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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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펼칠 때 나는 색연필과 노트, 삼색볼펜을 함께 준비했었다. 좀 골머리가 지끈거리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속속들이 파헤쳐가며 읽을 매혹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 시절 셰익스피어 전집에서 몇 권 골라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영 불안하고 작가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론할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을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처음엔 노트와 볼펜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색연필도 팽개쳐버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일대기에 대한 예찬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작가가 신비주의 연구가(칸트나 괴테가 근세 신비주의 운동으로 태어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근거부족이 신비주의 탓은 아닌 것 같지만) 라서 그런지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없다’라는 폭로성 발언을 뒷받침할만한 논리적 근거도 빈약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캐낼 수 있다는 암호들의 해독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불충분하다.

베이컨학파의 주장과 정황상의 추측에 의존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점성술과 탄생별자리, 초신성을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동방박사를 인도했다는 베들레헴의 별까지 거론하며 그것이 베이컨의 천성적인 위대한 재능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켜세울 때는 오히려 저자의 글에 대한 반감이 밀려들었다.

흥미만을 기대한다면 그리 기대를 저버리는 책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당시의 영국 왕조(헨리 8세에서 찰스 1세까지 이어지는)와 사회를 무대로 암투와 비리, 부정과 비밀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처녀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갈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 또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매한 인격과 천재적인 재능과 군계일학과 같은 귀품과 높은 지식을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냈고, 그런 비운의 사실들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빌려 출간한 작품들 속에 암호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사이비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책에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어떤 서점에서는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기도 했다.  차라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면 얻은 게 많았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주민 대부분이 문맹이며 사투리를 사용하는 스트랫포드의  에이번 마을 출신이라서 ‘교육과 교양과 학식의 뿌리가 스트랫포드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p.31) 주장을 폈지만 정설로는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은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고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스트랫포드  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었다고 하고 있어 이 책의 저자의 주장과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상반된 하나의 예를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설을 기본으로 바탕에 두지 않고 이 책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현명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프랜시스 베이컨을 셰익스피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안 것, 근세철학의 한 줄기라고 할 수 있는 경험론의 주인공 베이컨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에 실망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400여 년의 내공을 쌓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데는 그 작가가 셰익스피어건 베이컨이건 그다지 크게 상관할 바 없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셰익스피어 혹은 베이컨의 <겨울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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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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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여유를 갖게 되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그런데 그 관심의 방향이 ‘맛’이나 ‘영양’보다는 ‘안전’과 ‘건강유지’ 쪽으로 비중이 옮겨간 듯 보인다.  채소나 과일을 사면서도 농약이 너무 많이 뿌려진 것은 아닌지, 윤기를 더하기 위해 왁스를 바른 건 아닌지, 쉽게 상하지 말라고 약품처리를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이런 갈등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잡식 동물의 딜레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처럼 식용가능의 여부나 독성물질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여전히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은 원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산업음식’의 등장으로 인류가 섭식장애라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보고,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식탁까지 연결되어 있는 음식사슬을 추적한다.  우리의 식탁의 시작인 ‘그 어딘가’를 저자는 ‘산업적 음식’‘전원적 음식’, 그리고 ‘수렵,채집 음식’으로 나눈다. 

‘산업적 음식 사슬’로는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단일재배농장을 시작으로 공장형 농장을 거쳐 맥도널드 햄버거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으며, '전원적 음식사슬‘로는 산업적 유기농식품과 로컬푸드 농장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을 체험하고 친한 벗들과 함께 손수 요리한 음식을 즐기며 끝을 마감하고 있다.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서는 저자는 야생돼지 사냥과 버섯채집에 나서고 수렵과 채집에 도움을 준 지인들과 야생돼지고기 요리와 채집한 버섯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이러한 저자의 열정적인 추적과 몸을 사리지 않는 체험담은 오늘날의 잘못된 음식의 위험을 경고하는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을 단연코 돋보이게 만든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 철학적 사유들은 무척 객관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어 이 책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꽤나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로 뻗어가고 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매력은 더욱 짙어져갔다.

산업적 음식사슬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었으나 옥수수의 어마어마한 쓰임새에는 입이 쩍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슈퍼마켓에는 약 4만 5천가지의 물품이 있는데, 그 중 4분의 1이상에 옥수수가 들어있다‘(p.35)고 한다.  콜라에 설탕이 잔뜩 들어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나는 1984년에 코카콜라와 펩시가 모두 설탕을 값싼 고과당옥수수시럽으로 대체해버리면서 가격을 낮추는 대신 8온스짜리 코카콜라병을 모두 20온스짜리 병으로 바꾸었다는 글에서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슈퍼에서 가공음식을 아무거나 들고 보면 고과당이니 액상과당이니하고 표시되어 있던 게 바로 설탕이 아니라 옥수수였던 거다. 그것도 유전자 조작 옥수수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도 없는..

이러한 산업적 음식사슬은 효용과 군산복합체의 이윤을 가장 중요시 한다.  효율과 생산성은 오직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느냐는 기준으로만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식물이든 동물이든 산업적 음식사슬에 엮이기만 하면 그것은 저마다의 본성을 간직한 생명체가 아니라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계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런 산업적 사고방식 때문에 돼지는 꼬리를 잘리고, 산란계들은 부리를 잘리며, 소들에게는 억지로 옥수수를 먹이며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투여되고, 비싼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적 유기농 식품은 어떨까?  저자는 ‘전원적 음식사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산업’이라는 말과 ‘유기농’이라는 말이 애초에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못박는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목가적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직접 산업적 유기농 농장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거기엔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던 유기농 농장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유기농 식품을 선택하는 것으로 적어도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 등의 사용을 줄이는 효과는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로컬푸드’라는 ‘초유기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형태를 제시한다.  저자 마이클 폴란은 직접 폴리페이스라는 농장에서 일주일간 일을 하며 로컬푸드를 체험한다.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광으로 음식사슬의 처음을 장식하는 농장,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존중하는 경영방식, 자연 생태계의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이 보존되는 그 곳은 나에게 꿈의 농장으로 다가왔다.  ‘로컬푸드’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듯이 이 꿈의 농장에서 재배되는 것들은 산업시스템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퍼마켓에 가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농장에서 계란이나 닭고기를 사기 위해 구매할 수 있는 정해진 날에 맞춰 차를 타고 손수 달려오는 수고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우리집 현관문 앞까지 배달되는 일은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로컬푸드를 선택하는 것은 환경과 자연,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의사표현이며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한편으로 미국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로컬푸드가 좀 더 잘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어쩌면 한미FTA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것들 때문에 상처받은 우리 농민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설픈 상상을 펼쳐보기도 하고,  싼 산업적 음식과 조금 더 비싼 로컬푸드 중에서 과연 나는 한 점 망설임 없이 비싼 로컬푸드를 선택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수렵,채집 음식사슬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바로 2,3년 전쯤에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의견에 저자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수렵에 대해서 나는 꽤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저자의 사냥 경험담을 읽으며 나의 시각을 많이 조정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냥을 멋진 일이라고 추켜세울 수는 없지만 사냥의 과정에서 그 대상이 단순히 우리의 배를 채워 줄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훨씬 고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마치 지능적이고 잔인한 범죄자와 그를 쫓는 열정적인 형사의 관계처럼 서로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채 키워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축당하는 가축들보다 사냥에 희생된 동물은 훨씬 더 동물의 본성에 가깝게, 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섯채집에 대한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저자는 버섯을 사냥(저자는 ‘사냥’이라는 말을 쓴다.)하기 위해 숲 속을 헤매다 보면 ‘누구든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경관, 새로운 향기, 새로운 맛이라는 극사실적인 감각들과 함께 완벽한 존재의 가벼움은 느낄 수’(p.486)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렵과 채집을 통해 얻은 것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대가 없이 주어진,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에 가까웠다.’(p.490)고 고백한다. 

끼니마다 음식을 먹으며 놀랍고 설명할 수 없는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즐겁지 않을까. 수렵과 채집은 가장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생활형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정신적인(?) 섭식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을 우리들의 Comfort food로 만들지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몫이다.  나는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살짝 살얼음이 낀 식혜와 얼갈이가 섞인 개운한 열무김치가 떠오른다.  지금도 맛있는 식혜와 열무김치를 먹으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입안 가득히 퍼지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무엇을 자신의 Comfort food로 떠올릴지.  혹시 맥도널드 햄버거나 신라면, 혹은 도미노피자 같은 것들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저자는 말한다.  ‘아마도 완벽한 식사는 완전히 보상을 지불하고 빚을 남기지 않는 식사일 것이다.’(p.516)라고.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p.518)라고.  오랫동안 되새겨볼 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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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수수께끼 - 흥미진진한 15가지 쟁점으로 현대에 되살아난 중국 역사
김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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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는 긴 역사와 넓은 땅, 그 안에서 격변의 소용돌이가 불 때마다 명멸했던 수많은 왕조와 제왕들 덕에 우리 역사와 긴밀하게 얽혀있음에도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고, 그 광대함에 멀미가 난다.  그러면서도 관심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중국이 이제 그 이름에 걸맞게 세계의 중심이 되어버린 듯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입지를 흔들 지구상 유일한 국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고 게다가  동북아 공정이니 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제 중국이 우리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고.. 

이런 저런 이유로 중국에 대한 책이 나오면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EBS에서 ‘사기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던 김영수 님이 쓰신 책이라는 데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흥미진진한 15가지 쟁점으로 현대에 되살아난 중국 역사’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글쎄, 단순히 ‘흥미진진’하다고 보기엔 생각보다 무겁고 진지하다고나 할까?  나처럼 중국의 역사를 좀 가볍고 재미있게 만날 생각으로 대했다간 얼마 못 가서 잘못 짚었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다루고 있는 열다섯 가지 주제들과 그 내용들이 꽤 묵직하다. (물론 내 짧은 역사지식과 한참 모자라는 지적 한계 탓이 가장 크다.) 그 묵직한 무게만큼 읽고 난 뒤에 남겨지는 가치도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서문에 쓰인 ‘우리 역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라도 각 장면 장면이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하고, 시대를 읽는 깊은 통찰력을 기를 수 있게 돕는다. 
역사는 단순히 교훈만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성의 기회를 주고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며,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하는 수준 높은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자극제가 된다.‘ 라는 글처럼 중국의 역사를 통찰하면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반추해보게 된다.  역사는 단순히 앎에 머물러서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 역사와 현재의 가치가 함께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열다섯 가지의 주제를 통해 중국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고 오늘날의 우리를 반성하고 고민하는 이 책은 참 착한 역사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이라는 요,순 선양의 비밀에서는 그 감춰진 이면의 진실에서 권력의 위선을 실감하며 씁쓸했고, 절대적인 권력을 쥔 중국 역대 제왕들이 자기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정도를 벗어나 멸망을 자초하는 모습에서는 권력의 위험과 더불어 절제와 균형이라는 쉽지 않은 덕목의 중요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송태조 조광윤과 공명정대하고 청렴하고 유능했던 제갈량, 진시황의 발굴을 일언지하에 반대하며 소신을 밀고 나간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이야기는 선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찍어줄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나에게 막연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동방의 폼페이라는 나가촌 유적 이야기에서 어머니와 아이가 꼭 끌어안고 죽은 유골 사진 앞에서는 4000년 전에 아이를 안고 죽은 그 유골의 주인인 여인과 못 말리는 모성의 공감이 일어나 울컥, 콧등이 시려왔다.  약 2,200년에 걸친 중국 운하의 역사와 제왕들의 치수에 대한 노력은 그 자체로 장대하고 웅장한 한 편의 서사였다. 

이제 중국은 거대하고 막강한 힘으로 하상주단대공정에 이어 동북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 등을 통해 중국사 다시 쓰기를 진행 중이다.  문제는 그 ‘다시 쓰기’ 작업에 자국에 유리하도록 변형된 왜곡과 끼워 맞추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 게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에 비해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둘러싼 논쟁이 일제시대 이후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고, 아직도 식민사관과 반도사관, 집단 이기주의, 심지어 종교적 편견과 독선 등에까지 발목을 잡혀 우리 역사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암담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는 드라마 ‘태왕사신기’로 맞설 것인가, 배용준의 수려한 마스크로 중국의 잘못된 동북공정을 반박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진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의 뿌리가 썩둑 잘려나갈까 두렵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는 속담이 쟁쟁 울려온다.  눈 부릅떠야 할 세상인데, 어째 눈을 뜨거나 감거나 안 보이는 건 똑같다는 이 대책 없는 무력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래도 요즘 신문이며 TV며 하다못해 동네 담벼락까지 점령한 그 분들에게서 우리의 밝은 미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하거나 지켜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굳이 오늘날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이 핵무기가 아닌 역사를 무기로 들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송두리째 왜곡하거나 말살할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에 더 무섭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p.265)

어쨌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는 모든 일들을 우리 손으로 해 나가야 할 때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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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화의 수수께끼 - 아주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
조현설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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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나온 ‘한겨레 옛이야기’시리즈를 2003년 1월에 구입했었다.  어린이 대상으로 쓰인 우리나라 신화와 민담, 전설에 대한 책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15권을 한꺼번에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내가 아끼는 책으로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책들에게 내가 마음을 빼앗겼던 이유는 건국신화나 시조신화만이 우리 신화의 전부인양 여겨지고 있던 때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대별왕 소별왕, 바리데기, 한락궁이, 황우양씨와 막막부인, 오늘이, 궤네깃또, 자청비 등등의 무속신화를 소개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만화책이 한창 유행을 하고 있었던 터라 더욱 반갑고 예쁜 책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아이들을 위한 우리 고전과 신화에 관련된 책들이 꾸준히 출판되어 나왔던 것 같다.

우리의 다양하고 정겨운 신화들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화가 감추고 있는 상징과 비밀들을 덮어두고 재미있는 옛이야기로만 알고 지나간다는 것이 자꾸 개운치 않아서 누군가 내게 신화의 비밀을 풀어 설명해줄 책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책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단군신화에 대해서조차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단군신화 속 웅녀와 연결되는 곰나루 전설과 에벤키족의 웅녀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여성신의 타자화, 주변화에 대해 안타까움이 일었다.  게다가 단군을 낳은 것이 웅녀가 아니라 백호라는 신화도 존재하고, 환웅의 남근이 너무 길어서 다른 동물들이 모두 마다했는데 오직 곰이 환웅을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다소 민망하고 황당한 설화도 있다고 하니(물론 신화에서 표현되는 거대한 남근은 처음엔 창조신의 상징이었다가 국가권력의 상징으로 변형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도대체 잊혀진 우리의 신화와 전설, 민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싶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신화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에만 18000여 명의 제주신과 500여 편의 신화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건국신화나 시조신화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인 셈이다. 이 책 안에서 새롭게 만난 신화와 전설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알고 나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문명화된 세계에 대한 비판, 여신의 역사적 패배와 소외로 인한 주변화, 남신의 수렵문화와 여신의 농경문화의 만남과 충돌, 왕권의 정당화와 강화를 위한 신화의 변용, 남성 중심 문화로의 변모 등등의 속내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원래 시를 공부하다가 신화를 만났다고 한다.  ‘시적 상상력과 신화적 상상력, 시적 사유와 신화적 사유가 둘이 아님’을 알고 신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30개의 챕터마다 마지막 부분에 본문에 나온 신화나 전설 등을 간략하게 실어주기는 했지만 우리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알고 있어야 읽기가 더욱 수월할 것 같다. 게다가 몽골과 시베리아,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등지의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이 얽혀 들어가 있어 저자가 우리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여유는 없는 듯 보인다.  따라서 <살아 있는 우리 신화>(신동흔 저, 한겨레출판)이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서정오 저, 현암사), <왜 우리 신화인가>(김재용,이종주 저, 동아시아)등등의 우리 신화를 소개한 책들과 함께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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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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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팔레스타인 난민인 영화감독 미셸 클레이피는 “노스탤지어는 우리에게 하나의 무기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때의 ‘노스탤지어’는 회고 취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권력자나 강자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라’는 틀에 박힌 말로 자신의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감추고, 부당한 권익을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노스탤지어’란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정신을 가리킨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쓴 동기이기도 하다.  (p.5)

이 책에 담긴 49명의 사람들 중에는 낯선 인물들이 꽤 많았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일본인들의 이름과 삶은 오직 식민시대의 가해자로만 여겼던 내게 무척 의외의 것이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로 살해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알고 있었지만 정치범 수용소로 변해버린 칠레 스타디움에서 저항의 노래를 부르다 끔찍하게 살해된 빅토르 하라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인물들 중에서도 김구, 안중근, 윤동주, 홍범도, 김지하, 박노해, 윤이상 등등은 낯이 익었지만 B,C급 전범으로서 사형을 당했던 조선인 전범 조문상이나 박정희의 독재와 맞선 어머니 오기순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이 책에는 강자, 권력자, 정복자들이 그려놓은 역사의 물줄기에서 함께 흐르기를 거부하고 가라앉아 버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담겨있었다.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49인의 생애가 대여섯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읽다가 갑자기 삶이 왜 이리 서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과 체제, 전쟁과 폭력의 횡포 속에 내동댕이쳐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내려 했던 정신의 영롱함과  이상의 견고함이 슬프고도 서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책에 ‘묘비명’처럼 기록된 사람들의 핏빛 선명한 삶과 죽음이 과거의 틀 속에 고립된 채 현재로 흘러들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불하고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꼬여만 가는 듯한 세계, 드러난 상처들의 치유방법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듯한 오늘날의 모습이 이 책에 담긴 49인의 생애 앞에 부끄럽고 민망하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49인.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의지마저 박탈당한 죽은 자들이다.  그들이 사라지고 사라지지 않고는 그들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어쩐지 섬뜩하다.  역사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인물들 중에는 저자의 말마따나 남겨진 기록이 전무한 말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계속 가라앉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은 분명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퇴적은 언젠가 강물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는 희망을 믿고 싶다.  저자가 말한 무기로서의 노스탤지어는 그 때를 앞당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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