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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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일전에 레포트를 쓰며 참고할 일이 생겨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필요한 자료만 검색한 후 책을 덮었는데 언젠가는 완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다른 이유보다도 '영웅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가도 가끔 궁금해지는 건 그들의 업적 때문일 것이다. '영웅'은 하나의 칭호를 넘어선 거대한 무게를 지닌다. 어째서 세상은 누군가를 영웅이라고 부를까. 적어도 플루타르코스 개인이 평가하기에 영웅이었던 그들은 어떤 공을 세웠을까. 마침 을유문화사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새로운 완역본이 출간되어 서평단을 신청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세계적으로 수많은 역본이 존재하는 만큼 작가보다는 역자의 말에 초점을 맞추며 읽었다. 하나의 고전을 번역하는 데에는 많은 노고가 든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닌 여러 판본을 비교했던 작업의 과정, 그 안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이름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역자에게 신구약 성경을 윤문하고픈 소망이 있다는 점이다. 실상 성경을 읽을 때마다 번역 자체가 새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 많았는데 윤문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새로 다듬어질지 무척 궁금해진다. (역자님 만수무강하소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글의 구성이다. 이 책은 연대기나 일대기처럼 각 영웅의 인생을 일렬로 나열하지 않고 그들을 유사한 두 명씩 묶어 소개한다. 두 사람의 삶이 제시된 후, 그에 대해 짧은 비교 대조가 이루어지고 영웅의 공과 과에 대한 저자의 평이 이어진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 철학자를 방대하게 조사, 논평한 이 저술은 그 자체가 새로운 하나의 전설이라고 불릴 만하다.

고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문장의 힘을 잃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유효한 글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다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시라쿠사이의 격언, "권력은 가장 아름다운 수의이다"를 빼더라도 솔론의 말, "독재자의 자리가 마음 끌리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내려오는 길이 없다". 로마의 '대(大)카토'가 고위 관직에 욕심을 내는 이들에게 했던 말, "길을 잃지 않으려고 늘 시종(lictor)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다니, 길을 모르는 사람들인 듯하다" 등이 인상적이다.

영웅들의 삶이 담긴 글이라고 해서 첨예한 정치 다툼과 권력의 세계만 그려진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들의 가족사가 큰 분량을 차지한다. 또한 오래된 책이라고 해서 저자가 혐오나 차별에 몹시 둔감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던 섬 레스보스(lesbos)나 스파르타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 동성을 사랑했던 여러 철학자들의 소개가 생각보다 훨씬 무심히 쓰인 지점도 많았다. (물론 다수의 정치, 철학자들이 소수자에게 혐오적인 정책과 발언을 펼치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사회 개혁을 이루어낸 이도 있었다.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금화와 은화의 유통을 전면 중단하고 가치가 없는 엽전을 유통함으로써 금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다. 최근 '돈'으로 인한 여러 폐단을 보며 물물교환의 시대를 돌아본 경험이 있었다. 사회의 흐름이 물가를 요동치게 하는 지금보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물건의 가치가 정해지던 시대가 더 평등하지 않았을까 짐작만 했는데 실제 이런 개혁을 시도한 이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 뜻깊은 경험이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처음 읽을 때는 '영웅'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당대의 인물을 알아갈수록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의 사회와 비슷했다. 그들은 우리가 고민하는 것을 고민했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우리가 슬퍼하는 일에 슬퍼했다. 반면, 감상에 '오히려'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기도 한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보다 권력에 신중했고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했다. '오히려' 영웅이라는 말이 충실히 기능할 수 있던 시대. 그 단면을 살필 수 있어 즐거웠다. 아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전권을 읽는다면 깨닫는 바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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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악어 당신을 위한 그림책, You
루리 그림, 글라인.이화진 글 / 요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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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베아트리스』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글자가 하나도 없이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책이었다. 줄글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게 신기해서 구매했는데 복잡한 타임리프 서사가 색채의 대비와 이미지의 변화로 완벽히 표현되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이 스토리에 부여하는 힘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영화에도 무성영화가 있지 않았는가. 『베아트리스』를 읽으며 작가의 의도에 따라 글과 대사보다 그림과 장면의 힘이 더 클 수도 있다는 배움이 있었다. 그 뒤로 그림책을 볼 때면 글뿐 아니라 그림도 함께 보곤 한다.

『도시 악어』는 표지와 내지의 그림을 보고 선택했다. 실험적인 색채와 구도를 활용했다는 이 책이 내내 눈에 밟혀 서평단을 신청했다. 동화치고는 감명받은 어른들의 추천사가 눈에 띄었다는 점도 이 책을 보는 데에 한몫했다. "시원한 라거 맥주 같은"(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작가 강은경의 추천사)동화책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악어가 도시에 살게 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도시'와 '악어'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악어는 "내가 원해서 여기에 온 건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악어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어딘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사는 삶은 흔치 않다. 우리는 종종 억지로, 원치 않는 이유로 하나의 공간에 던져진다. 때로는 꽤 긴 시간동안 그런 환경에 놓이기도 한다. 악어는 우리와 비슷하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 '도시'에 던져진 악어는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뾰족한 악어의 이빨과 날카로운 생김새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았다. 악어는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처럼 행동한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이팩을 하는 악어는 귀엽다. 하지만 이빨을 둥글게 다듬는 악어는 조금 힘들어 보인다. 악어가 꼬리 엑스레이를 찍는 장면에서는 울컥 치미는 감정이 있다. 도시에 살기 위해서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악어에게 꼬리가 없어야 한다. '도시 악어'가 되기 위한 여정은 점점 악어의 몸과 마음을 옥죄고 상하게 한다. 악어는 지하철역에서 꼬리를 감싸고 울먹인다.

독자는 악어의 마음에 십분 공감한다. 악어에게 오이팩을 하는 것과 이를 다듬는 것, 그리고 꼬리를 자르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도 이처럼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한다. '도시'에 살기 위해 우리가 잘라야 했던 꼬리는 무엇이었을까. 기분, 체면, 마음, 감정. 악어와 같은 우리네가 잃어버린 꼬리는 생각보다 길고 소중한 것이다.

악어는 물을 아주 두려워한다. 물은 그가 원래 살았던 환경이지만, 악어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곳에 쉽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이런 악어의 모습도 당연히 독자와 닮아 있다. 갑작스럽게 물에 빠진 악어가 버둥거리는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본래의 모습을 들여다보길 꺼려한다. 감추고 피하는 데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이 악어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사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나였다. 언제나 '나에게서 도망가기 바쁘던 '나'.

악어는 얼떨결에 빠진 물에서 점점 자신을 되찾는다. 잘라버리고 싶었던 꼬리가 사실 자신의 정체성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악어야"라는 두 번째 대사는 '도시'가 아닌 '악어'에 집중한다. 꼬리가 있는 것이 '악어'의 의미라는 것을 알고 악어는 물속에서 마음껏 헤엄친다. 무엇을 자르거나 고칠 필요 없이 '나는 악어'라고 받아들인 자유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꼬리가 있음으로 악어는 헤엄친다. 동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악어는 같은 대사를 반복하지만("나는 악어야"), 그것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눈동자에 도시의 빛을 담은 악어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본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악어는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에서 오는 작은 위로가 점점 독자를 집어삼킨다. 악어는 빽빽하게 세워진 빌딩을 보며 담담히 말한다. 그림으로, 그리고 눈빛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살아가야 하니까. 이 도시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당신을 다정히 마주할 때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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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개인 인스타그램의 게시글을 일부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www.instagram.com/p/CZbwQAXp4cf/?utm_source=ig_web_copy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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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트림 물리학 - 수식 없이 읽는 여섯 가지 극한의 물리
옌보쥔 지음, 홍순도 옮김, 안종제 감수 / 그린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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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질릴 때 과학책을 종종 읽는다. 사실 모든 학문은 서로가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지식이 생각도 못했던 다른 분야의 공부에서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정작 학생 때에는 관심도 없었던 물리학이 성인이 되어 재미있어진 건 SF 소설을 읽은 후부터였다. 물리가 왜 재미있을까. 그 이유를 『익스트림 물리학』의 부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리는 '극한'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옌보쥔이 이 책에서 분류하듯 우리는 극한의 빠름과 극한의 무게, 극한의 열 등을 직관적으로 상상하지 못한다. 100도의 물에 손을 넣으면 뜨겁고 화상을 입는다는 건 알지만 1000도만 되어도 그 온도가 어느 정도의 열일지 가늠하기 힘들다. 우리는 100킬로의 무게를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10억톤의 무게는 감히 알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의 감각 범위를 벗어나는 연구를 하며 과학자들은 여러 증명 이전에 '상상'을 했다. 타당하고 그럴듯한 상황에서 새로운 극한을 충분히 검증하면 이론이 성립된다. 어쩌면 SF라는 장르의 발달에 물리학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상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익스트림 물리학』은 여섯 가지의 극한 상황에서 발생한 이론과 다양한 가정을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고등학교 물리학을 뛰어넘는 수준의 내용이 시각 자료와 적절히 어우러져 훌륭한 교양서를 이루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상대성 이론부터 SF 소설 또는 영화로 대중적인 이론이 된 '다중우주론'과 '삼체 이론', 그리고 생소하게 느껴질 법한 응집물질물리학이라는 분야까지 한 권에 비슷한 밀도로 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떤 것도 특별히 어렵거나 지나치게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작가의 지식적 유연함에 놀라곤 한다.

가령 원자핵 내부에서 매우 좁게 발생하는 강한 힘인 '강력'을 설명하며 옌보쥔은 그것이 마치 "권투선수의 주먹이 매우 강하지만 공격 범위가 팔의 길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국소적인 부위에만 작용하는 힘이 아주 강할 수 있다는 건 직관적으로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옌보쥔의 예시를 읽다 보면 단번에 상상이 가능해진다. 이 책은 시각 자료와 예시를 총동원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것이 어렵고 생소한 이론과 쉽고 대중적인 내용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저자의 예시는 단순한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SF 영화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는 '마션'과 인터스텔라'부터 세 종류의 성별을 가진 존재들이 나온다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신들 자신』, 그리고 앞서 삼체 이론과 함께 잠시 언급한 소설 『삼체』까지. 예술과 과학에 조예가 깊다는 작가 소개에 틀림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 특히 삼체 이론을 알지 못한 채 소설 『삼체』를 읽으며 애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접했다면 좋았을 텐데.

『익스트림 물리학』을 읽으며 자주 든 생각은 '왜 내가 그때 이 책을 알지 못했을까'였다. 물리학의 범주에 드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질문의 해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예전에 물리 과외를 하며 상대성이론을 가르치는데 시간 지연의 쌍둥이 실험에 관해 질문을 던진 학생이 있었다.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라 스스로 설명 가능한 범위가 좁아 아쉬웠는데 이 책에 그 해답이 쓰여 있었다. 좀 더 빨리 이 책을 읽었더리면! (물론 최신간 도서인 이 책이 당시에는 없었겠지만.)

이 책은 넓은 독자를 포괄할 수 있다. 물리학에 흥미와 관심이 지대하고 어휘력에 자신이 있다면 중학교 저학년도 도전해봄집하고 물리학에 손사레를 친다면 성인도 쭈뼛거리며 한두 장 넘겨볼 수 있다. 더 빨리 읽지 못한 걸 후회할 정도로 재미있는 이 물리책은 한번 읽기에는 지나치게 유익하다.

우리의 일상과, 배움과, 상상과 물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극한'의 재미가 깃든 학문에 한번쯤 발을 담가보고 싶다면, 넓이와 깊이를 측정하기 힘든 '익스트림'의 세계에 방문하고 싶다면 이 책으로 그 첫발을 떼는 건 어떨까.

늦게 알게된 만큼 두고두고 여러 번 읽어야겠다. 이 꼼꼼하고 재미있는, 그리고 친절한 물리학 책을.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으며 본인 인스타그램의 게시물을 일부 발췌 및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www.instagram.com/p/CZWnb3LJMlt/?utm_medium=copy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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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기 전, 단순하고도 명료한 ‘끝’이라는 발음을 곱씹어본다. 무엇의 극단에 종종 서는 사람은 이 말에서 진한 동질감을 느낀다. 끝에서 춤을 추는 행위는 위험하다. 그러나 혹자는 스릴을 느낀다. 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자신을 끝으로 내모는 사람도 있다. 끝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정한 과제가 끝난다면 시원한 동시에 후련하다. 수많은 ‘끝’의 속성 중 지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극단’의 이미지다. 흥미롭게도 누구나 ‘끝’의 속성을 하나쯤 갖고 있다. 어슐러 K. 르 귄의 에세이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언어, 여자, 그리고 장소를 끝까지 몰고 가는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도, 여성도, 장소도 특성의 끝이 있다. 르 귄은 여성 작가이다. 작가는 언어의 여행을 떠나므로 ‘여행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언어든 여성이든 장소든, 르 귄은 극단의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때로 머리가 아프다. 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끝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다. 끝에서만 출 수 있는 춤도 있다. 예술에서 ‘절정’이라 말하는 순간도 끝에 속한다. 예술가로서, 특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르 귄은 어떤 절정의 춤을 추고 있었을까. 작가는 친절하게도 나름의 기호를 붙여 ‘여성(페미니즘)’, ‘세계(사회적 책임)’, ‘책(문학, 글쓰기)’, ‘방향(여행)’으로 글을 분류한다. 관심 있는 주제만 골라 보라는 (또는 관심 없는 주제는 피해도 된다는) 작가의 배려겠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모든 작품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분류가 어디에 있을까. 여성도, 세계도, 책도, 방향도 잃어서는 안 되기에 주제의 분류가 무색하게도 처음부터 책을 쭉 읽어갔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장은 ‘여성(페미니즘)’ 카테고리에서 나왔다. 책을 펴자마자 보이는 「우주 노파」라는 제목의 굴은 여성과 폐경기를 짧게 다루었다. “폐경기라는 저택은 (…) 삶의 필수품들이 온전히 다 갖춰진 집 또는 가정이다”(18쪽)라는 말은 젊은 여성으로서 (부끄럽지만)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완경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를 ‘월경 중단’을 의미하는 원어 ‘menopause’의 의미를 살려 폐경기로 번역했다.) 르 귄은 이어서 “노년기는 처녀기의 회복이 아니라 세 번째이자 새로운 상태이다.”(같은 쪽), “이 여성은 분별, 재치, 인내심, 경험에 의한 통찰을 충분히 지니고 있”(21쪽)다고 말한다. 노년은 ‘쇠하는 시기’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탈피하는 때다.

작가는 알타이르 별의 네 번째 행성에서 누군가 “당신네 종족의 본질을 배울 수 있도록, 지구인을 한 사람 내주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교육을 잘 받고 육체적으로도 절정기에 있는 건강하고 총명하고 용감한 젊은 남자”가 아닌, 그렇다고 “젊은 여자”도 아닌, “60세 넘은 여성”을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역 슈퍼마켓이나 마을 장터”, 또는 “싸구려 장신구 코너”에 있으며 생기가 없고 “영원한 젊음의 비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우주선에 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요?”라며 무척 놀란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건 “나이로비에서 일하는 손자가 담긴 작은 사진”이다. 그녀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그러니까 ‘변화’라는 핵심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행동하기까지” 했다. 물론 설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녀는 지구인의 지혜를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그러니 우주선에 올라요, 할머니.”라는 마지막 문장은 긴 여운을 남긴다. 누구도 노파의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현자도, 과학자도, 샤먼도 노파가 통과한 삶의 두께를 감히 경험하지 못했다. ‘젊은 여성’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한가운데에서 최근 곱씹는 것은 노인의 결이다. ‘노파’라는 호칭에서 오는 바람 빠짐이 좋다. ‘노, 파-하’하고 길게 발음하면 더 잘 다가오는 이 특유한 발음은 먼지를 불어내는 느낌과 같다. 메주의 냄새와도 같다. 오랜 시간 경험한 변화와 새로움을 가다듬고 한데 잘 뭉쳐 오랫동안 묵히면 ‘노파’가 된다. 숙성의 끝에서 노파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속성을 받아들인다. 언제부턴가 나는 끊임없이 노파를 발음하고 있다.

‘여성’ 카테고리의 끝을 ‘노파’로 보았다면 ‘문학’의 끝에서 볼 수 있는 재미난 논쟁도 있다. 시작점에서 3분의 1지점에 있는 「산문과 시의 상호 관계」이다. 산문과 시는 많은 경우 대립항으로 쓰인다. 작가가 든 여러 예시에서 볼 수 있듯, 시와 산문은 오랫동안 이분적으로 나뉘어 왔다. 흥미롭게도 국내 사전에서도 산문의 의미 앞에는 “운문에 대하여 운율이나 정형에 제약이 없는 보통 문장”이라는 마링 붙는다. 시/산문을 구분하는 경계는 명확할까. 흔히 사회 통념상 그어진 모든 경계가 그러하듯,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경계 역시 뚜렷하지 않다. (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문학을 ‘분류’해야 하는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서 약간의 여지를 둔다.)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정의가 시를 표준화할 뿐 아니라 소설, 희곡, 야구 시합과 머나먼 은하에 대한 설명 등 분명히 시와 자유로이 소통해야 하고” “언제나 시와 교류하고 있는 글쓰기의 기대와 기준을 좁히고 낮출” 것이다. (201쪽)

어느 면에서나 정의는 양날의 검이다. 한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호명하는 방식과 태도에 항시 주의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경계’를 만드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문학을 피자 자르듯 자르는 것과 학문적인 단위 생성을 위해 구분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평균 이상의 눈치가 있다면 순문학(또는 본격 문학), 클래식, 주류(主流)라는 단어가 조성할 수 있는 위화감을 알고 있다. 간단한 성질의 차이를 마치 견고한 장벽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시와 산문도 마찬가지다. 문학에는 운율이 있는 산문과 정형에 제약이 없는 운문이 혼재한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태도가 문학의 극단에 필요하다. 통념이 세운 장벽을 허물 때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의 끝에서 산문과 시를 보았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르 귄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의 끝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선두에 ‘환경 문제’를 세운다. 환경 문제는 여러 에코 페미니스트가 선언했듯 여성-자연을 응시하는 관점의 유사성에 기대어 볼 수 있다. 자연은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왔다. ‘품다’, ‘내주다’, ‘포용하다’ 등의 말이 자연의 겉에 덧씌워지는 동시에 사람(man)은 일방적으로 자연(여성)을 착취한다. 동물권 등의 환경 이슈에 여성이 높은 비율로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과 여성은 ‘고통’의 기억을 공유한다.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르 귄은 “생태계”라는 말이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제가 ‘아버지말’이라고 부르는 언어는 (…) 현실에 대한 특권 관계를 주장한다면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 될 수 있어요. 아버지말은 화자들의 지속적인 생태계 파괴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죠.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온 ”생태계“라는 말 자체가 화자를 생태계에서 배제시키고, 궁극적인 무책임을 담보하는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쓰일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말이거든요.” (262-263쪽)

르 귄이 정의한 ‘아버지말’은 남성들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권위와 위계, 힘의 격차에 따른 지배와 종속을 포함한다. 그것은 모국어라고도 불리는 ‘어머니말(mother language)’과는 완전히 반대다.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환경 운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역시 연결(connection)이다. 손과 손을 놓지 않을 때 볼 수 있는 진실이 있다. 다수의 폭력은 단절에서 발생한다. 도살과 양계, 사육을 커다란 장막 안에 넣어두고 외면할 때, 조각난 채 포장되어 나온 어떤 동물의 살을 마트에서 무감하게 고를 때에는 미처 그것이 폭력인 줄 모른다. 심지어 장막을 걷어내려는 사람을 뜯어말린다. 그의 행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장막 안의 진실을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 문을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아버지말이 정의한 자연과 착취, 여성의 연결고리를 매만질 때가 됐다. 르 귄은 1986년,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여성과 자연에 빚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했다. 그로부터 약 3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서로와 가까울까. 오히려 우리의 주변에서 더욱 멀어진 존재는 없을지 돌아보아야 한다. ‘connection’이 가진 힘을 이제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는 여성, 문학, 사회적 책임, 여행 관련 에세이 이외에도 서평이 실려 있다. SF 작가로서의 시점을 유지하며 판타지 작가가 쓴 SF, SF 작가가 쓴 SF, 순문학 작가가 쓴 SF 등을 평한다. 여성 고전 작가로는 도리스 레싱의 작품 평이 두 편이나 실렸다는 것이 뜻밖이다. 르 귄의 평가 역시 흥미롭다.

“레싱은 전혀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다. 오래된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니, 폐기해야 마땅하다. (…) 레싱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레싱은 앞으로 나아간다.”(442쪽)

르 귄은 레싱의 글쓰기가 ‘어색하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시카스타』와 『3,4,5구역 사이의 결혼』을 읽은 르 귄의 반응은 실상 혹독하다. 그러나 르 귄은 레싱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 레싱이 평소의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독자는 레싱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할 때 작가는 발전할 수 있다. 르 귄은 나서거나 물러나지 않고 소설과 영화의 감상을 쓴다. 모든 문장에서 확신이 느껴진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작가의 가능성을 믿고, 작품의 내적 힘을 믿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날카로운 비평이다.

이토록 단단한 생각 위에 글을 쌓는 작가라면, 남에게 해줄 말이 많은 이 작가의 소설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작가와 독자의 의견이 같은 방향으로 흐를 때 오는 희열을 느끼고 싶어졌다. 어슐러 K. 르 귄이라면 가능하겠다.

세상의 끝에 먼저 도달해 춤을 추고 있는 이 작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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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개인 페이지의 글을 전문 발췌했습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10/02/황금가지-어슐러-k-르-귄-『세상-끝에서-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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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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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란 무엇일까. 동화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이를 위하여 지은 문예 작품’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동화를 ‘다시’ 읽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위의 정의에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게’ 쓴 이야기다. 동화, 특히 현대에 창작되는 동화는 종종 어린이의 시점에서 사회의 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아이의 시야는 어른의 것보다 넓다. 아이들은 어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 이해한다. 아이는 어른의 상상 너머를 원한다. 지식은 어른이 더 많을지 몰라도, 지혜는 아이들에게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인정받은 이야기는 마땅히 어른들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화'와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창작되었다. 이야기에 시간이 축적될수록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에게 읽히기 적합하지 않은 동화'가 생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낡는다. 가장 최신의 경향과 시각을 반영하더라도, 수십, 수백 년이 흐른 뒤엔 먼지 쌓인 이야기가 되고 만다. ‘고전’이라 불리는 동화에도 아이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거나 비교육적인 내용이 속속 등장한다.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가 대표적인데 『신데렐라』와 『빨간모자』의 수정 전 버전이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또한 『피리 부는 사나이』 역시 한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납치한 남성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그리 교육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동화들은 대부분 현대에 와서 수정되지만, 그저 문제가 되는 장면을 지우는 데에 그친다는 한계를 여전히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상상력을 모두 버리기에는 아쉽다. 옛이야기의 문장에는 당시만의 맛과 멋이 있다. 신데렐라와 왕자의 운명적인 만남, 빨간모자와 늑대가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싫다고 피리 소리를 영영 없애는 건 어쩐지 슬프다. 그렇다면 고전 동화의 상상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멋지게 재해석할 수는 없을까. 아이뿐 아니라 동화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어른도 속이 시원할 만큼 잘 쓰인 재창작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그 대답이 될 만한 책이 있다. 홍콩 출신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의 소설집 『마술피리』이다.

이 책에는 잘 알려진 고전 동화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재창작한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의 독자에게 작가가 던지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거인을 죽인 소년 잭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여자를 잔혹하게 살해한 동화 속 푸른 수염은 현대에 와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을의 아이들을 납치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위의 질문을 토대로 이 세 동화의 ‘뒷이야기’를 상상한다.

『마술피리』에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법학 박사 라일 호프만과 그의 조수이자 하인인 한스 안데르센 그린이다. 한스는 호프만과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이야기의 뼈대가 될 만한 설화나 사건을 수집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유명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것을 상징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한스는 세 개의 소설에서 서술자이자 사건의 전달자 역할을 한다.

한스와 함께 다니는 인물의 소개도 심상치 않다. 법학 박사라는 직함에 걸맞게 호프만 박사는 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실제 또는 가상의 지역에서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인물 간의 이해관계, 역사적 사건을 교묘하게 연결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그에게는 사건에 따라 다양한 성격이 부여되는데 그것이 모여 ‘호프만’이라는 한 명의 인물을 구성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스는 이런 호프만의 곁에서 그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것이 바로 『잭과 콩나무』와 『피리 부는 사나이』이다. (두 번째 소설의 배경 동화인 『푸른 수염』이 빠진 이유는 바로 뒤에서 설명하겠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동화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에 두 개의 동화가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첫 번째 단편인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은 메인 플롯에 동화 『잭과 콩나무』의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고 서브 플롯에 하나의 동화가 더 배치된다. 서브 플롯의 동화는 『잭과 콩나무』처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가의 창작 후기를 통해 설명을 듣자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 두 동화 모두 ‘거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에는 두 개의 동화가 차용되며 이 두 동화의 공통점을 통해 사건이 구성된다.

두 번째 소설인 「푸른 수염의 밀실」에는 동화 『푸른 수염』을 상징하는 인물과 사건이 메인 플롯, 또 다른 동화 하나가 서브 플롯을 구성한다. 이 서브 플롯을 구성하는 동화는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하다. 오히려 『푸른 수염』이라는 제목의 동화가 생소해서 서브 동화가 메인 동화보다 강하게 머리에 남을 정도다. 하지만 창작 후기를 읽어보면 확실히 메인 동화가 주된 이미지로 쓰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소설은 특이하게도 사건이 끝난 이후 한스가 서브 플롯의 동화를 쓰기로 마음먹으며 마무리된다. 작가가 창작 후기에서 “지나칠 정도”라고 표현했듯이 서브 동화가 결말에만 등장하는 감이 있기도 하다. 앞뒤의 소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세 번째 소설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메인 플롯에 삽입했다. 서브 플롯에서는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아주 유명한 동화가 보인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듯이 서브 플롯의 동화도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세 개의 소설 중 가장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세 소설은 메인 플롯뿐 아니라 서브 플롯의 동화를 찾는 재미가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아도 결정적인 암시를 주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 보통의 동화 각색은 하나의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찬호께이 작가는 두 개의 동화를 적절히 배합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세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각 단편은 동화에서 기원한 ‘재창작물’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원작의 근원이 된다는 독특한 구조로 쓰인다. 원형 동화의 원작 사건이 되는 셈이다. 글의 시작에서는 한 동화의 각색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어느새 그 동화의 시류가 되어 있다. 이 아이러니함은 소설을 읽은 뒤의 독자에게 긴 여운을 준다. 끝에서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 소설의 탄탄한 구성에 감탄하지 않기는 어렵다.

존중의 글쓰기

찬호께이 작가는 동화를 존중한다. 그것을 서사 장르의 아류로 보지 않은 동시에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떠오른 질문에 답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창작에 과감했다. ‘존중’과 ‘과감’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어떤 대상을 존중한다면 때로 과감할 줄 알아야 한다. 마땅히 존중하는 이야기에 의문이 생긴다면 그 의문을 풀어내야 한다. 그러나 찬호께이는 과감하기 이전에 신중했다. 이야기와 독자가 모두 다치지 않는 방법을 적절히 골랐다. 그리고 자신이 맞는 길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생긴 뒤로는 매 이야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고증과 창작 과정을 담은 후기를 읽자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나는 이 동화를 얼마나 알고 있었던가.

『마술 피리』는 동화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아이를 위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가 아닌, 현대에 필요한 동화의 재해석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술피리』는 심오하고 치밀하며 사실적인 허구이다. 동시에 누구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작가가 ‘아이였던’ 어른, 또는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선물에는 모름지기 정성이 담겨 있기에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는 정신이 멍해지도록 확실한 한 방을 먹을 것이다.

이 책은 어디에도 ‘소설집’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추리 파일’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어릴 적 보았던 동화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다. 왜 그 인물의 행동이 그러했는지 속 시원히 밝힐 시간이 되었다. ‘지금’의 시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죽이고, 해를 가하는 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방식으로 동화를 다시 풀어 보자.


이 동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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