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안재홍 등이 해방된 그날부터 좌우연합을 추구한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단결하면 강대국의 지원을 경쟁적으로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항상 민족적 위기에 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 나라와 등거리외교를 하면서 좌우합작을 하는 길만이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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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오페라는 광범위한 일반 청중을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전문가들도 매료시켰지만, 바그너와 다른 많은 오페라의 진지함은 대중 연예라는 목적에 맞지 않았다. 그 반작용으로 오페레타에서 보드빌에 이르는 대중 장르들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점차 중요해져 19세기 음악 문화의 상당한 토대가 되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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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이런저런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오페라 레퍼토리로 정착되어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면 새로운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일은 드물었고, 기본 레퍼토리가 잔 세계적으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이 작품들과 오페라라는 매체 자체가 엘리트를 위한 음악이 되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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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적인 고전 레퍼토리의 형성은 1820년대에 막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온전한 효과는 다음장들에서 살펴보게 될 19세기 후반 작곡가들에게서 나타났다. 물론 1850년 이전에도 관현악음악 작곡가들은 옛 걸작의 존재를 강하게 느꼈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관현악 작품은 이전 시대 많은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여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작곡가의 예술적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후대의 모든 관현악 작곡가는 베토벤의 그림자로 인해 괴로워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베토벤의 것과 분명히 비교될 것임을, 따라서 그의 수준에 도달하면서도 뭔가 그와는 다른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19세기 관현악 음악의 역사는 베토벤에 대한 다양한 대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 작곡가는 베토벤이 이룩해놓은 형식 안에서 뭔가 새로우면서 개성적인 것을 나타낼 방법을 탐색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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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은, 비록 시장경쟁에 의해 조장되고 낭만주의적인 천재 개념으로 채색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후 모든 작곡가의 필수 요건이 되었고, 이후 두 세기 동안 대중음악이든 예술음악이든 음악 양식의 급격한 변화에 자극제가 되었다. 실제로 음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낭만 시대의 산물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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