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다른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번갈아 써 나간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가 마지막에 합체된다. -6쪽

서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구조를 알고 들어가면 당황하지 않겠지만 만약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 놀랄 구성이다. 심지어 두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구병모의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와는 그 진행이 또 다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아예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초반에는 거의 접점이 없이 번갈아 나오기 때문이다. 두 인물이 존재하는 세계는 모두 '현실'과는 약간 동떨어져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 책이 정말로 40년쯤 전에 쓰인 것인가,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조밀한 문체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에 대해 조금만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곳에 사는 인물을 A, '세계의 끝'에 사는 인물을 B라고 하면 구분이 좀 쉬울 것 같다. A는 어느 날, 뇌의 '셔플링'을 의뢰한 고객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특이하다. 그를 만나려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를 통과해야 하고 동굴을 지나야 한다. A를 안내하는 노인은 '소리'를 추출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 의뢰인의 건물에 도착하자 '손녀'라고 불리는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데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소리를 '추출' 당한 것이다. '동굴'과 '폭포'는 어쩐지 의뢰인을 특이한 인물로 만든다.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사는 인물처럼 의뢰인을 묘사한다. (실제로 의뢰인은 세상과 동떨어져 '소리 추출'이라는 것을 연구한다.) 의뢰인은 동물의 '두개골'을 수집하고 그것을 두드리면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다.

A는 의뢰인과 엮인 날부터 이상한 일을 겪는다. 덩치가 큰 사람과 '꼬마'라고 부를 만큼 작은 사람이 그의 집에 와서 소중한 모든 것을 부순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여러 위험에 노출된다. 그런 일을 A가 겪는 동안 한쪽에서는 B의 이야기가 동일하게 이어진다. B는 어느 마을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B는 자신의 그림자를 빼앗기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B는 마을의 도서관에서 일각수의 두개골에 담긴 '오래된 꿈'을 읽는 임무를 맡는다. 동물의 두개골에 담긴 '오래된 꿈'을 '읽는다'는 것 역시 보통의 일은 아니다.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은 '보통이 아닌 것들'이다.

평행세계처럼 이어지던 두 공간이 접점을 찾는 것은 '두개골'이라는 소재에서다. 두개골은 신비한 소리를 내거나 '기억'을 담는 물질로 양쪽 세계에서 기능한다. A는 소설의 중후반에서 자신의 세계가 점점 납작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B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A의 위험이 고조될수록 B의 세계 역시 긴장감에 휩싸인다. 전혀 다른 것처럼 시작하지만 연결 고리를 찾아가는 두 세계의 만남을 기대하며 읽으면 좋은 책이다.

'그림자를 떼어낼 수 있다'거나 '소리를 추출할 수 있다', '꿈을 읽는다' 라는 등의 장치는 소설을 흥미롭게 만든다. 두 인물이 소설의 끝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된다는 것은 작품의 초반을 읽으면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일이다. (작가 역시 서문에서 밝힌 바가 있기도 하고.) 이는 자칫 독자에게 '결말'을 예상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고 소설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지루하지도 않고 읽는 도중에 긴장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800페이지의 긴 이야기를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완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세상이 너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이 책 역시 내 마음에 들었다.

'일각수'는 뿔이 하나 있는 동물로 이 책의 표지에 종이로 접어진 모양이 삽입되어 있다. 뿔이 하나 있는 동물은 왠지 신비롭다. 그 동물이 말을 닮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뿔이 하나 있는 말은 동화와 전설 속 동물인 '유니콘'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동물의 두개골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떨까. 일각수의 두개골에서 읽을 수 있는 오래된 꿈은 과연 무엇일까.

전체적인 이야기의 배경 설정은 정말 좋았다. '원더랜드'를 다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책을 추천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이 책을 '재미있는 흉기'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물리적으로 흉기의 몫을 다할 수 있을 만큼 두껍지만, 심리적으로도 위험할 정도의 속도를 느끼며 읽게 된다. 800페이지짜리 재미는 집에 하나쯤 놓아둔다면 충분히 좋을 것이다. 물론 800페이지를 80페이지처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읽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물리적'인 힘이 센 만큼 심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다.

책을 읽은 지 6일째 되는 날. 그러니까 내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완독한 날,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그토록 인기가 많은 작가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앞으로 올해 안에 그의 책을 두 권은 더 읽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지금까지 읽은 책 중 가장 두껍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소설이 이렇게 속도감 있을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작가의 입문용으로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보는 것을 고민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추천해주고 싶다. 일각수와 두개골. 그리고 다른 듯 같은 두 이야기에서 살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읽어본다면 누구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팬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본 후기는 개인 블로그에 업로드한 것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블로그에서 전문 읽기 : https://blog.naver.com/sol_narae98/22203450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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