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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평점 :
동화란 무엇일까. 동화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이를 위하여 지은 문예 작품’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동화를 ‘다시’ 읽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위의 정의에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게’ 쓴 이야기다. 동화, 특히 현대에 창작되는 동화는 종종 어린이의 시점에서 사회의 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아이의 시야는 어른의 것보다 넓다. 아이들은 어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 이해한다. 아이는 어른의 상상 너머를 원한다. 지식은 어른이 더 많을지 몰라도, 지혜는 아이들에게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인정받은 이야기는 마땅히 어른들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화'와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창작되었다. 이야기에 시간이 축적될수록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에게 읽히기 적합하지 않은 동화'가 생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낡는다. 가장 최신의 경향과 시각을 반영하더라도, 수십, 수백 년이 흐른 뒤엔 먼지 쌓인 이야기가 되고 만다. ‘고전’이라 불리는 동화에도 아이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거나 비교육적인 내용이 속속 등장한다.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가 대표적인데 『신데렐라』와 『빨간모자』의 수정 전 버전이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또한 『피리 부는 사나이』 역시 한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납치한 남성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그리 교육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동화들은 대부분 현대에 와서 수정되지만, 그저 문제가 되는 장면을 지우는 데에 그친다는 한계를 여전히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상상력을 모두 버리기에는 아쉽다. 옛이야기의 문장에는 당시만의 맛과 멋이 있다. 신데렐라와 왕자의 운명적인 만남, 빨간모자와 늑대가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싫다고 피리 소리를 영영 없애는 건 어쩐지 슬프다. 그렇다면 고전 동화의 상상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멋지게 재해석할 수는 없을까. 아이뿐 아니라 동화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어른도 속이 시원할 만큼 잘 쓰인 재창작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그 대답이 될 만한 책이 있다. 홍콩 출신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의 소설집 『마술피리』이다.
이 책에는 잘 알려진 고전 동화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재창작한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의 독자에게 작가가 던지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거인을 죽인 소년 잭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여자를 잔혹하게 살해한 동화 속 푸른 수염은 현대에 와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을의 아이들을 납치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위의 질문을 토대로 이 세 동화의 ‘뒷이야기’를 상상한다.
『마술피리』에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법학 박사 라일 호프만과 그의 조수이자 하인인 한스 안데르센 그린이다. 한스는 호프만과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이야기의 뼈대가 될 만한 설화나 사건을 수집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유명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것을 상징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한스는 세 개의 소설에서 서술자이자 사건의 전달자 역할을 한다.
한스와 함께 다니는 인물의 소개도 심상치 않다. 법학 박사라는 직함에 걸맞게 호프만 박사는 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실제 또는 가상의 지역에서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인물 간의 이해관계, 역사적 사건을 교묘하게 연결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그에게는 사건에 따라 다양한 성격이 부여되는데 그것이 모여 ‘호프만’이라는 한 명의 인물을 구성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스는 이런 호프만의 곁에서 그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것이 바로 『잭과 콩나무』와 『피리 부는 사나이』이다. (두 번째 소설의 배경 동화인 『푸른 수염』이 빠진 이유는 바로 뒤에서 설명하겠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동화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에 두 개의 동화가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첫 번째 단편인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은 메인 플롯에 동화 『잭과 콩나무』의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고 서브 플롯에 하나의 동화가 더 배치된다. 서브 플롯의 동화는 『잭과 콩나무』처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가의 창작 후기를 통해 설명을 듣자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 두 동화 모두 ‘거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에는 두 개의 동화가 차용되며 이 두 동화의 공통점을 통해 사건이 구성된다.
두 번째 소설인 「푸른 수염의 밀실」에는 동화 『푸른 수염』을 상징하는 인물과 사건이 메인 플롯, 또 다른 동화 하나가 서브 플롯을 구성한다. 이 서브 플롯을 구성하는 동화는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하다. 오히려 『푸른 수염』이라는 제목의 동화가 생소해서 서브 동화가 메인 동화보다 강하게 머리에 남을 정도다. 하지만 창작 후기를 읽어보면 확실히 메인 동화가 주된 이미지로 쓰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소설은 특이하게도 사건이 끝난 이후 한스가 서브 플롯의 동화를 쓰기로 마음먹으며 마무리된다. 작가가 창작 후기에서 “지나칠 정도”라고 표현했듯이 서브 동화가 결말에만 등장하는 감이 있기도 하다. 앞뒤의 소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세 번째 소설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메인 플롯에 삽입했다. 서브 플롯에서는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아주 유명한 동화가 보인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듯이 서브 플롯의 동화도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세 개의 소설 중 가장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세 소설은 메인 플롯뿐 아니라 서브 플롯의 동화를 찾는 재미가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아도 결정적인 암시를 주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 보통의 동화 각색은 하나의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찬호께이 작가는 두 개의 동화를 적절히 배합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세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각 단편은 동화에서 기원한 ‘재창작물’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원작의 근원이 된다는 독특한 구조로 쓰인다. 원형 동화의 원작 사건이 되는 셈이다. 글의 시작에서는 한 동화의 각색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어느새 그 동화의 시류가 되어 있다. 이 아이러니함은 소설을 읽은 뒤의 독자에게 긴 여운을 준다. 끝에서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 소설의 탄탄한 구성에 감탄하지 않기는 어렵다.
존중의 글쓰기
찬호께이 작가는 동화를 존중한다. 그것을 서사 장르의 아류로 보지 않은 동시에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떠오른 질문에 답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창작에 과감했다. ‘존중’과 ‘과감’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어떤 대상을 존중한다면 때로 과감할 줄 알아야 한다. 마땅히 존중하는 이야기에 의문이 생긴다면 그 의문을 풀어내야 한다. 그러나 찬호께이는 과감하기 이전에 신중했다. 이야기와 독자가 모두 다치지 않는 방법을 적절히 골랐다. 그리고 자신이 맞는 길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생긴 뒤로는 매 이야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고증과 창작 과정을 담은 후기를 읽자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나는 이 동화를 얼마나 알고 있었던가.
『마술 피리』는 동화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아이를 위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가 아닌, 현대에 필요한 동화의 재해석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술피리』는 심오하고 치밀하며 사실적인 허구이다. 동시에 누구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작가가 ‘아이였던’ 어른, 또는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선물에는 모름지기 정성이 담겨 있기에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는 정신이 멍해지도록 확실한 한 방을 먹을 것이다.
이 책은 어디에도 ‘소설집’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추리 파일’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어릴 적 보았던 동화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다. 왜 그 인물의 행동이 그러했는지 속 시원히 밝힐 시간이 되었다. ‘지금’의 시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죽이고, 해를 가하는 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방식으로 동화를 다시 풀어 보자.
이 동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