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기 전, 단순하고도 명료한 ‘끝’이라는 발음을 곱씹어본다. 무엇의 극단에 종종 서는 사람은 이 말에서 진한 동질감을 느낀다. 끝에서 춤을 추는 행위는 위험하다. 그러나 혹자는 스릴을 느낀다. 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자신을 끝으로 내모는 사람도 있다. 끝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정한 과제가 끝난다면 시원한 동시에 후련하다. 수많은 ‘끝’의 속성 중 지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극단’의 이미지다. 흥미롭게도 누구나 ‘끝’의 속성을 하나쯤 갖고 있다. 어슐러 K. 르 귄의 에세이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언어, 여자, 그리고 장소를 끝까지 몰고 가는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도, 여성도, 장소도 특성의 끝이 있다. 르 귄은 여성 작가이다. 작가는 언어의 여행을 떠나므로 ‘여행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언어든 여성이든 장소든, 르 귄은 극단의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때로 머리가 아프다. 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끝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다. 끝에서만 출 수 있는 춤도 있다. 예술에서 ‘절정’이라 말하는 순간도 끝에 속한다. 예술가로서, 특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르 귄은 어떤 절정의 춤을 추고 있었을까. 작가는 친절하게도 나름의 기호를 붙여 ‘여성(페미니즘)’, ‘세계(사회적 책임)’, ‘책(문학, 글쓰기)’, ‘방향(여행)’으로 글을 분류한다. 관심 있는 주제만 골라 보라는 (또는 관심 없는 주제는 피해도 된다는) 작가의 배려겠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모든 작품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분류가 어디에 있을까. 여성도, 세계도, 책도, 방향도 잃어서는 안 되기에 주제의 분류가 무색하게도 처음부터 책을 쭉 읽어갔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장은 ‘여성(페미니즘)’ 카테고리에서 나왔다. 책을 펴자마자 보이는 「우주 노파」라는 제목의 굴은 여성과 폐경기를 짧게 다루었다. “폐경기라는 저택은 (…) 삶의 필수품들이 온전히 다 갖춰진 집 또는 가정이다”(18쪽)라는 말은 젊은 여성으로서 (부끄럽지만)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완경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를 ‘월경 중단’을 의미하는 원어 ‘menopause’의 의미를 살려 폐경기로 번역했다.) 르 귄은 이어서 “노년기는 처녀기의 회복이 아니라 세 번째이자 새로운 상태이다.”(같은 쪽), “이 여성은 분별, 재치, 인내심, 경험에 의한 통찰을 충분히 지니고 있”(21쪽)다고 말한다. 노년은 ‘쇠하는 시기’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탈피하는 때다.

작가는 알타이르 별의 네 번째 행성에서 누군가 “당신네 종족의 본질을 배울 수 있도록, 지구인을 한 사람 내주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교육을 잘 받고 육체적으로도 절정기에 있는 건강하고 총명하고 용감한 젊은 남자”가 아닌, 그렇다고 “젊은 여자”도 아닌, “60세 넘은 여성”을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역 슈퍼마켓이나 마을 장터”, 또는 “싸구려 장신구 코너”에 있으며 생기가 없고 “영원한 젊음의 비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우주선에 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요?”라며 무척 놀란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건 “나이로비에서 일하는 손자가 담긴 작은 사진”이다. 그녀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그러니까 ‘변화’라는 핵심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행동하기까지” 했다. 물론 설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녀는 지구인의 지혜를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그러니 우주선에 올라요, 할머니.”라는 마지막 문장은 긴 여운을 남긴다. 누구도 노파의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현자도, 과학자도, 샤먼도 노파가 통과한 삶의 두께를 감히 경험하지 못했다. ‘젊은 여성’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한가운데에서 최근 곱씹는 것은 노인의 결이다. ‘노파’라는 호칭에서 오는 바람 빠짐이 좋다. ‘노, 파-하’하고 길게 발음하면 더 잘 다가오는 이 특유한 발음은 먼지를 불어내는 느낌과 같다. 메주의 냄새와도 같다. 오랜 시간 경험한 변화와 새로움을 가다듬고 한데 잘 뭉쳐 오랫동안 묵히면 ‘노파’가 된다. 숙성의 끝에서 노파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속성을 받아들인다. 언제부턴가 나는 끊임없이 노파를 발음하고 있다.

‘여성’ 카테고리의 끝을 ‘노파’로 보았다면 ‘문학’의 끝에서 볼 수 있는 재미난 논쟁도 있다. 시작점에서 3분의 1지점에 있는 「산문과 시의 상호 관계」이다. 산문과 시는 많은 경우 대립항으로 쓰인다. 작가가 든 여러 예시에서 볼 수 있듯, 시와 산문은 오랫동안 이분적으로 나뉘어 왔다. 흥미롭게도 국내 사전에서도 산문의 의미 앞에는 “운문에 대하여 운율이나 정형에 제약이 없는 보통 문장”이라는 마링 붙는다. 시/산문을 구분하는 경계는 명확할까. 흔히 사회 통념상 그어진 모든 경계가 그러하듯,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경계 역시 뚜렷하지 않다. (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문학을 ‘분류’해야 하는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서 약간의 여지를 둔다.)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정의가 시를 표준화할 뿐 아니라 소설, 희곡, 야구 시합과 머나먼 은하에 대한 설명 등 분명히 시와 자유로이 소통해야 하고” “언제나 시와 교류하고 있는 글쓰기의 기대와 기준을 좁히고 낮출” 것이다. (201쪽)

어느 면에서나 정의는 양날의 검이다. 한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호명하는 방식과 태도에 항시 주의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경계’를 만드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문학을 피자 자르듯 자르는 것과 학문적인 단위 생성을 위해 구분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평균 이상의 눈치가 있다면 순문학(또는 본격 문학), 클래식, 주류(主流)라는 단어가 조성할 수 있는 위화감을 알고 있다. 간단한 성질의 차이를 마치 견고한 장벽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시와 산문도 마찬가지다. 문학에는 운율이 있는 산문과 정형에 제약이 없는 운문이 혼재한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태도가 문학의 극단에 필요하다. 통념이 세운 장벽을 허물 때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의 끝에서 산문과 시를 보았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르 귄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의 끝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선두에 ‘환경 문제’를 세운다. 환경 문제는 여러 에코 페미니스트가 선언했듯 여성-자연을 응시하는 관점의 유사성에 기대어 볼 수 있다. 자연은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왔다. ‘품다’, ‘내주다’, ‘포용하다’ 등의 말이 자연의 겉에 덧씌워지는 동시에 사람(man)은 일방적으로 자연(여성)을 착취한다. 동물권 등의 환경 이슈에 여성이 높은 비율로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과 여성은 ‘고통’의 기억을 공유한다.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르 귄은 “생태계”라는 말이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제가 ‘아버지말’이라고 부르는 언어는 (…) 현실에 대한 특권 관계를 주장한다면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 될 수 있어요. 아버지말은 화자들의 지속적인 생태계 파괴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죠.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온 ”생태계“라는 말 자체가 화자를 생태계에서 배제시키고, 궁극적인 무책임을 담보하는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쓰일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말이거든요.” (262-263쪽)

르 귄이 정의한 ‘아버지말’은 남성들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권위와 위계, 힘의 격차에 따른 지배와 종속을 포함한다. 그것은 모국어라고도 불리는 ‘어머니말(mother language)’과는 완전히 반대다.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환경 운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역시 연결(connection)이다. 손과 손을 놓지 않을 때 볼 수 있는 진실이 있다. 다수의 폭력은 단절에서 발생한다. 도살과 양계, 사육을 커다란 장막 안에 넣어두고 외면할 때, 조각난 채 포장되어 나온 어떤 동물의 살을 마트에서 무감하게 고를 때에는 미처 그것이 폭력인 줄 모른다. 심지어 장막을 걷어내려는 사람을 뜯어말린다. 그의 행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장막 안의 진실을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 문을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아버지말이 정의한 자연과 착취, 여성의 연결고리를 매만질 때가 됐다. 르 귄은 1986년,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여성과 자연에 빚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했다. 그로부터 약 3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서로와 가까울까. 오히려 우리의 주변에서 더욱 멀어진 존재는 없을지 돌아보아야 한다. ‘connection’이 가진 힘을 이제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는 여성, 문학, 사회적 책임, 여행 관련 에세이 이외에도 서평이 실려 있다. SF 작가로서의 시점을 유지하며 판타지 작가가 쓴 SF, SF 작가가 쓴 SF, 순문학 작가가 쓴 SF 등을 평한다. 여성 고전 작가로는 도리스 레싱의 작품 평이 두 편이나 실렸다는 것이 뜻밖이다. 르 귄의 평가 역시 흥미롭다.

“레싱은 전혀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다. 오래된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니, 폐기해야 마땅하다. (…) 레싱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레싱은 앞으로 나아간다.”(442쪽)

르 귄은 레싱의 글쓰기가 ‘어색하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시카스타』와 『3,4,5구역 사이의 결혼』을 읽은 르 귄의 반응은 실상 혹독하다. 그러나 르 귄은 레싱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 레싱이 평소의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독자는 레싱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할 때 작가는 발전할 수 있다. 르 귄은 나서거나 물러나지 않고 소설과 영화의 감상을 쓴다. 모든 문장에서 확신이 느껴진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작가의 가능성을 믿고, 작품의 내적 힘을 믿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날카로운 비평이다.

이토록 단단한 생각 위에 글을 쌓는 작가라면, 남에게 해줄 말이 많은 이 작가의 소설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작가와 독자의 의견이 같은 방향으로 흐를 때 오는 희열을 느끼고 싶어졌다. 어슐러 K. 르 귄이라면 가능하겠다.

세상의 끝에 먼저 도달해 춤을 추고 있는 이 작가라면.

-


본 리뷰는 개인 페이지의 글을 전문 발췌했습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10/02/황금가지-어슐러-k-르-귄-『세상-끝에서-춤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