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작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작품에 종종 '아름답고 똑똑한 아내 시리'가 등장한다. 바로 소설비평에세이논픽션 등 다양한 장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미국 작가 시리 허스트베트다. 그녀 역시 걸출한 작가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작가 남편(폴 오스터)과 의외로 오랜 기간 충실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는 시와 소설, 미술 비평뿐 아니라 현상학, 정신분석학, 신경과학, 인지과학, 심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학문적 성과와 문학적 결실을 맺은, 무서우리만큼 해박하고 지적인 이력에도 불구하고 상처받기 쉬운 여린 마음과 잘 벼린 칼날처럼 위태로운 신경을 지닌 여자다.

 

그녀의 글쓰기는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의 자아를 새긴다. 아마도 그 자아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드라마틱한지, 그리하여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바로 이 매혹적인 여자의 자아가 박살 난 거울의 파편처럼 날카롭게 박혀 반짝인다.



픽션이 자아의 현실을 수많은 파편으로 해체하고 재현하고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 흥미진진한 여자의 자아는 모호하면서도 짙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으나 압도적으로 편재한다. 자아의 재현에 대한 이 집요하고 강박적인 관심은 나르시시즘보다는 인간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심리학적/신경정신학적 탐구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소재/주제를 통해 발현되는 기제다.

 

허스트베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학자이고, 감정과 지성이 융합되어야 파악하는 형용 불가의 현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주창한다. 자아의 핵심인 기억과 정체성이야말로 예술과 철학과 문학과 의학과 과학이 손을 잡아야만 파악할 수 있는 융합 지식의 영역이라 본다.


 

허스트베트의 소설 쓰기는 이 융합 지식, 감정과 지성을 통합한 현실의 인지를 실험하는 장이고 허구적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당당히 인지능력의 반열에 올려놓는 실천이며, 여기에서 사변과 정서와 감각이 어우러진 오로지 그녀만의 소설 세계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녀가 1992년에 쓴 첫 소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이러한 탐구의 원점으로서 훗날 이어진 화려한 이야기들의 근원을 되짚어 가늠하게 해준다.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편두통, 그리고 발작적인 읽기와 쓰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한 추도사 중에 발생한 쇼크 이후,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의식의 근원을 스스로 추적하는 과정은 그녀를 다양한 전문 분야로 이끌었다. 이는 학자이자 작가로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영문학 대학원에 다니며, 시를 쓰고, 강박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하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늘 두통에 시달리던 그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여러 분야의 학문적 추구, 픽션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는 <사각형의 신비>, <살며 생각하며 바라보다>, <에로스를 위한 변호>, <이곳이 아닌 저곳>,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트 섹스 앤 마인드>등의 에세이로 표현되었다.

아트, 섹스, 마인드, 그리고 이들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이 곧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다. 정신과 신체, 뇌와 감정, 고통과 만족, 이 모든 것의 경계가 아주 가는 선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은 단 한 분야의 전문적인 에서는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세분화된 영역의 전문가 문화 속에서, 더욱이 전문화된 남성 사회에서 공유된 지식의 부재'큰 슬픔을 느낀다'는 그녀는 자신을 의학의 섬, 인지과학의 섬, 문학의 섬 등 행복한 소수들의 섬을 여행하는 여행자라 불렀다. 이는 현대가 잃어버린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자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소설적 상상력의 근간인 공감의 능력, 르네상스적 공감이 필요하고 특히나 현대에 많은 역할을 품고 사는 '여성'에게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행복한 소수자들의 섬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서 자신이 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것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타인도 자신이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보고 판단하는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이 단일하고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인식에 기반을 두며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로 이해하고 있다.

자아, 역시 견고하게 존재해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바깥을 바라보고 상처를 입고 다치는 자아, 언제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며, 기억 역시 상상력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픽션의 영역이라는 것, 장르와 경계 구분에서 벗어나고 마치 상호주관성이 작용하는 모호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듯한 애매성이 어쩌면 시리 허스트베트가 기존의 문학 산업에서 마케팅 되지 않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왜 시리 허스트베트가 왜 중요한 작가인지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성의 경계 역시 모방과 상상, 동일시를 통해서 그 분리 지점이 사라지고 자기 안의 다수성을 느낌으로써 자유를 획득한다고 보고 있다. 모두에게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 안에 수많은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성의 일부라는 것. 모든 사람이 그만큼 복잡하고 특별하고 다양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특별함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시리 허스트베트의 모호함이라 할 수 있다.

 


확고한 자아를 기반으로 자기 경험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단단하게 돌을 쌓듯 글을 쓰는 폴 오스터의 작업에 비추어 자신은 강물로 표현한다. 의문을 갖지 않는 안전한 자아에서 나오는 글과는 다르게 시리 허스트베트는 끓임 없이 경계를 넘나들며 유동적인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물이 되고 그 물로 창작을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인간만이 거주하는 가상의 공간, 기억과 꿈, 상상이 현실이 되는 재현의 장소이자 모방과 동일시가 일어나는 현실적 시공간으로써 언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곧 읽기와 쓰기가 젠더의 견고한 구분을 이음새 없이 봉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를 허물고 단절을 봉합하는 것이 언어라면 성이나 계급을 구분하고 질서와 경계를 만들고 고착화시키는 것 역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시리 허스트베트는 미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에 주목한다.


 

기억과 꿈, 상상이 현실이 되는 재현의 장소로서의 언어,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또 다른 표현의 양식을 미술에서 발견한다. 그녀는 이를 가상 세계로의 여행이라 부른다. 이 여행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의 양식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시리 허스트베트는 끝없이 경계를 넘어, 사물의 질서를 교란하며 '사이를 유영하는' 여자라 할 수 있다.

형체 없는 유령에 가깝다는 그 느낌, 애매성이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고, 내가 책에 집어넣고 싶은 것이며, 독자가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살다, 생각하다,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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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이고 소설가이며 예술비평가인 시리 허스트베트의 빛나는 에세이집.

예술, , 그리고 마음을 바라보는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시선.

이 책은 뮤진트리가 일곱 권 째 작품으로 펴내는 작가 시리 허스트베트의 에세이다. 인문학자이고 소설가이며 예술비평가인 시리 허스트베트는 문학과 인문학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예술, 성 그리고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예술과 성, 마음에 관한 11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저자는 특유의 명징함으로 화가의 그림에 표현된 여성을 바라보고,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해 논하고, 이 시대의 포르노그래피를 생각하고, 문학에 표현된 젠더의 문제를 고찰한다.

 

피카소, 데 쿠닝, 루이즈 부르주아, 안젤름 키퍼, 수전 손택, 로버트 매플소프, 카를 오베 크나우스고르와 같은 예술가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특정한 예술작품들뿐만 아니라 예술, 문학, 그리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좌우하는 편견들을 비롯한 인간의 인식 자체를 탐구한다.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심도 깊은 지식으로 어쩔 수 없이 불명확할 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로 유영하는 시리 허스트베트만의 지적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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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날 골목길을 걷다 몸이 불편한 장년의 남자와 그를 부축하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아마도 늙은 아버지와 장애를 겪는 아들이겠죠한데 노인이 갑자기 힘에 부치는지 잠시 방심한 순간 아들이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힘겨워하는 노인과 무참한 표정으로 당혹스러워하는 아들을 발견한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요한 걸음에 뛰어가 휠체어를 바로 세우고 몸이 불편한 남자를 부축해서 휠체어 앉힐 수도 있습니다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의 호의와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합니다여기서 조금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죠.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산문집 [말의 정의]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을 전하며 우리가 타인이나 세상을 대하는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오에 겐자부로의 아들은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이 경험은 오에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습니다장애를 지닌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위해 굳건히 최선을 다하는 아내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자꾸만 돌이키고 싶어 하는 남편(화자)의 갈등이 진솔하게 다가왔던 소설로 기억합니다.

 

아들은 말을 하지 않지만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습니다유명한 작곡가가 된 아들은 40대로 접어들었으나 여전히 늙은 부모의 수발이 없다면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진이 났을 때 늙어 힘도 없는 아내와 내가 히카리(아들)를 데리고 대피를 해야 할 경우의 그 아득함"에 대해서 말할 때는 가슴이 먹먹합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두 살로 성인병의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히카리의 비만을 염려해서 보행훈련을 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오에가 머릿속의 산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굴러 다리는 돌에 발이 걸린 히카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죠히카리는 오히려 자신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자신의 실수를 자책이라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와 히카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히카리의 상체를 안아올려 산책로의 목책까지 간 다음 머리를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정도입니다그러느라 두 사람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은 필시 미덥지 않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부인이 뛰어내리더니 "괜찮아요?"하고 말을 걸면서 히카리의 어깨에 손을 댔습니다히카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은낯선 사람이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과 개가 자기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이럴 때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이 에부수수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만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부인이 화가 난 채 가버린 후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시나 자전거를 세우고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발견합니다그녀는 호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내보였습니다그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잠깐 보이기만 하고는 주의 깊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히카리가 일어나 걷기 시작할 때 돌아보자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뿐히 자전거를 타고 떠났습니다그들에게 전해진 메시지는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구급차나 가족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으면 휴대전화로 협조하겠다하는 것이었습니다오에 겐자부로는 아들과 걷는 모습을 보고 떠난 그 소녀의 미소 띤 인사를 잊지 못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에 의하면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있다고 합니다불행한 인간에 대한 베유의 정의는 독특합니다만갑작스럽게 넘어진 것에 동요하는 오에와 히카리도 그 자리에서는 불행한 인간입니다이쪽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의 적극적인 선의를 보여준 부인도 베유가 평가하는 인간다움의 소유자입니다오히려 이런 때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에 스스로 질책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 왕성한 사회에서 오에는 주의 깊고 절도 있는 그 소녀의 행동에서 생활에 배어 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찾아냈습니다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주의 깊은 눈이 그것을 순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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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죠. 릴케와 로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물론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시를 읽어야 했던 가녀린 릴케, 늘 또래의 아이들에게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벨에포크라 불리는 유럽의 황금기이자 격렬한 변화의 세기말에 사춘기를 보낸 릴케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루 살로메, 유년의 왜곡된 모성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를 루 살로메와의 만남, 그리고 위대한 예술혼을 찾아 도스토옙스키와 마주합니다.

 

자신이 예술가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오귀스트 로댕, 자신의 작업은 글자 그대로 일이었고, 그 일에만 파묻혔던 로댕, 머리보다는 손으로 꿈꾸었던 그는 대범하면서 호색적인 매우 남성적인 사내였습니다. 주류 미술계에 속하지 않았던 로댕, 학교와 '예술'이 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석공의 손놀림과 자신만의 시각이 그를 위대한 조각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진짜들 사이에서 진짜처럼 느끼고 진짜로서 존재하기를갈망했던 릴케가 로댕을 만납니다.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헤맸던 릴케는 로댕에게 예술뿐만이 아니라 삶의 비의 같은 것들을 자연스레 전달받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명성은 새로운 이름에 들러붙는 모든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정반대의 기질을 갖고 있었던 두 사람, 그러나 예술은 예술을 알아보는 법이겠죠. 높은 산은 자신만큼 높은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일과 삶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 예술가와 조력자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각자의 예술을 일구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로댕 또한 이 낯선 릴케에게 섬세한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 둘의 관계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별을 하게 되죠.

 

릴케는 자신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적어나가면서 비로소 한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갑니다. 릴케가 로댕으로부터 받았던 '생의 에너지'는 곧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남아 삶의 의미를 찾는 청춘들에게 답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릴케의 시 전문과 책[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그 누군가의 삶이라도 삶은 끊임없는 변화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진정으로 삶다운 것이라 하겠죠. 릴케와 로댕의 두 예술가가 전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였습니다.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


무르익는 과실 같은 눈이 머무르던

아폴로의 전설적인 머리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토르소는

지금도, 마치 등불처럼, 내면에서 피어 나오는 빛으로 가득하다,

거기서는 그의 시선이, 이제 낮춰졌으나,

환히 빛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융기한 가슴이 너를 황홀하게 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미소가 평온한 둔부와 허벅지를 지나

생명의 불길이 타오르던 그 검은 중앙부를

향하지도 못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돌은 투명하게 쏟아져내린 어깨 아래서

볼품없게 보일 것이고

들짐승의 털 가죽처럼 반짝이 지도 않을 것이며,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

마치 별처럼 피어나지도 않으리라, 여기서 너를 보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석상은 볼 수 있는 눈도, 말할 수 있는 입도, 생식할 수 있는 성기도 갖고 있지 않다. 말테가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듯, 그것은 내면에 자신의 탄생을 지니고 있다. 아폴로와 릴케가 그들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면서 서로를 탐색할 때, 릴케는 그 경험을 시로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하지만 이제 릴케에게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눈을 원했다.

 

단순히 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가 되고 싶었다. 아폴로가 그에게 말을 걸어온 순간, 릴케는 대상과 관찰자의, 작가와 독자의 공감적 결합을 완성한다. 이 새로운 존재는 이제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제 완전체였다. 릴케는 예술을 인정했고 그 신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달라졌다."(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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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함.

우아함이 삶에 필수적인 것일까요?

어쩌면 일상 기술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련된 행동이나 잘 다듬어진 장식만으로 우아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정도 우아함을 염두에 두고 사는 걸까요? 글쎄요...

우아함의 반대말을 천박함이라 할 수 있다면

지난 해 말에 우리는 천박함의 극치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아하지 않은 시대.

 

이제 바야흐로 품격과 품위의 시대로 들어서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이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도 이런 목마름 아닐지요.


"우아함이란 외모나 세련미와는 아무 상관없으며전적으로 연민과 용기의 문제다."

 

 

우아함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우아함을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우아함을 왕실 결혼식이나 국빈만찬이나 오페라 극장 같은, 지위 높은 사람들의 삶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 가령,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세련된 단정함에서 우아함을 보는데, 그녀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잘 다듬어진 인상을 주어야 했다. 그런 종류의 우아함에는 진주 표면처럼 차갑고 광을 낸 것 같은 특성이 있다. 그런 장식적인 우아함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익한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우아함이란 외모나 세련미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전적으로 연민과 용기의 문제다."

 

<우아함의 기술>은


탁월한 기량에 신체적 우아함까지 갖춘 몇몇 운동선수들, 대중의 이목을 끌지 않고도 자신의 미덕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보기 드문 셀러브리티들, 전쟁터와 같은 주방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 요리사들, 소박한 우아함을 갖춘 평범한 사람들, 유연한 우아함을 갖춘 정치인들, 그리고 유명 배우나 클럽의 스트리퍼들이 보여준 예기치 못한 우아함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소소한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우아함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면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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