할 때 눈부심 현상이 나타나는 점을 파악하고 현재의 암녹색으로 변경했다.

 

2010년 11월 루이비통 브랜드를 인천공항 신라면세점에 유치했다. 3년에 걸친 롯데면세점과의 유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루이비통의 아르노 회장이 직접 방한하여 롯데와 신라 모두 면담한 뒤 결정을 내렸는데, 루이비통이 공항 면세점에 입점한 것은 신라면세점이 세계 최초라고 한다. 호텔신라의 매출이 4,200억 원(2002년)에서 1조 4,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고, 이 중 면세점 매출이 전체 매출의 81%를 차지하는데 이는 세계 7위 수준의 면세점 매출이다. 이만하면 경영능력을 인정받을만하다. 이미 신세계와 한솔이 분리되었던 것처럼, 이부진 사장도 계열분리의 길을 걷게될지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1973년 생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일찌기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하여 기획담당을 하며 제일모직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갤럭시'나 '로가디스' 등 신사복 의존도가 높은 패션사업 구조에 손을 댔다. 2003년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 인수를 시작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새로 구성하고, 빈폴도 글로벌 브랜드화 전략에 착수했다.

 

2010년 초 이 부사장은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의 이사회 멤버로 선정되었고, 그 해 가을에 열린 '2010 F/W 뉴욕컬렉션'기간 중에는 '헥사 바이 구호(Hexa by Kuho)'라는 라벨로 구호의 첫 해외컬렉션을 선보였다. 2005년부터는 삼성패션 디자인펀드를 설립하여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 디자이너를 발굴, 후원하고 있다.

 



 김연아 평창 프리젠테이션에서, 의상은 '구호' 제품임 

 

그녀가 합류하고 제일모직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매출이 2조 원(2002년)에서 5조 원(2010년)을 돌파했고, 패션사업부의 매출도 8,100억 원(2002년)에서 1조 3,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다. 2009년부터는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의 경영도 챙기고 있다. 제일기획이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그녀를 기획담당 전무로 영입했었다.

 

2010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케미컬과 전자재료 사업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즐겨 찾는 곳은 R&D센터에 있는 컬러랩(Color Lab)이다. 2005년에 설립된 컬러랩은 글로벌 업체의 다양한 컬러 요구에 부응할 목적이었다. 노하우가 축적되어 흰색만해도 현재 2천여 종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자인과 컬러의 조화로 시너지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디자인 역량이 소재사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최첨단 IT제품의 경쟁력에서 컬러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다"

(56 쪽)

 

 


올 초 현대차 판매촉진대회에 참석한 정의선 부회장.


 
 



1970년 생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1남 3녀 중 막내이다.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할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권유로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대 MBA과정 중 현 배우자인 삼표회장의 장녀 정지선과 인연을 맺었다. 1997년 8월 MBA를 마치고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말 현대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대우)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상하 가리지 않고 직원들과 잘 어울려 평이 좋았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폭탄주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 시합을 벌인 적도 있다"(66 쪽)

 

그의 진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다. 상무(2001), 전무(2002), 부사장(2003) 등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입사 6년 만인 2005년에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단 맡겨보고 자질을 검증하는 현대그룹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는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며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이를 발판으로 적자인 기아차를 흑자로 전환시키더니 2010년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달성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지 주목된다. 

 

그의 누나 셋은 현대차의 경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도 현대가의 전통이다. 단지 사위들이 계열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녀 정성이의 남편인 맏사위 선두훈은 선병원 이사장으로 딴 길을 가고 있다. 둘째 사위 정태영은 종로학원 정경진 회장의 장남인데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대표이사 사장이다. 제일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정몽구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셋째 사위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은 현대모비스에 입사하여 현대하이스코로 근무지를 옮겨 영업본부장 시절 1조 원대를 맴돌던 매출을 2조 3천억 원으로 끌어올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즈의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

 

1962년 생인 두산건설 박정원 회장은 두산가 4세 중 맏형이다. 두산그룹은 올해로 창립 115년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구 한말 종로에서 '박승직상점'이라는 포목점을 시작으로 OB맥주, 코카콜라, 코닥, 3M 등 외국기업의 국내 비즈니스를 도맡았던 대표적인 소비재 기업이었다. 변신의 움직임이 일었다. 1995년 두산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맥주가 하이트의 추격에 직면하여 적자가 엄청나게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영등포 공장과 을지로 본사 사옥의 매각이 단행되었다.

 

박회장은 어릴 적부터 경영수업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두산산업 뉴옥지사에 입사했다. 이후 도쿄지사를 거쳐 미국 보스톤대 MBA를 마치고 일본 기린맥주에 취업했다. 창업주 박승직은 1930년대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소화기린맥주는 기린맥주의 한국 현지 생산공장이었다. 2년 후 그는 OB맥주로 복귀했다.

 

"남의 집 밥을 먹어봐야 내 것을 잘 알 수 있고,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

 - 창업주 박승직 경영철학

 

1968년 생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유명 탈렌트 고현정과의 결혼으로 한 때 세인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 이명희 회장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이다.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경복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미국 브라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신세계 전략기획, 기획조정실 상무, 경영지원실 등 컨트롤타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2010년 총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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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신세계 이명희 회장,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부사장.




 

2011년 3월 18일 주총에서 신세계는 백화점과 이마트가 별도법인으로 분리되었다. 재계에서는 정부회장과 동생 정유경이 각각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는 성격이 소탈하다. 트위터 매니아인 그는 트위터로 고객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한다. 최근의 이마트 피자 논쟁의 무대가 바로 트위터였다.

 

"가식적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 사람을 끄는 친근한 매력이 있다"(208 쪽)

 

경영 감각이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현장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마트와 백화점 매장에 직접 나가 상품과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이마트의 자체 브랜드인 PL 상품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다. 아직은 어머니로부터 경영독립을 하지 못했지만 멘토인 구학서 회장과 어머니로부터 그동안 많은 경영수업을 받았기에 조만간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 책에는 범현대가를 포함하여 모두 17개 그룹 50여 명의 리더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회사의 역사가 제일 오랜 두산의 경우는 이미 4세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SK그룹의 경우는 아직 2세 경영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역사가 짧은 탓인지 SK그룹은 신성장동력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하다는 증권가의 루머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 재벌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호불호好不好가 있기 마련인데 경영자의 좋은 면만 부각시켜 형평성을 잃은 것이 옥의 티 같아 다소 아쉬웠다. 혹자는 물려받은 부富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재벌가문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필 왜 그들이 기업을 경영하는지 그점에 대해선 나 역시도 불만이다.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승계하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공부로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등 글로벌 정신을 갖추었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점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되겠다. 아무튼 한국의 기업이 3대를 넘어 100대까지 이어져 세계 기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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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6-28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