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역사를 보면 볼수록 경제의 중요성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당나라와 이슬람 군대가 벌인 전쟁도 탐험가들이 새 항로를 개척하러 나선 것도, 두 차례 발발한 세계대전도 모두 경제적 이유로 설명이 더 잘 된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저는 다시 경제학을 돌아보게 되었고, 경제사라는 분야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23)

우리는 모두 돈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라는 약속된 매개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안전하고 아늑한 삶을 보장해주는 집이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따뜻한 음식이 될 수도 있고요. 즐거운 공연이나 게임 속 아이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서비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 역시 그런 욕망의 일종이지요.


(48)

경제학은 본래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이득, 또는 만족에 관심을 두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이나 이익을 경제학 용어로 효용이라고 하는데요. 한정된 자원과 조건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큰 효용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따지는 게 경제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하도록 효용을 수치화할 수밖에 없는 거죠.


(55)

경제학에서 한계란 한 단위가 추가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오래 굶주렸다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경우 밥을 한 술 뜰 때마다 만족감, 즉 효용이 증가하겠죠? 이렇게 한 단위가 추가될 때 늘어나는 효용을 한계효용이라고 부릅니다. 밥을 막 먹기 시작했을 때는 배가 많이 고프니까 밥 한 숟가락으로도 상당한 효용을 얻습니다. 한계효용이 큰 거죠. 그렇지만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한 숟가락이 주는 효용은 줄어들어요. 한계효용이 점점 작아집니다. 이렇듯 더 많이 소비할수록 추가되는 만족의 크기는 줄어드는 현상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불러요.


(78)

정부라고 해서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리스나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가 모라토리움 혹은 디폴트 사태에 직면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나요? 모라토리움(moratorium)은 쉽게 말해 빚을 갚을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으니 상환 날짜를 늦춰달라고 요청하는 일이에요. 지불 유예를 신청하는 거죠. 반대로 디폴트(default)는 채무 불이행, 즉 빚을 못 갚는다고 파산 선언하는 겁니다. 정부가 나라 살림을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놓고 그 빚을 제때 갚지 못할 때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태예요.


(118)

주식은 한자어로 그루 주()와 법 식()자를 씁니다. 무슨 조합인지 바로 이해가 되질 않죠? 그게 당연합니다. 이 표현은 주식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스톡(stock)’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거든요. ‘stock’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그중에는 그루터기와 저장품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루터기가 뭔지 다들 아시죠? 나무나 곡식을 베고 남은 밑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루터기에서 자라난 가지를 베어다가 겨울을 보낼 땔감으로 저장했기 때문에 저장품이라는 의미까지 생겼고요. 거기서 확장해 주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236)

다가올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지나온 과거에서 현재를 살아갈 지혜를 구하게 되죠. 경제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골치 아픈 분야가 아니라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쭉 존재해온 인간 삶의 총체니까요. 그래서 저는 경제와 역사를 아는 것이 곧 인간을 아는 것이자 세상의 원리를 아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238-239)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동화책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 비유적인 내용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골디락스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오두막을 발견합니다.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이 외출하고 빈집 식탁에 세 그릇의 수프가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뜨거운 수프였고, 또 하나는 식어서 차가운 수프였고, 나머지 하나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수프였어요. 골디락스의 선택은 당연히 미지근한 수프였습니다.

데이비드 슈먼이라는 경제학자가 이 동화에 착안해 골디락스 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요. 경제가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갑지 않고 중간쯤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안정적이고 지속되는 상태라고 볼 수 있겠죠.


(254)

파생상품이란 예금, 주식, 채권 같은 기초자산에서 파생된 금융상품을 말하는데요, 부동산 저당권을 채권처럼 만들어 내다 팔고, 또 그 채권들을 잘 섞고 포장해서 평균 위험도를 낮은 새로운 투자상품으로 내다 파는 식입니다.


(287)

흑사병은 인류사에 두고두고 남을 지독한 재난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농도들은 사회적 지위와 실질 임금이 높아지는 혜택을 입었어요. 또 많은 경작지가 버려지면서 영주의 통제력이 약해진 덕분에 농노는 이동의 자유를 누리게 됐습니다. 이전까지는 거주지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영지에 묶여있던 농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됐죠.

한편 지배 계층 사이에서는 보다 강력한 귀족 가문이 생겨났어요. 상당수의 영주가 권력을 잃고 몇몇 집안에 통폐합된 결과였죠. 말하자면 영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탄생한 귀족 가문은 이후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등장하는 데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289)

흑사병이 퍼질수록 기존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영주와 교회의 권위는 가파르게 추락했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이 이주가 전보다 자유로워졌고, 또 실질임금도 늘어났다고 했잖아요. 흑사병에 걸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차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오늘을 즐기자!’는 식의 소비와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게 됩니다. 이후 유럽은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문화 부흥기인 르네상스 시대로 진입합니다. 타락하고 무능한 교회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개혁, 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합리적 추론과 실험을 중시한 과학혁명도 비슷한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죠.


(294)

경제학의 대가는 귀한 능력들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 수학자이자, 역사가이자, 정치가이자, 철학자이어야 합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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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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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매년 10월이면 애서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있단다.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인터넷 서점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예상하는 이벤트도 벌이곤 하지. 아빠도 거의 매년 그 이벤트에 참가하여 투표를 한단다. 예전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를 투표했는데, 두어 년 전부터는 아빠가 모르는 작가에 투표를 한단다. 왜냐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 대부분 아빠가 몰랐던 작가들이었거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수상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책을 찾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그래서 아빠에게 노벨 문학상은 숨어 있는,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는 계기로 생각하고 있단다.

작년 202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역시나 처음 들어보는 작가가 수상하였단다. 욘 포세라는 노르웨이 사람이 탔단다. 노르웨이 작가라고 하면 아빠가 좋아하는 요 네스뵈가 있는데, 욘 포세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단다. 한번 읽어보고 싶더구나.  그래서 대표작 중에 한 권인 <3부작>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연작 소설 3편인 <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을 하나로 엮은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2019년에 출간되었단다. 책의 뒤편에 옮긴이의 글을 보니, 폰 욘세가 최근에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많이 거론된다고 써 있더구나. 몇 년 전부터 유력한 후보였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폰 욘세의 작품을 몇 년 전에 소개한 출판사는 노벨 문학상 발표 후에 돈 좀 벌었으려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드는구나. 대표작 3부작의 이야기를 간단히 해줄게. 역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은 읽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1.

첫 번째 이야기는 <잠 못 드는 사람들>이란다. 노르웨이 서남부 해변가 도시 베르겐의 옛이름은 벼리빈인데, 그곳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그러니까 베르겐이 벼리빈이라고 불리던 옛날 이야기인 것이야. 벼리빈 인근에 뒬리야 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아슬레와 알리다가 살고 있었지. 아슬레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아슬레도 아버지와 함께 연주를 하곤 했단다. 아슬레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슬레는 살고 있던 보트하우스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알리다의 아버지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나셨고, 엄마와 언니 올린과 함께 지냈는데, 엄마는 언이 올린만 좋아하고 알리다에게는 막 대했단다. 그래서 알리다와 엄마 사이는 오래 전부터 좋지 않았어.

아슬레와 알리다는 17살 어린 나이지만,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고, 알리다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단다. 보트하우스에서 쫓겨난 아슬레는 알리디와 함께 뒬리야를 떠나 벼리빈으로 가기로 했어. 벼리빈은 번화한 곳이므로 그들이 묵을 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이 소설은 마치 아슬레와 알리다, 젊은 여인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인가 싶었어. 아빠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좀 몽환적인 느낌이었단다.

벼리빈에 도착을 한 아슬레와 알리다…. 벼리빈은 비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했어. 그런데 이 두 젊은 연인을 받아주려고 하는 집이나 여관은 없었어.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들겠지만, 그들은 묵을 만한 방을 찾지 못했단다. 아무래도 낯선 젊은 연인에, 여자는 임신해서 출산을 앞둔 것처럼 보여서 방이 있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것 같았어. 한참 뒤에야 한 노파의 집에서 머물 수 있었는데, 거기도 거의 억지로 부탁해서 간신히 묵을 수 있었단다. 그래도 정착할 곳을 찾기 전에 임시로나마 묵을 수 있는 곳이 생겨서 다행이구나.

그런데 며칠 뒤 알리나가 아이를 낳으려고 했어. 그들은 아이 낳는 경험이 없으니 산파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어. 아슬레가 수소문 끝에 산파를 데리고 왔는데, 그 산파 왈, 아슬레와 알리다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도 산파라고 했단다. 그러나 그 집주인인 노파는 집에 없었단다. 사실 며칠 전부터 보이질 않았어. 이때부터 아슬레가 좀 의심스러웠어. 갑자기 스릴러 장르로 바뀌는 건가? 아무튼 산모와 아이는 모두 건강하게 출산을 했단다.


2.

아슬레와 알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시그발이라고 지었어. 그들은 벼리빈을 떠나서 바르벤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지냈어.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면서 이름도 아슬레는 올라브로, 알리나는 오스타로 바꾸었단다.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이 아슬레가 이름을 바꾼 올라브가 들어간 <올라브의 꿈>이란다. 그래서 두 번째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올라브와 오스타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할게.

올라브는 오스타에게 결혼식은커녕 아무것도 준 것이 없어서 바이올린을 팔아서 반지 선물을 사려고 벼리빈에 갔단다. 그런데 어디선가부터 어떤 노인이 올라브를 따라왔는데 올라브를 안다면서 계속 말을 걸어왔어. 올라브는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데 귀찮게 계속 따라왔단다. 빠른 걸음으로 그 노인을 따돌리고 선술집에 들어갔는데, 소름 끼치게도 그 노인은 먼저 선술집에 와 있었어. 그러면서 올라브에게 자신을 아냐고 계속 물어봤고, 올라브는 그 질문을 무시했단다. 올라브는 선술집에서 오스가우트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노인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어.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기를, 아슬레가 살던 보트하우스의 주인이 살해되었고, 그 마음에 어떤 딸의 엄마도 죽었고, 벼리빈의 한 산파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했어. 올라브는 사람을 잘못 봤다면서 자신은 아슬레가 아니라고 했단다. , 아슬레가 결국 일을 벌였던 것인가. 역시 노르웨이는 범죄 스릴서 소설에 강점이 있는 것인가. 색다른 스타일의 스릴러?

올라브는 원래 반지를 사러 벼리빈에 온 것인데, 오스가우트가 산 팔찌를 보고 너무 예뻐서 올라브도 마음이 바뀠어서. 반지 대신 팔찌를 사고 싶었어. 하지만 가격이 비쌌지. 아빠는 오스가우트도 죽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단다. 오스가우트의 도움으로 오스가우트와 같은 팔찌를 싼 가격에 살 수 있었어. 올라브는 오스타에서 그 팔찌를 줄 생각에 기뻤단다. 그런데 그날이 저물어서 벼리빈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 했어. 어떤 노파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노파의 딸이 올라브에게 계속 추파를 던졌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파의 딸이 올라브의 팔찌를 훔쳐갔단다.

더 놀라운 일은 노파의 남편이 집에 왔는데,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올라브를 쫓아다니면서 아는 척을 했던 그 노인이었단다. 그 노인은 이제서야 경찰에 신고를 했고, 올라브는 경찰에 체포되어 철창에 갇히고 말았어. 올라브는 왜 항변을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올라브는 그 죄가 인정되어 얼마 후에 교수형에 처해졌단다. 올라브가 진짜 범인이라고 해도, 왜 항변하지 않고 그렇게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죽었을까. 아빠가 책을 읽다가 뭔가 놓친 것이 있나? 싶었단다. 가족을 두고 그렇게 순순히 죽을 캐릭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3.

세 번째 작품을 읽다 보면 앞의 두 작품에서 읽다가 생긴 궁금증이 풀리려나. 빨리 책장을 넘겨보았단다. 3부작의 마지막 <해질 무렵>은 엘리스라는 할머니가 먼 옛날을 회상하면서 시작한단다. 엘리스는 다름 아닌 알리다의 딸이었단다. , 알리다와 아슬레 사이의 아기 이름은 시그발이었는데어찌 된 일인지 얼른 읽어보았단다.

아슬레가 돌아오지 않자 알리다는 시그발을 데리고 벼리빈에 갔단다. 하지만 아슬레를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가 선착장에 앉아 있었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기를 안고 헤매 다녔으니 힘들었겠지. 그때 고향 뒬리야의 어른 오슬레이크 씨를 만났어. 오슬레이크는 알리다가 굶주린 것을 알고 밥도 사 주면서 고향 소식을 알려주었어. 알리다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어. 그것도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의문사라고 했어.

이 소식을 들은 알리다는 충격을 받았단다.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엄마는 엄마인데 말이야. 그리고 보트하우스의 주인이 살해되었고, 벼리빈의 산파도 살해당한 후 실종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일과 연루된 아슬레가 교수형을 당했다고 했어. 믿기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알리다는 오슬레이크가 한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어. 아슬레가 없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막막했을 거야. 잠자리가 없는 알리다. 오슬레이크는 자신의 배에서 하룻밤 재워주겠다고 했어. 오슬레이크의 배로 가는 선착장에서 알리다는 팔찌를 하나 주었는데, 한 눈에 그것이 아슬레가 남긴 선물이라고 생각해서 잘 간직했단다.

알리다는 아기 시그발과 함께 오슬레이크의 배에서 하룻밤을 지냈어.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 오슬레이크는 고향인 뒬리야에 간다고 하니 알리다는 가지 않겠다고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갈 곳도 없었어. 결국 오슬레이크의 제안으로 그의 집의 가정부로 일하기로 했단다. 그러면 최소한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오슬레이크는 얼마 전까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집안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했어. 알리다는 그렇게 오슬레이크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사실 오슬레이크는 알리다를 자신의 가정부로 둔 또 다른 검은 이유도 있었단다. 알리다는 얼마 후 오슬레이크의 첫째 딸 알레스를 낳았고, 둘째 딸도 낳았지만 둘째 딸은 어려서 죽었단다. 어느날 알리다는 해안가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자살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세월은 한참 지나서 알리다의 딸 엘리스도 할머니가 되었고, 엘리스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란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아빠가 앞서 이 소설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꼈다고 했는데, 소설의 끝까지 그런 느낌이 들었단다. 아슬레가 예상치 못한 연쇄 살인범으로 죽어서 깜짝 놀랐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라는 반전을 기대하였지만, 그런 반전을 일어나지 않았단다. 아슬레가 죽고 나서 혼자 남은 알리다라도 해피 엔딩이면 좋았겠지만, 이미 소설의 분위기가 해피 엔딩이 아닐 것 같았단다.

지은이가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사실 아빠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이런 작품에서 어떤 우수한 점을 찾아내어 지은이 욘 포세에게 노벨 문학상이 돌아갔는지 잘 모르겠구나. 아빠는 아마추어 독서가이니, 전문가들의 높은 뜻을 알겠니. 책이란 게 그냥 재미있으면 되지…^^


PS,

책의 첫 문장: 아슬레와 알리다는 벼리빈의 거리들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슬레는 그들이 가진 모든 물건을 담은 보따리 두 개를 어깨에 메고 손에는 아버지 시그발에게서 물려받은 바이올린이 든 가방을 쥐고, 알리다는 음식이 든 그물자루를 들고서, 그들은 이제껏 몇 시간이나 벼리빈의 거리들을 돌아다니며 머물 곳을 찾으려 했다.

책의 끝 문장: 그녀는 계속해서 걷고, 깊이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자 파도가 그녀의 잿빛 머리를 넘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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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케플러는 우주의 조화를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좇고 있었다. 그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뒤엉킨 덤불을 헤치며 전설의 사냥감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과도 같았다.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냥꾼만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기회를 얻는 법. 무기라고는 아직 불완전한 계산과 미완성의 공신뿐이고, 더군다나 가장 노릇과 책임, 빌어먹을 가정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종을 번갈아 울려대며 소리치고 날뛰는 광대들에게 에워싸여 있는데 어떻게 그런 기회를 노리단 말인가? 그러나 딱 한 번, 아주 잠깐이나마 그 전설의 새를 본 적이 있다. 기껏해야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그것을 보았단 말이다. 섬광 같은 그 짧은 순간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126)

케플러는 내기를 위해서, 그리고 튀코의 자료를 빼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인 셈이었다. 화성은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똑똑한 학자들이 수없이 도전했음에도 화성은 수천 년간 비밀을 내주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대로 우주에서 행성이 태양이 아닌 지구의 위치에 따라 그 값이 결정되는 왕복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행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돈다면, 궤도상에서 동일한 거리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달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화성의 궤도를 규명하기에 앞서 이런 의문점을 비롯해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시치미를 뗀 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 매끈하고 복잡한 설계도를 재구성해야 하는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221-222)

제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주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저는 행성이나 별의 위상, 즉 행성끼리 이루는 각도와 그 배치와 인간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좋은 위상과 나쁜 위상을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습니다. 우주의 현상은 조화와 규칙성, 아름다움, 강렬함, 약함, 불규칙함, 이렇게 분류할 수 있을 뿐이지요. 별들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도 아니며 개인의 구체적인 운명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특정한 성격과 기질을 불어넣을 뿐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별자리가 지닌 특성과 양상을,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오는 별빛의 특징을 그대로 받아서 무덤에 갈 때까지 지니게 됩니다. 이 특성이 그의 육체 형태와 몸가짐, 태도, 성향, 정서적 감응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생기 넘치고 친절하며 사교적인 반면, 또 어떤 사람은 무기력하고 나태하여 매사에 시큰둥한 특징을 보이는 겁니다. 아름답고 정확한 별자리일 때 태어났는지 광범위하고 볼품없는 모양일 때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리고 행성들의 색깔과 움직임에 따라 그런 특징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233-234)

대사님, 갈릴레오의 얇은 책이 간결하고 단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의 저서 <별의 전령>은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책입니다. 몇 쪽만 훑어보아도 금세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가 주장하듯 그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이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황제께서도 예전에 작은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신 적이 있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비록 증거를 제공하진 못했지만 은하수가 무수히 많은 별의 무리일 거라고 추측한 바 있습니다. 행성에 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저는 그가 발견한 네 개의 새로운 행성이 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있다면 다른 행성에도 위성이 있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별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과 그것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51)

나의 사랑하는 레기나야. 나는 삶이란 게 정해진 형체도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이 아닐까 생각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용해된 유리 덩어리와도 같아서, 아주 조야한 도구조차도 없이 오직 맨손으로 만지고 다듬어 완벽한 모양으로 빚어 우리 안에 품어야 하는, 그런 물질 같다고나 할까. 그것이 우리가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바깥세상의 혼돈을 내면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으로 바꾸는 것. 하지만 아니더구나. 삶이 우리를 품는 것이고, 우리가 커다란 유리구슬에서 지워 내야 할 흠집인 것 같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기 일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걸 본다고들 하지. 사실 어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만 그렇겠니? 어떤 방식으로 죽든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과 행동과 생각 속에 감춰져 있던 본질적인 모습을 인식하게 될 거야. 죽음은 완성을 위한 수단이지.


(278)

정신은 모든 수학적 개념과 형태를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경험적인 신호를 통해 이미 아는 것을 기억해 낼 뿐이지요. 수학적인 개념은 정신의 본질입니다. 정신은 한 지점으로부터의 등거리를 생각해낸 뒤, 다른 어떤 감각 인식이 없어도 그 점으로부터 원을 그립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지요. 만약 정신이 신체의 눈을 쓰지 못한다면, 외부에 있는 사물을 상상하기 위해 눈이 필요하므로 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나름의 법칙을 지시할 것입니다. 정신 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양()에 대한 인식이 눈의 존재 방식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정신의 존재 양태에 따라 눈의 존재 양태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기하학은 눈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미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니까요.


(280)

나는 다시 한번 화성에 원 궤도를 적용해 연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화성 궤도는 양옆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위아래는 바깥으로 나가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타원형 궤도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학자들이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고수해 온 원동운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찾아낸 증거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양의 궤도가 화성뿐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나머지 행성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름이 끼치더군요. 미천한 내가 어떻게 우주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거기 들어갈 노력과 수고란! 주전원과 행성의 역행,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마구간을 싹 치우고 이제는 수레에 가득 실린 말똥, 즉 이 타원형 궤도만 남았습니다. 어찌나 악취가 지독한지! 그런데 이제 그 안에 들어가 구린내나는 말똥을 혼자 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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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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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달 전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책 <강신주의 장자수업 1>을 읽었단다.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강신주 님을 좋아한단다. 아빠는 틀에 박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면서 지내는데, (그게 더 편한데) 강신주 님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거든.. 아빠랑 생각이 많이 다르시지만, 아빠가 본받고 배우고 싶은 그런 분이지그래서 강신주 님의 책이 출간되면 관심 있게 눈 여겨 보는 편이란다. 그런데 이번에 쓰신 책이 장자라니…. 강신주 님이 장자에 대한 책은 그 전에도 쓰신 것으로 알지만, 다시 한번 장자에서 대해서 이야기하신 모양이구나.

장자는 아빠가 동양 철학자들 중에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이란다. 동아시아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래도 공자이겠지만, 장자는 공자가 영향을 준 동아시아에 살고 이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깨는 사람이거든. 장자를 읽다 보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아빠도 장자처럼 생각하고 장자처럼 행동하고 싶게 만든단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곤란을 좀 겪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서 생각만 장자처럼 하는 것으로…^^ 그렇다고 아빠가 장자를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야. 장자에 대한 책들을 여럿 읽어보긴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 심오한 철학을 아빠가 어떻게 이해하겠니. 아무튼 아빠가 좋아하는 강신주 님이 아빠가 좋아하는 장자에 대해서 책을 쓰셨다니, 당연히 읽어야겠지.

이 책은 EBS를 통해 강신주 님이 방송도 하신다고 하더구나. 어찌 보면 그 방송의 교재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우리는 TV가 없으니, 본 방송을 보긴 어렵지만, 유튜브에도 조금씩 소개가 되고 있더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강신주 님이 살이 많이 빠져서 걱정했는데, 방송하시는 모습을 보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구나. <강신주의 장자수업>은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오늘은 1권을 먼저 이야기해줄게.

이런 책을 읽는 것은 뿌듯하면서 무엇인가 가슴 속에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 채워진 느낌을 다시 다른 이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참 어렵더구나. 너희들에게 이 책을 제대로 이야기해주기 쉽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거야. 너희들이 좀더 크면 직접 한번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물론 바쁘시고 장자에 관심이 없으면 안 읽어도 상관 없고 말이야. 서두가 길어졌구나. 아빠가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짧게 몇 가지만 이야기할게. 장자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관련된 책도 많고, 유튜브에 동영상도 많으니 보면 될 것 같구나.


1.

장자(壯者)는 장 선생님 정도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장자의 본명은 장주라고 하는구나.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 중에 송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송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힘이 약해서 무시당하고 깔보던 나라였다는구나. 그런 그의 국적이 사상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을까? 잘 모르겠다. <장자>는 장자뿐만 아니라 장자를 따르던 이들이 약 300년간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장자가 직접 쓰거나 이야기한 내용도 있지만, 그런 장자를 따르고 공부한 이들이 쓴 내용도 있는 거야. 인터넷 좀 찾아보니 <장자>는 총 33 6 4606자로 되어 있다는 구나.  

<장자>는 짤막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철학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구나. 아빠가 이해한 바로는 장자 사상의 핵심은 쓸모 없음이란다. 장자가 살았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단다. 어떤 사람이 능력도 좋다면, 그러니까 쓸모가 많다면 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나라는 그 사람을 등용하게 된단다. 그렇게 쓸모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 일하거나 때론 전쟁에 투입되지. 그렇다 보면 금방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별로 능력도 없이 쓸모가 없다면 국가는 신경도 쓰지 않을 테고, 조용하게 한 평생을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거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쓸모 있는 인재가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야. 어렸을 때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단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단다. ? 장자가 살던 시대나 오늘날이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단다. 물론 쓸모가 있으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어.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런 쓸모 있는 인간은 자신보다 국가가 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했어. 그러면서 국가가 원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국가가 원하는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고 했단다. 나아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단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님들이 찔릴 말이로구나.

쓸모 없음에 관한 이야기는 책 전반에 걸쳐 나온단다. 6장 거목 이야기도 쓸모 없음을 이해하는데 재미있는 우화가 나온단다. 잘 자란 나무는 재목이라고 해서 금방 누군가 베어간단다. 그런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는 아무도 베어가질 않아서 엄청 클 때까지 자랄 수 있단다. , 쓸모 있는 것이 좋은가? 쓸모 없는 것이 좋은가? 장자와 강신주 님께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대충은 이해가 가지만,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생존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장자가 쓸모 없음을 이야기하자 혜시라는 사람은 반박을 했단다. 쓸모 없는 커다란 박은 부서져서 버려진다고 말이야. 그러자 장자는 이에 반박을 한단다. 커다란 박은 박으로는 쓸모가 없지만, 배로 쓸모다 있다고 말이야. 사람들의 능력도 마찬가지란다. 어느 일에 있어서 내가 쓸모가 없을지라도 다른 일에서는 쓸모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보통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그런데 쓸모가 없어져도 그를 소중히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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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는 성적이 좋은 아이여서, 품이 덜 드는 아이여서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는 아이, 동년배보다 쓸모가 더 큰 아이라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에 실패할 때, 혹은 정리해고라도 당했을 때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떠나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무용으로 아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는 죽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무용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람도 물도 그리고 새도 물고기도 무용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병들도 나이 들어 쓸모는커녕 주변에 짐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 여러분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건, 바로 이것이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의 진정한 속내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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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자>에 나오는 대표적인 우화라고 하면 빈 배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빈 배 이야기는 아빠가 예전에 읽은, 오쇼 라즈니쉬가 장자에 대해 쓴 책 <삶의 길 흰구름의 길>이라는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이야기인데 관념을 딱 깨어주는 이야기였단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고,

우리가 빈 배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 이야기는 이렇단다. 배를 타고 큰 강을 건너는데 어디선가 떠 내려온 빈 배가 내 배에 부딪히게 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거야. 하지만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 배가 내 배에 부딪힌다면 어쩌겠니. 당장 노발대발 큰 소리를 칠 거라는 거지두 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 자신을 빈 배처럼 만든다면 아무도 나에게 맞서지 않고, 나로 하여금 상처를 입지 않게 되겠지. , 쉽지는 않지만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구나.

장자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이라고 하는 아주 큰 새에 관한 대붕 이야기란다. 붕은 원래 엄청나게 큰 물고기 이었어. 그런데, 엄청나게 큰 새 으로 변했어. 얼마나 크냐면 날개가 몇 천 리라고 했어. 그렇게 크다 보니 땅에서는 날개 짓을 못해서 날지를 못했어. 커다란 태풍이 와야만 그 바람을 이용해서 날 수 있었단다. 마침내 큰 태풍이 와서 붕은 날아올랐단다. 그렇게 하늘을 날면서 붕은 자유롭다고 생각했어. 오랜 기다림과 어려운 조건을 이겨낸 자유라고 할까. 바람이 없으면 날지 못하는 자유. 제한된 자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제한적 자유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그 제한적 조건이 어려워서 그 자유를 누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란다. 마치 메추리처럼메추리는 날고 싶을 때 날고, 앉고 싶을 때 앉는단다. 현재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만 얻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유롭다고 하지. 태풍이 오면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피한단다. 대붕처럼 제한적이고 어려운 조건을 이겨내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단다. 그리고 대붕은 바람이 있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어. 이것은 두 존재 또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해. 장자는 자신과 타자의 관계를 고민했던 철학자이고, 우화에도 그런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단다.

또 다른 에피소드 중에 바람 이야기가 있어. 구멍이 있는데 바람이 있다면 구멍이 소리를 나지 않는다는 거야. 피리 등 악기들 중에 구멍에 바람을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있는데 바람이 없다면 그 악기들은 아무런 소리를 못 낸다는 거야. 그렇게 관계에 엮여 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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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차라리 우리는 바람과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의 마음은 바람과 같으며, 나아가 바람과 같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구멍이 되어 바람을 맞아 소리를 낼 수도 있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구멍에 들어가 그 구멍에 어울리는 소리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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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잘 듣는 것을 장자는 강조했단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더 나아가 기로 들으라고 했어. 아빠가 성격이 급해서 차분히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편인데 그래도 노력은 하려고 한다. 아빠도 잘 들어주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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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325)

음악을 듣는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습니다. 혹은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거실의 불을 끄거나 빛을 약하게 조절합니다. 음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군주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복종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눈을 감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상대방에 복종하겠다는 의지와 무관합니다.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을 감게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음이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라면, 눈을 감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군주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응시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타자의 말이나 혹은 타자를 듣는다는 것은 지해에의 의지나 복종에의 의지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건 소통에의 의지니까요.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고 말합니다. ‘’, ‘마음’, 혹은 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은 듣겠다는 그의 의지입니다. ‘듣겠다는 소통에의 의지가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좋고, 마음으로 듣는 것보다 기로 듣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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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리소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이 이야기도 참 인상 깊었거든. 장자의 핵심 철학인 쓸모 없음에 대한 주제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야. 지리소라는 사람이 있었어. 지리소라는 외형은 꼽추로 제대로 설 수도 없는 몸으로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지리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지리소는 그 자신의 몸을 탓하지 않았어. 빨래와 바느질에 소질이 있어서 돈벌이에도 문제가 없었어. 자신이 다 가졌다고 생각했어. 장애를 가졌다 보니 나라에서 돈도 좀 주고 그랬대. 그런데 돈을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어. 이미 자신은 먹고 사는데 문제 없고 사는데도 문제 없으니까 말이야. 전쟁이 나서 사람들이 끌려가도 지리소는 꼽추라는 장애 때문에 피할 수 있었어. 진정 모든 것을 다 자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주어진 여건이 열악하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지리소를 보면서 아빠 자신을 반추해 보게 되더구나. 아빠 자신을 볼 때 갖고 있는 것보다 뭔가 부족한 것을 먼저 보고 그것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 말이야. 지리소에게서 참 배울 점이 많구나.

….

그 밖에 아빠의 머리를 때리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단다.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장자>는 인류가 자랑하는 고전입니다.

책의 끝 문장: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면, 열자는 이렇게 산 것입니다.


행성 충돌이나 극심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거나 압도적인 포획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못을 스스로 조르는 자기 파괴적 동물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되는 전쟁을 보세요. ‘우리는 같은 종이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늑대나 토끼가 보았다면 당혹스러울 일이고, 인간을 전염병균처럼 여기며 멀리 떠나려 할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 거침없이 착취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를 살육하니, 우리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늑대와 토끼마저도 동족의 피를 묻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자신들이 도망할 곳마저도 인간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버렸으니까요. - P18

사랑이 힘든 것은, 양쪽 다가 주인이고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팽팽한 긴장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상대방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떤 강요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이야기도 성립되는 셈이죠. - P46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 P77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양생주> - P187

기원전 4000년경 인간은 말을 마지막으로 가축화한 이후로 더 이상 다른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인간 가축은 동물 가축과는 달리 말이 통하고 더 섬세한 작업에 투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거대 건축물로 상징되는 국가체제는 인간 가축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20세기 전번에 민주주의를 자임했던 국가에서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유행처럼 사용했던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혹은 자국민들을 길들여 지배하려 할 때 반드시 병행해야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비유한 거죠.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근과 채찍은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에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료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상과 벌 혹은 사랑의 방법과 폭력의 방법이니까요.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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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31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가축화, 고대 문명의 창작품이 지금도 이어지는 듯해요. 우매한 백성들을 선동질하는 사이비 정치인들 때문에 팬덤까지 형성되니 말입니다. 슬프요.ㅠㅠ

bookholic 2024-01-31 16:55   좋아요 0 | URL
그들의 가축이 되지 않겠습니다 !!!!
 














(70-71)

최익현 선생님께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마다하시고 끝내 굶어서 돌아가신 것은 실로 큰 뜻을 이루신 것이고, 우리에게 높은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합당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대마도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은 어찌 되었거나 살아서 조선땅으로 돌아오는 것일 테지만, 우리의 처지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꼭 산을 내려가 왜놈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산에서 목숨을 보존해 가며 후일을 기다리며 기회를 잡아 무장을 튼튼히 해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중대한 문제는 전과를 책하지 않겠다는 조정의 조칙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73-74)

지난번의 최익현의 처가가 그 고질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황제인 고종도 고종이었고, 의병장이라는 최익현도 최익현이었다.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국왕이 해산명령을 내리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름 좋은 황칙을 받았다고 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일으킨 의병을 일순간에 해산시키고 포박당하는 의병장의 처사는 또 무엇인가. 그 결과 불쌍한 평민들만 왜놈들에게 무참히 살육당했다.

최익현은 <황칙>이라는 것의 진의를 면밀히 파악했어야 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상감의 뜻이 아니었듯이 그 황칙이라는 것도 상감의 진의가 아닐 수 있었다. 그것이 만약 마지못해 작성된 것이었다면 최익현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른 것이었다.


(107-108)

같은 날 <뉴욕 타임스> <조선민족은 아직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그전에 이미 사건을 보도한 것은 물론이었다.

<스티븐슨를 저격한 것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진 조선인들 중에서 자기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의사표시였고, 자기 민족의 운명을 자기들 힘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형벌에 상관없이 그 젊은 청년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치밀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일본을 돕고 조선을 배신한 사람을 공격했다. 물론 그 행동은 그리 바람직하거나 현명한 처사는 못된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 행동에는 상당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설은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선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쳐들지 못하는 민족이다>라고 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 것과는 정반대 논지였다.


(109)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방영근은 날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장인환, 전명훈…… 장인환은 누구고, 전명운은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들은 보통사람들하고 어떻게 다를까. 특별나게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센 것일까. 글쎄, 씨름꾼이 아닌데 그럴 리가 있을까. 사람이 꼭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죽기를 작정하자면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건 마음이 강단지지 않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강단지기에 죽기를 작정하고 나서서 그런 장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들은 나이가 스물네다섯이다. 그러면 나와 같은 나이들이다. 그들도 고향에는 부모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걸고 나섰다. 나는……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내가 만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갈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112)

이승만은 7 1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을 만큼 잘하는 영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애국자 둘을 살려내리라는 기대로 동포들은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몇몇 유지들은 서로 다투어 이승만을 자기에들 집에서 묵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성의를 냉정히 거절하고 비싼 호텔에 투숙하고 말았다.


(112-113)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승만이 8 25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버린 것이다.

한인동포 여러분들께 매우 미안합니다. 그러나 재판일이 언제 될지도 모르고 또 나 역시 논문을 써야 되니 시간관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인이니까 살인관계 재판 통역은 원하지 않습니다. 살인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되는 죄악입니다.”

이승만이 남기고 간 말이었다.

이승만의 행동이나 그 말은 동포들에게 크나큰 충격이 되었다. 그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고, 이승만은 실망과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피나는 돈만 축내고 갔구먼.”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말이었다.


(143)

그들은 두 달 동안에 벌어진 수많은 죽음의 끔찍스러움에 마음병이 들어 있었고, 의병의 기세가 불 꺼지듯 잦아들어 버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속마음으로 의지하고 믿은 건 의병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갑오년 때와 다를 것 없는 감정의 엇갈림을 겪고 있었다. 그때 가슴속에 품었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밀려든 것은 허망감이었다. 그 막막하고 두려운 허망감에서 그들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165)

그들은 용맹스러웠다. 보잘것없는 무기로 신식무기를 갖춘 적들과 맞서 싸웠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갔다. 누가 강제로 끌어낸 것도 아니었고, 싸움에 이긴다고 무슨 보장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람대접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하층민들이었다. 대대로 빼앗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내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의 지고한 마음과 뜨거운 용맹 앞에서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 임금은 무엇이고, 대소 벼슬아치들은 또 무엇이었는가. 임금은 왜놈들에게 손발 묶인 허깨비였고, 모든 벼슬아치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요 매국노들이었다. 결국 나라의 참된 주인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적과 싸우다가 수없이 죽어간 그들의 피는 이 땅의 산하를 적시었건만 나라는 구해지지 않고 합방의 위기는 목전에 닥쳐와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204-205)

그러고 말일세, 나라가 망하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상감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아니면 신하고 백성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신하들이 줄줄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네. 그때 상감은 무엇을 했는가. 구중궁궐에서 비통 통분해했는가. 그것으로 상감의 책무가 다 되는 것인가? 또 그와 반대로 매국노 중신놈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의병해산령에 옥새를 찍어 윤허하는 것이 상감의 책임인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을 자네는 상감이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만, 그거야말로 한 나라 상감으로서 얼마나 비굴하고 무책임한 처사인가.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 놈들을 수만리 밖에 있는 딴 나라 사람들에게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그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또 있겠는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어야지. 그게 나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 했겠나. 이 땅에 합방이란 없었네. 상감은 그 책무를 피한 덕에 지금 연명은 하고 있으나 진작에 죽은 목숨이고, 그 초라한 몸에 걸쳐진 것은 백성을 버려 나라를 망친 죄, 치정을 그르쳐 사직을 망친 죄가 있을 뿐이네. 어떤가!


(239)

사진결혼의 소문이 농장마다 퍼져나가면서 나이든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고향병을 더욱 도지게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비자없는 입국은 조선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그 방법을 일본 중국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확대 실시하게 했던 것이다.

사진관의 문턱이 닳아질 지경이 되는 가운데 최초의 조선 신부감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국민회 회장 이대수가 시범을 보이듯 신부감을 맞아들인 것이다. 전라도 처녀 최사라가 일본배 지양환을 타고 호놀룰루 항구에 닿은 것은 1910 12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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