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경제 이야기 2 : 시장과 교역 편 - 우리는 왜 사고팔까? 난처한 경제 이야기 2
송병건 지음, 매드푸딩 그림 / 사회평론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오늘은 송병건 님의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경제이야기> 2권을 이야기해줄게. 2권의 부제는 <시장과 교역 편>이란다. 1권 이야기하면서 이야기했지만, 경제의 기초를 쉽게 설명해 주어서 너희들도 조금만 더 커서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장이란 너희들도 많이 쓰는 말인데, 경제적인 의미로는 교환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을 시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환이라는 것을 교역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그러므로 교역은 경제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우리 일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단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교환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면 경제란 무엇인가? 이제 와서 경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데, 이번 2권에 나와 있어서 이야기해줄게. 경제란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고, 나눠 쓰면서 효용을 높이는 과정이라고 하는구나. 재화라는 것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물건 중에서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으로 말하고, 서비스는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제공하는 가치를 말한단다. 그렇다면 교환 수단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화폐가 생기기 전에는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자연경제라고 한대. 그리고 화폐가 생겨난 이후 화폐를 통한 교환이 일어나는 화폐경제가 있고, 요즘은 신용 카드 등 화폐 없이 신용을 바탕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신용경제로 변화되었다고 하는구나. 교환 수단 중에 환어음이란 것이 있는데, 어음을 발생한 사람이 아니라 제삼자가 약속된 돈을 지불하는 어음을 말하는데,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이 바로 이 환어음을 통해서 성장했다는구나.

=========================

(43)

당시 피렌체를 지배했던 가문이자 역사상 가장 힘센 시민 가문 가운데 하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빛을 못 보던 작가들을 적극 후원해 르네상스 예술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이기도 합니다.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쏟은 거액의 출처가 바로 환어음을 활용한 은행업에서 나온 이윤이었어요. 메디치 가문이 유럽 경제의 ‘큰손’으로 성장하도록 기초를 놓은 인물은 조반니 데 메디치입니다. 국제무역을 하며 결제의 어려움을 절감한 조반니는 가장 먼저 유럽 전역에 지점망을 구축해 일종의 환전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상인들은 메디치 가문의 환어음만 가지고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됐죠. 덕분에 귀금속 화폐를 운반하는 비용과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

예전에는 인류가 여러 종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 하나가 교역이라고 하는구나. 약간 비약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겠구나. 원시 부족 시대에는 교역을 하다가 자꾸만 싸움이나 전쟁이 일어나서, 침묵교역이란 것을 했대. 한 부족이 물건을 가져다 두면 그 값에 해당하는 재화를 두고 가져간다고 했어. 문명이 생기고 나서 교역로도 발달하게 되었는데, 고대 중국 한나라와 로마를 잇는 긴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교역로란다.

 

1.

앞서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을 시장이라고 했잖아. 물건을 제공하는 공금과 소비하는 수요가 있는 곳이고, 각각의 경제 법칙이 저절로 작용하게 된단다. 적절한 공급량과 적절한 수요량이 일치하게 지점에 가격이 형성된단다. 학교에서 배운 수요 공급의 곡선이 이 책에도 나오는데, 가격이 정해지는데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는 곳에서 가격이 형성된단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이렇게 시장에서 수요량과 공급량에 이에 가격이 결정되는 것을 시장경제라고 하고, 정부가 임의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을 계획경제라고 한단다.

대부분의 나라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절충한 혼합경제를 채택하고 있지. 시장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생산량을 늘리게 되는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특화와 분업이 일어나게 된단다. 특화란 생산자가 하나의 업종이나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래. 예를 들어 브라질의 커피 원두나 지역 특산물 같은 것이 있단다. 브라질에서 커피 원두만 엄청 생산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얻으면 되기 때문이야. 분업이란 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눠 생산하는 것인데, 이건 너희들도 들어본 말이겠지? 이렇게 분업화하게 되면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단다.

..

‘맬서스의 덫’이라는 말이 있는데, 인류의 1인당 소득이 일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한대. 하지만 이건 산업혁명 이전이나 들어맞지, 산업혁명 이후에는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가게 되고, 1인당 소득이 계속 성장하게 되어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을 쓰게 되었어.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게 되었단다. 내가 여러 가지 재능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어. 한가지만 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해보자꾸나. 바로 기회비용이 적은 분야에 선택하는 것이 유리한데, 그것을 ‘비교우위이론’이라고 한단다. 비교우위에 유리한 것으로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나머지 필요한 것을 사서 해결하면 되는 거야. 이 세상으로 그런 식으로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오늘날은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어. 나라별 특화뿐만 아니라 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분업을 하기도 한단다. 말만 들어도 복잡할 것 같구나. 이렇게 국제적인 분업 과정을 ‘공급사슬’이라고 하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구나. 이런 공급사슬로 인해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는데 동물들의 서식지가 파괴되기도 하고, 아동 노동 착취가 일어나기도 했대. 그런 것들이 현대로 오면서 법적으로 개선으로 되었고 말이야.

과거 교역 중에 가장 참혹한 교역의 역사는 노예 무역이었을 것 같구나. 대항해 시대 이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에서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세 개 대륙으로 형성되어 삼각무역이라고도 불렀단다. 아프리카의 노예를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으로 썼던 거야. 그렇게 서구 유럽인의 자본과 노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규모 농장을 플랜테이션이라고 한다는구나. 경제 상식이 부족한 아빠는 이 말도 처음 들어본 말이란다.

=========================

(201)

플랜테이션이란 서구 유럽인이 돈과 기술을, 노동자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규모 농장을 말합니다. 사탕수수와 면화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재배되는 대표 품목이죠.

거대한 규모보다 더 중요한 건 플랜테이션의 운영 방식이에요. 서구 유럽인이 돈과 기술을 제공했다고 했죠? 이들은 토지와 생산시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해줄 노예를 잔뜩 사들여 대규모로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설탕을 내다 팔아 처음 투자한 돈의 몇 배를 벌어들였죠. 이때 처음 토지와 생산시설을 사들이는 데 들어간 투자금이 바로 자본입니다.

=========================

 

2.

앞으로 경제 공부를 하다 보면 나라간 무역에 있어 자유무역이라는 말과 보호무역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될 거야. 자유무역은 말 그대로 자유롭게, 아무런 장애 없이 하는 무역이고, 보호무역은 자기 나라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붙이는 무역을 이야기한단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이 유불리가 있단다. 오늘날 세계무역은 자유무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들이 경제성장을 할 때는 보호무역을 많이 해봤다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자국의 산업이 보호 받을 수 있으니 말이야.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1970년대 경제성장률이 높았는데 냉전 시대에 강대국인 미국이 자신의 진영 국가에 어느 정도 보호무역을 용인해 준 이유도 있다고 하는구나. 그로 인해 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구나.

=========================

(245-246)

당시 미국이 사회주의 진영을 이기기 위해 택한 전략 중 하나가 자본주의 진영에 속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일이었거든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성장을 경험한 국가라면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을 테고, 다른 국가들에도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과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죠.

해방 이후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된 우리나라에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원조도 받고, 미국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보호무역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일본과 유럽 등 다른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도 미국의 외교 전략에 발맞추어 한국의 보호무역을 용인해주었습니다.

=========================

하지만 1990년대부터 세계적인 기류인 자유무역을 하게 되었고,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반강제적으로 자유무역을 추진했다고 하는구나. 2000년대 들어서서는 FTA를 통해서 나라간 관세를 철폐하거나 줄이면서 더욱 자유무역을 하게 되었대. 하지만 자유무역을 하게 되면 다른 나라의 싼 물건들이 들어오게 되니까, 그런 제품에 대해서는 보호무역도 같이 평행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쉽지 않아. 그래서 FTA를 맺게 되면 어떤 분야는 타격을 받게 된단다. 우리나라에서는 FTA 때문에 농업분야의 타격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

.

경제사에 있어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은 너무 유명한 사건이란다. 이 경제대공황으로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각 나라에서는 보호무역을 하게 되었어. 그렇다 보니 국가 간 교역이 줄어들게 되고 경기가 침체되었지. 독일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공황 이후 보호무역으로 경제 상황이 최악이었어. 결국 나치가 정권을 잡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단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고, 국제 경제는 미국 중심으로 돌아간단다. 자유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GATT라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지고, 나중에 GATT는 강제력까지 갖춘 WTO로 재편된단다. WTO를 통해서 세계는 자유무역 중심의 세계가 되었지. 하지만 여전히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하려는 움직임도 여전히 있단다. 나라 간에 자유무역이니, 보호무역이니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는데, 최근 몇 년 간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간 무역갈등도 그런 연장선이란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중국산 철강에 관세를 부과했고, 그러자 중국은 미국산 식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후 다른 제품에도 계속 관세를 부과하면서 갈등이 커졌지.

오늘은 지구촌 사회라고 하잖니.. 국제적으로 어떤 이슈가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나라에 영향을 주게 될 거야. 그리고 그 기류는 자국우선주의가 될 것 같구나.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붙인 것도 자국우선주의이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브렉시트도 자국우선주의이고, 코로나 펜데믹 때 나라간 백신 독점했던 것도 자국우선주의였단다. 다 같이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닌, 자국만 일단 살고 보자는 자국우선주의가 득세하는 모양이 보기 안 좋구나.

이상 <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경제이야기> 2권에 나온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단다.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경제의 지식이 부족한 아빠에게 낯선 내용도 꽤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것 같구나. 너희들에게 좀더 잘 설명해주면 좋았겠지만, 아빠의 능력 밖이고,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나중에 너희들이 이 책을 읽어서 터득했으면 하는 바램이란다..^^

그런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019년 말 중국에서 시작된 정체불명의 호흡기 질환은 이듬해 초 새로운 감염병으로 판명됐습니다.

책의 끝 문장: 빚으로 팽창하는 신용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식, 금리와 환율, 화폐, 통제를 넘어 무제한으로 확장 중인 파생상품 이야기까지, 시장과 교역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벌써 기대가 됩니다.


유독 이해관계가 잘 맞는 국가들이 있다면 WTO가 일률적으로 정한 조건보다 더 장벽을 낮추는 게 좋겠죠. 예컨대 WT)가 8% 관세를 적용하라고 할 때, 두 국가끼리 자체적으로 관세를 완전 철폐하는 등 특혜에 가까운 조건으로 시장을 열어둘 수 있어요. 이렇게 이해가 맞는 국가끼리만 특별한 조건으로 협력하는 경우를 지역주의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지역주의 협력체가 바로 유럽연합, 다시 말해 EU죠. - P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5)

그들이 그런 식으로 징용방법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징용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달패인 낭인들에게 속어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였다. 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몇푼의 전도금을 주면서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었다. <모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낭인들은 탄광이나 광산, 철도공사 같은 데다 팔아넘겼다. 낭인들이 받은 돈은 끌려간 사람들의 임금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감시 속에서 골빠지게 일만 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 방법은 벌써 191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두번째는 관에서 알선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 군수산업체서 필요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관의 행정계통을 따라 조달하는 것이었다. 사업소-현의 지사-후생성-조선총독부-지방관서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징용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이 방법은 한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행정절차 때문에 노부자 조달이 3개월 이상씩 걸린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자꾸 확대되어 가고, 석탄 생산이며 군사시설 같은 것은 하루가 급한데 3개월이란 너무나 길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세번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노무자 징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 세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었다.


(88)

11월에 들어서 총독부에서는 대학, 전문학교, 고등학교에까지 징집영장을 일제히 발급했다. 그리고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 징용키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학도지원병이란 <지원>은 허울좋은 장식일 뿐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이광수와 최남선은 학병지원 권유연설을 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결국 제1차로 학병적격자 1천 명 중에 959명이 지원을 완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관부연락선 곤륜환이 미국잠수함에 격침되어 54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그리고 12월로 접어들면서 징병 적령을 1년 낮추는 긴급사태가 야기되고 있었다.


(198)

전동걸은 3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마쳤다. 조선의용군의 기본 군사훈련은 혹독하리만큼 강도가 높고 맹렬했다. 사격이며 분대전투 같은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격전 훈련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지니지 않고 완전무장을 한 채 태항산록 그 끝없는 골짜기와 봉우리를 열흘 이상씩 타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산중에서 구해야 했다. 뱀이고 개구리고 승냥이고 까마귀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야 했다. 산열매도 따먹었지만 절대로 따먹으면 안되는 것이 있었다. , 호두, 대추가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태항산록을 따라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꾸고 있는 과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생업으로 삼아오는데다 수확량도 엄청나 그 세 가지는 태항산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 열매들을 단 하나도 손댈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226)

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매춘부가 아닌 일반 처녀들 1백여 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직영으로 개설한 것은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해인 1938년이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일본의 낭인패거리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 <여점원을 하면 돈도 벌도 공부도 할 수 있다>, <간호부는 사람 대접받고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 이런 거짓말을 꾸며대서 사기극을 벌이며 처녀들을 군용 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1941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은 직접 나서서 1만여 명의 처녀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전국적으로 <여자사냥>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경찰과 형사들이 처녀들의 납치에 앞장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낭인들과 매춘업자들의 각종 사기극과 경찰이 자행하는 납치극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속에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은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 12월 말에 태평양전쟁의 전선 적역에 걸쳐 <기지위안소> 개설을 명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여자들의 인원수를 <물품대장>에 올려놓고 각 부대에 <물품>으로 <배급>했다.


(226-228)

시인 주요한은 1941 <국민문학> 11월호에 <댕기>라는 시를 썼다.


나라의 부름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

몸에 지니고 싸우시면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아요.


북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밑에 재우겠어요

꿈에 돌아오시는 당신은

원앙침에 주무시게 하겠어요.


아무르의 얼음도 여름에는 녹겠지요

녹았어도 소식이 없는 여름일랑

까만 댕기에 하이야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서강 저녁놀의 타는 듯한 붉은 핏빛은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신 당신의 피

무언의 개선, 마을 역 앞에서

하이얀 댕기 드리우고 만세를 외치겠어요.


그리고 시인 노천명은 1942 3 4일자 <매일신도> <부인근로대>라는 시를 썼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려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228)

또한 시인 모윤숙은 친일의 시들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직후에 <조선임전보국단>이란 친일어용단체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릿속에 대화혼(大和魂)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며 여성들이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나설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화여전 교장인 김활란은 1942 <신세대> 12월호의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에서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며 여성들이 일제의 전시동원에 앞장서라고 충동질하고 있었다.


(273)

그들이 지리산 속에 있으면서도 나라 밖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이렇게 선요원들을 통해서 각 조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를 점령당한 위기 속에서 일제가 일억총옥쇄(一億總玉碎)라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학생들이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일억총옥쇄의 일억이란 일본사람들 7천만, 조선사람들 3천만을 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억총옥쇄란 일본과 천황에게 충성을 다바쳐 일본사람 7천만과 조선사람 3천만은 다같이 깨끗하게 죽자! 하는 뜻이었다. 그건 패전의 위기에 직면한 일제가 발악적으로 내세운 집단자살의 구호였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총독부가 조작하고 있는 승전의 보도에 취해 일본이 조선을 2백 년 동안 지배할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일억총옥쇄를 여기저기서 열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307)

그동안 만주의 조선사람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징용이나 징병에 많이 끌려갔다. 일본의 선만일여(鮮滿一如) 정책에 따라 만주의 조선사람들도 일본이 좋을 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어가려면 며칠 전에 통지서를 발부하는 최소한의 절차는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징병은 그런 형식적 절차도 없이 총을 들이대고 마구잡이로 끌어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해진 것이었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변화 때문이었다. 2개월 전에 독일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을 도맡다시피 해서 승리를 이룩한 소련은 연합국 안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한 것이었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면 일본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해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변화에 앞에서 일본은 최대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중국과 동남아 전선을 막느라고 병력을 빼돌려 관동군은 형편없이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사기를 앞세우고 소련군이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격을 해오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서 관동군은 부랴부랴 병력 충당에 나선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세일기 -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되돌아본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알게 된 도올 김용옥 님의 <난세일기>를 읽었단다. 도올 김용옥 님의 쉬운 듯 어려운 철학 강의를 가끔씩 보곤 하고, 그의 직설적이면서 시원한 비판에 속이 뚫리는 기분을 같이 느끼곤 했단다. 더욱이 무능한 정권에 대한 비판은 거침없었고, 시대를 보는 눈을 배우기도 했단다. 그래서 아빠는 김용옥 님의 글과 영상을 가끔씩 보곤 한단다. 이 말도 안 되는 시대, 김용옥 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으로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신다. 검사 권력에 의해 소환되실까 걱정이 들기도 하더구나.

이 시대에 대한 비판을 <난세일기>라는 책에 쏟아부으셨단다. 읽다 보면 다 시원하면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마저 들더구나. 우리나라 권력이 언제부터 이렇게 무소불위 권력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김용옥 님은 이 시대를 난세(亂世), 그러니까 어지러운 세상으로 보고 계신단다. 2023 4 24일부터 2023 5 24일까지 한 달 간의 일기 속에 권력의 비판이 담겨 있고, 옛 선인들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김용옥 님의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한 삶의 교훈도 담겨 있었단다. 김용옥 님의 책들이 그러하듯 어려운 부분들도 있어서 쉽게 읽어나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생각과 주장에 많이 공감을 했단다.

 

1.

시작은 우리나라 현정부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단다. 얼마 전 녹색평론에서도 이야기되었던 양곡관리법을 거부한 대통령을 비판하였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가는데, 농민들은 여전히 보수 정당에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였단다. 아빠도 그 점이 이해가 가질 않더구나. 역시 보수 정권에서 농민에 대해 제대로 된 정책을 편 정부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 농민들은 보수 정당에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말이다. 연구 대상이다. 며칠 후에 있을 선거에서는 과연 변할까?

=======================

(13-14)

일정수준 이상 초과생산된 쌀의 정부매입을 의무화한 양곡관리법을 대해 윤석열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가뜩이나 쌀농사가 위축되고 있는 판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해 식량이 무기화되고 있는 이런 중대한 시기에 돈많은 정부가 가난한 농부의 주머니를 더욱 빈곤하게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요, 졸렬한 시책일 뿐이다. 본시 비토라는 것이 대통령의 권한이라고는 하지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농민은 아무리 눌러봐야 끽소리 못한다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에 비토권 행사의 최적대상으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내가 시골에 강연 나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농사짓는 사람들은 나의 비토비판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응원한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태는 농민의 대다수가 보수적으로 투표를 했다는 사실에 있다. 뻔히 자기를 죽일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자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즉 자기를 억압하는 자를 지도자로 모시는 것이다. 무지의 광란일까? 도대체 민주주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민주라는 이상은 인간세에 있는 것일 것? 벼라별 생각이 드는 것이다.

=======================

대통령의 역사의식도 비판했단다.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용서를 안 받겠다고 하질 않나, 과거를 잊겠다고 하실 않나. 말문이 막히는구나. 역사를 잊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역사를 잊겠다고 하는 자가 대통령 자리에 있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일제의 침략이 우리나라 현대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데 일본의 용서 하지 않는 역사의식에 지지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니

=======================

(46)

일본의 강점(强占)은 과거지사, 지나간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50년의 역사일 뿐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민족의 모든 역사를 지배하는 현존사(現存史)인 것이다. 끊임없이 역사의 의미를 묻게 만드는 현존재의 역사인 것이다. 일본의 강점통치가 없었더라면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등장한 미소 양숙의 분할점령도 없었을 것이고, 빨갱이색출도 없었을 것이고, 반공이념도 국시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6.25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의 냉전질서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요, 오늘날 소위 말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쓰레기이념도 이 역사에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태극기부대니 뭐니 하는 보수이념은 결국 반민특위의 좌절로 살아남은 친일파세력이 대간을 이루는 비극적 흐름일 뿐이다. 이런 떳떳치 못한 슬픈 몸부림도 일본의 강점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그래, 역사의식 까짓 것 생각의 차이라고 통 크게 봐 주자꾸나. 하지만, 일본의 방사성 오염수 방류를 왜 우리나라 정부가 옹호하고 지지해 주어야 하는가. 무슨 약점들을 잡힌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구나. 그런데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버린다고 하고서는 태평양 어디에 버리는지도 안 알려준다고 하더구나. 정말 괘씸하구나.

=======================

(111)

방사성 오염수의 방류는 코로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구원한 해악을 이 지구 온생명에게 끼칠 것이 분명한데, 지금 윤석열은 키시다의 손을 잡고 아무 대책 없이, 걱정 말라고 하면서 시찰단만 보내면 끝나는 문제라고 웃음짓고 있는 형국이다. 시찰단의 명단조차도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잊었는가? 19세기 말, 일본 시찰한다고 파견된 신사유람단 사람들이 결국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

일본에 대한 역사의식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반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도 떨어진다고 하는구나. 미의회 연설이 잘 짜여진 연출에 의한 연설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단다. 그 내용을 끄집어 분석을 하면 선교사의 자유와 연대가 한국 헌법의 기초라고 기술한 것은 미국 의회에 아부한 것이지, 우리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단다. 6.25에 대해서는 편협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고 했어. 적어도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유도된전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어. 트루먼 대통령의 트루먼 독트린에서 냉전이 시작되었고, 그 연장선상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단다.

케네디의 명연설도 인용하면서 비판을 했는데, 김용옥 님의 비판을 읽다 보니 수긍이 갔고, 케네디의 명연설은 명연설이 아니라 막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

(79)

케네디는 말한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 취임연설문 중-

너무도 유명한 명언이지만,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그 조국이 어떤 조국인데, 무엇을 하려는 조국인데! 우리 조선땅에서만 해도 미군정시기에 정의롭지 못한 족적을 남겼고 또다시 월남 땅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려는 조국을 위하여 먼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달라구? 초기에는 영장을 받으면 서로 가려고 다투었다.

=======================

 

2.

일기 형식의 책이라서, 지은이 김용옥 님의 주변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에 대한 글들도 많이 실려 있단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시니, 동서양 고전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현재를 배우자는 이야기도 했단다. 유명한 퇴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다산 정약용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동학의 기틀을 마련한 수운 최제우와 동학 운동에 관한 이야기도 했단다. 아빠가 알기로는 김용옥 님께서 예전에도 최제우에 관한 책들을 여럿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빠도 최제우에 관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어. 백제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의자왕이 말년에 사치와 타락에 빠져 백제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멸망했다고 하는구나.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니 의자왕을 안 좋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싶구나.

=======================

(308)

백제의 멸망을 두고 의자왕 말년의 사치와 타락을 운운하는 것은 사가들의 상투적 근인(近因) 지어내기에 불과한 짓이다. 그렇게 국민의 사랑을 받고 영민한 결단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던 해동증자 의자왕이 갑자기 타락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실상에 와닿질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적대해서는 아니 되는 국가를 적대하여 패망일로로 직입하는 오늘날의 꼴과도 같다.

=======================

그리고 우리 민족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민족이라고 하면서 풍류(風流)에 대해 많은 지면을 통해서 이야기를 했단다. 풍류라는 것이 그냥 즐길 줄 아는 것이라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아빠였는데, 김용옥 님께서 좀더 철학적으로 정의를 내려 주셨단다.

=======================

(315)

풍류는 하나의 로칼한 종교단체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고유한 현묘한 도, 즉 길(way)이다. 그 도는 그렇다고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종교와 같은 조직적 힘을 가지며,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유•불•도라는 종교철학의 핵심내용을 다 포섭하는 우리민족 원래의 철학이요, 문화요, 삶의 방식이다. 외래종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풍류는 이 민족에게서 사라질 수 없다.

=======================

마지막으로 김용옥 님이 일본인 친구와 전화통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단다. 그 일본인과 방사성 오염수 방류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양국의 정치판에 대한 비판도 했단다. 그러면서 키시다 일본 총리에 대한 평가를 한 부분이 있는데, 방사성 오염수의 폐기를 결정하는 행태를 보니, 키시다 총리가 악랄한 인물이라는 평가에 공감이 가더구나. 어쩌다 같은 시기에 일본과 한국의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지 원하늘은 동아시아를 버리려는 것인가.

=======================

(344)

키시다는 아베보다 훨씬 더 악랄한 인물입니다(여기 번역을 악랄하다라고 했는데 그가 쓴 표현은 히도이였다). 아베는 순진한 데라도 있어요. 이념적인 경직성은 있어도 그렇게 교활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키시다는 매끄럼하게 생겼지만 악랄합니다. 도덕적 판단이 없이 가지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취하고 마는 인물이지요. 일본인들은 그의 영도 아래 더욱더 타락하게 생겼습니다. 소수의 입장에서 일본의 대세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기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저도 답답하게 느끼고 있어요.”

=======================

읽을 때도 열불내면서 읽었는데,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쓰면서도 또 화가 나는구나. 좀 진정 좀 해야겠구나. 며칠 후면 중요한 선거가 있는데 그 선거 결과라도 아빠의 열불을 식혀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오늘 오전 11시에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연구자들 248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책의 끝 문장: 상향~


일본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것은 인류보편사의 정신이 요구하는 도덕성이다. 그 도덕성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인류사의 양심이 바로 우리 역사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요, 일제강점기의 만행이 우리 민족에게 남겨놓은 과제상황이다. 이 인류사의 성스러운 과업을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이 뭉개버리고 또다시 일본에 굴종하며, 일본의 편에 서서 일본의 모든 편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 국운의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권력자가 이 나라의 성스러운 세계사적 과업의 명운을 무시하고 또다시 일본의 강점과도 유사사한 사태를 재발시키고 싶어하는 형국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너무도 엉뚱하게 들이닥친 허무맹랑한 정황이래서 도무지 이해의 틀을 잡을 수가 없다. - P55

나는 묻는다:"아니 민중이 민중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안 선생님(안병무)은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민중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그런 인물을 이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나아가야 할 이 위태로운 시기에 지도자로서 뽑는단 말이오?} - P234

"일본의 민중은 자민당화되어 있습니다. 자민당을 객체화 시켜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민당의 정치세력은 근원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자민당은 이렇게 큰 원전사고를 치른 후에도 원전을 계속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거시적인 문제에 관해 도덕적 통찰이 없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은 언론이 죽어 있습니다. 언론이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같은 직접선거도 없지요. 그러니 자민당에 맞서는 사회세력이 없는 셈입니다." - P3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랑 3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3권을 이야기해줄게.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리랑은 총 4부작으로 되어 있고, 3권까지가 제1, 한반도란다. 1부의 마지막 이야기 3권의 이야기를 바로 시작해볼게.

김제의 농장 지배인인 요시다.. 그의 앞잡이인 이동만.. 그는 소작료를 올리고, 농민들에게 빌려준 돈의 이자도 확 올려버렸단다. 농민들의 불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고, 결국 그 불만이 폭발하였단다. 밤에 이동만의 집을 기습하여 그를 폭행했어. 이동만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치료 후에도 완치가 안 되어 계속 절룩거리는 신세가 되었단다. 소설 속 농민들만 아니라 읽은 이들도 통쾌했을 것 같구나.

의병 해체된 다음에 숨어 지내던 지삼출과 손판석은 죽산면에서 지내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 생각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군산으로 이사했단다. 이웃이었던 방영근의 식구들, 그러니까 감골댁과 수국, 대근도 함께 갔어. 군산에도 일본인들과 그 일본인들을 추종하는 조선 사람들도 많았단다. 목포우체국 군산출산소장인 하야가와가 있었고, 그 하야가와와 친한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도 있었단다.

친일파들은 1권과 2권에서도 나왔는데 다시 한번 정리해서 이야기 볼게. 죽산면의 면장인 백종두와 그의 아들 헌병 백남일, 보부상 출신으로 일본인에게 아부하며 가게가 번창하여 사탕공장까지 지은 장덕풍과 그의 아들 장칠문이 있었지. 장칠문은 순사보로 조선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괴롭혔단다. 정재규는 송수식의 친구였지만, 이제는 주색잡기에 빠져 아버지가 남긴 엄청난 재산을 계속 탕진하고 있었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형제들까지 재산을 나누라고 했는데, 장남이라는 이유로 혼자 독차지하려고 했어. 둘째 동생 정상규도 만만치 않은 욕심쟁이라서 그런 형과 계속 다투었단다. 셋째이자 막내인 정도규는 서울에서 유학 중인데, 이런 형들의 모습에 치를 떨었지.

 

1.

신세호는 야학을 하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들어갔다가 풀려 나왔어. 신세호는 송수익의 식구들도 보살폈는데, 송수익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송수익을 대신해서 장례를 치뤘단다. 1, 2권에서 신세호가 의병 활동도 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그 또한 그의 자리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구나. 국내 잠입을 하고 있던 공허 스님도 송수익 어머니 장례식에 몰래 참석했어. 그런데 일본 헌병에 잡혀 끌려가고 있었는데, 공허 스님은 기회를 엿보다가 그들을 처치하고 도망을 갔단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농사 지내 온 조선 사람들의 땅을 이런 사유, 저런 사유로 빼앗아갔단다. 졸지에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무엇인가 해야 했어. 박영진, 김춘배는 그렇게 땅을 빼앗긴 사람들인데,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데리고 면사무소로 향했단다.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면사무소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자, 면사무소 직원들과 작은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주재소에 잡혀 들어가고 말았어. 토지조사사업을 주관하는 토지조사국의 관리인 다나카는 토지조사사업을 방해하는 그들에게 엄벌을 처할 것을 요청했으나, 백종두 면장과 주재소장은 극형 처벌에 대해서는 반대했어. 백종두는 양쪽을 중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잃어버렸던 민심도 얻으려는 획책을 썼단다. 그래서 이 사건은 두어 명 주동자만 재판을 받고 나머지는 태형 50대로 마무리하기로 했어. 그렇게 박영진은 재판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단다. 그런데 그보다 태형 50대 맞은 사람들이 문제였어. 말이 태형 50대이지, 이것은 엄청난 형벌로, 태형을 맞은 사람들 중에 성불구자가 된 이들도 있고, 앓아 누어야 하는 중상자들도 생겼단다. 그렇다고 그들이 땅을 되찾은 것도 아니야. 이미 나라가 사라졌는데, 이것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해야 하나.

군산에 비밀리에 자리 잡은 지삼출과 손판석공허 스님이 그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부두에서 일을 했어. 그런데 일자리를 두고 중국인 노동자들과 패싸움이 벌어졌어. 이 싸움에서도 손판석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단다. 군산에서 부두에서 일자리 얻기가 쉽지 않아서, 여자들도 일자리를 알아보았단다. 정미소에서 쌀 속에 섞여 있는 돌을 고르는 일을 여자들이 했어. 감골댁과 부안댁이 그 일을 하려 갔으나, 감골댁은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맞았단다. 이를 본 수국이는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했어. 감골댁은 수국이가 일하러 가는 것을 걱정했단다. 얼굴이 예쁘다 보니 다른 남자들이 농간을 부릴까 걱정한 거야. 감골댁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단다. 수국이와 부안댁이 일하는 정미소가 하필 백종두 면장이 새로 지은 정미소였던 거야. 백종두의 아들 백남일이 정미소에 일하는 수국을 하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단다. 백남일은 수국이를 납치하여 강제로 추행을 저질렀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국의 동생 대근이는 백남일을 찾아가 반쯤 죽여놓았단다. 지삼출도 대근을 도와주었어. 읽는 아빠도 속이 시원했으나, 대근과 지삼출의 뒷일이 걱정되기도 하더구나. 결국 지삼출 가족과 감골댁, 수국이, 대근이는 또 야반도주를 해야 했어. 그들은 옛 의병 전우들이 화전을 하며 지내는 산으로 도망갔단다. 한편, 백남일은 큰 중상을 입고 일본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 갔어.

 

2.

양치성이란 자가 있어. 가난한 집안에 힘들고 살고 있었는데, 하야가와가 그를 좋게 봐서 거둬들여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양치성은 하야가와에 충성을 맹세했고, 하야가와는 양치성을 일본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단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는 골수 친일파가 되어 하야가와에 충성을 했단다.

서무룡이란 자가 있어. 서무룡은 군산 부두 일꾼으로 방대근의 동료였는데, 그도 수국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단다. 그런데 수국이가 백남일한테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백남일을 손봐주려고 그를 찾아갔어. 그런데 백남일은 이미 대근이한테 크게 얻어맞은 후였단다. 서무룡은 백남일이 쓰러져 있던 곳에 있다가 잡혀 들어가게 되었어. 서무룡은 억울했겠지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었어. 양치성은 그런 서무룡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단다. 풀려나게 해줄 테니 의병의 잔당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말이야. 이 제안을 받아들여져서, 서무룡은 다음날부터 부두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의병의 잔당들의 정체를 몰래 알아보았어.

한편 지삼출 네 식구와 방대근 네 식구들은 배두성과 필녀 부부의 집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어. 배두성은 의병 출신으로 지삼출의 동료였고, 지금은 산에서 화전을 일구며 지내고 있었어. 수국이는 자신의 당한 수치를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는데, 다행히 빨리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단다. 공허 스님이 수국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몸은 중요하지 않고 마음이 중요함을 일깨어 주어 수국은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었단다. 공허 스님이 땡중인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스님은 스님이시네공허 스님이 한 이야기가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발췌해 보았단다. 사투리를 진하게 써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있겠지만…^^

==================

(353)

부처님이 설허시기럴 몸언 맘얼 담는 그럭이라고 허셨소. 그렁게 알맹이넌 맘이고 껍데기넌 몸인 것이오. 그런 이치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언 맘이 껍데기인 몸얼 벗어불고 극락왕생허는 것이라고 말씸허신 것이기도 허요. 긍게로 중헌 것언 맘이제 몸이 아닌 것이고, 그 큰애기덜 둘이 도적놈덜헌티 몸얼 더립힌 것언 너물얼 캐다가 손얼 까시에 찔리고, 발얼 돌에 채이고 헌 것이나 하나또 다를 것이 없소. 흔헌 말로, 시상사 다 맘묵기에 달렸다는 말이 바로 부처님의 그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오. 허고, 목매달아 죽은 큰애기가 소로 환생히서 평상 죄닦음얼 헌 것언 첫찌로 목심얼 경시헌 죄요, 부처님이 말씸허시기럴 이 시상이서 질로 에로운 일이 만상 중에서 사람으로 몸얼 짓고 태어나기가 질로 에롭고, 그담으로 에로운 것이 바른 마음 지닌 불자가 되기가 에롭다고 허셨소. 사람 하나가 죽고 새로 사람이 되어 태어나자면 만년에 만년으 세월이 흘러야 된다고 설허셨소. 그리 에롭게 태어난 목심얼 경시허는 것언 질로 큰 죄요. 그담이 함부로 목심 끊어 부모헌티 불효허는 죄요. 그런 죄넌 다 몸이 맘보담 중헌지 잘못 알고 저질른 어리석음이오.

==================

공허 스님은 화전을 일구며 숨어 지내고 있던 이들에게 이제 만주로 이주할 때가 되었다고 준비하라고 했어. 감골댁은 시집 간 딸들과 하와이에 일하러 간 장남 방영근이 눈에 밟혀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방대근이 쫓기는 몸인지라, 만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단다. 지삼출 네 식구들, 배두성과 필녀, 다른 화전민들도 함께 만주로 향했단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손판석만 군산에 남아 있단다.

여기까지가 <아리랑> 3권의 주요 이야기란다. 일제의 침략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 그들의 총칼에 죽어도 어디 하소연할 수 없는 백성들.. 불쌍한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구나. 그들은 알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이 20, 30년 넘게 이어질 거라고….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아리랑>의 등장인물들은 실제 살아 있는 이들 같아 더욱 가슴 아프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동만의 집 앞에는 네댓 사람이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지삼출이 방대근이 앞을 막아섰다.




현수막에 쓰인 글씨 그대로 군산과 강경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철도 개통으로 군산 전체가 떠들썩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군산은 마침내 육로 수로 철로 세 가지 길이 합쳐지는 교통의 요충이 됨과 아울러 다른 부(府)들보다 앞질러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철도 개통의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경에 이르는 뱃길에서 소모하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동시에 수송량을 대폭 늘릴 수 있는 이점만이 아니었다. 그 철도는 엄연히 호남선의 일부였다. 따라서 군산의 세력은 항구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륙으로 뻗치게 되어 있었다. 힘을 뻗칠수록 일본물건들을 많이 팔아먹고 조선물건들을 많이 내갈 수 있어서 군산은 그만큼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

체스는 하늘과 땅 사이 무함마드의 관처럼 이 범주들 사이를 부유하는 학문이요 예술이며, 대립하는 모든 것들을 유일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던가? 즉 태곳적인 것이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이요, 그 구도가 메커니즘적이면서도 판타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며, 기하학적으로 일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조합에서는 무제한적이고 항상 자기 발전적이며 번식력이 없다. ()로 이끄는 생각, 무에 이르는 수학, 작품 없는 예술, 실체 없는 건축, 그럼에도 명백하게 그 존재 자체가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영속적이며,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게임이면서도, 지루함을 죽이고  감각들을 예리하게 하며 영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신이 이 땅에 가져온 게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이 게임에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어떤 아이들이라도 기본 규칙을 배울 수 있고, 체스에 서투른 사람이라도 누구나 자신을 게임에서 시험해볼 수 있다.


(60-61)

당신이 게임들 중, 특히 체스를 둘 때의 정신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생각해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체스란 우연과는 동떨어진 순전히 두뇌싸움인지라 자기 자신과 맞서서 게임을 한다는 건 부조리하다는 거죠. 체스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상이한 두뇌에서 전략이 나온다는 데 있거든요. 이를테면 이런 두뇌싸움에서는 검은 말이 그때그때 흰 말의 술수를 알 수 없고 항상 추측할 뿐이며 그걸 막으려고 하지요. 반면에 흰 말은 검은 말의 숨은 의도를 앞질러 내다보며 방해하려고 애쓴다는 데 그 매력이 있거든요. 그런데 검은 말과 흰 말이 동일한 사람이라면 모순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의 두뇌가 뭔가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또 몰라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인 흰 말의 역할을 하면서 일 분 전에 검은 말로서 의도했던 바를 완전히 잊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사고는 사실 의식의 완전히 분열을 전제로 합니다. 기계장치처럼 뇌의 기능을 임의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게임을 하려는 것이 체스에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으려는 것과 같은 역설을 의미합니다.


(116)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에게 그 순간의 절망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요?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운명을 고통스럽게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그런 운명을 전 한평생 견뎌왔고, 그 운명과 더불어 죽게 될 테지요. 어떻게 제가 이 절망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보세요. 인스부르크에서 보낸 그 이 년 동안 매 순간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상상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그 시절, 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가장 행복한 순간뿐 아니라 가능한 최악의 순간까지도 꿈꾸었습니다.


(117)

얼굴에 비치는 나이는 명암에 따라 묘하게 변하고, 입는 옷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체념한 이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아직 소녀였던 저는 당신의 망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끊임없이, 그리고 쉼 없이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저를 종종 생각하고 기다려줘야 한다는 헛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미미한 존재이며, 저에 대한 어떤 기억도 당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면, 제가 어떻게 숨인들 쉴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이 마음속에 저를 알아볼만한 그 어떤 것도 없으며, 당신 삶의 거미줄 같은 기억 한 오라기도 저와 연결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신의 눈길 앞에서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것이 현실로 떨어지는 최초의 추락이었고, 제 운명을 예감하는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