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구판절판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7쪽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구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 잘못이나 슬픔도 알사탕의 티끌로 보이는 곳으로요. 엄마, 저는 그 모든 순간을 즐겼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걸 위해서 희생했던 것들, 제가 저지른 실수와 오류들 말이에요. 사는 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11쪽

"내가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을 잘하는 순서대로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
나는 고모를 쳐다봤다. 정말?
"매너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야."-50쪽

할머니는 여느 처녀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고 살아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색이었다.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마다 모욕과 비웃음을 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감추게 되었다. -52쪽

"그애 마음이 지금까지 어떤 전쟁을 치렀는지 누가 알겠니."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72쪽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로 돌아온 뒤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잔을 하나 깨뜨린 것이었어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이었죠. 그것은 제가 건너온 것을 기념하는 하나의 축하의식이었어요. 그게 어떤 다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든 제가 그곳을 건너온 것만은 분명했죠.-82쪽

과연 이 일로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요. 방법은 그저 단순해지는 것뿐이죠. 삶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분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108쪽

동물이 다시 가길 원치 않았던 우주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되돌아가요. 우주에 다녀온 뒤 다음 비행을 포기했던 비행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죠. 그건 인간만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인생이죠.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동물보다 나은 것이 있겠어요?-108~109쪽

"저 개를 어릴 때부터 키웠던 주인이 엄청나게 때리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결국은 죽기 직전까지 때린 후에 길에다 버렸다는 거야. 그걸 조엘이 데려다 키운 거래. 그런데 그전에 매를 맞으면서 훈련받았던 것은 절대로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거야."-113쪽

그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밤의 정적 속에서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 배우들은 모두 요정들일세. 이젠 대기 속으로, 엷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환상의 세계처럼 저 구름 위에 솟은 탑도, 호사스러운 궁전도, 장엄한 신전도, 이 거대한 지구도, 마침내 다 녹아서 지금 사라져버린 환상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걸세. 우리 인간은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 허망한 인생은 긴 잠으로 막을 내리게 되지."-116쪽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일로 돈을 벌어서 밥도 사먹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따뜻한 옷을 사입을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20쪽

".... 그렇게 되면 내가 지나온 그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오기인지는 몰라도,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었어."
민이는 언제 깨어났는지 말없이 누워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고모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뿐이야."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126쪽

내 안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오심이 나를 몰아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37쪽

"슬리퍼 장사라는 게, 남자로서 너무 야망이 없는 거 아닌가."
"그게 기쁨일 수도 있잖아."
민이는 까딱까딱 걸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차 안에 앉아서 온종일 뜸한 손님을 기다리는 거, 그것만이 저 아저씨의 야망일지 누가 알겠어."-142쪽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잇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145쪽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삶이 영화처럼 멀어 보였다. -154쪽

의사는 민이가 다시 잠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나는 민이의 눈꺼풀이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깜찍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떤 여자,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도 유리컵에 입술자국을 묻히지 않는 여자, 칠 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서도 가볍게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여자,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지혜와 부드러움이라는 내면의 광휘를 가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이는 입을 벌리고 헤, 웃었는데 순간 그애의 눈꼬리를 따라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155쪽

달의 진짜 빛깔이 어떨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화성에서는 달이 분홍색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금성에서는 녹색으로 보일 수도 있죠. 외계인에게는 파란색으로, 물고기들에게는 주황색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160쪽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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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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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속의 여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남성의 언어는 흔히 표면장력에 떠밀리며 피상적인 것으로부터 힘을 구가하게 되곤 하지요. 남성의 언어가 획득한 힘은 어머니의 힘과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흔히 파괴적이고 배타적이며 경쟁적이고 연민을 모르는 문법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남성적 질서는 적군의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할 수 있지만 여성적 질서는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땅의 기억을 간직한 여성의 질서는 적군이라고 하여 앳된 소년병의 가슴에 총탄을 쑤셔박는 야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여성의 조국은 이 별이며 이 별이 속하여진 우주일 뿐. 야만의 폭력 위에 세워진 남성적 질서로서의 국가와 민족 개념을 넘어서고 가로지르며 여성의 말은 근원적인 대지의 힘으로 귀환합니다. 아마도 내가 아니마의 세계럴 결여한 위대한 예술가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며, 남녀를 불문하고 좋은 예술가들에게서 궁극적으로 선한, 위대한 여성성을 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34쪽

인간의 오만은 이미 극에 달하였고, 인간을 먹이고 입혀온 어머니는 신성한 곳까지 파헤쳐지고 절개되었으며, 이 야만의 질주가 언젠가는 끝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조차 희박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야만의 질주는 인간 스스로의 자각과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날, 인간의 오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어머니들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때 마침내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이 별의 인간들은 스스로를 피란시킬 수 있는 한점 대지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명과 개발이라는 폭력 아래, 생존의 근거인 이 별 전체를 잃어가는 실향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5쪽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불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창조해내는 세계에는 가장 낮은 것 속에 든 가장 높은 봉우리와, 가장 거대해 보이는 것 속의 가장 작은 속삭임들과, 가장 미천해 보이는 것 속의 위대한 전언이 공존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세상이 추구해야 할 의롭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열망하고 두리번거리고 귀기울입니다. 아파하고 연민하며 공경하고 분노합니다. 골방과 광장이 공존하며 사랑과 투쟁이 공존하는 시인의 거처에서 당신은 가난한 처녀의 탄색을 아파하며 모순되 사회제도를 비판합니다. -37쪽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하계의 질서란 계급과 계층 간의 끝없는 쟁투와 착취의 역사였으며, 다수 민중에 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가 가장 폭압적인 형태이거나 세련된 방식으로 그 외연을 바꿔온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나는 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았던 봉건적 왕조시대나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시대가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여전한 쟁투의 장이라는 것을. 더구나 이 척박한 현대의 자본주의는 내외적인 식민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이 별은 끊임없는 강자의 문법에 의해 구획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문법 속에서 선진제국에 의한 제3세계의 가혹한 착취가 소문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국 내 빈익빈 부익부와 다수 민중에 대한 착취가 민주의 외피를 쓰고 여전히 진행줄이라는 것을. 계급의 불평등과 인종의 불평등, 그리고 성의 불평등은 하계를 지배하는 가장 심각한 불평등체계이며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되어 있는 연옥의 미로라는 것을. -37쪽

어찌하여 달은 지구 가까이에서, 저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로 지구를 바라보게 된 것일까요. 달의 기원을 몽상하는 일은 세속의 일상을 가로질러 나에게 우주먼지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고 우주거품이라든지, 은하, 블랙홀이라는 말들을 떠오르게 하지요. 그리고 묻게 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라고.-46쪽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그리하여 달이 뜨지 않는 죽음의 시간을 지나 다시 부활하곤 하는 달은, 자신의 숨결에 성심을 다하며 지구별 위의 인간 역시 가장 낮고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사랑할 것을, 이 별을 사랑할 것을 묵언의 기도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의 죽음과 부활. 우리가 일상적인 것이라 느끼는 달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은 달의 의지가 이룬 매일의 기적이라는 것을. 내게 주어진 하루분의 생이 죽음을 껴안고 흘러가는 시계추 위에서 아직은 삶 쪽으로 기울어 있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라는 것을. -48쪽

태양빛이 강렬한 수직성을 갖는 빛인 데 비해 달빛은 구부리는 빛이지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이 종종 내 속의 공격성을 일깨운다면 달빛은 그 빛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에도 보듬어 소생시키는 부드러운 힘 쪽에 있습니다. 태양은 명징하게 빛나는 형태를 고수하지만 달은 자라나고 소멸하는 만물의 생멸의 주기 속에 함께 있습니다. 자라나는 달, 죽는 달, 소생하는 달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남루한 중얼거림을 받아안습니다. 그리하여 달님을 향해서라면 인지상정의 남루한 고통과 소망들을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지요. -51쪽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 이것은 어떤 수사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눈물겨운 일입니다. 때로는 이 지극히 단순한 본능이 일상을 지배하는 오만한 에고로부터의 해방을 촉매하기도 하지요. 인간성이라는 관념이 강제하는 도덕과 치장이 허물어지고 날것 그대로의 단순한 욕망이 지순하게 드러날 때, 그것들은 대개는 착하고 단순해져 오히려 자유로운 것에 가까워집니다. 몸이 아파질 때 비로소 내 몸이 신의 거처임을 아는 이 아둔함이라니.-52쪽

사랑을 얻기 위해 왜 자신의 말을 부정해야 하며 왜 사람의 다리를 얻어야 하는가. 누구와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 '누구와'가 아니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61쪽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표방하는 것들에 관심없습니다. 나를 지속시키는 힘은 세계의 이면에서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숨결의 아름다움이며, 그 숨결과 만나는 일이 '순간'임을 직시하는 일의 잔혹함이며, 순간의 진실이 사라지고 다른 순간이 태어나는 그 순간들의 틈새를 몽유하는 즐거움입니다. 모네는 나에게 순간의 풍경을 영원의 풍경으로 직조하는 자연의 색채로 보여줍니다. -69쪽

한 인간의 전생애를 통틀어 가장 빛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십대에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규율화된 사다리 타기에 능란한 소위 사회의 엘리뜨들이나, 사다리 타기에서 낙오된 소위 열패자들이 제도화된 사다리 타기의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결국 약육강식의 현실이며 경쟁과 정복의 역사입니다.
우리 학교교육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파편화된 인간을 양산하는 공장입니다. 단언컨대 나는 세상이 좀더 평화로워지기 위해선 대중매체와 학교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87쪽

적어도 십대를 경유하는 학교에서만이라도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지난 세기를 돌이켜볼 때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말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도탄에 빠지게 하였는지!-을 가장 풍부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 그리하여 한 인간의 영혼의 밑자리가 섬세하고 다양한 무늬들로 충만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학교여야 합니다. -87쪽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가장 자연스런 몇가지 사안에 대해 과민한 금기나 도덕적 포장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그러하고 성의 문제가 또한 그러합니다.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회피하려고 하는 반면 생을 욕망하는 방법들은 지나치게 차고 넘칩니다. 이 불균형은 교만과 방종을 낳는 동시에 보여지고 만져지고 획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뒤틀린 편집증을 낳습니다. 모든 태어나는 것들은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죽어가고 있으며 이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을 담지하는 순환의 아름다운 마디라는 것을 '자기'라는 세계밖에 볼 줄 모르도록 훈련받은 놀랍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별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고리 속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작은 하나의 마디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88쪽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결국은 직면하게 될 죽음을 가르치는 일에, 죽을 때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이해시키는 일에, '지금' '여기에' '존재함'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는 일에 우리는 한푼도 쓰지 않습니다. 나는 죽음의 의미와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충분히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한성의 자각으로부터 춤추는 하나의 별이 잉태되듯이.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고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시작될 수 있기를. 더이상 이 별을 더럽히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기를. -89쪽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예술은 태어난다고 하던가요. 삶의 배면을 흐르는 진실과 자유와 아름다움에의 추구. 모든 정직한 예술행위는 구도의 과정인 것입니다. 모순과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삶이라는 난파선 위에서 한 예술가가 지난한 투쟁을 벌여갈 때, 그의 투쟁에 있어 유일하게 확고한 단초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창조행위 속에서의 비타협성뿐입니다.-96쪽

"위대한 작가의 작품들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았다. 오직 위대한 작가들만이 이 작품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이런 작품들을 대충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어내는 수준으로만 읽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 속지 않기 위해 셈을 배우는 것처럼 글읽기를 배운다.(...)우리를 달콤하게 잠들게 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을 잠재우는 독서가 아니라, 발돋움하고 서듯이, 우리가 가장 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이다"라고 말이지요. 현대를 사는 대중들의 정서는 많은 부분 다양한 매체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미디어와의 접촉 빈도수가 대중의 기호를 만들어간다는 말은 팔할이 사실입니다. 이 다양한 매체들의 운동원리가 이윤의 창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소위 예술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 주체 사이에는 불가피하고 더러운 공모가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셈입니다. 대중의 부박한 소비취향이 저급한 문화의 생산을 야기하며 그 역 역시 똑같이 작동합니다. -97쪽

이 '문득' 만져지는 지극한 세계. 이 세계로 나를 이끄는 힘은 세련된 영화기법과 사건 전개의 흥미진진함에 의존하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무엇입니다. 오히려 의식적인 과장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수단을 포기함으로써 이르게 된 어떤 완전함의 세계이지요. 무언가 별나고 의미심장한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는 필연적으로 과장을 동반하고 요란스러워집니다. 이 '요란스러움'을 '무언가 말했다'로 착각할 때 영화는 천박해지고 '문득'의 세계는 소멸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예술장르의 공통된 속성이 아닐까 싶어요.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을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101쪽

나의, 우리의 내부에 현현하는 연옥의 묵시록. 그(베이컨)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추악한 괴물이었으며, 고깃덩어리였으며, 반인반수였으며, 그러므로 명백한 인간의 초상이었습니다. 찢기고 흘러내리고 발가벗겨진, 허위의 미의식이 거세된 제단 위에 그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차라리 자유로워진 슬픈 고깃덩어리..... 그의 화폭이 휘두르는 무언의 폭력 앞에 나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향해 있다... -120쪽

사모하는 마음을 향해 있을 때 모든 마음은 열렬하고 귀한 것이라는 존재증명의 싱그러움.-129쪽

사랑은 움직이는 마음이니, 그 마음의 역동성을 일방적으로 막아두기만 해서야 소통이 가능해질 리가 없지요. 상대방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결국은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어오도록 만드는 마법의 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130쪽

현실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꿈은 깊어집니다. 현실이 비관적일수록 꿈은 왕성해집니다. 이것이 몽환의 현재성이며 몽환의 물질성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반역과 혁명은 삶의 원초적인 동인입니다. 억눌리고 빼앗긴 것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삶 자체에 내재하는 힘,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삶에 대한 꿈꾸기로서의 혁명. 그리하여 혁명이라는 몽환은, 세계에 대한 비관이 길어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의 파동을 나의, 우리의 몸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세계가 슬프면 슬플수록 더욱. -154쪽

객방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습니다. 밤은 깊고 들리는 것은 물소리뿐입니다. 전깃불을 켜놓으면 밖은 안 보이고 방안만 시끄럽게 훤해집니다. 불을 꺼버렸습니다. 안이 저물어야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는 저 바깥. 어슴푸레한 계곡의 능선으로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173쪽

영혼의 풍경이 되는 어떤 풍경은 숱한 날들 중의 어느 한순간 문득 만나지며 그 문득의 가능성은 개개의 인간이 갖는 영혼의 결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그냥 옵니다. 전신의 느낌으로 말이지요. 수차례 선운사를 들락거리던 내가 바람 많이 불던 어느 가을날 문득 사랑을 깨달은 것처럼 당신도 어느날 어느 곳에서 문득 당신의 풍경과 만나겠지요. -180쪽

그러나,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냉소의 이름이든 회한이나 야합이나 대중추수의 이름이든, 인간정신의 점진적 '죽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살아남으라고, 살아서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저질러온 너무나 많은 죄-의미들이 들끓고, 죽을 때까지 싸워도 무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210쪽

하이데거를 빌리면,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물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시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말들이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시가, 시정신이 죽을 때, 존재의 시간도 사라진다. 어쩌면 빵만으로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갈증이 해갈되지 못하는 정서적 기근, 영혼의 빈사상태에서 '인간의 시간'은 '사육장의 시간'과 어떻게 변별될 것인가.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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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사토 다다오 지음, 설배환 옮김, 한홍구 해제 / 검둥소 / 2007년 6월
품절


정말 한국이 가난한 나라였던 1960년대보다도 우리는 21세기에 실행한 이라크 파병에서 '국익'이란 말을 훨씬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이라크전쟁이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국익을 위한 파병이란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에 이라크전쟁이 침략 전쟁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파병반대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과연 우리가 20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일본의 조선 점령과 대륙 진출은 분명 일본의 '국익'을 엄청나게 신장시키는 일이었다. (한홍구 해제 중에서)-12쪽

한국 사회가 많이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과거의 군국 소년들이 남긴 병영국가의 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심한 곳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청소년들이 생활하는 학교이다. 일제가 키운 군국 소년들을 자신들이 배우던 그 모습대로 한국의 학교를 만들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토를 달지 않고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전투에 임하는 모범적인 군인의 자세이자, 입시 전쟁을 치르는 전사인 학생들이 취해야 할 자세였고 지금도 그렇다. 건강하고 단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면서 오늘의 학교는 역시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하고 있다. 민주화도, 인권도 모두 교문 앞에 멈춘다.
(한홍구 해제 중에서)-13쪽

20세기 전반기만 전쟁을 치른 일본, 그것도 거의 대부분을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전쟁을 치른 일본에 비해 우리는 내 땅, 네 땅 가릴 것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경험이 너무 직접적인 탓이었을까? 일본의 경우 사토 다다오 외에도 전쟁을 겪은 세대의 쓰라린 체험이 평화를 지키는 큰 힘으로 작용했고, 미국의 경우도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반전 평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겪을만큼 겪었고, 엄청나게 많은 참전 용사가 있는 한국에서 자기 체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고백과 반전 평화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한홍구 해제 중에서)-14쪽

청일전쟁 때의 일본군도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군도 그 나라 사람들을 돕는다고 내세우면서도 실은 그 땽의 사람들에게는 재난을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이 없는 자를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78쪽

혁명이든 독립이든 결코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된다.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 이룬 혁명과 독립은 결국 그 나라로의 종속을 불러올 뿐 진정한 혁명과 독립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 또한 똑같은 것을 반대 입장에서 말하면 어떠한 나라의 혁명과 독립은 이웃 나라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심으로 어떤 나라의 혁명과 독립을 도우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가 하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대체로 그 나라를 자국의 종속국가로 삼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돕는 것은 언뜻 보아서는 아름다운 것 같다. 그러나 돕는다고 해도 진정으로 그 나라를 이롭게 하는 지원 방법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돕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 나라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가는 일이 많은 법이다. -80쪽

그러나 인간은 역시 자국이 하고 있는 일의 나쁜 면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이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르고 있는 실상이 일부에 알려졌어도 "그거야, 세상사에는 나쁜 면이 있기 마련이지."하는 정도로 수습해 버렸던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베트남전쟁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들의 손해가 너무나도 커지고, 그것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확연히 알게 되었을 때이다. 자신과 가족이 직접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신에게 직접 고통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가 상대에게 가한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86쪽

그런데 사람은 가족끼리는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비해, 학교에 가게 되면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학습에서 경쟁하게 되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어른이 된 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배운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165쪽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다니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장래 좋은 직업을 얻어 편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가난한 나라를 돕기 위해 이 세계에서 전쟁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166쪽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동물은 하지 못하는 식량 생산 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 무서운 것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데서 길러지는,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또 하나의 본능을 없애 버리고 있는 것이다. -236쪽

동물이 지니고 있는, 싸움을 멈추는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만큼을 인간은 이성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인간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동물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성으로 다툼을 통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동물과 같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237쪽

우리는 그 때문에 특히 가난한 나라,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활발히 연구하고, 그것을 일반적 교양으로서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우정을 쌓아 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를 위한 학문, 평화를 위한 학습으로 삼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것은 사회과학의 학습인 동시에 어떠한 의미에서는 도덕 교육이기도 하다. (중략) 그러나 평화를 위한 학문은 세계의 정세가 어떠한지, 어디에 어떠한 곤란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생각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반성의 움직임을 피어나게 하는 학문이다. -243쪽

우리는 학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아주 많은 것을 익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고 소중한 것은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중한 것은 인류가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244쪽

내가 전쟁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가 인종, 국적, 신분 등에 따른 차별과 편견이 얼키설키 뒤얽혔을 때 발생하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종과 국적에 의한 편견과 멸시는 신분과 계급에 의한 차별이나 불평등과 동일한 것이다.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며 곤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곤란한 것을 약자에게 강요하지 않겠다고 전 세계인이 결심해야 한다. 그것은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제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255쪽

지금 세계 최대의 강대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자유라는 이상을 내세워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찔러 왔다.
그러나 자유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자유라는 이상 속에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라든가, 기본적 인권을 지킨다는가, 선거의 자유 등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할 것이 많지만, 상행위의 자유와 같은 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동의할 수 없는 점도 나온다. 나아가 앞으로는 공해 문제와 자원 보호의 입장에서 무작정 물건을 낭비하는 자유 등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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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18쪽

세계화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 짜면서 우리를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게 이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집단에 대한 옹졸한 헌신만을 요구하는 낡고 퇴행적인 부족주의(tribalism)가 새로 등장하여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다. -24쪽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폭력과 살육의 핑계(망토,cloak)로 쓰기 위해 종교를 찾는 오늘날, 우리는 거룩함의 예복(robe)인 종교를 결코 그런 식으로 쓰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신앙을 전쟁의 대의로 사용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평화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종교는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28쪽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압도했던 시대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중략) 정체성은 쪼개고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도 '그들', 즉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는 확고한 경계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경계에 걸쳐 많은 갈등을 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29~30쪽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 ..... 차이의 존엄은 종교적 이념 이상이다. -49쪽

<덕의 상실 After Virtue>에서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도덕의 시뮬라르크(환영)을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윤리라는 개념 자체는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효율성(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과 치료법(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양쪽 모두 도덕성의 멘탈리티(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보다는 마케팅의 멘탈리티(욕망의 자극과 만족)와 관련이 있다.
(중략)
의무와 책임, 절제 등에 관해 말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족만을 바라는 욕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공공선에 관해서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65~66쪽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79쪽

즉, 보편주의는 부족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며 부족주의 못지않게 위험한다. 보편주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그릇된 믿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에 고나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내가 옳다면 너는 그른 것이고, 내가 믿는 게 참이면 네가 믿는 것은 거짓이며, 너는 그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구제받아야 한다. 역사의 참극은 이런 생각에서 생겨났다. -93쪽

성경의 유일신 신앙은 하느님이 한 분이기에 하느님늬 면전에 이르는 문도 하나밖에 없다는 사상이 아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유일성(unity)은 창조의 다양성(diversity)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자연에도 적용된다. 정말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진심으로 경이를 느껴야 할 대상은 잎사귀의-플라톤적 의미에서의-형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25만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잎사귀이며, 본질적인 새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9천종의 새이고, 다른 모든 언어를 포괄하는 초(超)언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6천 개의 언어이다. -98쪽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106쪽

부족주의는 이방인의 권리는 부인하고 보편주의는 이방인이 개종하고 순응하고 동화되어서 이방인이기를 그칠 때에만 권리를 인정한다. 보편주의는 단일한 문화의 진리를 전 인류의 척도로 삼는다. 그 결과는 종종 비극적이었고 언제나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모욕이었다. -111쪽

벤저민 바버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다. 맥월드, 즉 다국적 기업, 유명 브랜드, 미디어 스타, 위성 및 유선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전달되는 미국식 문화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서양의 '퇴폐'를 거부하고-때로는 종교적이고 때로는 인종적이며 주로는 양자의 혼합인-시원적인 정체성을 재천명하는 되살아난 부족주의가 있다. 9.11테러처럼 두 문화가 만나 충돌하면 세계는 무참히 흔들린다.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고 우리의 공통성과 차이, 보편과 특수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문화적 정신적 과제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만이 문명의 충돌을 피하는 길이다. -112쪽

가장 현명한 자는 남들보다 현명한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혜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려는 자이다.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만을 알기 때문이다. -11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뎃도 속하지 않은 상태, 아무에게도 진정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 -135쪽

도덕성은-언제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때로는-희망의 이름으로 절망과 맞서 싸우고 우리를 객체가 아닌 주체, 다시 말해 행동과 삶의 주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간단한 사실을 나는 어디에서도 분명히 언급된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탈도덕화demoralization'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상실이기도 하고 희망의 상실이기도 하다. -139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maker이 아니라 대상made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 -148쪽

도덕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이 세상에서 새삼 회복해야 할 가치는 책임responsibility이다. 즉,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이다. -149쪽

따라서 부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른바 리세즈 오블리주Richess oblige다..... 중략..... 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거기에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수반되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관점에서 새로운 경제의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면은, 자유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장이 사회적유대를 붕괴시키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격리하며 성공한 자의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다. -172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중략)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 -203쪽

최고의 평등은 수입이나 부의 평등이 아니고 기회의 평등도 아니다. ..(중략).. 사회는 모든 성원에게 동등한 존엄함(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하브리요트kavod Habriyot 즉 '인간다운 품위')을 보장해야 한다. -205쪽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210쪽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는 모든 어린이가 최대한의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29쪽

교육(읽고 쓰는 능력뿐 아니라 정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에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는 교육이 자유로운 사회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식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권력(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한는 선결 요건이다. 그것은 또한 창조성을 여는 열쇠이며, 창조성은 모든 사회경제 집단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창조성은 21세기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중략)
정보 시대에는 지식 자본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용할 능력이 있는 자, 즉 정보를 이해하여 혁신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능력(조지아 나이가 '부드러운soft' 권력이라고 부른)이 있는 자에게 있다.
(중략)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230쪽

오직 협동으로 경쟁의 균형을 바로잡을 때에만 자비로운 결과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경쟁의 역설이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세상은 창조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파괴로 끝이 난다. -255쪽

경쟁 없는 협동이 절름발이라면 협동 없는 경쟁은 장님이다. 만들고 사고 일하고 소비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새뮤얼 브리턴이 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264쪽

누군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후손들과 언약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행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제약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281쪽

생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미지는, 지구를 존재의 근원에 속하는 무엇으로 보고 우리를 그런 지구를 보존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의 후손을 위해 그 지구를 더욱 아름답게 가꿔야 할 신탁 관리인으로 보는 이미지다. -282쪽

도덕적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이상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계급과 수입과 인종과 신앙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288쪽

용서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움을 입증하는 증거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반응reaction이 아닌 능동적인 행동action이며, 상황에 규정되는 것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행로行路를 바꾸고 과거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미래를 위한 뜻밖의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나타낸다. -295쪽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 -307쪽

사랑은 소유 이상의 무엇이다. 사랑은 놓아줄 줄 아는 힘이다. 용서 역시 놓아줄 수 있는 힘이며,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만다. 모든 용서는 파편화된 세상에서 깨진 것들을 한데 붙여준다. -312쪽

과거의 증오 위에 그들의 미래를 세울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 사람들을 덜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더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중략).. 나는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 과거를 존중한다. 고통에 고통을 추가하거나 슬픔에 슬픔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증오에는 사랑으로, 폭력에는 평화로, 원한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갈등에는 화래로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13쪽

내가 보기에 종교는 경제학과 정치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진리를 구현하며, 다른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홀로 청정하다. 종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즉, 문명이 살아남는 것은 힘과 부와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자를 외면하지 않은 덕이고 빈자를 배려한 덕이며 힘없는 자를 보살핀 덕이라는 사실 말이다. 약자the vulnerable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 문화가 강했다invulnerable는 사실은 역사가 남긴 아이러니하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교훈이다. 우리가 극대화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함,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의 평등한 자식인 인간의 존엄함이다. -321쪽

참다운 신앙의 시금석은 내가 차이를 용인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 과연 나는 나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 나와 언어와 신앙과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나는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나를 만들게 하는 대신 내 형상에 따라 하느님을 만든 것이다. ..(중략).. 차이는 우리르 작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자의 사해동포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애착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애착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330쪽

다원주의는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의 목적에 각자 고유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한 앎의 바탕을 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서로의 욕망과 욕구가 충돌할지 모른다. 그러나 차이가 은총의 원천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중재와 갈등 해소와 화해와 평화를 구할 것이니, 평화의 토대는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333쪽

내가 유대 역사에 관해 숙고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낙관과 희망을 구분하는 법이다.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희망은 텅 빈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행동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난다. -338쪽

희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 다음에는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며, 역사란 때로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꺾어들기도 하지만 조지프 헬러가 말한 '바람에 날리는 우연의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가는 오래고 느린 여정임을 아는 것이다.
(중략).. 희망의 궁극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 역사를 쓰는 저자라는 믿음이 아니며 하느님이 개입하여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구원하거나 악이 배태하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리라는 믿음도 아니다. 희망의 궁극에는 하는님이 서투른 노력을 하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열망을 보살핀다는 믿음,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을 주셨다는 믿음,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꿈꾸고 희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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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절판


행복은 스스로 깨우쳐 얻지 않으면 결코 제 발로 다가오지 않는 냉정한 연인과 같다.-10쪽

그 순간 나는 믿었다. 우리가 어딘가로 쏟아 부은 사랑은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랑이 의미를 찾고 꽃을 피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이 우주 어딘가에는 우리가 쏘아 올린 사랑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것을. 이 믿음이야말로 춥고, 외롭고, 막막했던 내게는 구원이었다.-23쪽

우연히 똑같은 것을 보고 웃거나, 똑같은 것을 보고 무서워하거나, 아니면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것을 보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하소서.

나도 아이를 향해 웃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서로 웃었을까. 그것이 무엇이건 아이와 함께 바라본 순간의 진실에 나는 감사한다.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고, 지옥으로 내팽개치는 지독한 체험들 가운데 몇 개나 사랑하는 이들과 절실히 나눌 수 있을까. 그래서 공감하게 해달라는 저 기도가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리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함께 바라보고 느끼는 그 작은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임을.-24쪽

"이생에서 아무런 원한 맺힌 것 없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것은 과거의 영향 때문입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즈음 나는 세금 고지서처럼 꼬박꼬박 찾아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고통들이 지긋지긋했다. 스승이 답하셨다.
"티베트 불교에는 통렌 수행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가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귀한 것을 모두 다른 이들에게 주고, 중행의 아픔과 고통을 내가 대신 받는 상상을 하는 수행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이번 생에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럴 때면 다음 생에 받아야 할 것을 이번 생에 미리 받았다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 고통을 주는 이야말로 가르침을 주는 은인임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78쪽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의 몸이 완전히 타는 데 세 시간 정도가 걸리며, 마른 사람보다 뚱뚱한 사람이 더 쉽게 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 타는 냄새가 돼지고기 굽는 냄새와 닮았고, 좀 더 비릿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장이 팽창하다가 터질 때는 피융 하는 소리가 나고, 팔보다는 다리가 먼저 떨어져 나와 배 위에 얹힌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죽음에 관해 내가 시각과 후각, 청각으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죽음은 우리의 감각을 벗어난 곳에 있지 않았다.-84쪽

나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가 신성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삶이 나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어디에서 찾을까.-97쪽

세계가 내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지옥이 있다.-103쪽

어느 하늘 아래, 어느 침대 위에서 혹은 방바닥에서 잠들건 이곳의 삶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기에 견딜 만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통인 것이다.-106쪽

인생의 서글픔을 아는 사람들, 넘어져서 크게 코가 깨져 본 사람들은 다른 이의 아픔에 등 돌리지 못한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물질적 환경이 불안정한 사람들일수록 인간의 고통에 더 섬세한 공감을 일으킨다. -108쪽

인생의 새벽이라는 아동기에 왜 어떤 아이들은 강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우는 물고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112쪽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서로 소통한다는 건 고귀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115쪽

우리는 모두 자신의 존재 상황이 낯설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기가 어렵다.-126쪽

"이봐,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 절망하고 상처받아 세상을 원망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안에는 희망의 씨앗이 담겨 있음을 잊어선 안 돼.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건 그 순간 너무 큰 기대와 분노가 우리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야. 되는 일이라곤 없고,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다고? 좋군, 좋아! 뭘 걱정하나? 이제 더 일을 것도 없는데. 붕괴 너머로 어떤 징후가 오는지, 어떤 기회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한번 봐. 이번 생에 이루지 못했다면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운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물고기는 원형의 반쪽을 이루며 이렇게 속삭였다.
희망이라니, 너무나 구태의연한 제도의 꼬드김이다.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끌어내려 고안해 낸 오래된 회유책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깊은 차원에서 진실임을 뼈아프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한 번의 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제를 인정하기만 하면 기회는 무궁무진해진다. 그것이 바로 희망 아닐까.-134쪽

많은 이들이 익숙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삶의 권태와 불안, 공포, 환멸을 보지 않으려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사전에서 빼버리고 싶은 불길한 단어들이 살고 있지 않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쫓길 바에는 차라리 모파상처럼 우리가 삶의 권태와 공포 속으로 들어가 한 몸으로 살아 버리는 편이 낫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운명을 향한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므로. 별들은 어둠 속에 떠 있으나 결코 제 길을 읽는 법이 없다. -137쪽

여행은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다. 누구를 어떤 시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의 내용도, 과점도 달라진다. -138쪽

사람이 산다는 것, 보살피고 헌신하고 마음 쓰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빠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양로원에서도 얼마나 따뜻하고 속 깊은 모두의 딸이었던가.
다른 사람을 삶의 첫자리에 놓고 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 친구를 또 한 명 알게 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146쪽

켈상. 이 현실의 세계, 마야의 세계에 너무 깊게 빠지지 말자. 이곳은 우리가 일생을 걸쳐 뭔가를 배워야 하는 학교이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니까.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인생이란 우리가 설계한 대로 펼쳐지는 홀로그래피라는 걸 놓치기 쉬워. 그렇게 되면 게임 속 승패나 아이템에 매몰돼 공격적인 에고만을 키우게 되지. 이 사실을 몰라서, 아니 알아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해 나는 지금껏 좌충우돌 살아왔단다. 세상 끝까지 가도 슬픔이 끝나지 않을 거라 슬퍼했단다.
우주는 꼭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들과 만나게 해주더라.
..........(중략)........
이건 삶을 방관하며 허술하게 살겠다는 태도는 결코 아니야. 오히려 더 치열해지는 거지.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힘에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우이의 자부심이 돼야 해.
...........(중략)........
어디선가 슬픔도 집착의 결과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슬픔과 같은 예민한 감정을 잘 느끼는 나에게, 그리고 네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말 아니야? 슬픔이나 쓸쓸함, 고립감은 우리를 다리에 돌을 매단 새처럼 만들지. 땅바닥을 힘겹게 기어다닐 뿐,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게 만드는 새....
-148쪽

세상에는 멈출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길 자체가 모든 의문과 고통에 대한 해답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184쪽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부처님이 답했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얻지 않았다. 단지 그동안 찾아오던 것이 항상 내 안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단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완전했다."-193쪽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욕망이, 사로잡힘이, 두려움이 '나를 따르라'고 채찍질했는지. 따라가본들 거기에는 어떤 평화도, 자비도, 행복도 없었다. 그저 남들 하는 만큼 해봤다는 가냘픈 자기만족이 있었을 뿐. -196쪽

그 자리에서 나는 통렬하게 깨달았다. 고통을 치유할 영약을 찾아 세상 끝까지 헤매었지만 결국은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음을. 찾고, 구하고, 헤맨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으므로, 그토록 피곤하고 불행했음을. -198쪽

노스님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중략)... 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구는 '활동에 대한 욕구'를 제어하면 보이는 세계. 단순한 생활 속에서 건지는 소박한 기쁨들. -233쪽

늦으면 깊은 법이지요.-240쪽

일체의 인연이 내게 닿기까지의 수고로움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에 필요한 진정한 초심이리라. -270쪽

전쟁과 여행은 서로 상관없을 것 같은 단어이지만, 삶에 굶주린 사람들이 벌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닮았다. 군인은 타인을 파괴하과, 여행자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새 신화를 쓰고자 떠난다. 에고가 비워지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여행자의 심장에 순결하게 담긴다. -287쪽

누구에게나 하나의 세계가 완벽하게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기억이 저장되고, 언제 상처의 실핏줄이 터지고, 언제 일그러진 웃음을 치유하기 시작하는지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과 도취가 구원으로 가는 첫 단추일 수도 있는 것이다. -307쪽

여행이 가르쳐 주는 가장 일상적인 진리는 행복도 지나가고 불행도 곧 지난간다는 사실이다.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와 무상함에 지쳐 길 위로 나선 이는 모든 것을 치우치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삶이라는 여행길에도 얼마나 자주 고갯길을 만나 주저앉게 되던가. -312쪽

인생에는 '이치에는 맞지만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상식, 이치가 있다. 그러나 자기 논리가 모두 순리에 맞는 것은 아니다. -314쪽

우린 순간순간 매혹당하며 사랑하고, 떠나고, 환멸을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천천히 죽어 가고 있지. 오래전 누군가가 내 가슴에 들어와 살고 싶게 만들었고, 종종 가슴을 꿰뚫는 고독을 느낀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모든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세계에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난 이제 감각의 세계, 변화하고 죽는 세계에서 발을 빼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야. -332쪽

"당신은 욕심이 많군요. 깨달음은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을 때 오는 게 아닙니다. 더 이상 떨어져 나갈 것이 없을 때, 철저하게 벌거벗을 때 오지요."-334쪽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모든 것 같운데 인간의 마음이 가장 빨리 변한다. 그것에 반응하는 내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340쪽

춥고 외로운 이 황야에서 시간을 건너뛰려면 무엇에든 사로잡혀야 했다. 인생에, 언어에, 황에의 벌판을 비추는 달빛에, 가슴속 묻어 두었던 사무친 기억들에.-350쪽

티베트를 떠나며 깨닫는다. 그림자를 없애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임을. 그림자와 싸우지 않고, 그림자를 만드는 몸의 실체를 고요히 바라봐야 하는 것임을.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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