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는 노이즈가 없다. 검색 알고리즘은 우연을 몰아내고, 소셜 미디어는 강한 유대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인공지능 기반 개인 맞춤형 서비스는 취향과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고, ‘좋아요‘와 차단으로 이루어진 SNS 타임라인은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긴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가 친구냐 적이냐를 실시간으로 따지는 일에 골몰할 때 세계의 분열과 분단은 더욱더 확고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리즘이 가속화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내셔널리즘과 정체성 정치가 부흥하는 모순된 상황이다. - P55
추적단 불꽃이 말하듯 "살아온 환경, 살아온 방법, 살아온 시간이 달라도,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연대는 시작" 되는 것이다. - P94
문화이론가 마크 피셔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울증적 쾌락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는데, 이는 소소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는 허무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진정한 만족은 느끼지 못하고, 무언가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권태로워하기도 한다. - P133
넷플릭스의 넓은 창을 보면서 대체 무엇을 선택해야할 지를 고민할 때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이 제시되지만, 그것 역시도 우리의 과거 선택에 의존할 뿐이다. 알고리즘은 결코 새로운 것,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다. - P140
이처럼 사람다움과 환대를 긴밀히 연관시킴으로써 배제와 낙인, 신분 차별과 일상적 모욕을 비판할 수 있는 실천적 입지점이 생긴다. 환대는 더이상 주인과 손님의 문제, 즉 사적 개인이 다른 사적 개인에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개방하거나 개방하지 않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봉건적 신분 질서가 해체되고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나는 근대화 과정은 "그때까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완전한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157쪽) 따라서 환대의 원리는 종교적이거나 개인적인 의무에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근대 사회의기본 구성 원리, 즉 일상적 상호작용을 규제하고 우리의 도덕적·사회적 상상력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기본 규범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 P160
다시 말해 환대는 특별히 더 도덕적이거나 더 따뜻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공간과 도시에 대한 공적인 접근권을 개방하는 문제이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적의 없음을 드러내는 작은 몸짓이자 시민적 도덕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 P161
환대와 공존 같은 좋은 말을 우리가 아무런 유보나 비판 없이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결코 모든 것을 환대할 수 없다면, 그렇기에 우리의 환대가 언제나 제한되고 조건 지어진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 환대의 경계 위에서 그 경계를 부지불식간에 옹호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 위치를 망각하고 우리 시대의 좋음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은 그 좋음이 어떻게 숨어 있는 도덕적 배제를 정당화하는지를 인식하는 쪽을 향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환대의 태도는 경계의 무자각도, 경계의 완전한 개방도 아니다. 그런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절대적 환대를 꿈꾸기보다 우리가 제한된 환대 위에 서 있다는 분명한 인식, 경계의 희생자에 대한 주목, 그리고 그 제한된 환대를 확장하려는 마음이 긴요하다. - P173
결국 모든 우정과 환대가 언제나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제공할 수없는 이상 우정과 환대는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곳에 아무런 성찰 없이 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도덕 이념만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 있다. 모든 환대의 문제는 나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 환대보다 오히려 작은 연대가 우리에게 더 필요한 동시대적 환대의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 P176
풍요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풍요를 가능하게 해온 밑바탕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희생양이 되어 온 역사가 있다. 근대의 경제적 역동성과 발전은 생태적 뒤얽힘의 망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정치생태학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러한 뒤얽힘에 시선을 던진다는 의미다.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던 근대화 프로젝트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컨대 기후변화와 생태진화적 역동성의 붕괴는 자연의 위기가 아니라 자율성 프로젝트의 재정의를 요구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근대인이 지닌 자율성의 의미, 곧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처음부터 재규정하고 재발명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생태적으로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인간의 자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아니라, 자연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어야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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