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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ar82] 501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리뷰

블로그를 하면서 나의 독서력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모래알 한 움큼 가지고 해변에서 가장 빛나는 걸 가지고 있다고 자만했었다. 진짜 빛나는 모래는 내가 가지 않은 길에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도서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중학교 동창은 나를 기억하기를, [시몬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여러 종류의 잡지를 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 중 이 책에 대한 기사를 보고 친구 생일에 선물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이 친구가 성장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 대한 기억이 한 권의 책이란 사실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나는 그때부터 도서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모든 작가를 훑어보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알지 못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어가는 일이 더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있는 작가의 작품을 한 작품이라도 읽는다면 총 몇 년이 걸릴까? 나는 문뜩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흥미를 가득 가지게 되었다.

 

몽테뉴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다. 그의 작품 중 <수상록>은 내가 마르고 닳도록 읽은 책이니 말이다. 사람보다는 사색을 즐기고 자연을 벗 삼아 사고하는 그의 세세한 삶에 대한 성찰이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헌데 그는 무를 먹으면 소화불량에 걸리는 것까지 글로 쓸 정도로 자아도취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사실 책을 통해 진작 알아챘던 것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우정에 대해서, 거짓말에 대하여, 후회에 대하여, 자만심에 대하여, 분노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말에 내 생각을 비추는 거울임에는 분명하다. 


 
“굽이치는 소용돌이와 물기둥처럼 씩씩거리며 끓어오르다 급기야 우리를 빨아들인다.”라고 토스토엽스키의 소설들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소감이나 행복한 왕자라는 단편으로 기억하는 오스카 와일드가 ‘풍기문란’으로 투옥될 정도로 자유를 넘어 퇴폐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크레타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무덤 묘비명은 그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사상처럼 “나는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자유롭다.”이라고 한다. 그리고 환상과 우화적 성격이 짙은 마술적 리얼리즘 계열의 남미 작가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제 사라마구의 마지막 줄은 <80대의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였지만 이미 그는 고인이 되어 버린 아쉬움이 짙었다.
 

연대별로 분류한 작가와 출생과 스타일 및 장르 그리고 대표작과 덧붙이는 멋진 일러스트 사진들 모두 간단하지만 핵심은 분명했다. 익숙하게 보지 못하는 작가들의 사진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501명이나 되는 작가들을 선정함에 있어서 공정함과 신중함이 곁들어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1960년 이후 작가의 경우 J.K.롤링 경우는 의아했다. 헌데 다시 생각해보면 1960년 이후 소개된 작가는 모두 7명. 그건 501명 이후에 계속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그의 선정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1920년에서 39년 사이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읽어왔고 좋아해왔다는 것이다.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었는데, 나의 독서력을 파악할 수 있는 점이 더욱 매력이었다.


 

세계문학은 읽기도 즐겁지만 소장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품 안에 있는 책들이라는 건, 개인에게 굉장한 위안과 힘이 될 테니 말이다. 이 모든 작가들의 책을 가질 수는 없지만 단 한 권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리라. 무거운 만큼 보는 방법도 다양할 수 있고 읽는 즐거움 외에도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어서 앞으로 독서를 하는데 있어 좋은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된다.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 했다. 위대한 작가는 이처럼 매번 늘어나고 있다. 갈라지고 갈라져서 이제는 이미 방대한 정보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언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찾아야 할지는 다들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않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할수록 우리에게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이 책은 전 세계의 비평가, 작가, 교사, 기자 등으로 구성된 필진이 쓰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비교문학교수인 줄리언 패트릭이 책임 편집한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으라고 알려주지는 않지만 각 작가가 왜 위대한 작가로 인정을 받았고 그들의 책이 왜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즉,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세워진 표지판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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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 위대한 작가들/줄리언 패트릭 책임 편집/김재성 옮김/뮤진트리

예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세계문학에 대한 방대한 정보와 텍스트가 인터넷상에 존재하고 있다. 세계 문학의 흐름은 작가론과 작품론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비로소 일목요연해지는데 자판을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원하는 정보는 컴퓨터 화면에 뜨게 된다. 그렇더라도 더더욱 넓어져만 가는 세계 문학의 영토 안에서 작가와 작품을 취사선택하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의 비평가, 작가, 교사, 기자 등으로 구성된 필진이 쓰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비교문학교수인 줄리언 패트릭이 책임 편집한 ‘501 위대한 작가들’은 어떤 작품을 읽으라고 알려주지는 않지만 지적인 독서를 가능케 하는 길라잡이다. 이 책의 장점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에서 1977년 생인 나이지리아 출신 소설가 치마만다 아디치에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501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망라하면서 그들이 왜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았고, 그들의 책이 왜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압축하고 있다는 데 있다. 수록된 작가에 대한 일종의 해제는 비록 1페이지라는 제한된 지면밖에 할애되지 않지만 곧장 핵심을 찌른다.

헨리 밀러를 펼쳐본다.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북회귀선’은 1930년에 프랑스로 이주한 헨리 밀러가 파리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던 중에 씌어졌다. (중략) 밀러는 뉴욕의 웨스턴유니언사에서 일했던 1920년대의 뉴욕생활을 그린 ‘남회귀선’을 출간한 직후 파리를 떠났다. 그는 동료 소설가이자 친구인 로런스 더럴과 함께 그리스에서 6개월 동안 지낸 후 그리스와 그 나라의 과거를 깊이 있게 탐색하여 단순히 기행문이라 하기에는 훨씬 통렬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걸작 ‘마루시의 거상’을 썼다.” 사진도 덧붙이고 있는데 헨리 밀러가 아내 이브 매클루어와 함께 스페인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은 압권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예감한 듯 빠른 속도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는 학교 잡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에 복무하면서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고 노랫말을 지었으며 ‘낭만적인 이기주의자’라는 장편 소설을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중략) 그는 문학을 통해 미국에 재즈 시대의 씁쓸한 삶을 두려움 없이 드러내는 자유를 선사했다.”(스콧 피츠제럴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피츠제럴드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첫 문장은 이 책의 필진들이 얼마나 공을 들여 글을 썼는가를 알게 한다. 또 “매력적이고 생기발랄한 작중 인물들은 종종 지나친 무절제로 인해 실패와 파국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데, 이는 피츠제럴드 자신의 삶에 대한 우울한 비판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촌철살인의 문장은 인터넷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코멘트이다.

501명의 작가 가운데는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도 상당수 끼어있다. 이는 구미권에서는 이미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올라 있는 이들의 작품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탓에 기인한다는 반성을 우회적으로 촉구한다. 예컨대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레크’의 경우다. “페레크는 앞뒤로 읽어도 같은 말이 되는 회문,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낱말 퍼즐, 십자말 퍼즐 등 소규모의 실험 외에 외부로부터 적용된 틀을 사용한 대규모 작품도 완성했다. 가장 악명 높은 작품은 ‘실종’으로 알파벳 ‘e’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는다.”

가장 젊은 작가로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출신 치마만다 아디치에 역시 생소한 작가로, 이렇게 언급되고 있다. “아디치에는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사실주의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내게는 거의 자동적으로 정치적 역할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 현대 나이지리아 문학을 재구성하는 역할이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단점도 있다. 구미권 작가들이 주로 소개된 반면 동양쪽 작가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져 있다. 일본 작가는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하루키, 이시구로 가즈오 등 3명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이 책이 출간된 게 2008년 5월인데도 한국 작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를 필진들의 편식 증세로 몰아부치기 전에 우리 작가들이 아직 외국의 문학계나 비평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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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당신에게...<고독의 심리학> 

빨강머리 앤

 

혼자다. 외롭다. 무료하다. 할 일이 없다. 하루 종일 핸드폰 벨 한 번 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고독하다. 무엇이 고독의 사각 링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을까. 세상이다.
적어도 <고독의 심리학>을 보기 전까지 지금의 고독한 나를 만든 것은 세상이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왔다. 알고 보니 그것은 구차한 자기변명이었다. 자기보호와 자기폄하로 똘똘 뭉친 내 고독의 실체를 이 책을 통해 철저하게 깨부쉈다고 하면 과장일까.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 중인 책의 저자 제라르 마크롱은 “혼자이기 때문에 고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고독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혼자라는 느끼는 것이다.”라고 고독에 허우적대는 모든 이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않으며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 감정이다. 고독은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모든 신경세포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고독한 사람은 사회적/애정적으로 결핍된 인간이라 속단한다. 보통은 고독감과 우울증을 동일 의미로 여겨왔다.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독의 정의다.

반면 <고독의 심리학> 저자는 “고독은 사람들이 자아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라고 재정의 한다. 우울한 감정 또한 어느 정도 고독과 일맥상통하는 감정이긴 하나 고독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반응 중 하나일 뿐이다. 책에서 고독은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분석된다. 불만족스러운 사회관계로 인한 고독과 유년기 경험에서 파생된 감정의 기억이 몰고 온 고독으로 나뉜다.

먼저 사회적 관계에서 파생된 고독감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 찾아온다. 예를 들면 연인과의 이별 후 느끼는 고독과 감정적 고통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회적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고독감이 심각한 이유는 대인관계 기피와 사회성을 앗아간다는 데 있다. 상대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타인과 관계 맺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고립감은 강해지고 고독감은 지독해진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원망하며 타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 고독감의 무의식적 원인이 되는 유년의 경험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엄마와 애정 어린 관계 형성을 못했거나, 부모의 강한 요구 앞에서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며 성장했을 경우, 자존감을 갖지 못하며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의존적 성향을 배가시켜 성장 후,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세계 유명 정신분석학자들이 내놓은 고독과 심리적 불안감에 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독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답을 내리고 있다.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고독은 우리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에 거리가 생겼을 때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이다.”

고독은 분명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자, 회피하고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럼에도 고독을 잘만 활용하면 좀 더 안정적인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고독은 내면의 자신과 실제의 내가 분리되면서 파생되는 자연스런 감정이라는 저자에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의식적/의식적으로 억눌러왔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내면의 자신이 자신에게 그것을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감정이 바로 고독이다. 고독감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고, 자아학대를 하기보다 어떤 이유로 고독감에 휩싸였는지를 자신에게 질문한다면 고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우선, 메모와 일기 등을 이용해 자신이 느끼는 다양한 고독의 감정을 표현해보자. 그럼으로써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모색 가능하다. 또는 고독감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내면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경청하는 시간으로 활용해도 좋다. 어떠한 감정적 제어나 판단을 하지 않고 내면의 자아를, 관찰하는 기분으로 고독감이 불러오는 기억과 감정의 상태를 하나하나 분리하고 분석한다. 여기서 도출된 감정과 느낌, 기억들은 대부분 성장하면서 경험한 것에 의해 형성된 ‘도식’적 ‘자동반응’이다. 도식은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겪으면서 형성된 감정이다. 이것은 곧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자동반응은 그 신념에 따라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의 덩어리다. 신념처럼 굳어져 자신이 불편하거나 불안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다스려야 한다. 즉, 고독은 필요이상으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감정을 소비함으로써 더 짙어 질 수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고독을 예방하는 방법으로는 다이어리 작성하기가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빠짐없이 적고 시시때때로 체크해가면서 오늘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상의 빈틈을 파고드는 고독감을 어느 정도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고독감을 오래 느끼지 않을 뿐더러, 그 고통도 약하게 느끼는 편이다. 사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독을 예방하는/대처하는 방법은 많은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지독한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분명한 것은 고독이 극복 가능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고독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누구나 고독을 맛본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고독해질 수 있는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독감을 키우는 것은 온전히 자기 책임이다. 때문에 고독을 회피하기보다 고독을 자아실현의 긍정적인 동기부여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생기는 거다. 고독은 자신이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데서 촉발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때로는 고독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고독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보내는 자기 내면의 신호다.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이 남들과도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고독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독에 맞설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는 <고독의 심리학>을, 그래서 고독한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가보다. 매번 고독감에 패해 패잔병처럼 타인과 세상을 원망하는 바보짓을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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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녀 2010-07-16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겠어요..심리학 책 요즘 읽고있는 중이라....
 

우리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트레제게 | 2010-07-04 |


우리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혼자 있는 법을 배워라!



 

우리는 얼마 전 유명 연예인의 자살을 목도하였다. 베르테르의 효과처럼 몇 해 전 부터 계속된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한 원인이 우울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는 왜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했을까.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 누구나가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아무리 거부하고 뿌리치려 해도 내 안에서 밀쳐내지 못하는 내면의 심리학적 요소에서 파생된다. 수없이 많은 물리적, 정신적 좌절과 함께 동반하는 고독은 인간 집단에서의 이탈에 대한 관습적 공포로부터 기인하여 고독과 공포라는 밀접한 관계로 발전, 늘 반사적으로 인간의 뇌리에 각인되어 왔다. 즉, 고독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런 종류의 공포심이 발현하는 것이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슨 존재 가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이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물음은 나를 진일보시켜 현재의 삶을 의식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혹은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려 창조와 발명을 거듭하는 것도, 안전과 행복의 추구를 위해 환경을 변화시키는 일련의 행위들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고독이다. 현대 문명에서 가장 큰 문제는 환경오염, 가정의 붕괴, 과학이 아니라 바로 고독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로 공포 중에서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공포, 자의든 타의든 타인과의 이격에서 비롯된 공포가 고독의 공포라고 뭇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고독의 순간에 우리는 자주 나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대면하게 된다. 남들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무력감, 제 삶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생각, 상황에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 때로는 죄책감, 후회, 수치심, 자신감 상실에도 시달리기도 한다. 이처럼 고독의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보통 고독의 순간은 우리가 혼자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p.63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독으로 고통받고 외롭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많고 즐긴다는 사람은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 살면서 고독과 싸워본 일이, 즐겨본 일이 있는가. 융은 프로이트와 학문적으로 결별한 후 자신에 대해 끝없는 몰입과 침잠을 통해 '심리적 원형'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설을 정립하였고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으로 말미암은 신체적 유폐가 자신에 대한 몰입을 가능케 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이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고독이라는 시간이 천재적인 강렬한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나열했을 때, 우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반사적으로 느끼는 회피와 고통의 의식으로 고독을 모면하려는 의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하려면 고독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독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고독을 회피하는 것은 나 자신을 회피하는 것임을 [고독의 심리학]에서는 재차 강조하고 있다. 고독을 통해 현실과 대면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내적인 성찰과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길, 어쩌면 고독이라는 일련의 과정들이 사색과 성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책 소개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고독의 심리학]은 심리적 고독감을 극복하는 실천 지침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기존 허상을 쫓는 심리학 치유의 책과는 다르게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구체적이다. 논문과 같이 이론 위주의 책을 접하는 독자들이 흔히 느낄 수 있는 지루하고 상투적인 논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고독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심리학 차원의 간단하고 필수적인 이론들이 오히려 생소함과 무지함을 일깨운다. 특히 제3장 [나를 발견하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의 현실과 실용과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죽음은 그 어느 하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닫는 위태로운 외줄타기의 일직선 상에 존재하는 요소로만 알았다. '가장'이란 이유로 힘들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앓는 '가면 우울증'을 지닌 현대인, 외로움 탓에 고통 받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에 늘상 찾아오는 고독. 결국 우리는 혼자 있는 방법, 고독과 함께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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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21:15]

‘1960년 1월 4일 오후, 수많은 알제의 기자들이 카뮈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리옹가 93번지 아파트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아직 아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음을 알고는 주소를 잘못 안 것 같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카뮈의 마지막 날들’-조제 렌지니·문소영 옮김)

파리 근교의 한 국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카뮈의 소식이 전해진 알제의 고향집 풍경이다. 당시 카뮈는 47세였다. 3년 전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카뮈는 인생의 황금기가 보장되어 있을 때 세상을 떴다. 그런 만큼 북아프리카 알제에 살고 있는 카뮈 어머니에 대한 취재는 기자들에게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예상치 않은 방문에 뜨악한 눈을 치켜뜬 어머니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알제의 기자들에게 카뮈는 살아있을 때나 사후에나 뉴스의 진원지였지만 그 어머니 앞에서는 저널리즘보다 휴머니즘을 선택했던 것 같다. 카뮈의 어머니는 문맹에다 거의 귀머거리 상태였다. 자식의 죽음을 통보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도 난처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유난히 사망 기사가 많았던 비탄과 비통의 계절을 통과해왔다. 4·19, 5·18, 6·25로 이어지는 비극의 기념일 앞에 우리는 3·26 천안함 침몰의 역사를 보탤 수 밖에 없다. 카뮈의 경우가 개인적 죽음이면서도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면 천안함 희생자들은 사건 발생 순간부터 공적인 죽음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국방의 의무를 짊어진 작전 중의 병사라는 점에서 그들은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앞서 국가의 아들이었다.

이에 덧붙이자면 그들에 대한 추모 역시 국가 차원이 먼저였고 희생자 가족들의 추모는 그 후순위로 자리매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체 발견 전에 보상과 장례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그들에 대한 추모는 이미 가족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으로 번져들었던 것이다. 죽음의 분배 혹은 슬픔의 분배라고 할 만하다.

국가 차원의 보상과 묵념이 그들의 영정 앞에 바쳐졌지만 어머니의 슬픔은 줄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는 슬픔이라는 표면적 어감보다 더 큰 침묵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 차원의 거대한 묵념이 끝나고 나면 곧 시대가 바뀌게 되리라는 것, 즉 아들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가 차원의 추모와 보상이 이루어졌다 한들 희생자의 어머니들은 자식 잃은 슬픔이 엄습할 때마다 자신에게 억압된 것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순간들은 이렇듯 국가의 통제밖에 있다.

49재도 끝나고 보상도 매듭지어지는 단계다. 그러나 슬픔은 해소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 차원의 예우나 보상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숨 앞에서 티끌처럼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어머니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적 추모 앞에서 억눌러야 했던 개인적 슬픔,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양심적 부당함이나 불편함에 대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적 추모가 끝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 지점이 감성의 회복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알 수 없는 정보 속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는 유작이 되고 만 미완성 원고 ‘최초의 인간’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여기서 당신이란 문맹의 어머니다. 카뮈는 모든 명예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마음속은 알제의 여전히 낡고 좁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귀머거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들, 아니 자식의 모든 삶은 어머니에게 헌정된다. 지상에서 들이쉬었던 마지막 숨까지도.

정철훈 문화부장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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