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 알라까르뜨 - 여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38가지 방법
이종은 지음 / 캘리포니아미디어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이국적인 표지 디자인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굵고 큰 필기체로 적힌  ‘트래블 알라까르뜨’ 라는 제목 또한 얼마나 낯설고 이국적인가.  책을 손에 쥐자마자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훑어보았다.  세련되고 럭셔리한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렇게 화려한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책 속 사진들의 배열이 어째 잡지스럽다(?)는 엉뚱한 느낌이 들어서, 솔직히 이 책을 처음 손에 든 첫인상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래도 읽어봐야지. 사람도 속을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듯이, 책도 속을 읽고 나야 그 책을 알 수 있을테니,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  ‘여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넗히는 38가지 방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법은 화려한 첫인상과는 달리 소소하다 할 정도로 작고 소박한, 하지만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소중한 지침들이었다.  처음에 곱지 않은 첫인상 때문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읽기 시작했던 이 책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나 자신을 느꼈고, 마지막 장까지 모두 덮었을 때엔 처음에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보였던 책 속 사진들이 작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애정과 열정, 용기와 모험을 담은 사진으로 달리 보였다.

그저 작가의 여행담을 들었다고 여기며 책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책은 아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행은 영감을 얻게 하고 자신의 세계를 넓히며 성장하게 하는 가장 즐거운 교육’(p.9)이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며 좀 더 융통성 있는 시각과 통찰력을 갖게’하고 ‘나 자신의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며 “새로운 습관을 배우는 습관”을 가질 수 있게 한다.’(p.14)고.  그래서 ‘진정한 모험은 찰나의 놀라움이나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 삶에 적응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p.14)하며 ‘일상을 여행처럼 보낼 수 있는 삶의 방식’(p.15)에 눈을 떠야 한다고. ‘일상의 익숙한 흐름 속에서 변화를 만나고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p.15)이 필요하다고. 

그 말은 곧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되는 ‘여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38가지 방법’은 곧 일상 속에서도 실천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일상 속에서 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열린 사고가 아닐까.

이를 테면 저자가 소개한 열세 번째 방법, ‘감상을 품은 여유 -마음을 이끄는 의자에 앉아 세상의 한 부분을 지켜보자.’ 같은 것.... 내가 낯선 이국의 한 풍경 속에 놓여진 의자에 앉지는 못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흔하게 만나는 많은 의자들, 벤치들, 계단이나 화단 정원석 같은 곳에 앉아 주위의 풍경을 새롭게 만나고 감상할 기회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실제로 나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때론 내 변덕스런 마음에 따라 똑같은 풍경이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내 살갗에 닿는 대기의 느낌, 놀이터를 둘러싼 나무들의 변화, 뛰어다니는 아이들 틈 속에서 종종거리며 아이들이 흘린 과자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참새들, 땀에 젖은 아이들의 이마, 아이를 따라 놀이터에 나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즐거운 수다를 나누다가도 아이의 부름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엄마들의 애정 어린 눈빛들... 그런 것들 또한 세상의 한 부분을 지켜보는 일상 속의 작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니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여행은 수없이 많고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어느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맛볼 수 없는, 내 가족만을 위해 준비하는 우리 집 식탁에서 벌어지는 따뜻하고 단란한 음식 여행, 가까운 미술관으로의 작품 감상 여행, 또는 서툴게 그린 우리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의 여행도 즐거울 것이다.  이국의 음식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요리클래스엔 참가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요리책을 뒤적이다가 마음이 끌리는 새로운 메뉴를 저녁식탁에 올릴 수는 있지 않은가.  또 책 속으로 떠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일상 속의 작고 즐거운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여행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니, 새삼 나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책, 마술 같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단순히 유적지에 눈도장을 찍고 오는 여행이 되지 않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며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고, 늘 되풀이되는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그 일상 속에서 작은 여행을 찾아 즐기며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니까 말이다. 

저자는 책의 끝 부분에서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것 같고 나아갈 대상의 방향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낯선 적이 있는가.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대상, 목표가 존재해야 했다.  그 목표를 갈구 한다고 해도 먼저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목표에는 의미가 있어야 했다.’(p.289) 고 말한다.  낯설고 먼 땅으로의 여행이든 우리 평범한 인생 속 여행이든, 목표를 상실하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이리라.  삶의 방향성을 잃고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채로 맥없이 부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보았다.  저자는 그런 나에게 충고의 말을 던졌다. ‘기다릴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삶의 방향키를 잡다 보면 일상에서도 즐거움과 설렘을 만날 수 있을 것’(p.292)이라고, ‘가장 멋진 이는 열정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p.301)이라고.

이제 내 삶을 문질러 닦고, 풀어진 나사들을 조이고, 눈을 비벼 나른함을 몰아내고 사방을 둘러봐야겠다.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내 주변에 어떤 보석들이 반짝이고 있었는지를 점검해볼 시간이다.  내 마음의 풍경을 담은 그림 한 장, 내가 꿈꾸는 ‘저 너머’를 담은 사진 한 장을 골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은 날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는 나도 정말 떠나보리라 하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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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꼬마 큐레이터 - 우리 아이 미래를 바꾸는 예술교육
이현 지음 / 미진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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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학생인 큰딸 지니는 학교의 체육 수업에 대해 불만이 많다.  음악이나 미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운동신경이 둔한 지니로서는 체육수업에 대한 불만이 가장 심하다. 지니 입에서 불만이 나올 때마다 "즐기지 못하는 예체능"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졌었다.

지난 해 여름,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탕골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다.  티셔츠에 염색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만들고, 현대무용을 관람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보는 춤의 무대였다.  낯설어 하기도 하고, 무용수들의 과격한 몸짓을 보며 어색해하며 웃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을 무대로 끌어내어 함께 춤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마음껏 몸 움직이기를 꺼려했다.  "즐기기"가 서툰 탓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즐기기"는 행동으로 옮기기에 참 어색하고 서툰 낱말인 것 같다. 음주와 노래방 등등의 유흥문화에서만은 예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이 유용한 이유는 예술을 "학습"이 아니라 "즐기기"의 마인드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예체능교육의 그릇된 현실을 꼬집으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이며 미술, 무용, 스포츠에 즐겁게 다가설 수 있도록 부모의 의식을 변화시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미술사를 전공한 까닭에 미술에 대한 설명이 가장 풍부하다.  컨셉을 정해서 아이가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나, 미술전시회에서 아이들에게 '보는 법'을 지도하는 방법, 아이들에게 이미지 읽는 법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보는 방법, 미술관 관람 방법 등, 꽤 폭넓고 자세한 설명과 이미지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멋진 색이나 형태가 아니라 나만의 시각이며 미술이 중요한 것은 잘 그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잘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고 바로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극히 원론적인 주장이 특별한 것이 되는 교육풍토가 아쉽다. 

아이들의 예술 교육을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나처럼 미술이든 음악이든 간에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몰라 엉거주춤 눈치만 보고 있는 어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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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 2007-06-26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책들을 읽으시네요^^전 학창시절 수학보다도 미술을 더 싫어했어요..손재주가 없어서 손으로 뭘 만드는 건 늘 서툴었거든요. 미술선생님께서 제 그림을 보시며 저를 혼내셨던 기억이 나네요..쩝...못 그리는 건 죄가 아닌데, 그쵸? ^^;;; "즐기기"였다면 저같이 재주없는 아이들이 미술시간을 좋아라 했을까요? 하얀 스케치북을 보면 막막했었는데, 저 곳을 다 글씨로 채우면 안되나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었죠^^보라색 구절 정말 맘에 확! 와닿네요^^

섬사이 2007-06-26 08:46   좋아요 0 | URL
저는 체육을 가장 싫어했었어요. 운동회날은 우울한 날이었죠. 그 유전자를 아이들도 똑같이 물려받은 것 같아요. "공부"가 아니라 "유희"였다면 저도 체육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전 지금도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아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월드컵 시즌은 저에겐 고역이에요. ^^

홍수맘 2007-06-26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예체능 쪽엔 영~ 아닌지라 홍/수에게도 어떻게 접근시켜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저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네요. 감사해요.^^.

섬사이 2007-06-27 06:30   좋아요 0 | URL
뭐든지 너무 "억지로" 몰고 가진 않으려고 하는데, 사실 "억지로" 말고는 어떤 방법이 있는 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거기다 애들마다 취향이 다르기도 하구요. 엄마노릇, 때론 참 힘들어요. 그쵸?

hnine 2007-06-2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이 저자, 매력있어요. 책과 관계 없는 얘기이지만... ^ ^
미술에 얽힌 일화가 저도 많아서 페이퍼에도 올린 적이 있는데, 너무 틀에 박힌 방식으로 아이들의 창의력마저도 몰고 나간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은 여러 가지 미술 활동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깨어있는 엄마들의 노력의 결과인지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지요.

섬사이 2007-06-27 06:3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이들의 창의력이 오히려 제도권 교육 안으로 들어가면서 빛을 잃는 경우가 많은 것 같기도 하구요. 유치원 때까지 잘 그리진 못해도 재미있고 특이한 그림을 그리던 뽀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그 특유의 그림풍을 잃어버려서 참 안타까웠어요.
학습, 공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과 감상을 즐기는 예체능 교육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죠. 학교에선 일단 모든 게 성적과 밀접한 관련을 갖다보니.. -_-;;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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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에 걸친 시기에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프랑스와 케냐, 그리고 인도와 티베트를 꼽았었다.  왜냐고 이유를 물으면, 나는 프랑스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예술을 보고 아프리카의 케냐에서는 사바나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야생의 세계와 원시의 색을 만나고, 끝으로 인도나 티베트에서 인간의 내면,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아마 그 나이쯤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뻔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이제 젊음의 시기를 지나서 그 시절의 내 대답을 떠올리면, 난 그 때 여행을 꿈꾸었던 게 아니라 낭만이나 멋을 부리려 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꾸었던 그 곳에 내가 발을 딛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질만큼, 그 시절 나의 대답들이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어떤 특별한 장소에 대한 여행정보나 유적에 대한 느낌, 우리와 다른 문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저자가 "여행은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다."라고 했듯이 책 속에는 나라를 잃은 티베트 사람들의 딱한 처지가 담겨 있기도 하고, 중국에 정복된 티베트의 실상들도 적혀 있다.  중국에 의해 변질되고 있는 티베트의 그 맑고 순정한 영혼의 세계가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티베트 현실의 끝이 너무 위태롭고 날카로워서 소파에 편히 앉아 책을 읽는 내 처지가 안온하다 못해 늘어진 엿가락처럼 느껴지곤 했다.  또 책 속에서, 중국의 거센 중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만의 순정한 영혼은 침범당하지 않으려 하고 자비와 헌신의 티베트 고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티베트인들을 만나는 순간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모든 여행은 자기를 찾아가는 순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고, 숭고한 자연 앞에 겸손을 배우고, 역사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듣고, 현실의 회한을 가슴으로 싸안으면서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한 걸음을 옮기는 것. 

저자는 책에서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신성한 산이나 호숫가라고 다르지 않"(p.336)고, "풍경은 당신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p.335)한다고.  그러고보면 우리의 순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옳다. 여행과는 달리 순례에는 고통이 따른다.  저자는 고산병에 시달리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고, 입술에선 고름이 터지고 피가 맺히는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그 뿐아니라 중국공안의 검문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야 했고 가슴 아픈 현실 깊숙한 곳까지 스스로 걸어들어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종국엔 "오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인간을 이해하듯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나라고 불리는 존재임을."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나는 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갈 수도 있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 친구들의 목숨을 건 탈출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뜨거운 우정으로, 영혼의 성지인 티베트를 순례하고 싶다는 타는 갈망으로 순례의 길에 오른 저자는 그 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 이해하고 돌아온 것일까.  그래서 나를 향한 내 눈빛이 한없이 온유해질 수 있고, 나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타인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된 걸까. 

나는 어떤 갈망과 뜨거움으로 순례의 길에 오를까.  어떤 열기로 내게 주어지는 고통들을 녹여내고 어떤 기도와 성찰로  담금질할까. 나태해지고 싶을 때, 한없이 늘어져 안온함이 주는 편안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인생이 뭐 별거냐 싶게 심드렁해질 때, 내 앞에 놓인 여러가지 가치들의 선택을 두고 갈등하게 될 때, 그 갈등이 버거워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싶어질 때, 타인이 내두르는 편견과 아집의 잣대에 맞아 시퍼렇게 멍들 때, 미움이나 절망같은 감정에 기운을 모두 소모하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옹크린 채 꼼짝하기 싫을 때, 내가 순례의 길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마음의 여유와 길고도 먼 시각을 가다듬게 해 줄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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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8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18 10:05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도 님의 결고운 감수성이 작용한 것 같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마음을 담아 읽어주셔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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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 고미숙님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나에게 연암을 그토록 생생하게 소개해준 데 대하여, 나의 무식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개선해준 데 대하여 감사해야 마땅할 것이다. 

저자의 친절함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연암은 내게 아득히 먼 존재로만 여겨졌을 터이고, 연암에게서 매력을 찾아내고 그 매력에 빠지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을 터이다.  연암의 인간적 면모와 철학적 사유, 그 유쾌하고 호탕한 nomad와 '백탑의 청연'으로 대표되는 벗들과의 우정연대, 그의 거침없고 막힘없는 삶의 필적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가까이에서 연암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연암의 호모루덴스적인 유쾌한 필담들만큼이나 저자의 입담도 유쾌하다. 하긴 유쾌한 연암에 대한 이야기를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의 틀을 가진 사람이 펼쳐간다면 그 또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라 할만 하다. 

얼마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고미숙님이 펴낸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미진하게 느꼈던 부분들이 이 책을 통해서 많이 해소되었다.  <열하일기>라는 텍스트 분석 자체보다는 <열하일기>를 통해서 연암이라는 인물분석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은 것을 토대로 한다면 <열하일기>라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저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책이다.  우선 책의 말미에 엮어진 부록 부분.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 뿐만 아니라 저자가 연암을 설명하면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담겨 있다.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개념 용어들(기계, 되기, 리좀) - 난 현대철학에 대해 문외한이다. 다른 시대의 다른 철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  그리고 nomad(이 용어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애용되는 걸로 봐서 이제 일반상식 수준의 용어가 된 것 같다)라든가, 클리나멘(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사용한 개념이라고 한다), 홈패인 공간매끄러운 공간 같은 용어는 무척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뿐아니라 다른 책들에서도 종종 마주치곤 하는 용어들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개념정리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부분은 연암과 다산을 비교한 보론 부분이다.  동시대를 살았고 연암과 다산, 그 둘 모두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인물이었으며 중세적 담론 외부에 있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을 뿐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평행선 같은 존재였음을  설명하는 글에서 나는 획일의 시대로만 여겨졌던 조선시대에 서로 다른 향기와 모습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아  흥분되기도 했었다. 

단지 내가 모를 뿐이었다.  나의 얄팍하고 보잘 것 없는 지식의 범주 안에서 연암과 마찬가지로 다산이든 유성룡이든 그 누구든 빛도 잃고 향기도 없는 지나간 시대의 지나간 인물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에 빗대어 말한다면, 난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연암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자 연암은 나에게로 와서 향기와 빛깔을 가진 꽃이 된 셈이다.  연암 - 독특한 향기와 개성적인 빛깔을 가진 아주 매력적인 꽃임에 분명하다.   그를 알게 되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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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5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2007-05-2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5-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를 읽기는 부담이 이고 해서 선뜻 먼저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답니다. 읽고 연암관련 책을 더 읽어봐야지 하고 결심도 했었는데 어찌어찌 흐지부지 되어 버렸네요. 님의 리뷰를 계기로 다시 차근차근 챙겨봐야 겠어요.

섬사이 2007-05-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무척 인상깊은 책이에요. 저는 요즘 우리 나라 옛것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그 관심이 또 얼마나 길게 갈지 모르겠지만요..^^

홍수맘님, 님도 읽어보셨군요. 옛사람을 따라 흘러가는 책읽기도 꽤 멋졌죠? 저자의 가이드 역할이 무척 능숙한 탓이 크겠지만요.

알맹이 2007-05-2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저도 연암에 관심(만) 많은데.. 읽어보고 싶네요;;

섬사이 2007-05-29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디뽕님, 읽어보시면 님도 연암에게 빠져들걸요? ^^

fallin 2007-05-3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해두었다가..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쉬워보이진 않네요 ^^;;;

섬사이 2007-05-3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알아먹겠다 할 정도로 아주 어렵지도 않아요. 저자가 워낙 설명을 재밌게 잘 해놓은 것 같아요. 웬만한 용어해설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책 뒷부분에 나와 있기도 하구요. 음.. 징검다리 같은 책이라고 해야하나.. 철학이든 고전이든 어느 쪽으로든 관심을 뻗게 만드는 징검다리 말이에요.^^

비로그인 2007-06-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요즘 섬사이님 리뷰 너무 좋아요~ :)

섬사이 2007-06-0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고맙습니다. 꾸벅~

프레이야 2007-06-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굿모닝!
땡스투 하고 담아갑니다.^^ 전부터 미뤄뒀던 책인데 님의 리뷰를 보니 확!

2007-06-07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닉네임을 바꾸셨네요? 바꾸었다기 보다는 성을 떼고 이름만 쓴 건데도 분위기가 확 다르게 느껴지네요.^^ 책이 혜경님 마음에 들기 바래요.

속삭인님,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시네요. 건강 챙기는 거 잊지 마세요. 과로는 만병의 근원이라구요. 이 책이 님에게도 유익한 책이 되길 바래요.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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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이 유행이다.  책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과학과 요리가 만나기도 하고, 예술과 역사가 만나기도 하며, 동화와 철학이 만나기도 한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도 이런 퓨전도서(이런 명칭이 있는지 모르겠지만)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서 철학을 이야기 하는.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 강의를 듣고, 몇 번 쯤 <인간본질에 관한 일곱가지 이론>이라든가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등의 철학 관련 책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그 얄팍함이 어디가랴.  대학을 졸업하고 15년을 훌쩍 넘겨버린 시점에서 철학을 논하던 교수님의 카리스마 넘치던 강의도 친구들과 모여 앉아 강독했던 책들의 내용도 흐릿한 윤곽만 겨우겨우 막연하게 떠오를 뿐이다.

이제 한 번 덤벼볼까 하는 용기마저 꺾여버린 듯한 상황에서 "철학은 몰라도 영화얘기라면 혹시?"하며 겁도 없이 덥썩 잡은 책이다.   당연히 저자가 책을 통해서 말하는 철학에 관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할만큼의 철학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이 리뷰는 극히 내 개인적인 느낌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저에 깔아둘 수밖에 없다.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이 책의 장점은 내 일상의 삶에서 잠시 물러나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지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가 나의 미래와 현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그리고 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삶에 대한 나의 인식에서 잘못된 부분은 무엇인지.

내게 철학은 이론이었고, 철학자 그들만의 심오한 사상이었고, 삶과 동떨어진 난해함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비추는 철학이라는 거울을 보게 된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이 이 책을 쓴 저자가 철학을 솜씨좋게 풀어간 덕분인지, 아니면 더께더께 쌓인 나이만큼 내 삶의 품이 조금은 더 넓어진 덕분인지, 아니면 그 둘 다 때문인지 그건 모르겠다.  피타고라스의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한 정의, 파이어아벤트의 왼손잡이의 예술에 대한 논의, 공자의 화이부동과 동이부화의 가르침, 하이데거가 말하는 '있음'과 '있는 것'의 차이,  니체의 춤과 망각과 기억, 실존에 대한 외침, 포스트모더니즘의 '바깥'과 유목민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주장...  이 책에 소개되는 철학적인 논의들이 내가 받아들일 수있는 만큼의 크기와 깊이로 다가오는 것이 기뻤다.  

철학은 사람을 철들게 하는 학문일까?  나를 향한 시선과 타인과 세상을 향한 시선을 억지스럽지 않게 조율해주고 그리하여 나와 세상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학문은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까지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으로 점점 근시안이 되어가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넓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의 탁트인 시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다시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더 넓어진 시각 안으로 내 삶과 세상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그런 것... 치열하게 살지만 너무 매이지 않게 해주는 어떤 것...

책이 나를 선동하고 좌지우지하려는 듯한 느낌의 자기계발서들보다 훨씬 더 사려깊고 지혜로운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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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미있게 봤어요. 영화와 함께 저자의 철학적 해석이 괜찮더군요.
철들게 하는 학문, 맞는 것 같네요^^ 전,아직 멀었지만요.

섬사이 2007-05-0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저도 까마득하답니다. 물리적 나이와 심리,정신적 나이의 격차가 심해지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는걸요. 배혜경님은 우아하신줄만 알았더니, 겸손하시기까지.. 배혜경님을 통해서 아직도 저의 갈 길이 멀었음을 또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ㅠ.ㅠ

알맹이 2007-05-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적 나이와 심리,정신적 나이의 격차가 심해지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는걸요 -> 이거 정말 제 얘기에요 -_-;; 이 책 찍어두고 갑니다~

섬사이 2007-05-0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디뽕님, 물리적 나이와 심리,정신적 나이의 격차가 생기는 거, 인생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카프카의 변신을 예로 들면서요. ^^

fallin 2007-05-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이 말에 혹해서 주문합니다^^ 근데 제겐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그런 책인 거 같아요. 아직은 쌓인게 없어서^^;;;

섬사이 2007-05-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lin님,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제 서재에 오셔서 댓글까지 남겨주시니 감사해요. 저도 오랜만에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을 읽은 건데 다른 철학책들에 비해서 받아들이기가 수월하더라구요,. 물론 어려운 부분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영화 속 인물들과 줄거리와 연결되어 설명되니까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웠던 것 같아요. 님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