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어린이/청소년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새 5월이 다 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등성이마다 연두빛 새싹들이 보드라운 솜털처럼 느껴지더니 이젠 수탉의 억센 깃털처럼 강하게 빛나고 있다.  책만 읽으며 지내기엔 어쩐지 아까운 시간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를 걷고,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나누고 싶은.  봄치고는 비도 자주 내렸지만, 그 비도 마냥 고운 비도 아니고 음모의 그늘이 드리워진 듯한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그런 비였지만, 그래도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고도 싶어진다.  

그래도 책의 유혹은 강하고, 읽어야 한다는 근거없는 사명감은 또 뭐냐.  새로 나온 책들 사이를 기웃거리며 마음이 가는 책들을 뽑아본다.  조금 피곤하고 지치는 요즘이지만, 내가 피곤한 건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만큼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내가 잘 견디고 있기 때문이라고.

  

 1. 경극이 사라진 날

<꽃할머니>,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등에 이어 나온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시리즈 네 번째 권이자, 중국의 첫 번째 작품이다.  미리보기를 보니 전쟁을 담은 평화 이야기가 의외로 잔잔하게 진행된다.  아이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게 있다면 그 중 하나가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소중한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전쟁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저하는 책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긴 하다. '난징 출신의 작가 야오홍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중일전쟁 이야기, 좁혀 말하자면 1937년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난징대학살’이 자행되기 직전에, 일본군이 난징 진입을 위해 감행한 공습 전후 보름여 간의 이야기'이며 '전쟁의 참상과 만행을 고발하기보다, 그로 인해 파괴되고 죽어간 소박한 일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꼭 읽어줘야 할 것만 같다.

 

  

   
 2. 내가 사는 곳은 바로 여기!

지난 달에도 지리에 대한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달에는 지난 달에 뽑았던 책보다 좀 더 어린 유아에서 초등 1,2학년이 읽을만한 지리 이야기 그림책이 나왔다.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넓은 세상 안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따라서 우리의 삶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사는 곳, 그 위치라는 게 사람들이 만들어낸 행정구역 상의 명칭들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크게는 지구, 우주 속의 한 일원이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까지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3. 분청, 꿈을 빚다 

난 이런 이야기에도 약하다. 언젠가 읽었던 <도자기>라는 만화책도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우아한 청자나 단아한 백자보다 정겨운 분청사기들을 좋아한다.  그러니 분청사기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이 책에 끌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고려 최고의 사기장의 아들 강뫼가 분청사기를 탄생시키는 고난의 과정의 그려져 있다는데 자못 두근두근 기대가 된다. 왜구의 침입, 고려말 왕조의 혼란 등이 맞물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다.

 

 

  

 

 4. 오, 나의 남자들! 

오오오, 이런 발칙한 제목이라니!!! 5월부터 지금까지 난 이현이라는 작가에게 빠져있었다. <짜장면 불어요!>, <장수 만세!>, <우리들의 스캔들>, <영두의 우연한 현실>, <오늘의 날씨는>, <마음대로봇>을 읽고 이제 <로봇의 별>을 읽으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어라? 새 책이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현 작가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글감들이 참 다양하고 버라이어티하다.
그런데 <오, 나의 남자들!>이라니.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써냈기에 이런 제목이 붙는단 말인가.  청소년들의 불안하면서도 발랄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5. 나는 무슨 일하며 살아야 할까? 

길담서원이라는 곳에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들을 진행한다.  지난 번엔 '밥'이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가 있었는데, 우리 아들녀석을 보내봐야겠다고 하다가 그만 신청이 늦어버렸다. 게으른 엄마의 불찰이다. 아무튼 '일'이라는 주제로 했던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가 책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에서 저자들은 직업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직업이 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열망하면 그것이 미래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청소년들도 일터에서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 현상이라고 일과 노동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책 소개 글은 아이들에게 '노동'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듯 하다.  아울러서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업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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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6-02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평화그림책 시리즈가 또 나왔군요.
이현의 <오, 나의 남자들!>은 제 서재 광고에 이미 올려졌어요.
<분청, 꿈을 빚다>는 막 나왔을 때 올렸었고요.^^

섬사이 2011-06-02 14:04   좋아요 0 | URL
제 눈에도 들어온 책들이 순오기님의 민감한 레이더를 피해갈 수 없겠죠. ^^

하늘바람 2011-06-02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기대되네요

섬사이 2011-06-02 14:08   좋아요 0 | URL
늘, 항상, 언제나,
기대되는 책들이 너무 많아요. ㅠ.ㅠ
요즘 <물건 이야기>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종이 1톤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원이 98톤 필요하다네요.
저는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하는데, 환경을 위해서는 전자책을 반가워해야 할 것 같기도 해요.
(갑자기 뜬금없는 환경타령을.. -.-;;)
암튼 기대는 되지만 욕심은 부리지 말자, 뭐 그런 내용입니다요. 끙~~

2011-06-02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6-1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무슨 일하며 살아야 할까?'여기저기서 눈에 띄네요.
저도 요즘 아들의 장래를 놓고...아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지라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섬사이 2011-06-14 17:59   좋아요 0 | URL
아들과의 신경전이라.. 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죠.
그래도 아드님이 장래에 대한 계획, 의지 같은 것들이 있나 봐요.
저도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해서 도움이 될만한 책인지 말씀드릴 수 없는게
좀 안타깝네요.
저보다 먼저 읽어보신다면 책에 대한 글을 써주실 거죠?
양철댁 님의 리뷰나 페이퍼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유아/어린이/청소년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내일이 어린이날인데도 아직 아이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에게 실바니안 인형과 가구들을 선물받은 딸은 이번에 실바니안 집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무심한 엄마는 이 페이퍼를 쓴답시고 모니터 속 책들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중.    

 

<강은 세상을 만들어요>   
기코 시토시 지음/ 김혜숙 옮김/ 학고재

4대강 문제로 온나라가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4대강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9명이 죽었다는데도, 보류되었다지만 분명 무슨 꼼수가 있을 것 같은 지류사업이 논해질 때에도 세상은 참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강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주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아이들과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맑고 산뜻한 수채화풍 그림과 각 페이지의 그림을 이으면 거대한 하나의 그림이 되는 구성도 눈여겨보면 좋을 듯.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설흔 / 창비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그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던 이옥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옥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그저 정조의 문체반정에 굴복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문체가 무척 여성적이라는 점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확실치가 않다.  
창비 청소년도서상 수상작품이라는 점에도 마음이 끌리지만 무엇보다 세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갔을지도 무척 궁금하다.

  

 

 

  <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
김향금 지음/ 김재홍 그림/ 열린어린이 

열린어린이에서 기획한 '그림책으로 만나는 지리 이야기'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거주지 이동과 가족 형태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사회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이 책은 단순히 '지리'에 대한 지식전달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들의 할머니 세대, 그리고 부모인 우리 세대,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대의 모습을 섬세한 그림과 설명으로 잘 담아놓은 것 같다.
너무 빨리 발전한 우리 나라. 그래서 아이들은 불과 50년 전의 모습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앞으로 문명의 발달 속도에는 더욱 가속이 붙겠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세대간의 삶의 변화를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 책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읽는다면 그것도 참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문학동네어린이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의 작가 김려령.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되는 책이다.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는데, 과연 어떤 이야기로 내 마음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만들어 줄까.  
책을 읽다보면 일상에 찌든 나를 위로하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온기를 전해주는 책들을 만나게 되는데, 책 소개글을 읽어보니 어쩌면 이 책도 그런 온기를 가진 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서니 브라운의 나의 상상미술관>
앤서니 브라운, 조 브라운 지음/ 홍연미 옮김/ 웅진주니어 

고등학생인 우리 큰애들이 어렸을 때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어린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좀 섬뜩하고 무서운 면이 없지 않으니까. 그런데 좀 커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꺼내 읽더니 "엄마, 이 사람 천재 아니야?"라고 물어오더라.
지금 일곱 살인 막내도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자라서 다시 읽는다면 큰애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 큰애들에 의해 '천재'로 불리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삶과 그림책 세계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보는 방법과 '모양 상상 놀이'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그림책을 완성해가는 과정까지 담았다니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일이 걱정이구나. 어디 나들이를 가자니 사람과 차들이 무섭고, 선물을 골라 사주자니 특별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내 맘 같아선 좋은 그림책 몇 권을 선물하고 싶지만, 아이 입장에선 장난감을 장만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을 놓치고 싶지 않을 터. 딸아이도 좋아할 것 같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하고, 두고두고 오랫동안 가지고 놀 수 있겠다 싶은 장난감들은 너~~~~~무 비싸고, 가격대를 맞춰서 사자니 내 아이에게 사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딸아, 좀 더 소박한 어린이날을 보내면 안되겠니?  나무에게 좀 미안해서 그렇지, 세상에 책처럼 좋은 것도 드물단다.      에구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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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5-0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려령 작가 책이 끌리네요. 6학년 아들내미는 어린이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아참 아빠에게 자전거 사달라는 주문은 했네요.
책처럼 좋은 것. ㅋㅋ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 1호 일껄요. 슬프다. ㅠ

섬사이 2011-05-06 07:05   좋아요 0 | URL
어제, 아이가 갖고 싶어하던 실바니안 이층집을 주문했어요.
아무래도 어린이날이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이 입장에선 더 과열되어도 손해볼 게 없다는 아이들 쪽 반론에 부딪쳤습니다.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선물해주고, 재미난 곳 데려가 주고 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정말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제각각의 개성과 꿈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할 텐데 말이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희망으로 2011-05-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애들은 골목에서 늦게까지 놀던 추억이 많지 않아 어른들에게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할 책이라 눈에 띈 책. 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는 그림이 궁금합니다. 김려령의 책이나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죠^^

섬사이 2011-05-11 08:23   좋아요 0 | URL
<동네 이야기>는 지리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아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다섯 권의 책들이 모두 정말 군침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쓰읍~)
어떤 책을 받아볼 수 있을지....
제발 저 다섯 권의 책중에서 선정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답니다.

 

아이들이 모두 제대로 학교며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달이다. 정신없던 겨울이 정리되는 느낌.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돌아왔구나, 하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딸이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청소할 땐 청소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빨래할 땐 빨래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밥을 먹을 땐 오직 먹는 일에만 충실할 수 있는 시간,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아무도 이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에 기뻐할 수 있는 시간..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니 내가 나만의 시간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너무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3월이면 공식적으로는 봄인데, 겨울동안 읽겠다고 했던 <안나 카레니나>를 3월까지 끌고 왔다. <안나 카레니나>가 거장이 쓴 작품이라고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건 인물들의 마음을 미묘한 변화까지도 참 잘도 묘사했다는 점이다.  

레빈은 결혼한 지 석 달째가 되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한 걸음마다 예전에 했던 공상에 대한 환멸과 뜻밖의 새로운 매혹을 찾아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를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어느 쪽을 향해서 갈 것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빈이 키티와 결혼한 후 자신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실제 결혼 생활이 다른 점을 기가막힌 비유를 써서 묘사한 구절이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씩은 다들 공감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이 투사된 인물같았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호감형이긴 하지만 너무 진지하고 반듯한 성격때문에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말하긴 힘든. 그에 비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두 사랑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로 수백수천의 난반사를 일으키니까.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어렵고, 끝난 사랑은 미치도록 아프고, 지나간 사랑은 늘 저만치서 아름답게 손을 흔들어대니까.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등장인물 전체가 반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3권 마지막에 레빈에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레빈의 농장에서 일하는 표도르라는 농부였다.  

"그야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저 자기의 욕심만으로 살고 있고, 미티우하 같은 놈은 그런 치입니다만, 그저 제 배때기에다 처쟁이는 짓만 하고 있습죠. 그런데 포카느이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길래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거야?"레빈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뻔하잖아요. 진리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뿐이에요.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리만 하더라도 사람을 모욕하는 짓은 하지 않으시니까 말예요..."

톨스토이에게 종교, 특히 기독교의 향이 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 권에 걸쳐 진지하게 물어왔던 질문에 대해 작가가 보여주는 해답이 좀 실망스럽기는 했다. 난 교회도 권력이며 종교와 신앙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성당에서 '냉담자'로 분류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교인들의 방문, 전화, 초대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건, 내가 종교생활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언정 신앙생활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내 아이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라'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일까.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이 마지막 문장들을 씁쓰름하게 읽어야 했다. 지난 겨울에 보았던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함께 떠올라서 이 마지막 문장들 사이사이를 배회하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정말 확신하며 눈감았을까.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영화와 소설 속에다 대고 작가에게 당신의 삶이 그랬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고 여기면서도 100년도 전에 죽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숨이 확신 속에서 거두어졌을지 궁금했다.  

봄기운이 스멀거리는 3월까지 <안나 카레니나>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 좀 무안했는데, 그러면서도 애써 아직 민들레를 못 봤으니 봄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정말로 민들레는 4월 6일이 되어서야 만났고, 난 봄이 오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은 거라며 좋아했다. 그동안 <안나 카레니나>를 다 못 읽은 걸 알고 민들레가 내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참 속이 깊은 민들레구나. 그래.. 민들레는 뿌리가 깊지.. ???? (뭐라는 거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신 기생뎐>을 다시 읽었다. 책읽기 모임때문에 읽었는데,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맛이 나는 것 같다. 같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는 것도 좋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책욕심때문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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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1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는 다시 읽고 싶어요. 그리고 몇년뒤에 또 다시 몇년뒤에 또 다시. 인용해주신 문장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섬사이님이 이렇게 쓰신걸 읽으니,

[하지만 두 사랑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로 수백수천의 난반사를 일으키니까.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어렵고, 끝난 사랑은 미치도록 아프고, 지나간 사랑은 늘 저만치서 아름답게 손을 흔들어대니까.]

소주 생각이 간절해져요. 뭔가 길게 쓰다가 다 지워버렸는데요, 섬사이님, 제 요지는 그거에요.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도 아니고 편집자도 아니고, 그저 그의 책을 읽은 또다른 독자에 불과하지만, 섬사이님이 안나 카레니나를 이렇게 읽어주셔서 고맙고 기뻐요. 안나와 브론스키와 그리고 레빈이 섬사이님의 몇개월을 함께했다고 생각하니 참 좋아요. 책들을 읽고 생각을 하고 이렇듯 글로 그것들을 표현해주시는 섬사이님이 좋아요.

그래서 민들레더러 제가 일러뒀어요. 섬사이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섬사이님이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그때 눈에 띄라고. 그거 제가 그런거에요.
:)

섬사이 2011-04-18 12:57   좋아요 0 | URL
어쩐지~~ 민들레가 어디로 꽁꽁 다 숨어버렸나, 했어요.
일본원전의 원자로폭발때문에 민들레도 방사능이 무서워 안 나오는 건가, 하며 남몰래 슬퍼했었다니까요.
다락방님이 시켜서 그런 거라니까 참 다행이에요.

저야말로 다락방님 덕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수 있어서 참 고맙고 기뻤어요. ^^

순오기 2011-04-1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만의 시간은 꼭 있어야 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왜 세계는 굶주리고 있는가는,어머니독서회 토론도서였어요.
안나 카레니나는 언제 차분히 읽게 될런지...

섬사이 2011-04-18 13:0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엄마만의 시간은 너무너무 중요한 거, 맞죠?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집안 일을 하든 정신이 쉴 시간이 필요해요.

알맹이 2011-04-16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 읽고 싶은 사람 여기 또 있네요. 1권 200여 페이지 읽다 만 것 같은데.. 무슨 승마장 장면이었나 거기까지 읽었던 거 같아요. 저희 집에 있는 건 범우사에서 나온 글씨 빽빽한 옛날책인데 저렇게 예쁜 책이 새로 나왔네요. 제가 구할 땐 없었는데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집에 있는데.. 지금 같아선 과연 저 책들을 집어들 날이 올까 싶어요. ㅠㅠ

섬사이 2011-04-18 13:06   좋아요 0 | URL
저도 거의 두 달이 넘어 걸린 것 같아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독서등을 켜놓고 조금씩 매일 꾸준하게 읽었어요. 하루 이틀 안 읽으면 자꾸 레빈이 말을 시키더라구요. 아마도 제가 레빈에게 가장 많이 동일시했나봐요. ^^
 
<유아/어린이/청소년>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알라딘 신간평가단 4기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책을 너무너무 많이 받아 리뷰를 쓰느라고 진이 빠졌었다. 평가단 활동을 끝내고 나서 이제 신간평가단 모집할 때 신청하지 말아야지, 했었다.  그런데 얼마전 신간평가단 활동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으흠.. 이 정도라면.. 하는 마음에 덜컥, 신청하고 뽑혔다.  

그래서 평소에 안하던 '주목신간'을 뽑는 페이퍼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원한 분야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 분야다. 3월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페이퍼로 올리는 게 4기에는 없었던 신간평가단의 새로운 미션이다. 그리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무척 고민되는 미션이다.

도서관에서 추천도서를 선정할 때랑 기분이 다르다. 최대 다섯 권만 담을 수 있으니 고민이 더욱 깊다. 이 책 저 책 번갈아가며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 마침내 다섯 권을 뽑았다.  (내가 뽑는다고 그 책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첫 번째 책 ,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이라는 책이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원전의 방사성물질 유출 때문에 세상이 소란하다.  예전에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란 책을 읽고난 후 원전건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이번에 이웃나라에서 불거진 원전의 심각성을 보면서는 원전이 필요하게 된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전기가 어디서 저절로 샘솟는 것마냥 아무 생각 없이 헤프게 쓰는 내가 원전건설반대를 부르짖을 자격이 있나 싶었다. 원전이 싫다면 전기를 좀더 귀중하게 여겼어야 했다. 원전이 더 이상 필요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골랐다. 지구를 위한 한 시간. 2007년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된 '지구촌 불끄기 운동'에 대한 그림책이다. 전등 하나를 밝히는데 소요되는 전력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지구 전체의 전등이 꺼진다면, 지구도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시간만이라도.   

 

두 번째 책 ,
2011 칼데콧 메달 수상
2010 뉴욕 타임스 최우수 그림책 선정
2010 퍼블리셔 위클리 최우수 도서 선정
2010 커커스 리뷰 최우수 도서 선정
일단 수상경력이 너무 화려하다. 너무 이러면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해서 거북이가 이기게 해주고, 코 알레르기가 있는 하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펭귄 곁에 가만히 함께 앉아 있어주고, 밤이 무서운 올빼미에게 책을 읽어주는 다정한 동물원지기 아모스 할아버지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할아버지가 아픈 날, 동물들은 할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음... 궁금하다. 

 

세 번째 책,  

<짜장면 불어요!>의 이현 작가의 새 책이다. 이번엔 2045년을 배경으로 하는 SF동화다.  같은 작가의 전작 <로봇의 별>이라는 책도 SF동화라고 할 수 있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책소개글에 따르면 <로봇의 별>은 '굵직한 서사로 인간과 로봇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냈지만 이 책은 재치와 유머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따사로운 봄햇볕 아래서 심각하게 인상쓰지 않고 깔깔대며 읽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있을까. 꽃망울 터지듯 나와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질 수 있다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마음에 걸린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2권까지 있다는 거. 서평책이 <마음대로봇 1>만 온다면 어쩐지 좀 뒤가 개운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예상된다는 게 좀...   

 

 네 번째 책, 
 

 푸른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상을 탔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왜 상을 탔을까?는 아무래도 궁금해진다. 이 책의 소개글을 읽고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지우개 따먹기'라는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어른들에게도 통할만한 인생법칙(?) 같은 것을 다뤘다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작가가 얼마나 이야기를 잘 끌어갔느냐가 중요하겠지만, ' 박진감 넘치는 탄탄한 구성과 간결하면서도 구성진 문체,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의 몸짓이 돋보인다'는 소개글로 보아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다섯 번째 책, 

청소년 책이다. 청소년 뿐 아니라 어른인 나도 고전문학을 읽는다면 주로 시조나 소설 영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창세가부터 시작하여, 허균, 이규보, 정약용, 이황, 강희맹, 김정희 등 같은 익숙한 인물부터 이양연, 오도일, 임숙영처럼 낯설은 인물의 다양한 글들이 실려있다.  
문학도 입시를 위해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교과서 고전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 이외에도 일반 민중들의 원초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창세 신화와 서사무가 등 기존에 만나기 힘들었던 고전의 명편들을 수록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고전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였다'는 책소개글은 일단 반갑다.  
그리고 굳이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나처럼 고등학생 때 이런 읽을거리를 접해보지 못했던 어른에게는 참 신선한 책이 될 것 같다.  

  

이 페이퍼를 쓰면서 두어번 페이퍼를 갈아 엎었다. 올렸다가 지워진 책이 두어권. 그 책들에게 어쩐지 좀 미안하다. 내가 쓴 페이퍼에 없는 책이라도 좋으니 부디, 4월에 좋은 책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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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0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과 마음대로 봉은 관심도서여요.
지우개 따먹기는 실망하지 않을거에요.^^
다섯번째 책도 끌리는데요.^^

섬사이 2011-04-02 11:21   좋아요 0 | URL
늘 욕심을 버려야지, 하면서도 책들을 보면 욕심이 앞서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무슨 책이 올지 기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꿈꾸는섬 2011-04-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기 신간평가단 활동 하시는군요.^^ 축하해요.^^

섬사이 2011-04-02 11: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신간평가단 활동은 좀 조심스럽기도 해요.^^

세실 2011-04-0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잣거리에서 세상을 배우다.' 학창시절에 접해보지 못했던 저도 이런책들 보면 읽고 싶어요. 꼭 받으시길 바래요.

메일 잘 받았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님의 힌트로, 고미숙샘이 활동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강사도 섭외했답니다.
전 담당자로서 꼭 들어야지 하고 기대하고 있구요!!

섬사이 2011-04-11 07:29   좋아요 0 | URL
아, 메일 받으셨어요?
수유+너머에서 강사 분을 섭외하셨다니
무척 근사한 강의가 될 것 같아요.
가깝기만 하다면 저도 들을텐데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2007년에 읽고 리뷰를 올렸던 책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문 내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것은 순전히 도서관 책 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읽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두 번째 읽는 이 책에서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레비는 부나의 화학실험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서경식 교수가 낸 책의 제목인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지금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진짜 이야기'로의 접근을 막는 방해도 공공연하게 진행되곤 한다. 때론 '진짜 이야기'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 스스로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는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를 묻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갈망하며 매일 고통스러운 꿈을 꾸는지도.  

두 번째 책은 서경식 교수가 쓴 <디아스포라 기행>이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비극을 다뤘다면 이 책은 근대 제국주의의 결과로 생겨난 현대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세상 곳곳에서 디아스포라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의 지난한 삶을 통찰한다.  

고통의 공감을 통해서만 연결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외부적인 충격-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바 없는-에 의해 내 삶이 전복될 정도로 일그러진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디아스포라들의 삶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것에 전적인 공감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역사의 커다란 굴곡이 없지 않았지만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내가 있지 않았고, 그래서 부끄럽게도 내 삶을 평온하게 지켜왔던 것 같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광주의 풍경 앞에서 '운이 좋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비겁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프리모 레비를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 누스바움, 장 아메리, 파울 첼란 등- 에게 집요하고 악랄하게 강요된 고립과 고통이 자기 삶을 짓눌러 파괴시키는 것을 견뎌내기란 상상이 불가능할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픈 삶과 죽음이 한동안 마음 속에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개념-뿌리들>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인간은 목적이라는 것을 떠나서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간의 존재 방식은 과거에서 그를 떠미는 원인들 못지 않게 미래에서 그를 끌어당기는 목적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죠.  
....... 중략 .........
시간을 앞당겨서 미래를 본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에요. 자기 뒤에서 떠미는 기계적인 인과의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시간을 앞당겨서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행동을 이끌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죠.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볼 수 있는 미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할 수 있는 미래도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단순한 삶의 관성이라고 습관처럼 지껄이며 일상을 지루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과거와 미래 뿐 아니라 현재의 일상까지도 모두 참혹했을 것이다. 뒤에서 떠미는 기계적인 인과의 고리가 현재를 절망스럽게 만들고, 미래조차도 절망스러운 현재를 개선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죽음이 삶보다 가볍다고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우리가 들어주기를 갈망했던 이야기들이 <디아스포라 기행> 속에도 있었다.  서경식 교수의 책들 중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었는데, 그의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책들만 놓고 본다면 그의 시선은 음울하고 어둡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들어두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대로 잘 듣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경제, 경영, 투자, 재테크...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난 많이 둔하다. 국방부에서 이 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줬을 때, 내가 이 책을 덜컥 사 버린 데는 읽고 싶다기 보다 이 책에 대한 응원(?)의 의도가 컸다. 게다가 '부자되기'를 위한 안내서가 아니니까, 세상을 '경제'라는 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선한 의도의 책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책은 내내 책꽂이에 꽂혀있었는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또 덜컥 구입하면서, '순서'에 대한 쓸데없는 강박(?)에 밀려 펼치게 된 것이다. 어쩐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먼저 읽어버리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영영 읽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제국주의 식민 정책이 정말 끝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치적 지배력은 사라졌다고 해도 경제적인 억압과 착취는 자본주의라는 명목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 귀에 들리는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무엇이 우리 눈을 흐리게 하는 걸까.

도서관 책 읽기 모임 때문에 읽게 된 이 책에서는 세계사 속에서 커피가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하며 어떤 단면들을 보여주는 지를 설명한다. 그 날 책 읽기 모임을 열면서 도무지 그냥 커피를 마시면 안될 것 같아서 모임 전날 나가 공정무역 커피를 샀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하지만 커피에는 차나 술과는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지금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서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저 먼 중남미나 아프리카 어딘가의 세상에서 커피를 생산해야 하고(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닌) 그 커피콩을 무사히 우리에게 보내주는 일련의 산업구조(수출업자,중개인,선박회사,창고회사,가공업자,소매점,커피점 등등)가 트럭 한 대, 사람 한 명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기능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차나 술을 마시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인공적이고 문명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지배라는 오랜 과거와 원활한 세계교역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 행위이다.'
나는 위선적인 얼굴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무역과 제국주의 쪽에 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커피를 잊지 못해 난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언젠가는 끊고 말거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며칠 전 선물받은 이 책도 읽었다.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글이 주는 중량감은 꽤 묵직했다. 맨처음의 폭력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된 걸까, 하는 생각의 꼬리가 길게 남았다. 어린 바르트와 거친 베트예만은 어쩐지 서로 닮았다. 둘 다 너무 외롭고, 지독히도 운이 없고, 미숙하고, 어둡고, 슬프고, 춥다. 행복한 결말을 빌어주고 싶지만 차갑게 굳어버린 감정은 그렇게 쉽게 따뜻하게 데워지거나 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용서와 상처는 그렇게 쉽게 덮어지거나 지워지거나 말끔히 없었던 듯이 아물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위로 터지는 폭죽이라니... 아마도 그들은 계속 슬프고 외로울 것만 같다. 1월 0일은 계속 될 것이고 그들은 계속 맨손일 것이다. 무력한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악을 품고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가.

1월에 내가 본 영화 다섯 편이다. 한 달 동안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기는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한 번 보기 시작하니까 줄줄이 연이어 보고싶은 영화들이 마구 이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한동안은 영화를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새미의 어드벤처>는 꼬맹이딸과 함께 가서 봤다. 3D로 예매해서 봤는데  3D영화가 어린아이들에게는 사시가 될 위험이 있다며 남편이 질색을 했다. 이번 딱 한 번만 3D로 보겠다고 하고서 본 영화다. 그런데 꼬맹이딸이 보고 싶어하는 <라푼첼>이 또 3D다. 이건 어쩐담??? 
<조선명탐정>은 동네 엄마들이 보러가자고 해서 아침 일찍 씨네시티에서 봤다. 진지한 무게감을 덜고 코믹의 가벼움을 더한 김명민이 낯설면서도 "역시 김명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김명민의 콤비인 오달수 보는 것 또한 즐겁다. 영화는 큰 웃음이나 큰 의미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식상한 웃음코드와 코믹을 의식해서인지 지나치게 과장했다 싶은 설정들도 종종 눈에 띈다. 코믹물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봐줘야 했다. 김명민과 오달수, 퓨전사극의 독특한 소품과 장치들을 가볍게 즐겨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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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1-30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은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독서회에서 이런 책들을 선정하지 못했어요. 2011년엔 섬사이님 페이퍼를 참고하며 우리도 이런 책도 봐야겠어요.^^
조선명탐정은 방금 심야로 보고 왔어요~ 가볍게 웃으며 보기 좋은 영화였어요.

섬사이 2011-02-04 18:19   좋아요 0 | URL
책 읽기 모임에서 다음 책은 어떤 책을 고를까가 어렵더라구요. 서로 관심분야도 다르고 하니까 돌아가면서 책을 선정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기도 해요. 순오기님 덕분에 책읽기 모임을 계속 이어갈 힘을 얻었더랬어요. 3월부터는 신동호 선생님을 다시 모실 수 있도록 계획을 추진하고 있긴 한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

마녀고양이 2011-01-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좋은 책을 많이, 이렇게 많은 영화를 보시다니...
너무 부러워여. 요즘은 여기저기서 제 게으름을 반성 중인데,
계속 게으르기만 하고 있어요. ㅎㅎ

섬사이님, 즐거운 설 연휴 되셔염!

섬사이 2011-02-04 18:24   좋아요 0 | URL
가끔 어쩌다 한 번씩은 게으름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잖아요. 사람이 늘 한결같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구요. 저는 1월 한 달 영화보러 다니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집안일에 게으름을 떨었거든요. ^^

치유 2011-02-0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부지런하게 삶을 즐기시는 멋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가조 모두 건강하시길~!

섬사이 2011-02-04 18:33   좋아요 0 | URL
아~~ 배꽃님~!! 너무너무 반가워요.
설 잘 보내셨나요?
배꽃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새해엔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