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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어떤날  2010.5.9 12:29 

여느때처럼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를 먼저 읽는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사춘기 시절, 밀란 쿤데라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사숙...'이란 대목에서 잠시 주춤...

만만치 않은 두 작가를 사숙했다니, 책을 받아봤을 때의 첫 인상이 조금은 무거운쪽으로 변한다.
나 또한 좋아하는 작가들인지라, 미리 도착한 책을 여러 사정으로 늦게야 손에 들게 되면서 부랴부랴 읽어본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설이었다.

다 읽고 난 뒤 보니 나는 중간 중간 이런 메모를 해두었더라.

픽션+논픽션, 풍자+성찰, 인문학적 글쓰기+옴니버스 영화, 커트 보네거트+밀란 쿤데라, 조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
 

'디에고는 여전히 모험 그 자체요, 세상의 끝이다'
'세상의 끝'이므로 '종착지'다.
그것도 '표류하는 영혼들'의, 어찌보면 현대사회 구성원 모두가 해당될...

중반 이후부터 버릇대로 문장이나 문단에 빗금을 그은 부분이 많아졌는데,
문장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을 때처럼 흔하지 않게 내게 건네는 충고들 같아 되새김질을 한 곳들이었다.
솔직하고 과감한 채찍질이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마다가스카르, 프랑스와 프랑스인 그리고 아시아계 소수로 대변된 서구사회, 국제협력기구에 대해
알고 있거나 알지 못했던, 그래서 '오해'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였던 사실들을 수정해가게 되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사회참여적이면서도 현대사회 속 개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 본 의미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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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주소 : http://blog.aladin.co.kr/729034103/3716199  글쓴이 : 필리아

“죽음은 소리 없이 엄습하고 피는 조용히 흐른다.”  - 오델로 中에서

‘카뮈’하면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담배 한 대를 들고 있는 비스듬한 시선”의 익숙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애정과 무관심이 동시에 깃들어 있는 시선”,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시선에 깃든 무관심의 정체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1960년 1월4일 파리근교‘프티-빌블르뱅’에서 자동차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그 시간에 이르는 이틀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카뮈의 작품들과 작품 속 인물들, 그리고 그의 친지와 친구, 동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카뮈에 대한 그 어떤 글들보다 이해와 애정이 깊게 담겨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친구이자 출판업자인‘미 셸 갈리마르’가족과의 파리를 향한 이틀간의 자동차 여정 속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의 추억과 흡사한“기억과 재구성된 기억의 침묵사이에 고해”하듯이 과거의 시간을 풀어놓는다. 열병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어머니의 침묵’은 이 작품의 가운데 놓여 카뮈의 인생을 지배했던 삶의 지향점을 풀어놓는다. 아마 작품 도입부의 표현처럼 “어머니와 함께 보낸 기나긴 무언의 시간에서 비롯된”‘선천적인 불구’에 대한 해명이라 하여야 할까?

카뮈에게‘침묵’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소리를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언어를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침묵,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헛된 연민 뒤에 갇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 말을 하고 싶을 때조차 결국 체념의 벽을 넘지 못하던 어머니의 고통에서 말과 침묵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카뮈를 발견하게 된다.
문득 이 작품을 침묵의 해석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알제리의 분리독립과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서로 다른 민족의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갈등하던 알제리의 프랑스인인‘카뮈’의 고뇌, 여기에 더해‘샤르트르’를 비롯한 파리 사교계의 비난과 조롱은 그의 침묵을 더욱 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그의 작품『이방인』의‘뫼르소’가 재판관의 노여움을 증대시킬까봐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것과, 양로원에서의 어머니 장례식 날의 자신의 모습과 행위처럼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는 진실함을 내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카뮈의 주요 작품들인 『전락』『페스트』『이방인』『안과 밖(表裏)』등의 인물들에서 카뮈의 전형을 찾아내고, 카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절대로 혀가 할 수없는 그 이상의 의미로서의 침묵에서부터 삶의 역경을 잠재우는 행복한 침묵, 내 뱉어지지 않은 수많은 말을 담고 있는 고통스럽고 귀중한 침묵을 통해 “소리나 감정의 부재가 아닌 가득 들어차 있는 상태”라는 것을.

지나가는 풍경과 상황,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상상의 공간과 마주하며 눈앞에 현실이 펼쳐지듯 이 작품이 그려내는 그 날의 카뮈를 보는 것은 감동이지만 그의 죽음을 알고있는 독자로서의 애잔함이 내내 콧등을 시큰거리게 하고 왠지 어떤 시원적인 고독함이 내내 가슴에 엉겨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다닌다. 그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우리네들에게‘부조리의 시간’과‘반항의 시간’으로서만 그의 작품을 기억하게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그에게 시작되고 있었음을『최초의 인간』이라는 완성되지 못한 그의 작품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이 소설에서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하는 그의 야심작으로 준비되던 작품을 우린 접할 길이 없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대변되는 알제리의 사랑, 그리고 그 속의 서민들의 침묵으로부터 도출해야 했던 회고로서 그가 펼쳐냈던 그간의 기억의 편린들을 완결하는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예기치 않은 운명을 진정 애석하게 한다.
어린시절의 가난과 그 가난한“빈민가의 서민들이 침묵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최초의 메아리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표시인 존재, 밀봉된 상자...”는 벙어리인 어머니이자 고향 알제의 벨쿠르 언덕과 아르카드 숲,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있는 알제리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최연소 프랑스인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는 침묵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감정적 비약을 담은 기사에서부터 시기와 질투로 졸렬한 비난의 앞장을 섰던 엘리트주의자들의 대표인 샤르트르같은 좀스런 사상가까지 “암담한 자기도취와 상처받기 쉬운 나약함이 한데 뒤섞여 있어서...省略..”라고 카뮈라는 개인에 대한 공격을 해대었으니, 그 극단적 야비함에 대해 카뮈는 정말 아무런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외롭고 감각적인 삶의 변두리에서 자신이 살고 떠들고 소외되는 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사람, 또한 침묵의 의미를 알았던 20세기 실존주의의 커다란 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의 마지막 날들의 소묘는 가난한 프랑스인 아들에 관한 아름다운 서사로 가슴 깊이 새겨진다. 어쩌면 이 작품이 바로 “어머니의 존경할 만한 침묵에 내재해 있는 사랑이나 정의를 되찾으려는 한 남자의 노력을 작품의 중심에 놓으리라는 구상”이었던‘카뮈’가 미처 완성치 못한 『최초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마치 자전소설 같은, 그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고 작품 속 주인공들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진정 유효한 완성도 높은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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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주소 : http://blog.aladin.co.kr/775287143/3710960  글쓴이 : bookfest

[리뷰]카뮈의 마지막 날들

[카뮈의 마지막 날들]은 카뮈 사후 50주기를 맞아 카뮈가 죽기 전 이틀 동안의 여정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저자는 카뮈의 작품과 가족, 친구, 동료들의 증언과 방대한 양의 자료 등을 토대로 인간 카뮈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카뮈의 죽음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다양한 문화와 계급을 위한 문학, 모두를 위한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알제리의 가난하고 초라한 프랑스인의 화려하지만 고독한, 그리고 당당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그리하여 완벽한 여정을 보여준다.

어머니, 혹은 알제리와 프랑스

카뮈는 1960년 1월3일 루르마랭의 자택을 나와 파리로 향한다. 알제리 독립운동에 따른 알제리-프랑스 사이의 폭력적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한 카뮈는 대중의 몰이해와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의 시기와 질투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폭력과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상주의에 대한 거부를 자기 철학으로 삼은 카뮈에게는 고통의 시기였다.

알제리에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알제의 좁고 낡은 아파트에 홀로 기거하고 있다. 귀머거리에 말도 잘 못하는 카뮈의 어머니가 그녀의 어머니에 맞서 ‘카뮈는 학교에 가야해요’라고 외치던 장면은 가슴 뭉클하다.
그녀는 자식이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로 성공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상을 탔다는 것에 감동했을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기자들을 부담스러워했을 뿐이다. 프랑스로 건너와 성공한 아들 곁에서 노년을 보낼 것을 끝내 마다했던 어머니였다.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폭력의 종식을 위한 카뮈의 노력은 대중의 몰이해와 파리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산다.
카뮈에게 알제리와 프랑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그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어야 했음에도 침묵을 택한다. 혹자는 그의 침묵이 알제리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안전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귀머거리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그 침묵,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이 위협적인 현실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그를 키워낸 곳은 알제리였다. 그는 프랑스의 식민정책과 탄압에 대해서도 거부했으며 알제리 독립 후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제국주의와 구소련의 반서방주의 사이에 놓이게 될 불안한 알제리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드러내면서 알제리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백기완 선생처럼 ‘제국주의자의 오만방자함‘이라 할 수도 있으나, 정의와 자유의 이념으로 희생되는 수많은 약자들이 언제나 그의 관심사였던 것은 이 소설 속의 어머니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어머니, 알제리, 프랑스 이 세 개의 단어로 압축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당시의 카뮈를 감싸고 있었던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를 대하는 파리 지식층의 “왕따”에 상처받은 한 남자의 연약한 그림자가 있다. 최고학력자를 위한 철학을 한다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은 카뮈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았다. 그가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카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존재자체가 가난이었고 그로부터 삶을 배웠으므로.
노벨상 수상 이후 더욱 거세진 비난에 카뮈는 흔들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스스로 해가면서 그는 전쟁터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그가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최초의 인간”을 붙들고 있었다. 바깥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그는 알제리와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가난했지만 생으로 충만했던 그 기억들 속으로.

이렇듯 그를 둘러싼 묵직한 안개 속을 뚫고 그의 자동차는 파리를 향한다. 속도에 대한 기피,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고 평소 말했던 카뮈는 결국 그 스스로 부조리를 입증하고 만다.

권력과 정치, 위선과 타협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저항, 신과 이성 그리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불신은 그를 진정한 자유인이자 현실주의자로 자리 매김한다. 항상 고독했던 남자, 그러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들과 언제나 연대했던 남자, 카뮈가 1960년 1월4일 플라타너스 그늘아래 미완의 “최초의 인간”과 그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남기고 사라져가는 이야기. [카뮈의 마지막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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