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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그는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가 진동을 느끼고 누군가의 느닷없는 등장에 놀라지 않게 늘 하듯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문을 열고는 잠시 꼼짝 않고 서 있다가 달려가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포옹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포옹이 길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약간 위로 물러난 그는 어린 시절의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그 미소에 어머니는 입술을 약간 모으는 것으로 답했는데 그런 표정은 두 사람이 똑같았다. 그 표정은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그 기쁨은 언제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졌다가 갑자기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알제리의 가을빛처럼 서서히 희미해졌다. 어머니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의자에 앉을 때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던 그 기념할 만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했다. 신문에서 오린 사진들을 서류가방에서 꺼내 보여드렸다.거기에 칼라가 접힌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그가 있었다. 그리고 긴 드레스를 입은 프랑신과 왕이 있었다. 진짜 왕이! 스웨덴 왕이!

어머니는 태연했고 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따라가고 있었으나 그 내용을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낯설지 않은 방심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조그만 하얀 손수건을 한 손가라가에 감았다가 다른 손가락에 감기를 반복했다. 그런 행동은 뭔가 불편하거나 불안할 때 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손으로 이야기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베르....니 바아지 구겨졌어. 다림질해야 해. 벗어!"

어머니가 식탁 위에 덮개와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누런 낡은 천을 올려놓자, 알베르는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물을 묻힌 천이 닿자 다리미는 곧바로 성난 고양이 숨소리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살짝 탄 눌은 냄새와 겨울 연통에서 나는 냄새가 풍겼다. 알베르는 속옷에 양말과 구두 차림으로 거기 그렇게 있었다. 다 피운 담배를 끄면서 파리의 중상모략가들 중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림질을 끝내고 어머니는 바지를 의자 등받이에 조심스레 걸쳐놓았다. 바로 입어버리면 다시 주름이 생기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월요일 아침이면 다림질된 깨끗한 옷을 얼른 걸치고는 일주일에 한 번 새옷 느낌이 나는 바지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기분좋은 냄새를 맡았던 그때처럼 해보고 싶었다...

(카뮈의 마지막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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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0-05-1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바라보는 모자의 시선이 뭉클했어요...

뮤진트리 2010-05-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런 걸 영화의 장면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요?..
 

 
서울 국제도서전의 주빈국 행사로 열린 카뮈 좌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좌담회 참여 후에 카뮈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자리였습니다.
카뮈 전공자이신 두분의 국내 학자와 프랑스에서 오신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출판사의
영미문학 책임편집자라는 여성분이 카뮈에 대한 애정 가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뮤진트리 블로그의 카뮈와 관련한 포스트들에 거의 다 들어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대중적인 좌담회이다 보니 전문적으로 문학과 사상을 논하긴 힘들었을 듯 합니다.
상처받은 남자, 오해와 경멸, 멸시와 오명에 휩싸였던 불행한 남자의 열정적인 삶에 대해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재조명과 팡테옹이전문제, 사르트르와의 차이점과 복잡했던 관계, 파리 지식인 사회와의 단절과 소외 등이 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이념이 아니라 인간을 택했던 남자. 카뮈. 매우 포괄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근간으로 삼다보니, 파리의 철학자들로부터 매우 아마추어적인 철학자 혹은 순진한 친구라는 멸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여기에 더불어 출신의 문제까지 겹쳐있구요.
올해도 어김없이 카뮈 사후50주년을 맞아 쏟아진 기사의 무게를 재어보면 수백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카뮈의 승리라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역사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고요. 그러나 이 또한 카뮈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듯합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을 활용했는데요, 사르트르는 '증오'의 개념,카뮈는 '인간'의 개념으로 풀었는데, 오해와 논란의 소지가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토록 하겠습니다.
사르트르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블로거들의 지속적인 독서와 탐구로 풀어야 할 듯하구요.
좌담회는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의외로 젊은 대학생들이 많았고요.신선했습니다.
이 자리를 정리해보면서 드는 생각은 카뮈의 현재성에 대한 부분인데요, 프랑스에서의 재조명 등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사회에서의 평가와 한국지식인 사회의 연구 성과 내지는 재평가 작업 등은 숙제로 남겨진 상황인 듯합니다.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영미문학 책임편집자인 크리스틴 조디스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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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제도서전의 주빈국 행사로 열린 카뮈 좌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좌담회 참여 후에 카뮈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자리였습니다.
카뮈 전공자이신 두분의 국내 학자와 프랑스에서 오신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출판사의 영미문학 책임편집자라는 여성분이 카뮈에 대한 애정 가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뮤진트리 블로그의 카뮈와 관련한 포스트들에 거의 다 들어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대중적인 좌담회이다 보니 전문적으로 문학과 사상을 논하긴 힘들었을 듯 합니다. 

상처받은 남자, 오해와 경멸, 멸시와 오명에 휩싸였던 불행한 남자의 열정적인 삶에 대해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재조명과 팡테옹이전문제, 사르트르와의 차이점과 복잡했던 관계, 파리 지식인 사회와의 단절과 소외 등이 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이념이 아니라 인간을 택했던 남자. 카뮈. 매우 포괄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근간으로 삼다보니, 파리의 철학자들로부터 매우 아마추어적인 철학자 혹은 순진한 친구라는 멸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여기에 더불어 출신의 문제까지 겹쳐있구요.

올해도 어김없이 카뮈 사후50주년을 맞아 쏟아진 기사의 무게를 재어보면 수백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카뮈의 승리라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역사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고요. 그러나 이 또한 카뮈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듯합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을 활용했는데요, 사르트르는 '증오'의 개념,카뮈는 '인간'의 개념으로 풀었는데, 오해와 논란의 소지가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토록 하겠습니다.

사르트르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블로거들의 지속적인 독서와 탐구로 풀어야 할 듯하구요. 

좌담회는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의외로 젊은 대학생들이 많았고요.신선했습니다.
이 자리를 정리해보면서 드는 생각은 카뮈의 현재성에 대한 부분인데요, 프랑스에서의 재조명 등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사회에서의 평가와 한국지식인 사회의 연구 성과 내지는 재평가 작업 등은 숙제로 남겨진 상황인 듯합니다.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영미문학 책임편집자인 크리스틴 조디스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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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0-05-1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문제보다는 소수특권계층으로서의 지배계층과 다수 대중의 관계라는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이고도 역사적인 삶 그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좌담회 내용이 궁금했는데요, 해소시켜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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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미 2010-06-09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벤트 당첨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책 열심히 읽고 블로그에 서평쓸게요~^-^!!

뮤진트리 2010-06-11 11:42   좋아요 0 | URL
네 축하드립니다. 6월9일 도서 발송해드렸습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래요. 리뷰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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