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평점 :
1426년 조선, 한 마을에서 열세 명의 여자아이가 실종된다. 이를 수사하다 돌연 자취를 감춘 아버지 민 종사관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향인 제주로 내려온 민환이는 마을에 도는 수상한 소문을 듣는다. 한두 집도 아닌 열세 집의 딸이 사라졌다. 10대 소녀들이 줄줄이 모습을 감춘 그곳에서 환이는 아버지가 찾던, 여자아이들의 목숨 뒤에 숨은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성 탐정소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미디어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작은 섬 제주, 그 안의 더 작은 마을 노원에서 발생한 실종사건과 조선의 당대 현실을 꼼꼼히 이어 만든 이 이야기는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한국의 역사를 사랑하는 작가 허주은은 “인천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캐나다에서” 보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로서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동아시아의 공물 제도, 특히 여성을 공물로 보내는 공녀 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의 여성들은 나라를 위해, 가문을 위해, 집안을 위해, 사익을 위해 바쳐졌다. 여성의 삶은 때로 나라와 나라, 집안과 집안, 개인과 개인의 거래에 매여 있었다. 장옷을 쓰고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 여성의 삶은 이와 다를까.
“이 아이들은 문갑에 보관하는 옥반지, 은 머리 장식, 비단이 아니야.”-381쪽
여성이 홀대받은, 아니 천시받은 조선의 역사에 너무 무뎌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공녀’ 제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심지어 그에 바탕을 둔 추리를 이전에도 여러 편 읽었지만, 공녀로 바쳐지는 아이들을 향해 이토록 애도하는 작가는 오랜만이다. 그건 아마도 작가 허주은이 서양의 문화에 더 익숙해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문화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인신공양에 너무 익숙하다. 사람을 바치고 무언가를 대가로 얻는 것. 특히 여성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팔리고 바쳐진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한 남성의 실종을 좇아 제주로 내려온 소녀 민환이를 탐정으로 내세운다. 제주는 뭍과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은 데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특유의 사투리와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그뿐 아니라 제주에는 다양한 토속신이 전해오기도 한다. 종종 우리 문학에서 제주가 신비하게 등장하는 만큼, 이 소설 역시 그곳의 향토성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었다. 원문이 궁금해질 정도로 사투리를 실감 나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가 물씬 묻어나온다.
“이곳에 오려고 천 리나 되는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러니 어떤 답이라도 찾아야겠습니다.”
환이의 수사망에는 죄인 백씨, 무당인 노경 심방, 최 목사, 유 선비 등이 잡힌다. 하얀 가면을 쓴 남자라는 단서 하나로 환이는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소녀들은 왜 납치되거나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마치 캐나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작가 허주은이 조선의 공녀 제도에 놀라 이 이야기를 쓴 것처럼 육지에서 제주로 온 환이는 충격적인 수사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이 이 소설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생인 매월과 환이의 관계뿐 아니라 한국의 밖에서 조선의 역사를 바라본 작가의 시선과 환이의 수사는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다.
캐나다의 한국 작가가 쓴 조선의 역사 탐정소설이라는 면에서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독자들에게 해석의 넓은 폭을 제시한다. 권위 있는, 또는 유명한 지면에서 보내는 다양한 찬사를 걷어내더라도, 이 소녀들의 이야기는 마음을 먹먹하게 움직이는 힘 자체로 귀하다. 누군가가 인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홀로 존재했던 이들의 애절함이 절절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소녀들의 삶은 십몇 년의 시간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수히 많이 태어났으며, 억울한 삶을 살고, 어쩌면 그보다 더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이 책은 그녀들을 위한 하나의 제문이자 위령기도다.
갇힌 소녀들을 위해 붓과 사건 일지를 든 소녀 탐정이 종횡 조선 땅을 움직이고 있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듯이, 무섭게 역사를 꿰뚫는 허주은 작가의 더 많은 소설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