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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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전기 소설이나 평전을 좋아하는 편인데, 인터넷 서점은 아빠의 이런 점을 노리고 관련 신간이 나오면 초기 화면에 띄어주는구나. 그렇게 알게 된 책이 오늘 읽은 존 밴빌의 <케플러>라는 책이란다. 지은이 존 밴빌은 모르는 사람인데 지은이가 무슨 문제겠니, 천문학자 케플러의 전기 소설인데천문학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거의 한두 손가락에 드는 사람이 케플러가 아닐까 싶구나.

너희들에게 학교에서 혹시 케플러의 법칙을 배웠냐고 물어보니, 아직 배우지 않은 것 같구나. 케플러의 법칙은 지구과학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법칙으로 3가지 있단다. 첫째는 행성은 항성을 중심으로 타원 궤도로 공전한다는 법칙이야. 학창 시절 처음 이 법칙을 배울 때는 이게 대단한 발견인가 싶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 법칙을 발견한 것이 까마득한 중세 시대이고, 당시 어떻게 이런 밝혀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둘째는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행성이 항성을 중심으로 공전을 할 때 공전궤도를 지나면서 항성과 행성이 만들어내는 시간당 면적이 같다는 법칙이란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좀 쉬운데, 말로만 하려니 쉽지 않구나. 아무튼 타원 궤도로 공전하는 행성들은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때문에 태양에서 가까우면 속도가 빠르고, 태양에서 멀면 느리게 움직인단다. 공전속도가 늘 똑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 세 번째 법칙은 조화의 법칙으로 이것은 하나의 수식으로 외웠던 기억이 있구나.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행성의 타원 궤도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란다. 아빠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위에서 설명한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은 인터넷을 좀 참고해서 설명했단다.

이렇게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케플러는 법칙만큼 그의 삶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 같구나. 아빠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거든. 학교에서도 케플러의 법칙이 시험에 나오지, 케플러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안 나오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 책을 신간 코너에서 보고 무척 읽어보고 싶더구나. 사실 케플러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고, 너무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구나.

아빠가 위에서 지은이가 누구인지 상관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어떤 분인지는 한번 약력을 읽어봤단다.

아일랜드 작가이고, <바다>라는 소설로 부커상도 수상했다고 하는구나. <케플러>라는 책은 1981년에 쓴 책이라고 하고, 과학에 관한 책들을 여럿 쓰셨다고 하는구나. 그의 책들 중에 <닥터 코페르니쿠스>라는 책에 눈에 띄는구나. 그 책도 리스트에 올려두어야겠구나.


1.

, 그러면 케플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이 책이 비록 소설이라서, 100% 진실은 아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것 같구나. 중세 시대 그의 삶 전체를 팩트 그대로 알 수 없으니 말이야. 케플러의 삶 중간중간 빈 곳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단다.

요하네스 케플러. 소설의 첫 장면은 식구들과 함께 튀코 브라헤라는 천문학자의 초대로 보헤미아로 가는 시절부터 나온단다. 하지만 그 전에 케플러의 좀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해주어야겠구나. 케플러는 그라츠 지역의 튀빙겐 대학에서 메스틀린 교수한테서 천문학을 배웠단다. 매스틀린 교수와 서로 학문적 논쟁도 했고, 50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도 이 때 알게 되었고, 그는 이후 지동설을 믿었단다. 천체 기하학 이론을 공부하면서, 직접 태양계의 천체 모형을 만들기도 했어. 그리고 첫 번째 저서 <우주의 신비>를 지필 했어.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는데 상인 오베르도르퍼라는 사람이 거래를 제안했어. 남편이 둘이나 죽어 과부가 된 바르바라 뮐러와 결혼을 하면 금전적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케플러는 바르바라 뮐러와 결혼을 했단다. 당시 케플러 나이 스물다섯이었어. 둘은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평범한 가정 생활은 이어갔단다. 케플러와 결혼하기 전에 바르바라는 딸 레기나가 있었고, 케플러와 바르바라 사이에서 첫째 아들 아인리히가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두 달 만에 죽고 말았어. 둘째도 출산 후 곧 죽고 말았대. 당시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이 둘을 잃었으니 무척 힘들었겠구나.

케플러가 천문학자이긴 하지만 종교의 신념도 강했던 사람인데 당시 주류인 가톨릭 예수교가 아닌 루터교 신봉자였단다. 가톨릭 예수교를 믿으라고 강요를 받기도 했는데, 이를 거절하여 케플러는 추방당했다가 돌아오기도 했어. 카톨릭 예수교의 규제가 점점 심해지자, 그는 그라츠를 떠나기로 했어. 그때 마침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초대장이 생각이 나서, 보헤미아에 있는 튀코 브라헤의 성() 베나테크 성으로 식구들과 함께 갔단다. 그곳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들과 함께 연구하였어. 튀코 브라헤와 함께 천문학표를 발표하여 제작하기로 했는데, 프라하의 루돌프 황제가 지원을 해주어 그 천문학표의 이름을 <루돌프 표>라고 하기로 했어. 그런데 이 <루돌프표>는 케플러 말년에 가서 완성하게 된단다.

튀코의 다른 조수들과 화성의 운동에 관해 논쟁을 하던 중에 케플러는 7일만에 설명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단다. , 그들이 그 동안 관측한 화성 자료를 모두 달라고 했어. 그리고 케플러는 화성 운동에 연구를 했지만 그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7일 안에 끝낼 수는 없었어. 17개월이 지나도 화성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어. 하지만 기정 사실이었던 행성들이 등속도 운동을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의심하게 되었어.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튀코 브라헤가 죽었고, 그가 죽고 나서 케플러는 제국의 황실수학자가 되었단다.


2.

처음 두 아이가 죽긴 했는데, 이후에 주자나, 프리드리히, 루트비히가 태어났단다. 황실 수학자가 된 케플러는 황실의 지원을 받아서, 수학과 천문학에 연구를 하여 많은 업적과 책을 썼단다. 아무래도 황실수학자이다 보니 많이 유명해지기도 했단다. 케플러의 고향에는 어머니와 뇌전증을 앓고 있는 동생 아인리히가 있었어. 가끔 고향을 가기도 했지만, 아내와 어머니 사이는 그리 좋지는 않았단다.

이 책의 제4부는 케플러가 주고 받은 편지들로 채워져 있단다. 그런데 이 편지들이 실제 남긴 편지인지, 지은이가 상상으로 적은 편지들인지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이 편지에서는 갈릴레이뿐만 아니라 많은 유명한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있고, 가족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도 있었단다.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케플러는 갈릴레이 연구 결과에 지지와 비판을 함께 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단다. 케플러는 갈릴레이를 약간 오만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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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234)

대사님, 갈릴레오의 얇은 책이 간결하고 단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의 저서 <별의 전령>은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책입니다. 몇 쪽만 훑어보아도 금세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가 주장하듯 그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이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황제께서도 예전에 작은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신 적이 있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비록 증거를 제공하진 못했지만 은하수가 무수히 많은 별의 무리일 거라고 추측한 바 있습니다. 행성에 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저는 그가 발견한 네 개의 새로운 행성이 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있다면 다른 행성에도 위성이 있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별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과 그것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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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딸이었던 레기나는 결혼을 하였고, 아들 프리드리히가 전염병으로 죽고 얼마 후 아내 바르바라도 병으로 죽고 말았단다. 한편 케플러의 어머니는 고향에서 주변 사람들을 치료해 준다면서 이상한 약물을 만들어 주었대. 그래서 그 약물을 먹고 병이 난 사람들도 있고,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어. 그 약물 때문에 병이 나고 죽은 것인지 인과관계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 일로 마녀로 몰리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중세 시대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성행했단다. 어머니도 마녀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지만, 케플러가 가서 도와주어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았단다.

케플러는 연구 결과를 하나 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단다. 등속도 운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행성의 운동은 타원형으로 공전한다고 가정을 하니 모든 것이 딱 들어맞았어. 자기 스스로도 깜짝 놀랐단다. 그렇게 케플러의 법칙은 완성되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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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나는 다시 한번 화성에 원 궤도를 적용해 연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화성 궤도는 양옆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위아래는 바깥으로 나가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타원형 궤도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학자들이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고수해 온 원동운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찾아낸 증거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양의 궤도가 화성뿐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나머지 행성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름이 끼치더군요. 미천한 내가 어떻게 우주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거기 들어갈 노력과 수고란! 주전원과 행성의 역행,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마구간을 싹 치우고 이제는 수레에 가득 실린 말똥, 즉 이 타원형 궤도만 남았습니다. 어찌나 악취가 지독한지! 그런데 이제 그 안에 들어가 구린내나는 말똥을 혼자 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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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브라바라가 죽고 나서 주자니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케플러와 주자니 사이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 중에 세 명이 어렸을 때 죽었다는구나. 이 즈음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케플러를 후원해주었던 루돌프 2세는 동생 마티아스에 의해 쫓겨나고 마티아스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단다. 케플러의 황제 수학자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임금을 받지 못하고 체불되었어. 그래서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 그러면서도 행성 연구는 멈추지 않고, 그 옛날 튀코 브라헤와 함께 연구했던 천문학표인 <루돌프표>를 완성하여 출간했어. 가난이 계속 이어지고, 체불된 임금으로 받으려고 길을 나섰는데 병을 얻어 그의 나이 나이 59세에 삶을 마감했단다.

이 책에는 구체적인 연도가 안 나와 있는데, 케플러의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단다. 케플러는 1571 12 27일 신성로마제국(오늘날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태어나 1630 11 15일 신성로마제국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에서 죽었다고 하는구나.

여기까지가 존 밴빌의 <케플러>였단다. 시대적 배경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좀 있었단다. 그래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케플러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단다. 그런데 오늘따라 키보드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오타나 많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나이를 먹어서 손이 마음대로 안가는 느낌이랄까. 하기야 손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자주 엉클어지는 느낌이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고괜한 넋두리로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러프에 고개를 묻고 잠든 사이, 요하네스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를 푸는 꿈을 꾸었다.

책의 끝 문장: 난 절대 죽지 않아. 절대로.


케플러는 우주의 조화를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좇고 있었다. 그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뒤엉킨 덤불을 헤치며 전설의 사냥감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과도 같았다.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냥꾼만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기회를 얻는 법. 무기라고는 아직 불완전한 계산과 미완성의 공신뿐이고, 더군다나 가장 노릇과 책임, 빌어먹을 가정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종을 번갈아 울려대며 소리치고 날뛰는 광대들에게 에워싸여 있는데 어떻게 그런 기회를 노리단 말인가? 그러나 딱 한 번, 아주 잠깐이나마 그 전설의 새를 본 적이 있다. 기껏해야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그것을 보았단 말이다. 섬광 같은 그 짧은 순간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 P43

케플러는 내기를 위해서, 그리고 튀코의 자료를 빼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인 셈이었다. 화성은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똑똑한 학자들이 수없이 도전했음에도 화성은 수천 년간 비밀을 내주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대로 우주에서 행성이 태양이 아닌 지구의 위치에 따라 그 값이 결정되는 왕복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행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돈다면, 궤도상에서 동일한 거리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달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화성의 궤도를 규명하기에 앞서 이런 의문점을 비롯해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시치미를 뗀 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 매끈하고 복잡한 설계도를 재구성해야 하는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 P126

나의 사랑하는 레기나야. 나는 삶이란 게 정해진 형체도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이 아닐까 생각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용해된 유리 덩어리와도 같아서, 아주 조야한 도구조차도 없이 오직 맨손으로 만지고 다듬어 완벽한 모양으로 빚어 우리 안에 품어야 하는, 그런 물질 같다고나 할까. 그것이 우리가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바깥세상의 혼돈을 내면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으로 바꾸는 것. 하지만 아니더구나. 삶이 우리를 품는 것이고, 우리가 커다란 유리구슬에서 지워 내야 할 흠집인 것 같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기 일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걸 본다고들 하지. 사실 어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만 그렇겠니? 어떤 방식으로 죽든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과 행동과 생각 속에 감춰져 있던 본질적인 모습을 인식하게 될 거야. 죽음은 완성을 위한 수단이지. - P251

정신은 모든 수학적 개념과 형태를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경험적인 신호를 통해 이미 아는 것을 기억해 낼 뿐이지요. 수학적인 개념은 정신의 본질입니다. 정신은 한 지점으로부터의 등거리를 생각해낸 뒤, 다른 어떤 감각 인식이 없어도 그 점으로부터 원을 그립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지요. 만약 정신이 신체의 눈을 쓰지 못한다면, 외부에 있는 사물을 상상하기 위해 눈이 필요하므로 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나름의 법칙을 지시할 것입니다. 정신 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양(量)에 대한 인식이 눈의 존재 방식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정신의 존재 양태에 따라 눈의 존재 양태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기하학은 눈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미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니까요.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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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상규는 말하는 세금은 지난 4 1일부터 적용된 중일전쟁특별세였다. 총독부에서는 중일전쟁에 대비하느라고 그 특별세만이 아니라 연달아 새로운 법들을 공포해대고 있었다. 2월에 중일전쟁특별세와 함께 육군특별지원령을 공포했고, 4월에는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관제를 공포했으며, 5월에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의 조선 적용을 공포했고, 6월에는 각 학교에 학교근로보국대 조직을 지시함과 아울러 각 도에 근로보국대를 조직하도록 명령했으며, 전국적으로 방공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창립시켰고, 전국의 사회주의 사상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전조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게 했고, 전국 교원들과 관공리들에게 제복 착용을 지시했다. 그 숨가쁜 조처들은 다름아닌 전조선의 전시체제화였다.


(23)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산산맥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우람하고 장엄했다. 천산산맥은 몸피가 거대하면서 길이도 끝없이 길었다. 그리고 능선은 톱니 모양으로 이어져 나가며 험준한 산줄기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천산산맥은 하늘을 가르며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마치 하늘에 도전하고 하늘에 제압하려는 것처럼. 천산산맥은 사람이 오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아득히 멀리 있으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천산산맥을 보고 압도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장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솟는 경탄의 소리와 함께 압도당했고, 계절의 변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순백의 자태를 드리운 만년설을 보면서 신비스러운 경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9)

조선족에게 쏘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쏘련은 왜 조선족을 이렇게 핍박하는가. 전인류적 해방을 외치고 있는 공산주의 모국 쏘련이 왜 이 모양인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쏘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다 거짓이고 위장인가? 아니, 강제이주를 시키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자. 우리에게 알릴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당하게 사람 대접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왜 할 일은 제대로 안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가. 제놈들에게 사람을 개 잡듯 죽일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아니, 짐승도 이렇게는 취급할 수가 없다. 흉악무도한 놈들! 인민해방, 인민혁명, 인민의 천국, 전인류적 해방, 약소민족의 독립 지원, 새빨간 거짓말! 도둑놈들! 사기꾼 집단!


(81)

사람들은 숯 굽는 일의 생소함이나 고달픔 이전에 숯 굽는 일 자체에 혐오감을 나타냈다. 일본세상이 되면서 숯은 장작이나 솔가리나무를 압도할 정도로 번창했다. 다다미방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일본사람들은 방마다 숯불화로를 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산속 숯가마에서 숯쟁이로 먹고 사는 조선사람들도 많아졌고, 숯장사로 떼돈을 버는 일본사람들도 많아지면서 목탄조합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짚불이나 솔가리불을 화로에 담아 쓰는 농부들로서는 숯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더구나 코밑은 물론이고 손이며 옷에도 숯검정을 하고 다니는 숯쟁이나 숯장수들을 농부들은 싸잡아 <숯쟁이>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그건 단순히 자기들에 비해 그들의 몰골이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그러는 것만이 아니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대대로 물려온 자부심을 은근히 품고 있는 농부들은 기껏 일본사람들한테 빌붙어 먹고 사는 숯쟁이나 숯장수들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105)

그동안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해왔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동료들이 여러 식민지국가들에서 봉직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계속 서신 교환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조선사람들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고 끈질깁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세계적으로 가장 가혹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상황 아래서 조선사람들이 가장 치열하고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가히 세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에서 23년을 살다가 쫓겨나는 제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진실한 말입니다. 제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중단하지 않은 죄로 쫓겨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천주교나 개신교나 조선사람들한테는 면목이 없고 미안함이 많습니다. 우리 양쪽 교단은 일본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세워놓고 3.1 운동 때도 방관만 했었지요. 그 결과 신자들이 격감하고, 장기간 교세확장이 안되었던 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로도 정교분리 원칙은 고수되었고, 신사참배 문제도 양쪽 교단의 몇몇 학교가 자진 폐교하긴 했습니다만 결국 총독부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호자는 것이었지 조선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실은 이 인터뷰에 응할 자격이 없습니다.


(182-183)

김원봉은 1938 9월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곧 중일 양국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이고 있는 무한 전선에 참전했다. 그러나 무한은 함락되었고, 조선의용대들은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 일본구 포로들의 신문, 일본군 점령지에서 첩보수집, 암살, 파괴활동 같은 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군의 보조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그런 역할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선독립군으로 무장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봉 앞에 닥친 현실은 냉엄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자기네 군대의 운영에도 정신이 없는 중국정부에서는 조선독립군의 지원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김원봉은 중국정부를 상대하는 현실과 대원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산주의 간부들이 이탈하면서 김원봉의 세력은 그 어느 때 없이 약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254)

어느 극단에서 만주를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그 극단은 여러 곳을 돌아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도문에 이르러 있었다. 도문에서 공연을 마친 단원들은 투숙하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넓고 넓은 대륙 만주의 수많은 거리에서 거리를 마을에서 마을로 바람에 실리듯 순회를 하고 다는 피로 탓인지 단원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잠이 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옆방에서 오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는 너무나 슬프고 절절해서 그 사람의 마음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인의 오열은 밤새껏 그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날이 밝자마자 여관 종업원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물어보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독립군에 가담했는데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두만강을 건너왔다가 남편이 이미 싸우다 죽은 것을 울며 새운 그 여인은 다음날 두만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안타까운 소식까지 듣게 된 그 사람은 굽이치는 두만강 물결을 바라보며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물 적은 두만강>이었다.


(286)

, 저는 중국과의 전쟁을 보면서 이번 전쟁의 답을 찾습니다. 중일전쟁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만 5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정부와 군부에서는 뭐라고 큰소리 쾅쾅 쳐댔습니까. 몇 개월이면 중국대륙을 완전 장악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몇 개월이 몇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중국대륙은 반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이 공업이 발달한 나랍니까?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랍니까? 다 아시다시피 농업국가에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 발달은 없습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많은 인구뿐이고 현대무기는 구라파 쪽에서 사들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한 일본은 예상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세월을 소모해 가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럼 영국은 어떤 나랍니까.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으켜 공업을 발전시켰고,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하고 있는 나랍니다. 미국은 또 어떤 나랍니까. 거대한 신대륙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영국의 공업기술을 받아들여 세계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라 아닙니까. 과학기술로 볼 때 중국은 영국과 미국에 비교조처 될 수 없는 원시상태의 나랍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겠습니까. 일본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패망합니다. 파쇼통치의 광기가 저지른 이번 전쟁으로 일본의 무고한 인민들만 희생의 제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외로 탈출해 인민구출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07-308)

만장하신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현하 세계정세는 독일과 일본을 적으로 하고 중국 영국 미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연합국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진작에 대일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 청장년들이 이 전쟁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심히 유감스러운 설()이 들려 우리 조선인들을 분노케 하고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신탁통치설입니다. 그건 연합국 중의 두 나라 대표인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종전 후 처리문제 중의 중대사인 아세아와 아프리카 식민지국가들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신탁통치란 무엇입니까!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연합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도 없고, 국가를 운영할 지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대국의 일방적인 횡포이며,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재론할 여지도 없이 신탁통치란 우리나라를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음모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석달 전인 지난 2월에 임정의 조소앙 외교부장께서 비판의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우리는 좌시할 수 없어서 오늘 이렇게 비판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를 통하여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신탁통치를 절대 거부하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결의를 만천하에 밝히고, 그리하여 처칠과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비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상으로 인사의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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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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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2권을 이야기해줄게. 아리랑의 초판이 1994년이더구나. 아빠가 처음 읽은 것이 2001년이니 아빠도 일찍 읽은 편은 아니구나. 하기야 아빠가 2000년 이전에는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으니…. 다행히 늦게나마 책읽기의 재미에 빠진 것이 다행이구나.

, 그럼 오늘도 부지런히 이야기를 해줄게.

을사늑약이 발표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단다. 충청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경상도에서도 뒤이어 일어났단다. 전라도에서도 최익현과 임병찬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단다. 송수익도 친구 신세호가 소개해 준 임병서와 함께 의병 일으킬 준비를 했단다.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다는 적이야. 한편, 일본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병에 맞설 준비를 했어. 일본은 그 전에 만든 친일단체 일진회를 의병을 막는데 이용했단다. 그래서 일진회 회원들은 무장을 하고 훈련 연습을 했어. 이에 일진회 회원들은 불만이 커졌단다. 일진회 회원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는 무기 없이 의병 준비를 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단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그런 일진회 회원들을 몰래 꾀어내어 죽이고 총을 빼앗았단다.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문 일로 의병들의 무기는 초라했단다. 그렇다 보니 무기로 무장한 일본 헌병대에 맞서 싸우다 보면 희생자도 많고 생포되는 사람들도 많았어. 잡힌 이들은 자신의 동네로 끌려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상을 당하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어.

의병 조직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은 아니었어. 의병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병 조직 내에서도 양반과 상민이 따로 있다는 거야. 양반 유생들이 아직 신분을 따지고, 천한 신분이라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어.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의 경우도 황제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면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해산명령을 받고 산에서 내려오는 우를 범했단다. 양반이라면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였어. 결국 쓰시마 섬까지 끌려가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게 되었지. 그의 뜻은 알겠으나, 그의 성급한 결정으로 전라도 의병의 줄기가 사라지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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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지난번의 최익현의 처사가 그 고질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황제인 고종도 고종이었고, 의병장이라는 최익현도 최익현이었다.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국왕이 해산명령을 내리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름 좋은 황칙을 받았다고 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일으킨 의병을 일순간에 해산시키고 포박당하는 의병장의 처사는 또 무엇인가. 그 결과 불쌍한 평민들만 왜놈들에게 무참히 살육당했다.

최익현은 <황칙>이라는 것의 진의를 면밀히 파악했어야 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상감의 뜻이 아니었듯이 그 황칙이라는 것도 상감의 진의가 아닐 수 있었다. 그것이 만약 마지못해 작성된 것이었다면 최익현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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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송수익 부대에서도 몇몇 유생들이 의병을 떠났단다. 전라도 의병 조직이 와해되어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단다. 이런 현상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단다.

을사늑약 이후 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좀더 살펴보면 나라의 빚을 백성들이 직접 갚겠다고 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단다.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고, 그 일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세웠어.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것도 이 즈음인데,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많이 유입되어 의병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도 했지만, 여전히 양반유생 의병들이 자기 권리를 찾으려고 하여 제대로 단합이 되지 않았단다. 그런 양반유생들이 의병을 떠나고 나중에 평민 출신 의병장들 위주로 의병의 색깔이 바뀌었단다.

 

1.

하와이에 노동자로 끌려간 방영근은 하와이에 온지 어느덧 4년이 되었어. 하와이에 도착하고 2년동안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계약기간인 2년이 지나고 나서는 그나마 생활이 조금 수월해졌어. 그리고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농장주들에게 인기가 좋았단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성실하고 성과도 좋았거든. 조선인들 중에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본토를 가는 이들도 생겼어. 방영근도 샌프란시스코로 가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법이 생겨서 미국 본토 이동이 제한되었단다.

하와이에 있는 노동자들은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듣고 했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을 인정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이 조선인의 손에 죽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전해졌어. 아빠가 작년에 읽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도 나왔던 내용이라 그때도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그때 마치 처음 알게 된 사실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소설 <아리랑>에도 나왔던 내용이구나. 그렇다면 아빠가 이미 20년 전에 읽고 잠시나마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을 텐데아빠의 기억력을 탓해야지그래도 이렇게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억에 조금 더 오래가겠지? 아무튼 그 나쁜 놈 스티븐슨을 죽인 장인환 님, 전명운 님의 이름을 오래 기억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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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08)

같은 날 <뉴욕 타임스> <조선민족은 아직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그전에 이미 사건을 보도한 것은 물론이었다.

<스티븐슨를 저격한 것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진 조선인들 중에서 자기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의사표시였고, 자기 민족의 운명을 자기들 힘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형벌에 상관없이 그 젊은 청년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치밀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일본을 돕고 조선을 배신한 사람을 공격했다. 물론 그 행동은 그리 바람직하거나 현명한 처사는 못된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 행동에는 상당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설은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선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쳐들지 못하는 민족이다>라고 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 것과는 정반대 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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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방영근은 날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장인환, 전명훈…… 장인환은 누구고, 전명운은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들은 보통사람들하고 어떻게 다를까. 특별나게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센 것일까. 글쎄, 씨름꾼이 아닌데 그럴 리가 있을까. 사람이 꼭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죽기를 작정하자면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건 마음이 강단지지 않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강단지기에 죽기를 작정하고 나서서 그런 장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들은 나이가 스물네다섯이다. 그러면 나와 같은 나이들이다. 그들도 고향에는 부모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걸고 나섰다. 나는……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내가 만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갈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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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미국 교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단다. 장인환 님과 전명운 님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돈도 모금해서 미국인 변호사를 선임했단다. 그리고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해 문학석사 과정중인 이승만을 데리고 왔어. 교포들은 서로 이승만을 자기 집에서 묵게 하려고 했지만, 이승만은 교포들이 모금한 돈으로 호텔에서 묵었단다. 재판이 계속 연기되자, 이승만은 자기 공부해야 한다고 떠나버렸단다. 그리고 자신은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살인사건의 연루될 수 없다는 말도 남겼대. 대단한 위인인세. 이런 사람이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니, 우리나라는 이렇게 지지리 인복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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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3)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승만이 8 25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버린 것이다.

한인동포 여러분들께 매우 미안합니다. 그러나 재판일이 언제 될지도 모르고 또 나 역시 논문을 써야 되니 시간관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인이니까 살인관계 재판 통역은 원하지 않습니다. 살인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되는 죄악입니다.”

이승만이 남기고 간 말이었다.

이승만의 행동이나 그 말은 동포들에게 크나큰 충격이 되었다. 그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고, 이승만은 실망과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피나는 돈만 축내고 갔구먼.”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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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 노동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남자들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았지. 그래서 미국 한인 모임인 국민회는 사진결혼을 추진했단다. 하와이에 사는 남자들의 사진을 국내로 보내서, 그 사진을 보고 여자들이 하와이로 와서 결혼을 하는 것이지. 이것도 작년에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읽고 이야기했던 것 같구나. 1910년 첫 사진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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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사진결혼의 소문이 농장마다 퍼져나가면서 나이든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고향병을 더욱 도지게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비자없는 입국은 조선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그 방법을 일본 중국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확대 실시하게 했던 것이다.

사진관의 문턱이 닳아질 지경이 되는 가운데 최초의 조선 신부감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국민회 회장 이대수가 시범을 보이듯 신부감을 맞아들인 것이다. 전라도 처녀 최사라가 일본배 지양환을 타고 호놀룰루 항구에 닿은 것은 1910 12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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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는 의병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쳤단다. 무기가 변변치 못한 의병들은 일제의 이 만행에 속수무책이었어. 많은 의병들이 죽고, 의병들을 도와준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어. 의병장들은 현상금이 붙기도 했는데,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송수익이 이끄는 의병대도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었어. 송수익은 다리에 총상까지 입어서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절에 숨어 지냈단다. 이때 승려 출신 의병인 공허 스님이 도움을 주었단다. 이렇게 힘든 시절 멀리 만주 땅에서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단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었어.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단다.

그런 의병들의 끈질긴 항일운동이 계속 되었지만, 1910 8 29일 경술국치,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졌단다.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친일파 단체 일진회도 해산되었는데, 군산 일진회 회장을 맡고 있던 백종두는 당황했어. 자신의 권세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이야. 백종두는 다시 권세를 잡기 위해 일본인들을 찾아가 굽실거렸고, 죽산면의 면장이 되었단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는데, 많은 일본인들이 이때 강제로 조선인들의 땅을 빼앗아 땅부자가 된단다. 그 중에 죽산면의 땅을 노리고 있는 하시모토라는 사람도 있었단다.

….

송수익은 임병서와 함께 몰래 신세호를 찾아왔단다. 신세호에게 함께 의병활동을 하자고 했으나, 신세호는 의견 차이를 보였어. 송수익은 상감(고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그의 무능함을 지적했는데, 골수 유생이었던 신세호는 상감을 비판하는 송수익을 비판했단다. 그래도 상감은 상감이라면서송수익은 상감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감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단다. 아빠는 송수익의 비판이 맞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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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05)

그러고 말일세, 나라가 망하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상감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아니면 신하고 백성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신하들이 줄줄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네. 그때 상감은 무엇을 했는가. 구중궁궐에서 비통 통분해했는가. 그것으로 상감의 책무가 다 되는 것인가? 또 그와 반대로 매국노 중신놈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의병해산령에 옥새를 찍어 윤허하는 것이 상감의 책임인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을 자네는 상감이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만, 그거야말로 한 나라 상감으로서 얼마나 비굴하고 무책임한 처사인가.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 놈들을 수만리 밖에 있는 딴 나라 사람들에게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그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또 있겠는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어야지. 그게 나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 했겠나. 이 땅에 합방이란 없었네. 상감은 그 책무를 피한 덕에 지금 연명은 하고 있으나 진작에 죽은 목숨이고, 그 초라한 몸에 걸쳐진 것은 백성을 버려 나라를 망친 죄, 치정을 그르쳐 사직을 망친 죄가 있을 뿐이네. 어떤가!

===================

..

송수익이 떠나고 나서 신세호는 송수익이 이야기한 것을 생각했어. 그리고 길은 다르지만 자신도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신세호는 서당을 열어서 몰래 아이들에게 항일 정신을 가르쳤단다. 하지만 105인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주재소에 체포되었어. 그가 가르치는 책 중에 신채호의 <이순신>, <을지문덕> 등의 책이 문제가 되었거든한편 송수익은 국내에서 의병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만주행을 결심했단다. 함께 했던 의병대원들에게는 당분간 해산하고 기다리라고 했어. 자신이 먼저 만주에 가서 정착한 후 연락하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송수익은 만주로 떠났단다.

여기까지가 2권의 대략적인 내용이란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들녘에 봄기운이 아련하게 어렸다.

책의 끝 문장: 풀꾹새는 석양빛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

"최익현 선생님께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마다하시고 끝내 굶어서 돌아가신 것은 실로 큰 뜻을 이루신 것이고, 우리에게 높은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합당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대마도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은 어찌 되었거나 살아서 조선땅으로 돌아오는 것일 테지만, 우리의 처지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꼭 산을 내려가 왜놈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산에서 목숨을 보존해 가며 후일을 기다리며 기회를 잡아 무장을 튼튼히 해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중대한 문제는 전과를 책하지 않겠다는 조정의 조칙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 P70

이승만은 7월 1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을 만큼 잘하는 영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애국자 둘을 살려내리라는 기대로 동포들은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몇몇 유지들은 서로 다투어 이승만을 자기에들 집에서 묵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성의를 냉정히 거절하고 비싼 호텔에 투숙하고 말았다. - P112

그들은 두 달 동안에 벌어진 수많은 죽음의 끔찍스러움에 마음병이 들어 있었고, 의병의 기세가 불 꺼지듯 잦아들어 버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속마음으로 의지하고 믿은 건 의병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갑오년 때와 다를 것 없는 감정의 엇갈림을 겪고 있었다. 그때 가슴속에 품었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밀려든 것은 허망감이었다. 그 막막하고 두려운 허망감에서 그들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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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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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이사벨 아옌데 님의 신작 소설을 읽었단다. 이 책은 2022 1월 코로나 펜데믹이 한창일 때 외국에서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말에 출간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 빛소굴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구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중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에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비올레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단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이사벨 아옌데는 아빠가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럴 수 있겠지만,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두 작품이 모두 재미있었으니 페이지터너스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도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이 책이 코로나 펜데믹 시절에 출간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내용과도 연관성이 있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920년에 태어나서, 2020년에 삶을 마치게 되는데, 1920년은 전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으로 펜데믹을 겪던 시절이었고, 2020년은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펜데믹을 겪던 시절이었단다. 100년을 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단다.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의 주무대는 칠레이고, 한 사람이 일생을 들여다 보면서 삶 속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음과 삶이 얼마나 짧은지도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되었단다. 또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역사이고, 소설이 아닌 실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역사는 사람의 수만큼 있다는 말이 있단다. 아빠의 역사, 너희들의 역사도 같을 수가 없단다. , 그럼 지금부터 비올레타의 역사를 이야기해줄게.

 

1.

이 소설은 황혼의 끝자락에서 손자 카밀로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해주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단다. 주인공 비올레타는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던 1920년 칠레에서 태어났단다. 스페인 독감은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독감 중에 하나였는데, 아빠는 스페인에서 시작하거나 가장 큰 피해를 입어서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1차 세계대전 때 유행하기 시작한 정체 모를 독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는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1차 세계 대전의 피해로 독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스페인에서 먼저 이 독감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어서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구나.

아무튼,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는 방역을 철저하게 해서 집안 식구들은 아무도 스페인 독감에 걸리지 않았단다.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중간 이름과 성()은 익숙하지 않니? 델 바예. 아빠만 익숙하니?^^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세피아빛 초상>의 주인공의 집안이 델 바예 집안이었잖니.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도 이 집안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아빠는 확신했단다.^^ 왜냐하면 지은이 이사벨 아옌데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다른 소설 속 인물들과 관련이 짓곤 했거든.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아는 이름을 발견했단다. 아르세니오 델 바예의 어머니 이름이 니베아라고 했어.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에서 나왔던 세레로 델 바예와 니베아 부부가 있었어. 그 부부는 열다섯 명을 낳았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아르세니오 델 바예는 그들의 아이 중에 한 명인 거야. 이것은 분명 지은이가 의도를 한 것이었겠지?

다시 소설의 이야기를 하자꾸나. 비올레타의 엄마는 마리아 그라시아라는 사람이고, 오빠들이 다섯 명 있었는데, 가장 큰 오빠인 호세 안토니오와 가장 친했단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이모들인 피아, 필가르와 함께 살고 있었단다. 비올레타는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났단다. 비올레타는 어렸을 때 조세핀 테일러라는 아일랜드 출산 가정교사로부터 공부를 배웠어. 조세핀 테일러는 고아로 힘들게 살았는데, 비올레타의 집에 와서 처음으로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났어. 비올레타의 집에 와서 지낸 지 2년 뒤에 종양으로 큰 수술을 할 때도 비올레타의 가족들이 잘 보살펴주어 회복할 수 있었단다. 특히 비올레타의 큰 오빠 호세 안토니오가 지극히 간호해 주었었어. 사실 호세 안토니오가 조세핀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조세핀이 다 회복하고 나서, 호세는 청혼을 했는데 조세핀은 거절했단다. 어렸을 때 일하던 집에서 집주인으로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트라우마로 남자를 멀리하게 되었거든.

조세핀은 어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바지입은 여자 테레사 리바스를 만나게 되는데 둘이 말도 잘 통하고 금방 친해져서 우정을 쌓아간단다. 당시 칠레에서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것은 반항의 의미까지 있을 정도로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이었어. 그만큼 테레사 리바스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으로 페미니스트였단다. 조세핀과 테레사는 처음에는 우정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호세만 가슴 아프겠구나. 호세는 조세핀과 테레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도 모르고 10번도 넘게 조세핀에게 청혼을 했다는구나.

 

2.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시대가 왔어. 미국에 시작한 대공황은 칠레에도 영향을 주어 아버지의 사업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단다. 아버지가 동분서주하여 회사를 살리려고 했지만, 끝내 파산은 막을 수 없었고, 집까지 빼앗기게 되었어. 그리고 아버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결정을 했단다.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했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된 비올레타의 식구들은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단다. 조세핀이 테레사에게 부탁을 해서, 테레사의 부모님인 아벨과 루신다가 살고 계신 칠레 남부의 나우엘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단다. 그곳은 조용한 시골이고 테레사의 부모님은 모두 선생님으로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단다.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마다하지 않으셨어. 그런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서 테레사가 진취적인 사람이 되었나 보구나. 테레사의 부모님인 아벨과 루신다는 비올레타의 식구들을 모두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단다. 비올레타는 테레사의 부모님과 함께 다니면서 교육을 받았단다.

그 시골에 파비안이라는 젊은이가 수의사 실습을 하기 위해서 왔는데, 비올레타는 파비안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비올레타의 오빠 호세 안토니오는 이제 청년이 되어 사크라멘토에서 목공건축사업을 시작하여 재기에 성공하게 된단다. 성인이 된 비올레타도 오빠의 일을 돕겠다고 사크라멘토로 가게 되는데, 남자 친구 파비안은 나무엘에 남아 있어야 했단다. 잠시 헤어져야 했지. 어느날은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나우엘로 돌아갔고, 어머니는 오랜만에 모두 모인 6남매를 뒤로 하고 돌아가셨단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어. 칠레는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워낙 큰 전쟁이다 보니 칠레도 혼란을 겪게 된단다.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1945년 전쟁이 끝나게 되고, 드디어 비올레타는 파비안과 결혼을 했단다. 그런데 사실 비올레타는 결혼 전에 이 결혼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어. 어렸을 때 풋사랑으로 만나 계속 그 관계를 유지를 해왔는데, 자신이 파비안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 잘 몰랐거든. 그래서 조세핀 선생님한테 상담도 했는데, 조세핀 선생님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었단다. 하지만,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어서 파비안과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파비안은 수의사로 크게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수의사가 되었어. 그리고 비올레타는 자신의 의심을 결혼하고 나서 확신을 하게 되었단다. 자신이 파비안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거지. 그저 유명한 수의사의 아내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어. 그러면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파비안의 아내상은 너무나 달랐어. 집에서 살림 잘하고 아이를 낳아주는 아내를 필요로 했어. 결국 그들의 위태위태한 사랑은 덴마크왕족의 방문 파티에서 깨지고 말았단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파비안과 비올레타도 참석했는데, 비올레타는 그곳에서 덴마크 왕족을 태우고 온 비행사 훌리안 브라보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파비안과 헤어지기로 했어. 당시 칠레는 이혼이 불법이었다는구나. 그래서 꼼수로 혼인무효라는 것을 많이들 했는데, 파비안은 절대로 혼인무효를 해줄 수 없다면서 비올레타에게 돌아오라고 했어.

한편, 홀리안은 비행조종사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지냈어. 비올레타와 사랑에 빠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단다. 사실 훌리안은 바람둥이에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단다. 비올레타는 훌리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훌리안은 이것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단다. 더 문제는 그들이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거야. 파비안이 혼인 무효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아직 법적으로 파비안의 아내이니까 말이야. 비올레타는 첫째 아들 후안 마르틴을 낳고, 둘째는 딸 니에베스를 낳았단다. 첫째 후안은 비올레타를 닮았고, 둘째 니에베스는 아빠 훌리안을 닮았는데, 니에베스는 자라면서 아빠하고만 다녔단다. 10대일 때는 아빠 따라서 세계곳곳을 여행했단다. 비올레타는 아들 후안과 둘이 주로 지냈단다.

 

3.

나우엘에 사시던 테레사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 그 집은 비올레타가 관리를 하였단다. 테레사는 여성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조세핀은 여전히 이런 테레사를 뒷바라지하고 있었단다. 테레사가 폐암에 걸려 나우엘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얼마 안 있다가 죽고 말았단다. 조세핀은 상심하여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돌아오고 말았단다. 조세핀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혼자 살고 있는 호세 안토니오는 또 청혼을 하였고 조세핀은 이제서야 승낙을 했단다. 조세핀의 나이 62세였고, 호세의 나이 57세였단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호세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어 아빠도 기쁘더구나.

그리도 파비안으로부터 드디어 결혼 무효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실 오빠 호세 안토니오가 뒤에서 힘을 쓴 것이란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지금 와서 훌리안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훌리안과 니에베스는 미국 마이애미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훌리안은 비올레타에게 이제 함께 살자고 계속 졸랐어. 비올레타는 훌리안 때문이 아닌 니에베스 때문에 마이애미로 가기로 했단다. 그동안 소원했던 딸과 친해지고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니에베스는 많이 타락해 있었단다. 불량 아빠인 훌리안과 둘이 살다 보니 니에베스에게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히피족이 되어 집에서 가출하고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어. 훌리안이 사설 탐정 로이를 고용하여 딸을 감시해 달라고 했어. 훌리안은 비올레타한테 함께 살자고 했지만, 그에게는 소라이다 아브레우라는 애인도 있었고, 비올레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단다. 비올레타는 훌리안을 더 이상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거든. 비올레타는 마이애미에 계속 머물 수 없어서 칠레 사크라멘토와 미국 마이애미를 오가는 생활을 했단다.

1960년 칠레는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이 당선되었어. 아빠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설의 지은이 이사벨 아옌데의 삼촌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란다. 후안과 조세핀도 이 좌파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단다. 하지만 좌파 대통령이 되고 나서 반대파와 미국의 모략으로 사회는 큰 혼란을 가져왔단다. 이것은 나중에 비올레타 식구들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그건 조금 있다가 또 이야기를 해주고, 다시 딸 니에베스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사설 탐정 로이는 거의 죽기 직전의 니에베스를 구출하여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하지만 니에베스는 그 병원을 탈출하여 다시 사라졌어.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찾으러 다녔단다. 히피족이 다시는 곳, 마약 소굴이라고 부르는 곳들을 다녔어. 로이가 다시 니에베스를 찾았는데, 훌리안은 이번에는 니에베스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단다. 니에베스는 이번에도 병원을 탈출하여 사라졌어.

비올레타는 사크라멘토로 돌아왔는데 몇 달 뒤 로이로부터 연락이 왔어. 니에베스를 찾았다고다시 미국으로 날아간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만났는데, 여전이 약물중독이었고 임신까지 했단다.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진심으로 보살펴 주었단다. 니에베스가 어렸을 때 이후 둘은 가장 친하게 지냈단다. 니에베스도 뱃속 아기를 위해서 약도 끊고 건강을 되찾으려고 많이 노력했단다. 하지만 이미 몸은 무척 안 좋은 상태여서 임신중독까지 걸리게 되었단다. 결국 출산 중에 그만 니에베스는 죽고 말았단다. 건강한 아들 카밀로만 남긴 채 말이야. 비올레타는 딸을 잃은 슬픔도 잠시, 엄마 잃은 손자를 보살펴야 했지. 다행히 로이의 도움으로 비올레타는 카밀로를 로이의 멕시코 여자 사람 친구인 리타의 집에 머물게 되었어. 리타도 무척 착한 사람으로 비올레타와 카밀로를 잘 보살펴 주었단다. 카밀로가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칠레 사크라멘토로 돌아왔단다.

 

4.

칠레로 돌아온 지 11개월 후 우익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인해 좌파 대통령은 죽고 말았어. 그리고 좌파 대통령을 지지했던 좌파 인사들은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비올레타의 아들 후안도 쫓기는 신세였단다. 일단 나우엘로 도망갔지만 그곳도 안전한 곳이 못되어, 후안은 국경을 넘어 도망갔단다. 후안은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가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얼마 후 아르헨티나도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안전하지 못했어. 후안은 노르웨이로 망명을 갔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착을 했단다. 카밀로가 좀 큰 다음에 비올레타는 카밀로를 데리고 노르웨이로 가서 아들 후안을 만날 수 있었단다. 카밀로는 이제 노르웨이 사람이 다 되었고, 나중에 칠레가 다시 민주주의를 되찾은 이후에도 칠레도 돌아오지 않고 노르웨이에 계속 살았어. 가끔씩 식구들 만나기 위해 방문할 뿐이었단다.

후안의 망명을 도와준 노르웨이 외교관 하랄드 피스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나우엘 시골까지 찾아왔단다. 외교관을 은퇴하고 왔다는데 비올레타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야. 둘은 결혼을 했어. 비올레타 나이 65세였단다. 비록 많은 나이였지만, 비올레타는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단다. 카밀로는 자라면서 사제의 길을 선택했단다. 비올레타가 반대하기도 했지만 손자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지. 그리고 세월은 빠르게 흘러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갈 수 없는 길을 떠났단다. 그리고 비올레타도 니에베스가 찾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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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477)

한 세기를 살다 보니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백 년은 어디로 갔을까?

너에게 고해성사를 할 수가 없구나, 카밀로. 너는 내 손자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 죄를 사해 줄 수 있겠지. 그러면 에텔비나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다. 죄 없는 영혼들은 우주 공간을 가볍게 떠다니며 별 가루로 변한다.

안녕, 카밀로, 니에베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하늘이 예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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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지도 아빠의 기억력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단다. 한 사람의 삶을 읽다 보니, 아빠의 삶이 비록 지루하고 평범한 삶이지만,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지금부터라도 일기를 좀더 열심히 써야겠구나. 늘 재미있고 깊이 있는 이사벨 아옌데의 또 다른 소설을 찾아 나서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사랑하는 카밀로에게

책의 끝 문장: 하늘이 예쁘구나.


역병에 걸렸다는 느낌은 무덤 저편에서 건너온 듯 그 무엇으로도 완화되지 않는 오한, 늪에 빠지는 듯한 열병, 몽둥이질을 당한 듯한 두통, 눈과 목이 타는 듯한 열기, 바로 눈앞에서 사신이 찾아온 듯 끔찍한 섬망으로 시작되었다. 감염자의 살갗은 청보라 빛을 띠며 점차 시커메지고 손발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기침이 터져 나오고 폐가 부글거리는 피거품으로 가득찬 채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결국 숨이 막혔다. 제아무리 운 좋은 사람도 몇 시간 안 걸려 목숨을 잃었다. - P20

인생의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충격적인 일 하나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지만, 그 여정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기억에 새겨진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처럼 오래 산 존재 안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깃들어 있다. 내 가엾은 몸은 닳아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신은 아직 흐트러지지 않았다. 잊지 모하는 것은 내게 있어 저주란다. - P179

나는 딸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애가 살았을 때 해주지 않은 말을 마침내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너를 사랑했다고, 여러 해 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내 딸과 헤어질 수 있었고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애에게 키스하며 무심하고 소홀했던 내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내 딸로 와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내 마음과 아들의 마음속에 네가 언제나 살아 있을 거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꿈속에서 나를 찾아와 달라고, 신호와 암호를 보내달라고, 거리의 모든 아름다운 아가씨의 화신으로 나타나 달라고, 가장 깊은 밤이면 영혼으로 나타나 주고 한낮에는 퍼져나가는 햇살로 나타나 달라고 부탁을 했다. - P316

우리는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해 왔고, 강제 수용소, 고문, 살인, 수많은 사람이 겪은 탄압이라는 최악의 과거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실제 상황이었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정보도 없었고 소문만 무성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독재가 나라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며 정당화하곤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독재가 있었다. 그때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였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훌리안 브라보가 10년 전부터 경고한 대로 그들은 우리 대륙에 좌파 사상을 허용하지 않고자 했다. 러시아인들 또한 자기 통제권 안에 있는 나라들에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 P345

1980년대 말에는 세계도 우리나라도 우리의 삶도 많이 변화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28년 동안 독일을 갈라놓는 장벽을 하룻밤에 망치로 부수는 베를린 사람들의 행복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소비에트 사이의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어떤 나라는 평화를 희망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항상 어딘가에는 전쟁이 존재한다. 몇 가지 슬픈 예외를 제외하고, 오래 고통을 겪어온 온 우리 대륙은 최근에 와서 과거의 족벌, 혁명, 게릴라, 군사쿠데타, 폭정, 암살, 고문, 대량 학살의 역병으로부터 치유되기 시작했다. - P423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기억을 떠올려야 할 시간이 있다. 나는 이 며칠간 침묵 속에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물질적인 문제보다 감정에 관한 것이기도 한 이 유언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세세한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 나는 손으로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지 몇 년 되었다.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워지고 어릴 적 미스 테일러에게 배운 우아한 글쓰체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관절염도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걸 막지는 못한다. 컴퓨터는 마비되다시피 한 내 몸에서 가장 유용한 수족이다. 카밀로 너는 나를 놀리고 있지. 내가 죽어가는 백 세 노인 중에 기도보다 컴퓨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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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26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인상적이라 강하게 자리잡는 책이네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지네요.

bookholic 2024-03-28 23:36   좋아요 0 | URL
북플과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조심할 부분이죠..
장바구니에 책이 쌓이는 것... ^^
늘 즐거운 책읽기 하시길 바랍니다...
 















(9)

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2003sus 국제 테러 조직 알 케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에서 출발해,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으며 세력을 넓혔다.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로, 집단 학살과 잔인한 테러를 일삼았다. ISIS IS(Islamic State)가 그들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2019년 현재 IS는 대부분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27)

삶은 흘러간다. 이라크인, 특히 야지디족 같은 소수 부족들은 새로운 위협에 잘 적응했다. 무너지는 나라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적응이라 하면 때론 아주 소소한 일들을 뜻한다. 우리는 꿈의 크기를 줄였다. 학교를 졸업하는 것, 농사일을 그만두고 덜 힘든 일을 하는 것, 제때 결혼식을 하는 것 같은 바람들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꿈은 이룰 수 없었다고 쉽사리 자신을 설득했다. 이따금 적응은 아무도 모르게 차츰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무슬림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었고, 낯선 이가 마을을 지나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또 공격과 관련된 TV 뉴스를 보면서 정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은 입 다물고 지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예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기도 했다. 매번 공격이 있을 때마다 남자들은 시리아에 면한 서쪽에서 시작해 코초 외곽 장벽을 연장했다. 어느 날 깨어 보니 성벽이 마을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남자들은 마을 주변에 참호를 팠다.


(49)

어린 시절 나는 내 나라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제재와 전쟁, 극악한 정치, 점령 등이 일어나는 행성 같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웃들은 서로 등을 돌려 버렸다. 이라크 북단은 쿠르드족이 독립을 원하는 지역이었다. 남쪽은 주로 시아파 무슬림들의 본거지였는데, 이들이 종교와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부에는 수니파 아랍족이 있다. 이들은 한때 수니파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 함께 주()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라크 침공 이후 지금은 시아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에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50)

코초의 북동쪽, 쿠르드 자치구의 남쪽 경계에는 아랍인과 쿠르드 인에 이어 제3의 민족인 투르크멘족이 산다. 무슬림은 투르크멘족 역시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뉜다. 기독교인들은-그중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아르메니아인-나라 전역, 특히 니네베 평원을 흩어져 산다. 기타 지역에는 아프리카인과 같은 마쉬 아랍족을 비롯해 카카이, 샤박, 로마니, 만다야 같은 소수 집단이 산다. 바그다드 인근 어딘가에는 아직도 이라크의 유대인 집단이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고 들었다.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두고서는 다양한 구분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쿠르드족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그들은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야지디의 경우는 종교를 믿는 이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이라크 아랍족은 시아파나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러한 복잡한 구분들이 오랜 세월 수많은 분쟁을 야기해 왔다.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이라크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


(102)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ISIS의 눈에 뛸까 봐 집 안에만 있었고, 그렇게 코초의 삶은 정지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서 지내니 이상했다. 코초는 밤늦도록 남의 집에서 친구들과 식사하고, 옥상에서 이웃끼리 떠들다 자는 일이 일상인 동네였다. 그러나 ISIS가 포위한 뒤로는 잠에 바로 옆에 누운 사람과 소곤대는 것과 위험해 보였다. 우린 최대한 눈에 안 띄려 했다. 그러면 ISIS가 우리를 잊기라도 할 것처럼. 점점 뼈만 남게 말라 가는 것도 자기를 보호하려는 방법 같았다. 곡기를 끊으면 결국 투명인간이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친척들은 살피러 가거나, 물품을 가지러 가거나, 아픈 사람을 도우러 갈 때만 집을 나섰다. 그때도 빗자루를 피해 달아나는 벌레들처럼 늘 피할 곳이 있는 쪽으로 잽싸게 걸었다.


(148)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야지디에서는 종교 지도자층의 일원을 종교적인 의미의 형제자매로 삼는다.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고 내세에서 우릴 도와준다. 나의 자매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아름다웠으며 야지디 교리를 매우 잘 알았다. 그녀는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을 했고, 친정에 돌아와 살면서 신과 종교에 자신을 바쳤다. 나의 자매는 ISIS가 집 가까이 오기 전에 탈출하여, 독일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이런 형제나 자매의 가장 중요한 소임은 우리가 죽은 뒤 신과 타우시 멜렉 곁에 앉아 우리를 변호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자는 제가 생전에 알던 사람입니다. 영혼이 지상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177-178)

IS 소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비야는 재산에 불과하므로소유자 뜻대로 선물로 주거나 팔 수 있다. 여인들을 자녀와 떼어 놓으면 안 되지만-그 이유 때문에 디말과 아드키는 솔라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말릭처럼 다 자란 자녀는 데려가도 무방하다. 사비야가 임신하거나 주인이 죽으면 사비야는 유산의 일부로 분배되었다. 또 주인은 노예가 성교에 접합하면 사춘기 이전이어도 성교할 수 있으며, 적합하지 않으면 성교 없이 즐기는 것이로 족하다라고 되어 있다.


(206)

지난 3년간 야지디 여자들이 ISIS에게 잡혀 성 노예가 된 사연을 많이 들었다. 대부분 같은 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이었다. 우린 시장에서 판매되거나, 신병 혹은 고위 지휘관에게 선물로 건네졌다. 그러면 그의 집으로 끌려가서 강간당하고 모욕을 받았으며, 대부분 폭행당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또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 쓸모가 다하고 죽기 전까지 이런 식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면 지독한 벌을 받았다. 하지 살만의 경고처럼 ISIS는 검문소에 우리 사진을 붙였고, 모술 주민들은 노예를 가까운 IS 센터에 신고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러면 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받는다고 했다.


(345)

왜 나세르는 선량한데 모술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 잔인했는지 모르겠다. 마음 깊이 선량한 사람이라면 IS 근거지에서 나고 자라도 여전히 선량한 것 같다. 강제 개종을 당해도 내가 그 종교를 믿지 않고 여전히 야지디인 것처럼. 그런 인품은 내면에 달려 있다. 내가 나세르에게 말했다. “조심해요. 몸을 잘 챙기고, 가능한 범죄자들과 멀리 지내요. , 헤즈니의 전화번호를 받아요.” 나는 헤즈니의 휴대폰 번호를 적은 쪽지와 그의 가족이 내준 택시비를 내밀었다. “언제라도 헤즈니에게 전해도 돼요. 내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가 말했다. “행복하게 살기 바라요, 나디아. 지금부터 쭉 멋진 인생을 살아요. 우리 가족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쓸 거예요. 모술에서 탈출하려는 여자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전화해요. 우리가 도와주려고 노력할게요.”


(383)

난 떨면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어떻게 코초가 점령당하고 나 같은 여자들이 사비야로 끌려갔는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반복해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다 결국 탈출했는지 설명했다. 오빠들이 살해당한 이야기도 전했다. 청중은 조용히 경청했다. 연설이 끝나고 나서, 나중에 한 터키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오빠 알리도 살해됐어요. 그 일로 온 가족이 충격에 빠졌어요. 어떻게 한꺼번에 오빠 여섯을 잃고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가족을 잃은 집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388)

막상 코초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헤어졌던 곳, 내 오빠들이 살해된 곳 말이다. 디말, 무라드(이즈음 무라드를 비롯한 야즈다 활동가들은 가족과 다름없었다)를 비롯해 일부 가족과 함께 있다가, 이제 코초에 가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자 함께 이동했다. 우리는 전투를 피해 먼 길을 돌아갔다. 마을은 썰렁했다. 학교의 창문은 깨지고 안에는 일부 시신이 남아 있었다. 지붕의 나무까지 빼앗겼을 정도로 우리 집은 약탈당했고, 남은 것은 뭐든 소각되었다. 신부 사진이 담긴 사진첩은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는 대성통곡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파괴된 곳이라고 해도 대문을 들어선 순간 그곳이 내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순간 ISIS가 들이닥치기 전에 느낀 감정이 되살아났다. 일행이 떠날 시간이라고 일러 주었지만, 나는 한 시간만 더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지디가 신과 타우시 멜렉에게 더 가까워지려고 금식하는 12월에는 코초에 있겠다고 맹세했다.


(389)

나는 간단히 연설했다. 내 사연을 말한 다음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연설을 잘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든 야지디는 ISIS가 집단 학살 죄로 기소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청중들은 세계의 약한 자들이 보호받도록 도울 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난 우릴 유린한 남자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연을 가진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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