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6)

우리와 다른 외계인, 진정한 천재가 존재한다니. 전교생이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 살에 글을 깨쳤다고 했다.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여섯 살에 암산으로 여덟 자리 숫자 두 개를 나눗셈할 줄 알았으며, 한번은 여름방학 때 펜싱 교사 머리에 불을 붙인 벌로 아버지 서재에 감금되었다가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혼자 깨쳤고 급기야는 마흔다섯 권이나 되는 빌헬름 옹켄의 일반 역사서를 달달 외웠다. 모든 소문을 진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 내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직 통통하게 살이 찌기 전이었음에도 움직일 때 어쩐지 투실투실하고 굼뜬 느낌이 났다.


(111)

수학이란 신의 정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숭배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수학에는 진정한 힘이 깃들어 있으며, 그 힘은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그 힘은 오직 인간만이 소유한 능력에서 탄생했는데, 은혜로운 우리의 신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과 발톱 대신에, 그만큼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힘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에 관해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떠한 심판이 내려지건 간에, 차마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가 미래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내가 누구보다 먼저 보았음을. 그가 가진 능력이란 참으로 진귀하고 아름다워서 지켜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다른 것도 보았다. 우리 모두를 묶어두는 자제력을 상실한, 사악하고 기계 같은 지성. 그런데 왜 침묵했냐고? 그가 너무 우월했으니까. 나보다도. 우리 모두보다도.


(153-154)

실험 직후 우리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서신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을 상대로 폭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대통령을 설득하는 탄원서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 중 백오심 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유럽의 전쟁은 끝난 후였다. 히틀러도 이미 총을 쏴 자결했으니, 우리가 실제 그랬던 것처럼 일본 민간인 이십만 명을 죽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일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면, 일본 장군이 단 한 명이라도 폭탄 실험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탄원서는 트루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탄원서가 결과를 바꿨으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만든 폭탄은 이미 군의 손에 넘어가 있었으니 어쨌거나 그들은 그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최상의 표적을 고르기 위해 위원회도 벌써 꾸린 터였다. 그런데 폭탄을 지면이 아니라 높은 공중에서 터뜨려야 한다고 군을 설득한 다름 아닌 폰 노이만이었다. 그래야 폭풍파의 피해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는 최적의 높이가 600미터, 대략 2천 피트쯤이라는 계산도 직접 도출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높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예스러운 목재 가옥 지붕 위로, 우리가 만든 폭탄이 폭발했다.


(176)

정말 모든 상황마다 합리적인 행동 경로라는 게 있을까? 조니는 이를 의심할 여지 없이 수학적으로 증명해냈으나 그건 오직 양측의 목적이 정반대로 다를 경우에 한정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추론에는 관찰안이 좋은 사람이면 단박에 발견해낼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이론 전체의 틀을 떠받치는 최대최소정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런 주체는 오직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며,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전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할 뿐 아니라, 게임이 한 단계 진행될 때마다 자신과 상대방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를 오차 없이 파악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확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조니 폰 노이만뿐이다.


(186)

에니악의 특징은 계산이 일어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내부로 걸어들어가면 비트값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구도 숫자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실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조니는 예외였다.

계산의 현장 한가운데 잠자코 서서 눈앞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던 그를 기억한다.

기계가 또다른 기계 안에 들어가 생각하는 모습을.

그는 다음날 나를 고용했다. 고등연구소에서 더 다은 기계를 함께 만들자는 거였다.

나는 곧장 연구소로 가는 기차를 탔다.


(213)

기계가 못하는 일이 있다고들 한다. 기계가 못하는 일이 정확히 뭔지 내게 말한다면, 나는 언제든 그걸 해내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

- 존 폰 노이만


(270)

클라리는 자기 남편이 그렇게나 컴퓨터를 좋아하더니 아예 컴퓨터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연치는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산했고, 그게 아니면 루프에 빠지거나 서서히 멈춰버리거나 오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절대 미친 것이 아니었다. 대화할 때는 어느 때보다 명민했고, 사후 출간되어 읽은 그의 말년 연구는 생각할 거리가 풍부했으며, 수학적으로 아름다웠고, 기술적으로는 역시나 그의 연구답게 빈틈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선을 넘어 이성이 굴레이자 제약이 되는 세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성을 옆으로 치워두어야만 하는 영역으로 들어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표면적으로 암시한 신호는 단 하나, 암이 그의 혈액뇌장벽을 넘어서기 직전 그의 조지타운 집에서 내가 목격한 참으로 혼란스러운 일화였다.


(294)

어떻게 기계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가? 튜링이 그의 기계를 구상한 것처럼 나도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식화할 수 있을 것 같네.” 연치는 죽기 몇 달 전 내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알레프제로(Aleph-zero)라고 명명한 일종의 자동기계가 존재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데, 만일 당신이 알레프제로에게 무엇에 관한 서술을 제시하면 그 정보를 흡수해 두 개의 사본을 생성한다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할 계획을 이미 세웠다고 했다. 튜링이 컴퓨터의 탄생으로 이어진 사고실험을 고안했을 때, 또 괴델이 불완전성정리를 증명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논리 방법, 자기 참조적이며 재귀적인 추론을 사용해, 단순히 1 0의 문자열이 아닌,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을 생성하는 이론적 기계를 설계해낸 것이다. 그는 일종의 임계점, 티핑 포인트가 존재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기계의 진화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317)

미래를 감춰놓은 베일을 걷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과학이 다음에 어디로 진일보할지, 다가올 세기에 일어날 과학 발전의 비밀이 무언지 일별할 수 있다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다비트 힐베르트


(323)

이세돌, 쎈돌, 바둑 9, 동시대 누구보다 창의적인 바둑 기사. 첨단 인공지능 시스템과 대전을 치러 패배를 안긴 유일한 인간, 그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목소리를 잃었다.

한반도 서쪽 끝자락의 작은 섬 비금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오 년째, 프로 바둑 기사가 된 지는 육 개월째이던 1996, 폐에 알 수 없는 병증이 생겼다. 기관지가 상해 성대가 마비되었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나 희한하게도 일부 단어를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일시적이었던 실어증의 근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질병(심오한 내적 혼란의 징후가 아니라 정말 질병이었다면)의 여파로 결국 기관지 신경이 영구적으로 마비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장난감 인형에서 나올 법한 독특하고 새되고 밭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329-330)

그에게 바둑이란 호흡과 같아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바둑을 생각한다. 머릿속에 바둑판이 하나 있어서 새 전술이 떠오르면 그 바둑판에 돌을 둔다. 술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고 당구를 칠 때도 늘 그런다.” 지금껏 눈 뜨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바둑에 바치느라 놓친 것들이 아쉽지는 않은지, 사실상 정규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고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를 앞두었는데 곧 닥쳐올 일에 맞설 준비는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인간 정신의 내적 작동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며, 바둑의 전술과 수수께끼와 풀 수 없어 보이는 난해함이 바둑을 우리 우주의 아름다움, 혼란, 질서를 유일하게 비견할 인간의 창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돌의 위치와 관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세에 숨겨진, 거의 감지할 수조차 없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신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세돌에게는 승패보다는 바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전부 이해하기 전까지는 절대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김지석은 말했다. “한번은 이세돌과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자기가 막 이기고 온 대국을 만취한 채로 복기하겠다며 흑돌과 백돌의 수 하나하나 다시 두기 시작했다. 이기기는 했으나 딱 한 수가-심지어 자신이 두었던 수인데!-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347)

바둑판에서 가능한 자리의 수, 즉 두 사람이 대국할 때 발생하는 고유한 돌 배열의 가짓수는 너무 커서 2016녀네 이르러서야 제대로 규명되었다.

208,168,199,381,979,984,699,478,633,344,862,770,286,522,453,884,530,548,425,639,456,820,927,419,612,738,015,378,525,648,451,698,519,643,907,259,916,015,628,128,546,089,888,314,427,129,715,319,317,557,736,620,397,247,064,840,935


(370)

사실은 알파고가 확률을 계산하는 기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를 본 순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알파고는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 수가 알파고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었어요. 바둑에서 창의성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좋은 수, 위대한 수, 강력한 수를 두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수를 두는 능력이죠.” 대국이 끝난 후 인터뷰를 진행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그는 말했다. 이세돌은 평소였으면 포기했을 시점을 훌쩍 넘겨 세 시간을 어 기계와 싸웠다.


(401-102)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제대로 결정타를 날렸죠.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바둑을 뒀습니다. 그때 바둑은 예의와 매너가 전부였어요. 게임보다 예술을 배우는 것에 가까웠죠. 크고 난 후에야 바둑을 두뇌 게임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배울 때는 예술이었어요. 바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달라졌어요. AI가 도래하면서 바둑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에요. 알파고는 나를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로는 계속 바둑을 뒀지만, 은퇴는 진즉에 결심했어요. AI가 등장한 후로는 내가 최정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복귀해서 미친듯이 노력해 최고의 바둑기사가 되더라도, 최고일 수는 없어요. 세계 최고가 되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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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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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이구나. 9권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일제 시대, 특히 193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 문화와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그래서 부제도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란다. ‘한국 근대사 산책이라는 제목 없이 부제만 본다면 오늘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오늘날도 연애열풍,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꼭 맞으니까 말이야.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가면서 강제로 근대화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도 그 사회에 적응을 해 나가는 듯 보였어. 그런 모습들은 9권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차례도 보면 여성문화, 대중문화, 소비문화, 생활문화, 중독문화 이렇게 되어 있단다. 지금까지 달리 역사적인 사건 없이 이야기가 펼쳐져 다시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았고, 보통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있었단다.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라고 하는 신세대 젊은이의 모습들이 등장하였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이 유행처럼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살을 하고,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특이 기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깨고 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나혜석이 아닐까 싶구나. 나혜석은 아빠가 여러 책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서 오늘은 건너 뛸게.. 다만 아빠가 나혜석에 대해 몰랐을 때는 그냥 신여성이자 화가라고만 알았는데,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뒤로는 나혜석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그렇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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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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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 박인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던져주고 이혼을 한 뒤에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다시 국내로 와서 이런저런 활동까지 했다는구나. 하지만 나중에 친일 활동을 했다고 하니 이미지가 확 추락하는구나.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현모양처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어. 그런데, 현모양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던 말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하는구나. .. 앞으로 이 말을 좀 쓰지 말아야겠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들어나면서 여성 운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월급을 주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단다. 일제는 우리나라 생활 문화에 이런 저런 간섭도 많이 했어. 예를 들어 조혼제, 그러니까 일찍 결혼하는 것을 폐지하였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장례를 간소화하여 간단히 하라고 했어. 일제의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강제로 우리 문화를 서서히 변화해갔단다.

 

1.

1930년대 대중 문화는 어땠을까? 대중 잡기가 성행하여 <삼천리>, <신동아>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잡지들이 출간되었대. 특히 <삼천리>리는 가장 오래 유지되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인데, 조선일보 기자답게 1937년 이후로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이전에는 돈 많은 집에서나 가질 수 있는 라디오가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로 인해 라디오 드라마가 급증하였고, 스포츠 실황도 라디오로 해주었대. 이렇게 라디오가 인기를 끌자, 일본은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선전용으로 적극 활용했단다. 이때도 언론과 방송의 힘은 권력의 노예가 되었구나. 하기야, 이것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게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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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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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영화도 유행하여 극장도 많이 지어졌단다. 한 동안 영화의 인기를 이끌었던 변사는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도 대거 유입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구나. 라디오와 함께 축음기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와 함께 가요도 같이 발전하였단다. 이때 활동했던 가수들과 유행했던 가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몇몇 노래들은 아빠도 알고 있는 노래들이었단다. 그 중에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가 가사를 통해서 몰래 항일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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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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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커피도 많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커피가 못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도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좋다고 하고,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하고그때나 지금이나커피는 몸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과하게 먹지 말라고 이해해야겠다. 커피가 유행하면 덩달아 커피를 파는 카페와 끽다라고 하는 다방이 함께 유행했단다. 카페는 에로로 문제가 되기도 해서 총독부에서 강한 규제를 하기도 했대. 그 밖에 음악 장르 측면에서는 재즈도 유행을 하고, 댄스도 유행을 했는데, 일제총독부에서는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일부 춤꾼들은 댄스홀 허가해 달라고 편지도 썼으나, 총독부는 끝내 허가하지 않았대.

 

2.

백화점도 생기기 시작해서,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은 서로 경쟁을 했는데, 화신백화점의 주인 박홍식은 민족주의 마케팅을 하고, 공격전인 할인을 통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였어. 그로 인해 동아백화점은 개업 반년 만에 화신백화점에 흡수 합병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여자들의 패션을 살펴보면, 머리는 단발, 파마 등 여러 가지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대. 남자들의 헤어스타일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대. 하지만 장발 단속이 이때도 있었나 보구나. 일제 시대 장발에 대한 탄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불우한 현대사를 갖게 되었으니, 일제가 장발에 대한 탄압은 잘못해도 엄청 잘못한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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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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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사이에서는 여우목도리도 유행을 했다고 하는구나. 최초로 패션쇼도 열렸다고 했어.

이 시대 전화 보급도 급증을 했대. 그러면서 전화 범죄도 발생했다는데, 보이스 피싱의 역사는 전화의 역사와 함께 했나 보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전화도 가능해졌다는구나. 일본 문화는 계속 물밀듯이 들어와서, 대중 목욕탕도 생겼는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는다는 것이 유교 주의 사회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테지. 크리스마스도 전래되어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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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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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유행은 그 이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구나. 이 시절 경성과 평양의 정기 축가 대항전이 있었대. 경평전이라고 불렀다는구나. 승부욕이 지나쳐서 경평전을 열기만 하면 난투극이 벌어졌고, 지역 갈등도 있었지만, 축구를 통해서 항일한다는 의미도 있었다는구나. 이때 평양팀의 김영근이라는 선수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이 경평전은 매년 펼치다가 해방이 되고 남북에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1946년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고 하는구나. 축구만큼 권투의 인기도 많았대. 서정권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 이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열이 엄청 났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입학정원이 적어서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데 평균 경쟁률이 6:1이나 되었대. 그렇다 보니 더욱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고,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DNA에 새겨져 있는 것 같구나.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의 이야기란다. 이제 한 권 남았는데, 아빠가 지금까지는 시간 간격을 두고 한 권씩 읽었는데, 마지막 10권은 그냥 연달아 읽어서 끝내버렸단다. 10권도 읽은 지 좀  되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너희들한테는 아직 이야기를 못해주었구나. 곧 해줄게. 9권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랑 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말이야.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20년대 도시 고학력층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모던 걸 1930년대에 이르러 숙성되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갔다.

책의 끝 문장: 각개약진할 때 하더라도 이젠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슬기가 필요하다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년 10월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46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년 11월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 P114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 P160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년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 P179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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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천지에 가득한 그 아름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연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는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더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 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


(90)

만주에 퍼져 있는 일본영사관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는 중국관리들에게 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고 군대까지 철수시킨 그들은 중국관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계획이 바로 이화제한(以華制韓)이었다. 중국의 힘으로 한국을 제재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의 이한제한(以韓制韓)의 수법에다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었다. 조선인 친일파와 밀정들을 투입하여 독립투쟁 세력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이 이한제한이었다.


(165)

그래, 자네의 판단이 정곡을 찌르고 있네. 여기 서간도가 북간도보다 다소 덜할지는 모르나 여기 동포들의 동향도 대동소이하네. 경신년 참변 때 이곳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독립군들이 이동을 단행한 것은 무고한 동포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려는 작전계획으로,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취하는 군사행동이지. 그 작전에 왜병들은 당당한 작전으로 맞서지 않고 한다는 짓이 양민들을 대량학살한 것이네. 그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열함이고 잔혹함일세.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네. 그게 무언고 하니, 동포들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이 바로 왜놈들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목적이고 노렸던 바란 사실이네. 우리 동포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고, 또한 독립군을 불신하게 하고, 협조를 못하게 만드는 술수, 그게 바로 왜놈들이 조작해 내는 이간책동술이네. 그러니까 지금 독립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무작정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왜놈들의 그런 이간책동을 바르게 알리고 이해시켜 가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동포들이 곧 조선이고, 동포들이 없고서는 그 어떤 독립투쟁 단체들도 존속할 수 없으니까.”


(210)

저런 인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자들인가. 저런 것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종자들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가. 영원히 일본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믿는 것인가. 저런 놈들한테 꼼짝없이 끌려가야 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왜 튀어나온 것인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이광수는 왜 저런 못된 인종들을 질타하고 정신차리게 하지 않고 민족 전체를 비하시키고 흉보고 흠집 내고 있는가. 이광수는 3.1운동을 보지도 않았는가. 아니, 지금도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것일까. 이광수는 왜 그 따위 글을 쓴 것일까. 그건 바로 일본놈들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광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나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235)

보라, 조선의 사나이 된 자들이, 더욱이 배움을 갖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항일이냐, 친일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또 하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항일도 친일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친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친일인가? 조선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배움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 책무가 더 커진다. 그런데 왜놈들의 범죄를 방관하다니. 범죄를 방관하는 것은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고 동조하는 또다른 범죄다. 그러니 그게 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가 된 이 땅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고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배움도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왜놈들의 착취정책을 피할 능력이 없이 매일매일을 고통에 시달리며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살 수밖에 없다.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생활, 그건 바로 항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방관에 비하면 그건 적극적인 항일이 된다.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들을 구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게 지식의 대의며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바쳐 그들이 못배운 바를 일깨워야 하고, 깨달음에서 생성된 힘을 한덩어리로 뭉치게 해야 한다. 자각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항거, 그건 그들의 해방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이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마음을 크게 열고 세상을 대하라. 식자들이 망친 나라를 식자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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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생명의 순환을 차라리 죽음의 순환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을 것이고, 죽는 모든 것은 먹힐 것이다. 벌레는 파랑새에게 먹히고, 파랑새는 뱀에게 먹히고, 뱀은 매에게 먹히고, 매는 올빼미에게 먹힌다. 이것이 야생의 작동 방식이고, 나는 그걸 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프다.


(20)

사랑의 그늘진 면은 늘 상실이고, 비통함은 사랑 자체의 쌍둥이일 뿐이다. 마마 앨리스가 돌아가셨을 때 내 어머니는 열두 살이었다. 파파 독은 포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길가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자라고 있는 장미 덤불을 응시했다. “내 생각에 파파 독은 그때 죽기로 결심하셨던 것 같아.”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겨우 한달 남짓 사셨으니까.”


(31)

친족들-어머니와 아버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하얀 후광 속에 온전히 차분하게 잠겨 있는 외외증조할머니-이 모두 내 주위에 모여 있다. 너무 일찍, 작고 허약하게 태어난 나는 모든 사진 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사진 속에서 내 주위에 모여 머리를 기울인 채 내 입술이 또 다시 파래지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너무도 얇게 숨을 쉬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너무 작고 항상 추위를 탄다. 하지만 친족들은 마차 태양인 양 나를 보고 있다. 내 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외외증조할머니, 그분들 모두가 나를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분들은 내가 태양인 양, 그분들이 그때껏 평생 추위를 탔던 양 나를 보고 있다.


(101)

그렇기는 하지만, 잔혹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감할 줄 아는 종이다. 2007년에 베트남에서 심한 장애를 가진 선사시대 인간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그 화석 인간의 골격은 클리펠파일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선천성 질병의 특징인 융합된 척추뼈와 약한 뼈들을 보여 주었다. 그 남자는 사지 마비 환자였고, 자기 힘으로 음식을 먹거나 몸을 깨끗이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동체 안의 다름 사람들이 돌봐 준 덕분에 성년기-알겠는가, 석기시대에 말이다-까지 생존했다.


(168)

하지만 겨울이면 플라타너스의 헐벗은 가지들이 자기들이 여름 내내 보호한, 내 머리 30센티미터 위에 있는데도 거의 보이지 않던 흉내지빠귀 둥지를 보여 준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너무도 많이 흩어져 있어서 가로등만이 유일한 방해물이다. 붉은꼬리말똥가리가 차가운 노란 발 위로 깃털을 부풀리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맹세할 수 있는 너무도 고요한 태도로 땅을 조사한다.


(186)

모두들 알다시피 안개는 소리 없이 낀다. 하지만 시()에서 그러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내려앉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안개는 분주하다. 그것은 귀찮게 쫓아다니는 고양이와 할퀴는 참새를 마찬가지로 감춰 준다. 그것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무디게 만들고, 구부러진 잔가지를 펴 주며, 섬세한 녹색 그늘 속에서 모든 나무를 더 부드러운 모양으로 만들어 준다. 숲 깊은 곳에서 안개는 어린 가지와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보석들을 하나하나 깔아 두면서 숨어 있던 거미줄을 꿈의 풍경 속으로 일깨운다. 하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침 해가 타오른다. 하지만 세상은 당분간 안개에 속해 있다. 안개는 감추고 보여 주고 하느라, 우리가 아는 것을 감추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우리 눈에 드러내느라 분주하다.


(235-237)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해도 된다고 내게 허락한 단어.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우라질.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해도 된다고 내게 허락하지 않은 단어.

콧물.

아버지가 좋아한 농담의 마지막 문장.

  , 제기랄. 내가 개똥을 밟았어.

아버지가 좋아한 시의 첫 문단.

   토요일의 저녁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있다,

   오말리가 바의 문을 닫고 있다,

   그가 몸을 돌리고

   붉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 말했다.

   나가요, 당신은 여기 머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한 마지막 말.

   고맙다.

아버지가 한 마지막 말.

   그만해.

부모님이 죽어 가던 방에서 내가 한 말.

   사랑해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사랑해요.

부모님이 죽어 가던 방에서 내가 하지 못한 말.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 , 우라질.


(246)

어머니의 장례식 2쥐 뒤, 그 개가 가출했다. 얼룩배기 털을 가진 그 개는 제멋대로이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부르면 절대 한 번에 오지 않았고, 가장 낮은 덤불 밑, 꺾어진 가장 작은 나뭇가지 뒤로 몸을 감추었다. 겁에 질린 나는 정원을 뒤집어 엎으며 그 개를 찾았다. 마침내 길 건너편 어머니 집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뒷문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뛰어오르고 할퀴고 있는 그 개를 발견했다. 얼마나 절박하게 할퀴었는지 문설주의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252)

내 꿈속에 나올 때 엄마는 저승의 유령 혹은 나 자신이 느끼는 비통함을 반영하는 표정이 아니라, 항상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다. 꿈에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첫 반응은 항상 안도감이다. ,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착각했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꿈속에서 내가 엄마를 붙잡고 꼭 껴안으며 몇 번이고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항상 놀라고 어리둥절해한다.


(261-262)

우리가 늘 느끼는 것에는 그 자체의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어둠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약간의 선량함을 숨기고 있다. 예기치 않던 빛이 반짝이기를, 그리하여 가장 깊은 은닉처에서 그것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면서.


(281)

어머니는 서른 살에서 서른여섯 살 사이에 아이 셋을 가졌고, 나도 서른 살에서 서른여섯 살 사이에 아이 셋을 가졌다. 지금 내 몸은 정확히 어머니 몸의 복제품이다. 내 굵어진 허리에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의 발이 나를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안 나는 지켜본다. 내 목의 접힌 부분과 눈썹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반지를 낀 내 손가락의 곡선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어머니가 절대 빼지 않던 그러나 남겨 줘야 했던 반지.


(296)

그 모든 해를 지나온 후 모성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맥박처럼 똑똑 소리를 냈고, 긴 줄에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유령 아기를 팔에 안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아들들을 본다. 이제는 전부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다. 때때로 그 아이들의 머리가 내 엉덩이 근처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그 아이들의 축축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 얽혀 있거나 블라우스 뒷자락을 움켜지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때로는 저녁 식사 중 아이 한 명이 유리컵을 입술에 가져갈 때, 그 아이의 손이 빨대 컵을 붙잡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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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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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사벨 아옌데의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세피아빛 초상>을 읽었단다.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긴 하지만, 시간 상으로는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의 사이에 해당하는 시간이란다. 먼저 쓴 <운명의 딸> <영혼의 집>을 연결해주는 작품이자 삼부작을 매조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세피아빛 초상>에는 <운명의 딸>에 나오는 등장인물도 나오고, <영혼의 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나와서 읽는데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단다.

소설 제목에 있는 세피아빛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가 자꾸 연상이 되는데, ‘세피아빛이라는 것은 오징어 먹물로 만든 암갈색의 안료가 내는 빛이라고 책의 마지막 문장의 주석으로 설명이 나와 있더구나. 이사벨 아옌데의 이번 작품도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았단다. 삼부작을 다시 정리하면 지은이 아옌데가 쓴 순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순서이고, 시간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 순서란다. , 그럼 <세피아빛 초상>의 이야기를 해줄게..

..

<세피아빛 초상>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862년부터 188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운명의 딸>에서 등장했던 엘리사와 타오 치엔 기억나니? 그들은 결혼 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을 하게 되었단다. 엘리사는 칠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영국계 사람이고, 타오 치엔은 중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중국계 사람이잖아.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아들 럭키였고, 둘째는 딸 린이었단다. 미국에서 살기에는 중국인 성을 따르는 것보다 엄마의 성을 따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성인 소머스를 붙여주었단다. 타오 치엔은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린 소머스는 커 가면서 엄마의 얼굴와 아빠의 큰 키를 닮아서 뛰어난 외모로 유명했단다. 그래서 공화국 여인상이라는 동상의 모델로도 뽑혔어. 그런 린 소머스가 한 방에 훅 가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마티아스라는 바람둥이를 만나서부터였단다.


1.

마티아스를 이야기하자면 그 집안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마티아스의 아버지는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크루스라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파울리나 델 바예라는 사람인데, 마티아스의 어머니 파울리나의 집안이 엄청난 부자였단다. 칠레에서 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엄청난 돈을 벌었어. 그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는데 모두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 장남 마티아스는 예술에 관심 있어하지만, 공부에 관심 없고 방탕한 생활을 했어. 행실이 바르지 못했고 술도 좋아하고 심지어 아편까지 했단다. 마티아스의 장점이자 단점은 잘 생겼다는 것. 그에 반해 파울리나의 조카 세베로는 참 성실했단다. 세베로 델 바예는 칠레의 엄격한 보수주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세베로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 보수적인 성향의 집안에서 보자면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세베로는 칠레에서 쫓겨나 미국에 있는 파울리나 고모의 집에 오게 된 거야. 파울리나는 그런 세베로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어. 세베로는 고모의 후원으로 변호사가 되었어.

….

마티아스도 린 소머스의 소문을 들었어. 마티아스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린 소머스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장담했어. 린 소머스는 너무 쉽게 마티아스의 외모에 빠지고 말았단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세베로는 가슴 아파했단다. 세베로도 린 소머스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마티아스의 장담대로 린 소머스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만 린이 임신을 했단다.

이 일로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파울리나를 찾아왔단다. 마티아스는 아기의 아빠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잡아떼고 유럽으로 도망가 버렸단다. 세베로는 가족의 대표로 린의 집에 찾아가 잘못을 사과했단다. 세베로는 그렇게 얼굴을 익힌 이후 계속 린의 집을 찾아갔어. 앞서 이야기했듯이 세베로는 린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세베로는 린에서 청혼을 했지만, 린은 거절했단다. 하지만 세베로는 아기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계속 설득을 했고, 린은 세베로의 진정성을 알게 되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단다.

결혼식은 세베로, 린의 가족들(엘리사, 타오 치엔), 그리고 세베로를 도와준 파울리나 집안의 착한 집사 윌리엄스만 모여서 조용히 식을 올렸단다. 그런데 린은 딸은 아우로라를 낳고 얼마 못 가서 산후열로 그만 세상을 등졌단다. 린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과 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파울리나도 들었어. 파울리나는 엘리사를 찾아와 아우로라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으나, 엘리사는 거절을 했단다. 파울리나는 격분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어.


2.

2부는 1880년부터 1896년까지의 이야기란다. 세베로는 아우로라의 법적인 아버지였지만, 갓난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어. 당연히 경험도 없었고 말이야. 아우로라는 외조부모인 엘리사와 타오 치엔이 보살폈단다.

당시 칠레는 1879년부터 주변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 애국심이 뛰어난 세베로는 칠레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칠레로 돌아왔단다. 세베로가 린 소머스와 결혼하긴 했지만, 사실 칠레에 약혼녀가 있었단다. 약혼녀 이름은 니베아였어. 니베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세베로를 용서하고 여전히 세베로를 사랑했단다. 세베로는 니베아와 만남을 뒤로 하고 전쟁에 참여했어. 하지만, 전쟁 중에 중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했단다. 이 소식을 들은 니베아는 전쟁터에 와서 세베로를 지극히 간호했단다. 니베아의 계속된 구애로 니베아와 세베로는 결혼을 했단다. 이후 그들의 사랑은 아이를 열다섯 명이나 낳았단다. 니베아와 세베로의 막내딸 이름이 클라라였는데, 많이 익숙한 이름이었어. <영혼의 집>의 주인공 이름이 클라라였던 거 같은데…. 하면서… <영혼의 집>을 읽고 쓴 독서편지를 찾아보니, 맞더구나. 그리고 독서편지를 읽어보니 클라라의 부모님 이름이 니베아와 세베로였어. 그제서야 <세피아빛 초상>이라는 소설이 <운명의 딸>뿐만 아니라 <영혼의 집>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약간의 희열도 느꼈단다.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책 읽고 독서편지가 써놓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를 해볼게. 아우로라는 외할머니 엘리사와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 그런데 아우로라가 다섯 살 때 타오 치엔이 죽고 말았단다. 엘리사는 타오 치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를 타오 치엔의 고향인 중국에 가져가려고 했어. 오랜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엘리사는 아우로라는 친할머니에 맡기기로 했단다. 파울리나라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우로라가 온 날 이후로 아우로라에게 헌신을 다했단다. 아우로라의 뿌리가 칠레이므로, 파울리나는 아우로라가 칠레의 교육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모두 칠레로 가기로 했단다. 오랫동안 집안을 완벽하게 해준 집사 윌리엄스와도 헤어져야 하는데, 집사 윌리엄스는 뜻밖에 파울리나에게 청혼을 했단다. 파울리나의 남편이 이미 오래 전에 죽어서 혼자였어. 윌리엄스는 칠레에 가면 어떤 식으로는 집안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할 테고, 형식적이지만 남편도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평생 보필하겠다고 하자, 파울리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단다.

그들은 칠레에 가기 전에 잠깐 유럽에 들러서 아들 마티아스를 잠깐 만나고 칠레에 도착했단다. 아직 아우로라는 자신의 친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해변 따라 내려오면 칠레인데, 칠레 오기 전에 유럽을 들렀다가 온다는 것이 파울리나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려주는 듯 하구나. 칠레에 도착한 파울리나 일행은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잘 지냈단다. 아우로라는 마틸데 피네다라는 가정교사한테 공부를 배웠단다.

.

당시 칠레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단다.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독재 정치를 기획하고 있어서 반대파의 거센 항의로 내전이 일어났어. 세베로 역시 목발을 짚고 반대파 진영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단다. 니베아는 파울리나의 집에 머물면서 반대파의 유인물을 몰래 인쇄했단다. 이 일은 윌리엄스가 도와주었고, 가정교사 피네다도 적극 관여했단다. 파울리나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유인물 전달책이 정부군에 잡히면서 알게 되었다. 일단 파울리나의 집에서 모두 피신해야했어. 윌리엄스는 자신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할 거라면서 남겠다고 하고 파울리나와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피신했다가 사태가 안정되었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얼마 후 유럽에 있던 마티아스가 악성 성병에 걸려 휠체어에 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단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몸이었어. 그나마 생애 마지막을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우로라와 지낼 수 있었지. 아우로라도 이제서야 마티아스가 자신의 친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십대 소녀가 된 아우로라는 사진을 배우고 자신이 어느 정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한편 윌리엄스는 유럽에 갔다가 포도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파울리나에게 칠레에서 포도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단다. 프랑스의 날씨와 칠레의 날씨가 비슷해서 성공할 거라면서파울리나는 포도 사업을 알아보기 위해 유럽에 식구들과 가기로 하고, 아우로라도 함께 갔단다. 파울리나는 사실 이때 몰래 수술을 받기 위해 유럽에 간 것이었어. 병이 생겨 몸이 많이 안 좋았거든


3.

3부는 1896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야기란다. 다행히 파울리나의 수술은 잘 끝냈어. 프랑스에 가서 포도와 와인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칠레로 돌아왔단다. 파울리나는 몸이 안 좋게 되자,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로라의 결혼을 봐야겠다면서 아우로라에게 결혼을 종용했단다. 그래서 파티에서 만난 디에고 도밍게스라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단다. 할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결혼처럼 보였어. 그런데 사람을 좀 잘못 고른 것 같구나. 디에고 도밍게스의 집은 상당히 보수적인 농장 집안이었단다. 결혼하고 나서 아우로라는 시골에서 생활하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어.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남편과 맞지 않았어. 답답함과 지루함의 연속이었지. 그나마 시누이 아델라와 마음이 맞아서 아델라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어. 이 결혼으로 얻은 것은 아델라라는 친구뿐.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이때 시누이 아델라도 함께 왔어. 할머니가 좀 나아지셔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밤마다 어딘가 나가는 남편을 뒤따라 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단다. 남편이 자신의 형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거야.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남편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할거냐고 했어. 그 즈음 다시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단다. 다시 할머니 집에 왔어. 다행히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단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냥 할머니 집에 머물기로 했단다. 형수와 불륜 관계인 남편에게 돌아가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어. 할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할머니의 담당의사였던 이반 라도빅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사실 그 전부터 서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호감으로만 머물고 있었지.

….

그러던 어느날 외할머니 엘리사가 찾아오셨단다. 티오 치엔의 유해를 가지고 중국에 가서 묻어주고, 영국에 가서 엘리사의 고모인 로스 스머스를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주셨대. 엘리사의 고모 로스 스머스도 <운명의 집>에서 등장했던 분인데 기억나니? 로스 스머스가 돌아가신 다음에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아들 럭키와 지내다가 아우로라 생각이 나서 칠레로 왔다는구나. 엘리사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셨어. 파울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아우로라에게 다시 든든한 버팀목이 나타나신 거란다. 아우로라와 엘리사 할머니는 함께 지내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났단다.

아빠가 메모를 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중간중간은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부분도 있어. 기억을 잘못하여 내용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우로라, 파울리나 할머니, 엘리사 할머니 모두 강단 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런 캐릭터로 나오는 것 같구나. 그런 강단 있고 주장이 강한 그들의 성격을 배우고 싶더구나. 그런 이들이 모두 여자여서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구나.

아빠가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들은 모두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들이었단다. 최근에 이사벨 아옌데의 신간이 한 권 출간되어 읽었는데, 그것도 조만간 이야기해줄게. 그 책에도 또 다른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단다.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

책의 끝 문장: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카메라는 간단한 기계여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도전이라면 그것으로 예술, 곧 참된 것과 아름다움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한 탐색은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일이다. 나는 투명한 가을 낙엽과 해변의 완벽한 모양의 소라에서, 여체의 등허리 곡선과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 조직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포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들에서도 찾는다. 때때로 암실에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작업하다가 한 사람의 영혼, 한 사건의 감동 또는 한 사물의 생동하는 본질을 만난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치솟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게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의 목적이다. - P142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보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들려왔고 사회의 변화를 모르고 지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실외 스포츠와 실외 게임, 산책 등 카스티야 이레온 귀족의 느긋한 후손들보다는 외향적인 영국인들에게 맞는 놀이들을 광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예술과 문화의 바람으로 칠레의 분위기가 새로워졌고, 독일산 기계들이 중후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칠레의 오랜 식민기적 낮잠은 중단되고 말았다. 벼락부자에 교육도 받고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했다. 파업, 폭행, 실업, 칼을 뽑아 든 기마경찰의 공격 등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여서 칼레우푸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 년 전에 같은 침대를 썼던 고조부들처럼 여전히 농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20세기는 찾아들었다. - P348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순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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