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 쓰고 만화가 정훈이가 그린 책 표현의 기술을 읽었다. 스스로 '정치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유시민은 '왜 쓰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발췌와 요약의 중요성, 악성댓글 대처법, 표절에 대한 의견과 비평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고, 자소서, 보고서, 회의록 쓰는 법,어린 학생들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까지 이어나간다. 워낙 글을 명료하게 잘 쓰는 '유시민'이므로 쉽게 잘 읽힌다. '쉽게 잘 읽힌다'는 건 분명 장점이지만 유시민의 다른 저작들에 비해 날카롭게 '벼리는 맛'이 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절하지만 느슨하고 이것저것 상냥하게 설명해주고 조언해주지만 뭔가 덜 채워진 것 같은 허전함이 있다. 유시민의 글은 '글쓰기'를 위한 글보다는 사회의 여론형성을 위한 글이 훨씬 더 매력적인 것 같다. 그게 왜 쓰는가라는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기도 했으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다운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유시민은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라는 철학적 자아의 특성에 대한 물음이며, 우리는 인간 일반의 본성 위에 그 어떤 '자기만의 것'을 세웠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이야기가 결국 '자기소개서' 쓰기로 이어진다. 유시민의 말마따나 '자기소개서'를 폄훼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뒤이어 설명하는 자기소개서 쓰는 법은 결국 그것을 읽는 사람, 혹은 기업이 요구하는 바에 맞춰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기소개서는 자기 자신보다는 그것을 읽을 사람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여길 만한 사실을 중심으로 정해진 분량만큼만 써야 합니다'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아주 실용적이고 유용한 조언이다. 하지만 '철학적 자아의 특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글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뭐랄까, 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논문 쓰는 절차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랬다. 유시민은 논문 쓰는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주제를 명확한 형태의 질문으로 만든다.

2)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논문 주제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그 현황과 성과와 한계를 요약 정리한다.

3) 기존 연구 결과를 반박, 보완, 수정,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실, 가설, 이론, 해석을 제시하고 서술한다.

4) 논문에 담은 연구 결과의 학술적 의미와 가치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썼다.

 

간단하지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글쎄..... 이게 나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논문작성을 앞둔 예비 학사, 석사, 박사들한테 이게 식은 죽 먹기인가. 내가 논문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걸 '간단하다'고 말하는 저 문장 앞에서 더 큰 절망을 느낄 것 같은데... 유시민에게는 저게 간단하고 쉬운가 보다.

 

콘텍스트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 '느끼는 책읽기'의 권유, '마음이 먼저'라는 글쓰기 철학(?) 등에는 충분히 공감했고,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얕게 다루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정훈이가 그린 만화가 글 중간 중간에 삽입되었고, 마지막 11장에는 만화가 정훈이의 <나는 어쩌다가 만화가가 되었나>란 제목의 만화가 실려있다. 글 중간에 들어간 만화들은 챕터가 다 끝난 마지막에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읽다가 중간에 만화가 나오니까 순간 당황스러웠다. 만화를 읽고 지나가자니 글의 맥이 끊기고, 그냥 안 읽고 넘어가자니 읽다가 만화를 보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하고...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편집인 것 같다. '표현'이라 함은 꼭 '글쓰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닙니다, 라는 의미로 만화가 정훈이의 이야기가 들어간 것 같다. 정훈이의 만화로 온전히 채워진 11장에서 정훈이는 말한다.

 

가장 좋은

표현의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의 마음은 '기술'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훈이가 순수고졸의 학력으로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씨네 21>에 만화를 연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건 모두 '표현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진심과 최선'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제목부터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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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02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오늘은 초여름 느낌도 드는 월요일입니다.
따뜻한 바람이 부는 오후예요.
즐겁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섬사이 2018-04-02 23:2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날이 좋다는데 전 오늘 하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새로 구입한 큰딸아이 의자가 오늘 배송오기로 했는데,
온다고 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해서요.
오늘은 하루종일 의자만 기다리다 시간을 다 써버린 기분이었는데,
서니데이님의 다정한 인사가 위로가 됩니다.
 


319일 비 내리던 봄밤에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꺼내 읽고 주책맞게 찔끔거리고 난 후에 시집을 다시 책꽂이에 꽂아두지 못하고 거실 테이블에 놓아 두었다. 가끔씩 펼쳐지는 대로 시를 읽다가 지난 토요일부터는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 꾹꾹 옮겨적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부터 차례로 하루에 두 개, 혹은 세 개씩. 처음 옮겨 적을 땐 속으로 '내가 이걸 왜 옮겨 적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종이 낭비는 아닐까. 나무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있구나. 시를 다 옮겨 적더라도 그 노트를 펼쳐 읽지는 않을 텐데. 시를 읽고 싶으면 시집을 펴지 볼펜으로 삐뚤하게 적어놓은 걸 읽겠어? 시간 낭비야. 차라리 옮겨 쓸 시간에 시를 하나라도 더 읽지 그래? 그런 말들이 계속 머리 속을 떠다녔다.

그런데 시의 한 줄 한 줄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까 그 시간이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할 수가 없었다. 시를 옮겨 적을 때마다 시가 파르르 떨면서 노트로 건너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간질간질 간지럽다며 날보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성당이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은 뜨거운 신앙을 증명하려는 듯 두껍고 글자도 많은 성경책을 필사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시를 옮겨 적으며 증명할만한 시에 대한 뜨거운 애정 같은 걸 갖고 있지 않다. 남들보다 시를 더 많이 읽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다만 그 봄밤 이후 시하고 잘 지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는 다른 글들보다 좀 더 오래 꼭꼮 씹어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욕심에 옮겨 적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 같다. 난 지금 시를 꼬시고 있는 중이다. 혹시 모르지. 시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하면서..... . 그만 하자.

 

오늘은 <전주>라는 시를 옮겨 적었다.


전주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이 시를 옮겨 적으면서 저기 저, 당나귀를 탄 북극성 친구와 자전거를 끌고 가는 시인이 함께 가는 버드나무 길의 정경을 떠올리다가 그림 하나가 생각났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저 그림 속 말(당나귀였으면 더 좋았겠지만)을 타고 가는 선비 옆에 자전거 끌고 가는 시인을 그려주면 딱 좋겠다. 그림 그리는 재주만 있었다면 어떻게 좀 그려볼 텐데. 시인의 천진한 웃음까지 멋지게 그리고나서 나도 같이 흐뭇하게 웃을 텐데.

 

올해는 꽃들이 늦다. 이제서야 매화가 느릿느릿 꽃잎을 펼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미 피고 졌을 시기다. 앞산에 개나리도 노란 점을 몇 개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산수유만 화창하다. 올해 첫 민들레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봄을 부르는 것 같은 저 그림이 더 생각났나 보다. 오늘 밤엔 미세먼지고 뭐고 따지지 말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북극성에 살고 있는 시인의 친구를 향해 건배하고 싶다. 늦은 만큼 더 서둘러 성큼 오고 있는 봄에게도. (술을 마실 줄 몰라도 건배는 할 수 있잖아. 아니면 술 대신에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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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28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 겨울이 많이 추워서 그런 걸까요. 다른 곳에는 목련도 핀다는데, 제가 사는 곳에는 동백나무에 작은 꽃 하나 피었어요. 그래도 이번주에는 기온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손으로 써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많이 들어요.
요즘은 손글씨를 잘 쓰는 분이 그래서 부럽습니다.
섬사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섬사이 2018-03-28 21:59   좋아요 1 | URL
손으로 쓰려니 좀 어색하긴 해요.
쓰는 데 시간도 더 걸리고, 쓰다가 틀리면 속도 상해요.
그래도 시는 대부분 아주 길지는 않으니까 천천히 쓰기 좋아요.
쓰다가 잠깐 멈추어도 급할 게 없구요.
제 글씨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시가 마음에 들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하고 쓰고 있어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라로 2018-03-29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 필사하는 일인 여기 있습니다. ㅎㅎㅎㅎ 아직은 베껴쓰는 수준이에요. 머리엔 안 들어와요. ㅠㅠ 왜 하고 있는 이러고 있는 상태. 좀 지나야 도를 닦을 까요??? ㅎㅎㅎㅎ
암튼 섬사이 님은 여전히 글을 잘 쓰시는 군요!!

섬사이 2018-03-30 22:15   좋아요 0 | URL
성경을 필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전 신약성서의 맨 앞부분, 누가 누굴 낳고 또 누가 누굴 낳고.... 그 부분만 봐도 헉, 이걸 어떻게 필사하지? 싶거든요. 그건 정말 신앙이든 신념이든 그 무엇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아니면 성경필사를 하면서 신앙이나 신념 같은 것이 자라나 단단해지는 걸까요?

글을 잘 쓰다니... 칭찬,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말 잘 쓰면 좋겠어요. ㅠ.ㅠ)

라로 2018-03-31 13:55   좋아요 1 | URL
저는 신앙이나 신념이 없어서 그렇게 필사를 하면 좀 생길까 하고서 하는 거에요. ㅎㅎㅎㅎ
저는 날라리입니다요. ㅠㅠ마음을 모아 이제는 좀 진실되게 종교에 다가가고 싶은 소망이지요.

섬사이 2018-03-31 22:22   좋아요 0 | URL
제가 시를 필사하는 마음과 같네요.
저도 시에 다가가고 싶은 소망을 담아서 노트에 시를 옮기고 있는 거거든요.

예전에 대학다닐 때 임용고시 준비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늘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던 친구였는데, 늘 성경책을 꺼내서 필사를 하고 나서 공부를 시작했지요.
갑자기 그 친구가 생각나네요.
성경필사가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라로님의 성경필사, 저의 시 필사, 좋은 영향을 줄 거라 믿어요. ^^

2018-03-29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30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뭐라도 되겠지>는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집이다. 기분을 가볍게 하기에 아주 그만이다. 초반에 작가의 자유분방한 학점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하고 웃음이 터졌다. ‘학고(학사경고의 줄임말) 김중혁 선생의 학점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1도 없었다. 그가 얘기하는 방식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했다면 난 진심으로 같이 걱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위로와 격려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방식은 , 나 학사경고 4번이나 받았어. 그래서 F4. 근데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하는 식이다. 그래서 걱정해주지 않아도 잘 살 것 같고, 위로나 격려 따위는 개나 줘버려, 할 것 같다. 밝고 씩씩하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학점이 웬만큼 잘 나와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오해하지 마시길,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한 번 받았는데,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까 못 받으면 부모님께 죄스러운 이상한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압박감에 밀려서 공부를 했다. 근데 내가 대학을 다닌 시기는 바야흐로 80년대 중반. 영화 <1987>을 본 사람은 알 거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격렬한 시간을 보냈는지. 그러니까 시험 때가 되어 공부를 하는 것이, 장학금을 받는 것이 이게 또 이상한 죄책감으로 작용을 하는 거다. 물론 나도 시위대 가장자리에 끼어보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뭐랄까... 내가 가짜인 것 같은 불쾌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나를 괴롭게 했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참아가면서 공부하고, 불쾌감을 견뎌가며 대학을 다녔는데, 막상 졸업하니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학점이 꽤 높은 대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일에 도전하고 경험을 쌓을 걸, 신나게 놀아보기라도 할 걸, 후회했다.


얼마 전에 읽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라고 말한다.


작가는 고등학교 때 어렴풋이 글 쓰는 사람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국어국문학과가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학과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학교를 대충 다녔다고 한다. 그때 학점관리를 안하고 시간을 충분히 낭비하며 뇌를 싱싱하게 유지한 것이 소설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현명한 판단이었던 거다.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공부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학생인 이상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사람들이 성적을 보면 얘가 성실한 아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옛날엔 그런가?’했는데, 언젠가부터 말도 안 돼!’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지난번에도 어떤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 공부에 통 관심이 없는 아이 때문에 속상해하면서 또 그 성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근데,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심지어 하기 싫어 죽겠는 일에 성실하기가 쉬운 일일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3때까지 총 12년을(대학 4년을 더하면 16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한결같이 성실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12년간 성실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싫어하는 일을 12년 동안이나 성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달리기는 지구력과 심폐기능 향상, 혈액순환에 좋을 뿐 아니라 인내심을 키워주는 훌륭한 운동이니까 앞으로 12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달리세요.’라면서 강요한다고 치자. 그게 사회적으로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매우 중요한 거라서 달리기를 잘해야 취업과 승진에 유리하고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치자. 난 달리기가 싫은데, 달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더러 불성실하다고 하고, 왜 최선을 다해 더 빨리 더 오래 달리지 못하냐고 재촉하고, 이대로 달리기를 못하면 내 앞의 인생이 깜깜해질 것 같고, 난 이미 틀려버린 건 아닐까 불안하고, 근데 난 달리기는 젬병이라 자주 다리에 쥐가 나고 발이 무거워진다면..... 난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어야 그나마 즐겁게 기꺼이 성실할 수 있다. 아이가 공부에 성실하지 못하다면 그건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놈의 공부’, 그게 문제인 거다. 노력하면 뭐든지 다 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아들딸이 엄마아빠는 왜 재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으셔서 이 모양 이 꼴이세요,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아이에게 성실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내가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난 가끔 슬쩍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오기도 하고, 밥하기 귀찮으면 인심 쓰는 척 자장면 같은 걸 시켜 먹이고, 어쩔 땐 빨래가 밀려서 수건이 없다 양말이 없다 찾게 만들고, 종종 설거지거리가 쌓여있고, 자주 청소를 거르는, 그런 엄마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완벽을 구하랴.


실패해도, 시간을 낭비해도 좋고(경우에 따라 낭비를 권장하고),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이 모습대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고, 굳이 애쓰며 살지 말라고 말하는 이 책이 좋다. 게다가 작가는 웹툰 작가의 경험도 있어서 책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만화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떨고 있는 청년들과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들이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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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무 경솔했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덮고 난 어제 저녁 나는 나의 단순함과 경솔함을 떠올리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혔던 것처럼 이 책의 다윈도 악의 기원을 밝혀줄 게 분명하다고 흥분하며 떠들었던 내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럽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알 수 있었다. 누가 감히 악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증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너는 왜 그때 후드를 네온 강에 버리지 못했지? 왜 그 후드를 다시 집으로 갖고 와 원래 있던 지하실 상자 속에 그대로 넣어 두었지?

퇴근길에 후드를 몰래 숨기듯 집으로 가져와 서재 책장 뒤에 밀어 놓는 순간에도 그는 비아냥거리며 계속 물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걸 버리지 못하고 거기다 처박아 놓는 거야, ? 말해봐, 도대체 왜 그렇게 겁먹은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117쪽)

 

악은 이 책에 나오는 후드 같은 거다. 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는 거. 남들이 찾을 수 없는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숨겨둘지언정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 하지만 우리는 왜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악을 버릴 수 있다는 건 우리의 착각일 뿐 악은 우리의 의지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가 아닐까. 이 세상 속에, 그리고 내 안에도(나도 이 세상의 일부니까) 선이 있는 것처럼 악도 그냥 있는 거라서 우리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조차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단 한 번이라도 그게 진정한 선택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606쪽)

 

이 문장 앞에서 또 한참 머뭇거렸다. 그러게, 진정한 선택이었을까.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했던 방향이 정말 나의 진정한 선택이었을까. 상황에 밀려서, 어쩔 수 없어서, 내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걸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어서,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이쪽 길이 더 안전해보여서.... 이런 저런 이유로 선택했던 것들이 진정한 나의 선택이었던 게 맞나. 오히려 타협에 더 가깝지 않았나. 지금에 와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며 ,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좀 더 용기를 내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하며 회한에 젖을 때가 있다. 그것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지만 선택하지 못하고 타협했던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다.



 

어젯밤의 판결은 아버지가 이뤄 놓은 세계를 자신이 그대로 승계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흠결이 있는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보장하는 안정과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776쪽)

 

안정과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그 유혹 앞에서 흠결을 트집 잡아, 흠결은 없지만 안정과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악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속삭이는 걸까. ‘이봐, 이런 정도의 흠결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살아. 너 혼자 고결한 척 유난 떨지 마. 이 정도의 흠결을 트집 잡아 힘든 길로 간다면 그건 너만 손해라고.’ 현실에서는 이런 속삭임에 무릎을 꿇는 것이 비난거리가 되기는커녕 현명하다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 그런 세상이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세상도 아니니까.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간단한 선택이 아니니까, 갈림길 앞에서 나는 진정한 선택보다 쉬운 타협을 더 많이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로 선택에 따른 나의 손익계산을 따져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 봐주고 납득할 수 있는 악의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그 경계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고, 우리는 그 경계에 대해 어떻게 합의한 걸까. 내 짧은 생각을 아무리 뻗어본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심오한 문제라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니스의 아버지이자 다윈의 할아버지인 러너가 내 편이 되어준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뿐이지. 카멜레온이 제 몸 색깔을 바꾼다고 누가 비난하더냐?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아버지가 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으냔 말이야.’ (636)

이 말이 왜 이다지도 고마우면서 슬플까.



 

누구도 기원을 끝까지 밝혀 가며 살 수는 없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살인하지 않은 조상을 가진 핏줄이 과연 단 하나라도 있을까? (770)

 

악은 우리 뼈와 핏줄 안에 깊이 새겨져 있는 본성일 것이다. 저 글을 읽으며 루쉰의 <광인일기>가 생각났다. 루쉰의 <광인일기>에서는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책에도 할아버지 DNA가 아버지랑 저에게 공유돼서 그런 거 아닐까요?”(738)라거나 말은 DNA가 중요한 동물이거든 인간처럼 조상과 후손을 엄격하게 따지지.”(764)같은 문장들이 보인다. 악의 DNA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뼈와 핏줄 안에 깊이 새겨진 악을 지워낼 수 있을까 고민해 왔지만 실패했다. 문명이라는 화려한 이름 아래 세련되게 숨겨두는 건 가능했을지 몰라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부정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운명인가 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루미는 이 진화한 다윈이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을 느꼈다. 루미는 자기도 모르게 돌발적으로 다윈에게 입을 맞추었다. (851)

 

진실을 집요하게 좇던 루미는 진화한 다윈에게 돌발적으로 입을 맞추며 다윈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이 늘 바라 온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856)이라고 생각한다. 루미는 내내 자신의 이름처럼 빛을 좇아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했으나 루미가 이라고 확신했던 제이삼촌도 실상은 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책의 그 누구도 빛이 아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빛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루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다윈도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드디어 악을 삼킨 다윈이기에 이상적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면 무릇 악의 DNA까지 발현되어야 완전한 인간인 건가. 악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인간이 오히려 불완전한 걸까. 하긴 인간이 선한 빛으로만 가득하다면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반납하고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겠지. 루미가 진화한 다윈에게 이끌리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악을 향해 몸을 기울이게 되는 운명인가 보다.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자기만의 후드를 감춰두고 살아가고 세상 곳곳에서 악은 음흉한 꼬리를 흔들며 유혹한다. 누구였더라... 악은 정교하고 치밀하다고. 인간주제에 그렇게 정교하고 치밀한 악의 계략에서 빠져나간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삶을 사는 것뿐이라는 거야.” 651

모두 각자의 죽음이 납득되는 삶을 살아야 해.” 845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것, 아니 그냥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내 안에 있는 악을 자각해야 가능한 걸까. 내 안의 악인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세상 앞에 죄인의 마음을 갖는 것. 내가 이 세상의 오점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조심하고 겸손해지는 것.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나의 죽음이 납득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빛과 어둠을 다 끌어안고서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존재하는 악의 문제는 풀 수 없고 제어조차도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태어난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나의 경솔했던 점 하나를 더 반성한다. 이 책은 청소년 책이 아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겠다는 걸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주인공들의 나이가 열여섯이니까 그 정도 나이의 청소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청소년읽을 책은 아니라는 거다. ‘청소년 책이라고 독자의 한계를 규정할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다. 성인들도 널리 두루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다윈을 비롯한 열여섯 아이들의 아버지는 40대이고, 그 조부모는 70대이다. 그러니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모두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악의 기원에 대한 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에 대한 진지한 고찰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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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으니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생각나네요.

섬사이 2018-03-26 11:57   좋아요 0 | URL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이런 주제를 다뤘나 봐요.
예전에 <7년의 밤>을 읽었는데, 저와는 잘 안 맞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정유정의 책은 찾아 읽지 않았는데,
<종의 기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해지긴 하네요.

다락방 2018-03-25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대로 보기 마련이잖아요. 마지막에 루미가 다윈에게 이끌리고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하게 됐을 때, 되게 복잡한 마음이 되더라고요. 니가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너는 그토록 진실을 좇는 아이였잖니, 라고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어디 루미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요? 바로 제게도 해당되는 일일텐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도 어른들에게 일독할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섬사이 2018-03-26 12: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가 보고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죠. 루미는,,,, 뭐랄까. 영악하고 야무지고 맹랑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랬어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루미 외에 다른 여성들은 수동적인 여성이거나 성녀처럼 이상적인 여성으로 그려져 있더라구요. 러너의 양어머니와 부인, 해리의 부인이자 제이의 엄마, 또 조이헌터의 부인까지도요. 그래서 나중엔 루미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나무 아래 서 있는 다윈에게 다가가면서 다윈이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해서 루미처럼 영악하고 야무져도 결국 악이 끌어당기는 힘을 거부하기 힘들구나, 했죠.

다락방님과 이렇게 책 이야기 나누는 거 너무 좋아요. ^^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856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흡인력이 있어서 책장이 금방 넘어간다. 그저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 521쪽까지 읽었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어서 짜릿한 흥분과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박지리라는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 <맨홀>, <합체>, <양춘단 대학 탐방기>라는 책을 냈다는데, <다윈영의 악의 기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에너지를 보면 다른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몰라봐서 미안하다... 박지리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고 있어서, 조만간 다른 책들을 읽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어볼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거다.  나는 책, 그것도 소설에서 '재미'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것도 '재미'를 위해서이지 않을까. 교훈이든 비판이든 풍자든 감동이든 뭐든 간에 그게 이야기 속에 재미있게 녹아들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힘을 잃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이야기를 잘 다룬다. 이야기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예전에 천명관의 <고래>를 읽고 그 서사의 힘에 감동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책을 쓰기 위해 작가가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아니면 작가가 엄청난 천재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헌터'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30년 전 의문의 살해를 당한 제이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아버지이자 실력 있는 사진작가인 해리 헌터, 그리고 제이 헌터의 동생 조이 헌터의 딸 루미 헌터다. 그들은 모두 헌터(사냥꾼)같은 성향을 보인다. 사진작가라는 직업은 종종 사냥꾼으로 비유된다. 총 대신 카메라로 피사체를 포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미의 할아버지 해리는 '헌터'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제이 헌터는 9개의 지역으로 구획된 계급사회에서 하위계급 사회에 대한 잔인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물론 그의 적개심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지만 '척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그는 하위계층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다. 그런 제이 헌터에게선 표적을 쫓는 오만하고 포악한 사냥꾼의 모습이 보인다. 제이 헌터의 본모습은 알지 못한 채 30년 전 열여섯 살의 나이에 살해당한 삼촌 제이 헌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는 루미 헌터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집요한 사냥꾼의 모습 같다. 루미 헌터의 아버지이자 제이 헌터의 동생인 조이 헌터는 사냥꾼보다 표적에 가깝지만 거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처음엔 무심코 읽다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 작가가 이래서 이 가족의 성을 헌터라고 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 센스 있다. 

주인공 '다윈'의 이름도 그렇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다윈'은 '악의 기원'을 밝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읽고 있는 512쪽 근처에서 다윈은 커다란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며 구토 중이다.  유순하고 모범적이고 밝고 순진했던 다윈이었는데, 참으로 딱하다. 다윈이 밝혀줄 '악의 기원'이 사회적 불평등한 구조일까. 더 깊이 들어가 불평등한 계급사회를 만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일까. 센스 있는 이 작가가 어떤 결말을 보여줄지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며 읽고 있다. 좋다, 이런 흥분. 

비유 면에서도 그렇다. 이것도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윈이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시제와 인칭에 따라 달라지는 불규칙 동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불규칙동사'는 규칙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규칙에 불응 저항하며 무리에서 이탈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생존 능력이 강할까에 대한 상념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 '불규칙동사'의 비유는 늘 사랑 가득한 모습으로 안심과 확신을 주었던 아버지가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쓰인다. 그리고 혼란에 싸여있는 다윈이 명문 프라임 스쿨의 교정에서 친구 레오와 만나는 장면에서 다시 나온다. '프라임 스쿨의 일원으로 있으면서도 이 분위기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는 레오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 자유롭게 변화하는 하나의 불규칙 동사 같았다.'(514쪽)라고. 
이런 식의 비유들이 몇 군데에서 등장한다. 다윈의 아버지 니스 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상상하다가 루미와 맞닥트리는 장면도 그렇다. 

재미있으면서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가볍지 않다. 불규칙동사만 해도 '규칙에 불응, 저항해서 무리에서 이탈한 자는 도태된 낙오자인가, 아니면 규칙과 질서를 뛰어넘는 우수한 능력을 가진 자인가'라는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7급 서기관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조이 헌터는 루미의 말대로 야망 없는 겁쟁이일까, 진정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일까'도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해볼 만한 물음이다. 

음... 다윈이 어떤 방법으로 이 엄청난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갈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빨리 다시 책으로 돌아가 일단 다윈의 구토부터 진정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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