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7
리베카 미첼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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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년 전에 아빠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의 연주를 찾아보다가 임현정 님이 연주하는 라흐마느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들었단다. 아빠 귀가 막귀이긴 하지만, 임현정 님의 파워풀한 연주는 딱 아빠 취향이더구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워낙 유명하니까, 선율이 익숙했고 다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도 나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라흐마니노프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단다. 아빠가 음악가의 삶과 음악에 담긴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좋아하는 편이잖니.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도 검색해 보았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 중에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이 없었어. 책이 무수히 출간되고 있지만, 아직 원하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구나. 우리나라 출판업계 더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아무튼아빠가 원서를 읽을 수도 없고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신간 코너에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된 것을 보았단다. 낯익은 얼굴이 책 표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어.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되었구나. 책 표지 색상이 심각한 표정의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더구나. 너희들도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빠가 짧게 이야기해줄게.


1.

라흐마니노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출신으로 1873 4 1일에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태어난 시기가 참 절묘하구나. 아빠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 황제, 계속된 혁명, 소비에트의 탄생 등 러시아 국내에도 굵직한 사건이 많았던 시기이고,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많던 시기였어. 좀더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서 음악 활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음악에 그 시대의 색이 덧칠해져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평화로운 시기에 음악 활동을 했다면 다른 색의 음악을 했을 수도

라흐마니노프는 쇠락 위기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단다. 특히 어머니가 장군의 외동딸로 재력이 있으셨지만,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단다. 육 남매 중에 네 번째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별거를 하셨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사셨대. 어렸을 때 누나 두 명이 일찍 병으로 죽어 라흐마니노프는 충격을 받았어. 이런 저런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어. 그래도 음악의 재능이 있어서 즈베레프라는 음악가의 제자가 되어 음악을 하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스승을 통해 차이코프스키 등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들도 만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16살에 즈베레프와 의견 충돌로 결별하게 되었단다.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라흐마니노프는 고모의 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안정을 찾았단다. 고모의 자녀들, 그러니까 라흐마니노프의 고종 사촌들이 4명이 있었는데, 모두 라흐마니노프에게 잘 해주었단다. 그 중에 나타샤와는 나중에 결혼도 하였단다. 안정을 되찾고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도 제대로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했어. 작곡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1895 1번 교향곡을 작곡했어. 2년 뒤인 1897 1번 교향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혹평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당시 지휘를 맡았던 글라루노프가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작품의 실패로 라흐마느니프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좌절했다고 하는구나.

첫 번째 작품인데 너무 실망하긴 이른 거 아닌가, 힘 내야지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해줬겠지? 그렇게 격려해 준 사람 중에 톨스토이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달 박사의 최면치료로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사촌인 나타샤도 적극적으로 라흐마니노프를 도와주었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작곡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에 만든 곳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이라고 하는구나. 처음 2악장과 3악장만 먼저 만들어 연주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년 뒤에 1악장을 추가하여 완성했다고 했어. 이 곡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한 단계 올라선 음악가가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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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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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02년 나타샤와 결혼했단다. 사촌 간 결혼했다는 것이 오늘날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가 싶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도 사촌 간 결혼은 할 수 없었대. 어렵게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1903년에는 첫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1904 3월에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를 맡게 되었단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러시아는 혼돈과 불안의 시기였단다. 사회는 빠르게 현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제정군주가 통치하던 모순된 사회

1905년 노동자들의 불만이 퍼져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총으로 대응하면서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단다. 이런 혼란은 라흐마니노프에게도 영향을 주었어. 3년간 독일 드레스덴에서 지내다가 러시아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1909년에는 처음 미국 순회 공연을 갔는데,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되었단다. 이 시절 또 하나의 대표곡 <피아노 협주곡 3>을 작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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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77)

<피아노 협주곡 3>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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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유럽 이곳 저곳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그 공연들도 중단되고 말았단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대상자였기 때문에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마음에 늘 불안해 했다고 하는구나. 결국 징병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1차 세계 대전과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대.

1917 2월에는 러시아에서는 군주제가 막을 내렸단다. 라흐마니노프도 구세대 유물이었던 군주제가 끝난 것을 환영했단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혁명 세력의 주동자들인 농노들은 지주를 압박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장인도 지주였고, 그들의 집도 저택이라서 농노의 공격 대상이었단다. 그들도 언제 공격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외국에 가 있는 것을 고려했어. 1917 9 5일 러시아에서 마지막 연주를 했단다. 곧바로 1917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라흐마니노프는 식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단다.

이 전에 미국에서 순회 공연에서 큰 인기를 끌어서 미국에 정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 여러 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하였단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정신적으로도 정착하고 안정을 찾는 것도 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더욱이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를 무척 사랑했는데


3.

미국에서의 생활은 음악에 대한 열정, 그 자체였단다. 미국은 이미 녹음 기술도 발명이 되어서 유명한 음악가의 음반 산업도 활발했어. 라흐마니노프도 피아노 녹음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지만 러시아와 유럽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나 봐. 1930년에는 스위스 루체른 근교에 빌라를 새로 지었는데, 빌라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세르게이와 아내 나타샤의 이름을 합쳐 세나르라고 지었단다. 이곳에서 교향곡 3번을 작곡하는 등 많은 작곡 활동도 했대. 1930년대면 그의 나이도 이제 육십 대에 들어섰어. 몸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지.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치명적인 관절염도 있어서 의사가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권고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음악과 연주에 열정이었단다. 무대에서 죽는 것이 그의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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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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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루체른의 생활은 히틀러에 의한 유럽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되면서 마무리 되었단다. 1939 8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그가 미국으로 떠난 지 일주일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이때 함께 오지 못한 둘째 딸 타타냐와 루체른의 빌라 세나르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하는구나. 1942년에는 베벌리힐즈 에 주택을 장만하고 죽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어. 1942년 데뷔 50주년이 되던 해라서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도망 온 러시아에서도 축하 선물을 보내주었다고 하는구나. 1943년 피부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2 5일 생애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3 28일 눈을 감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죽기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구나.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 피아니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평생 마음 한 곳이 허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야.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웃는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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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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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상상 속 그의 손끝에 있는 건반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각별히 선호한 독일제 베히슈타인이 아니라, 1934년 라흐마니노프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악기를 가능케 한다고 칭찬했던 민첩한 액션으로 무장한 스타인웨이의 감응력 좋은 현대식 피아노였을 것만 같다.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펼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 P12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 라흐마니노프는 첫 공개 연주회 장소도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골랐다. 바로 1892년 9월 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피아노 협주곡 4번> 제 1악장,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아울러 전 세계 청중에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알릴 최신곡도 초연했다. 다름 아닌 <전주고 c샤프단조>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그해 가을에 작곡한 네 편의 피아노곡과 묶어서 출판업자 구트하일에게 건넸고, 구트하일은 다섯 편의 피아노곡을 <환상적 소품집, 작품 3>으로 출판했다." 출판 악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스승 안톤 아렌스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 - P74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을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른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페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 P197

<피아노 협주곡 4번>의 뿌리는 러시아이지만, 마틴은 이 곡이 "주로 뉴욕에서 쓰였고 서유럽에서 완성되었으며 게다가 섬세하고 명석한 작곡가의 작품이니 그가 수년간 주로 생활한 나라의 경치와 소리에 영향받은 게 당연하다"면서 "낭만파의 희뿌연 실안개는 영영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1924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재즈와 안면을 튼 상태였고, 심지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도 참관한 다음이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한층 간결해진 주제를 사용하는 등 라흐마니노프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곡 스타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P274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읽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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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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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알게 된 스릴러 소설 <퍼핏 쇼>를 읽었단다. 지은이는 M.W. 크레이븐이라는 영국 사람인데, 주인공 워싱턴 포를 내세운 <워싱턴 포> 시리즈가 유명한가 보구나. 아빠는 물론 지은이 이름도 <워싱턴 포> 시리즈도 모두 처음 들어봤단다. 아빠가 읽은 <퍼핏 쇼> <워싱턴 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2018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는구나. 영국 범죄문학상인 골드 대거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읽기 전 이런 것에 현혹되면 괜히 기대감만 상승하고 나중에 실망할 수 있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단다.

2018년에 출간된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작년에 소개되었으니, 요즘처럼 초스피드 시대에 좀 늦게 소개된 것 같구나. 책을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구인지 대략 예측이 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빠른 전개와 잘 짜여진 짜임새로 인해 재미있게 읽었단다. <워싱턴 포> 시리즈가 또 번역 출간되면 눈여겨봐도 될 듯 싶구나.

….


1.

이멀레이션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왔어. 종교 제물로 바치려고 죽이는 일을 뜻하고, 특히 불로 죽이는 일이라고 하는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의 별명이 이멀레이션 맨이란다. 이멀레이션의 뜻을 이야기해주었으니 이멀레이션 맨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잔인하게 죽이는지 예상이 되겠지.

영국에 신석기 또는 청동기 고대 유물인 환상열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멀레이션 맨은 이 환상열석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지금까지 3명이 불타 죽었는데, 모두 60대 남자들이었단다. 3 건의 유사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중범죄 분석섹션의 경찰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단다. 중범죄 분석섹션의 스테파니 플린 경위가 이 사건을 맡았어. 플린 경위와 함께 일하는, 틸리 블래드쇼라는 데이터 분석관이 중요한 단서를 잡았단다.

틸리 블래드쇼는 천재 기질을 보이는 사람으로 데이터 분석에는 유능하지만, 사교적으로는 상당히 부족한 사람으로 마치 사회부적응자로 보였어. 어렸을 때부터 거의 집에서만 지냈다고 하더구나. 자기 스스로도 온실 속 화초라고 이야기했어. 틸리가 시신에 숨겨져 있는 정보를 하나 찾았는데, 거기에는 얼마 전부터 정직 중인 경찰 워싱턴 포의 이름이 있었고, 숫자 5가 있었어. 워싱턴 포는 중범죄분석섹션 경위로 있었는데 사고를 치고 지금은 정직 중으로 농장에서 지내고 있었단다.

스테파니 플린은 워싱턴 포를 찾아갔고, 연쇄 살인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 어쩌면 자신이 다섯 번째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경사로 복직하였단다. 그리고 스테파니와 틸리와 함께 이멀레이션 맨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단다. 얼마 후 네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단다. 워싱턴 포가 머무르고 있던 농장 근처였어. 그럼 다음은 워싱턴 포인가? 워싱턴, 스테파니, 틸리는 함께 현장에 출동하였단다. 현장에는 이 사건이 담당 경찰 리드가 나와 있었는데, 리드는 워싱턴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였단다. 리드와 워싱턴은 범인을 찾기 위한 도움으로 주었어.

어느날 워싱턴의 집에 전달된 의문의 엽서에 워싱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단다. 그리고 퍼컨테이션 포인트도 같이 적혀 있었어. 퍼컨테이션 포인트를 물음표를 거울에 비춘 모양 ("") 이란다. 퍼컨테이션 포인트는 아이러니 부호라고도 하고, 문장의 수사의문문에 쓰이기도 하고, 비꼼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문장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을 때도 사용한다고 하더구나. ,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워싱턴 일행들은 퍼컨테이션 포인트 ("")를 보고선 한 가지를 떠올렸단다. 세 번째 시신에서 발견된 숫자 5는 숫자가 아니고 퍼컨테이션 포인트 ("")였다는 거야. 그렇다면 범인은 왜 워싱턴에서 퍼컨테이션 포인트 ("")와 워싱턴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보냈을까?

엽서를 보낸 것은 범인이 맞을까?


2.

지금까지 벌인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지능이 높아 보였단다. 그리고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복수 등의 목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피해자들 간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워싱턴과 틸리는 이것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했고, 이 사건은 오래 전 존재했던 세븐 파인스라고 하는 보육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들 희생자들은 모두 비밀스러운 모임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이고, 그 명단도 찾아냈는데, 피해자들 중에 없는 카마이클이라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초대에는 당시 보육원 사회복지사였던 힐러리 스위프트가 연관되어 있었어.

20여년 전의 일이라서 힐러리 스위프트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단다. 워싱턴과 리드가 힐러리 스위프트를 찾아갔고, 힐러리가 준 차를 먹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단다. 정신을 잃으면서도 워싱턴은 스테파니한테 전화를 했어. 워싱턴이 정신을 차려 보니 힐러리는 이미 사라져 있었단다. 그렇다면 힐러리가 이멀레이션 맨? 아니 이멀레이션 우먼? 그런데 지금까지 범행을 보면 힐러리 같은 할머니가 혼자 할 수 있는 범행이 아닌데그렇다면 공범이 있는 것인가?

20여 년 전 보육원에서 있었던 비밀 모임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6년 전이었어. 몇몇 부유층 인사들한테 은밀한 초대장이 보내졌고, 그 모임은 커다란 크루즈 안이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보육원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몹쓸 짓을 했단다. 당시 그 일을 꾸민 사람이 힐러리 스위프트와 카마이클이란 사람이었단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에게 죽음까지 당했지만, 이 일에 연루된 어른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단다. 아마 뒷돈으로 조치를 했겠지. 이 일은 워싱턴 포는 이번에 조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왜 범인은 워싱턴 포의 이름을 시신에 남기고, 워싱턴 포에서 엽서를 보냈을까? 워싱턴 포의 지인이 범인이란 말인가?

그렇단다. 이런 스릴러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읽는 이도 범인이 누구일까? 추리하면서 읽게 되는데,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 중에 있단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범인은 26년 전 십대일 가능성이 높으니, 범인이 갑툭튀가 아니라면 대충 예상을 할 수 있게 된단다. 그리고 그 예상했던 사람이 범인이 맞았단다.  보육원 출신으로 그 크루즈에 들어갔던 소년들 중에 한 명. 그런데 범인이 밝혀진 이후에도 아직도 소설의 분량이 꽤 남아 있었단다.

범인은 밝혀졌지만 아직 잡지는 못했어. 범인은 아직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어. 힐러리 스위프트그리고 그 사건을 이 세상에 알리는 것. 그 이후 범인은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고 자신 스스로도 죽은 친구들에게 가는 것을 선택했단다. 아니, 그렇게 보이게 했는데 범인은 실제로는 죽지 않은 것 같았어. 주인공 워싱턴이 그렇게 추리를 했지. 범인이 연쇄 살인을 한 것은 잘못한 것이 맞는데, 법으로 응징할 수 없었던 것을 스스로 응징한 것이기에 그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구나. 그리고 워싱턴이 생각한 것처럼 그 범인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앞서 범인이 26년 전 사건에 대한 모든 증거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었잖아. 그 사건의 모든 증거가 담긴 usb 메모리가 워싱턴의 손에 들어오게 된단다. 그것이 사회의 많은 풍파를 일으킬 것이 예상되었지만, 워싱턴의 정의는 그것을 신문사에 보내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어.

….

스포방지를 위해서 범인의 정체는 너희들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다시 편지를 읽어보니 다른 내용들은 스포를 엄청 많이 했구나. 이 책의 표지을 본 Jiny가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내용이 무섭고 좀 자극적이니, 좀 커서 봤음 좋겠다.

그럼 <워싱턴 시리즈>의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 환상열석은 수천 년을 품은 평온한 장소다.

책의 끝 문장: 포는 전송을 누르고, 뒤로 기대고는 다가올 미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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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

(최재천)10년 전에 긍정심리학의 대가라 불리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회의 고통은 과목별로 오지 않는데 아직도 교실에서는 20세기 방식으로 과목별로 가르친다. 그 점이 오늘날 복합적으로 융합하는 산업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기 힘들게 한다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시대에 발맞춰가지 못하는 교과목식 분류가 교실뿐 아니라 우리의 통치 프레임에도 깊게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39)

(최재천) 평소에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자꾸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공부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교육의 내용이 사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채워져야 하고요. 진실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이 일반인에게 신뢰를 받아 통용될 수 있도록 사회의 갈등이 잦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위정자들이 힘써 노력해야 하지요. 갈등의 골이 깊으면 진영논리로 사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커집니다. 저는 무엇보다 앎이 가져오는 사랑이 소중하다고 여겨요. 우리 인간은 사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엔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45-46)

(최재천)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내용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일까요? 솔직히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삶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시간을 우리가 지금처럼 빼앗아도 될까?’ 자주 의문을 가져요. 저는 어른들이 그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인권 문제라고 보는데요. 청소년 시절에는 왜 인권을 보호받지 못할까요?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기성세대가 청소년에게 삶을 접고 공부만 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교육 제도는 위 세대가 아래 세대를 압박하는 장치가 됐습니다. 이제라도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고민하고, 모두가 삶을 즐기면서 자라나도록 길을 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육하고 공부하는지를 숙고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87)

(최재천) 30분 단위로 쪼개서 일해요. 학생 상담 30, 회의 한 시간, 그 중간에 30분이 비면 원고 재검토, 그러고는 약속된 곳으로 뛰어나갑니다. 집이 연희동인데 학교까지 매일 걸어 다녀요. 연세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동산을 넘어 이화여자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올라 연구실로 오죠. 10년 정도 이렇게 했어요. 3.5킬로미터를 30분 내에 걷습니다. 그 속도로 연구실에서 이대역까지 언덕을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강연장으로 갑니다. 강연이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다시 연구실로 들어와 뒷일을 하고요. 오후 5시 반에 집으로 출발합니다. 그럼 오후 6시에 도착해요. 하루 평균 1 5천 보 정도는 걷는 일과입니다.


(146)

(최재천)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나가다 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어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입니다.


(166)

(최재천) 그런데, 적자생존이란 말이 부각되면서 진화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다윈이 친구인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표현을 받아들여 쓴 말이 적자생존입니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최상급으로 썼어요. 이 말이 다윈 진화론의 존폐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흥분된 마음으로 견해를 열정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저는 그를 다윈의 전도사 중에 한 명이었다고 표현하는데요.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붙이죠. 아직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한 전도사님이라고요. 그런 사람이 적자생존을 최상급으로 표현하는 사람에 우리가 무지무지 적응을 잘해야만 살아남는 것처럼 이해하게 됐어요.


(223-224)

(최재천)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선생님은 모든 게 편집이다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에요. 지금 인터넷을 뒤지는 젊은 세대는 스스로 편집합니다. 기성세대는 명저 한 권을 붙들고 흡수했죠. ‘이 대가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구나라면서 쭉 읽고, ‘다 이해했어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이해했다는 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거죠. 젊은 세대는 스스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나름대로 취사선택하고, ‘뭐 이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라고 판단도 하면서 그 화면은 닫고 다음 걸 읽죠. 자기가 편집합니다. 저는 그 방식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232-233)

(최재천) 동물 세계에는 선생님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냥 거기 있고 아이들이 보고 배웁니다. 저는 우리가 약간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먼저 가르치려고 덤벼들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일종의 촉진자가 되어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엄마 침팬지가 새끼가 실패하는 것을 모르지 않아요. 관찰해보면 계속된 실패를 보는 엄마 침팬지의 표정이 착잡합니다. 마치 붙들고 가르쳐봐?’ 이런 고뇌를 하는 듯해요. 사실은 아니겠죠. 관찰하는 저의 감정이 이입됐을 텐데요. 엄마 침팬지는 실패하는 새끼 옆에서 자기 열매만 계속 깨먹고 있습니다. 가끔은 새끼가 엄마 침팬지 걸 뺏어 먹어요. 뺏기면 할 수 없지만 배고프지? 엄마가 까줄게그러지는 않습니다. 새끼는 배고프니까 어떻게든 기술을 익혀서 먹으려고 엄마 침팬지를 더 세심하게 관찰하겠죠. 마침내 자기가 혼자서 탁! 깨 먹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250)

(안희경) ‘메기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유럽 해역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 청어인데, 바다에서 잡은 청어는 항구에 도착하는 동안 대다수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따라 들어온 메기가 있던 수족관의 경우 꽤 많은 청어가 항구까지 살아 있었다고 해요. ‘한 조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효과메기 효과라는 말을 씁니다. 누군가 선생님 말씀을 언뜻 들으면,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 공부 못하는 아이가 희생해야 하는가? 성적은 낮지만, 창의력이 뛰어나거나 특기가 있는 아이들이 또 희생해야 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성적 중심으로 뽑는 대학 입시가 바뀔 가능성이 없는 지금,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여는 작업은 양쪽 모두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쟁에 매몰된 교육 문화를 흔들 단초가 될 것 같습니다.


(271)

(최재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한때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있었어요. 대학 교육이 엉망이라서 기업들이 신입사원들을 재교육시켜야 한다고요. 제가 신문에 이런 요지의 칼럼을 썼어요. ‘내가 알기로 외국의 유수한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아서 재교육을 시킨다. 당신들은 왜 국가의 세금으로 당신들 회사를 위한 교육까지 시켜달라고 하느냐. 그럴 거면 모든 대학생이 등록금 없이 다니도록 대학에 돈을 내라. 당신들이 다시 교육시키는 게 맞다. 세금은 내 돈이다. 왜 내 돈을 가지고 당신들 회사에서 일할 사람을 교육시켜 달라고 떼를 쓰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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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벌여온 재판을 세상 밖으로 다시 꺼내는 일과 같다. 진실과 정치가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산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그려질 때, 여론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정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영혼의 진실은 대개 중간 그 어디쯤에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의 위대한 성인도 아니었고, 특별히 똑똑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평범한 성격에, 불타는 열정도 얼음 같은 차가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착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평범한 인물이었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비극적인 긴장감은 인간과 그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영웅이나 천재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에 비해서 너무나 좁고 적대적인 주위 세계와 충돌할 때 생겨난다.


(10)

운명은 평범한 사람도 뒤집어 놓을 수 있고, 한계를 넘어 나아가도록 강제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예시이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던 그녀의 세계 안에 혁명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이 합스부르크의 여인은 수많은 다른 황녀들처럼 평범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을 것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밖으로 내던져야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운명이 쥐고 있는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채찍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불행의 손길은 비정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불행 속에서야 겨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한 나를 알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하찮은 평범한 삶이 후세에 어떠한 본보기가 되리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책임 의식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을 초월하여 성장한다. 필며의 형체가 부서지기 직전에, 영원히 지속되는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27-28)

세상사는 대개 개개인의 내적 갈등의 결과물들일 뿐이다. 아주 작은 계기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 것은 역사가 지닌 위대한 비결 중 하나이다. 1차 세계대전의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와 드라가 마신의 결혼, 두 사람의 암살, 카라조르제비치의 즉위, 오스트리아와의 적대. 빈틈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세계대전. 역사란 거미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정교하게 조합된 역사라는 장치 속에서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라도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듯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 결혼 이후에 몇몇 해들은 세상의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29)

오늘날에도 베르사유는 절대 왕정의 가장 웅장하고 도전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도심에서 떨어진 시골 한가운데, 별다른 이유 없이 언덕 위에 자리한 궁전에는 수백 개의 창문들이 인공 운하와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는 원래 도로도 기차도 이어지지 않았었다. 한순간의 기분으로 굳어진, 무의미하게 거대한 호화로움이었다. 바로 이것이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지는 국왕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그 개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짐이 곧 국가다.” 그는 지위의 무한함을 표출하기 위해 궁전을 의도적으로 파리 밖으로 옮겼다. 그가 팔을 뻗어 명령만 하면 모래밭은 정원과 숲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세워졌다.


(58)

네가 얻은 새로운 지위에 대해 축하의 말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은 것이다. 시할아버지의 자비와 관용으로 지난 3년동안 누려온 평안한 생활,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이 너희에게 안겨준 사랑. 그 감사한 일들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할 때에는 더욱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것은 너의 지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지위를 유지하며, 국왕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희 둘은 아직 너무 어린데…… 이 어미는 걱정이구나. 지금 내가 너희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눈으로 살펴보고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두거라.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음모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64)

하지만 부정은 못 해도 용서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라도 이런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궁궐의 뒷방에서 정신적으로 채 성장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 최고 권력의 자리에 부름을 받은 그녀. 게다가 18세기라는 이 시대는 그녀를 유혹하기에 절묘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된 첫날부터 자신을 신격화하는 숭배의 향연에 휩싸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현명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녀의 행동은 곧 법이 되었으며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변덕을 한번 부려주면 그다음 날에는 벌써 유행이 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궁중은 열광적으로 따랐다. 허영심에 찬 아들에게는 그녀 곁에 한 번 서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불한다는 단어 한마디를 종이 위에 휘갈겨 쓰기만 하면 수천 두카트가 쏟아져 나왔다. 빛나는 날개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어찌 경솔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4-145)

왕비에게는 적자 부인(Madame Defizit)’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민주적인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궁정이나 왕, 귀족은 없고 오직 시민만이 있는 나라, 완전한 평등과 자유가 있는 나라를 말했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볼테르, 디드로의 저서에서 말하다시피 왕권은 결코 신이 부여한 유일한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존경심은 호기심으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며 귀족과 시민들은 점점 확신했다.


(241)

오래된 비법: 국가나 정부는 내부적인 위기를 더 이상 통제할 능력이 없을 때, 외부 세계와의 긴장을 조성하면서 눈을 돌린다. 이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혁명의 지도자들은 내란을 피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요구했다. 헌법을 받아들이며 루이 16세의 왕권은 약화되었고 라파예트 같은 순진한 사람들은 이제 혁명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법의회를 지해하고 있던 지롱드당은 공화정을 바라고 있었다. 왕국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전쟁이 나면 왕실 가족과 국민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 있었다. 최전선에는 시끄러운 왕의 두 형제가 나설 것이고, 적군은 왕비의 오빠가 지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254)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 마지막 결전이 일어난 이날, 튈르리 궁 앞 사람들 속에 젊은 소위 한 명이 서 있었다.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누군가 그에게 자네는 언젠가 루이 16세의 후계자가 되어 이 궁전에서 살게 되리라 말했다면 바보 같은 소리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그는 마친 근무 중이 아니었기에 양쪽 진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두세 발 대포를 쏘아대기만 하면 이 폭도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왕이 이 보잘것없는 포병 소위를 기용하기만 했다면 그는 파리 전체를 상대로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궁 안에 나폴레옹처럼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격은 하지 말고 단단히 버티면서 강력하게 수비하라!” 이것만이 병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266)

혁명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넒은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최상의 이상주의에서부터 현실적인 잔악함에 이르기까지, 위대함에서부터 무자비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색됐다. 프랑스 혁명에는 두 부류의 혁명가가 있었다.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와 복수심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295)

대체 언제 너는 진짜 네가 될 작정이냐?” 20년 전 절망에 빠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존엄을 되찾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법 절차를 빠뜨리지 않으려는 심문자 푸키에 탱빌은 그녀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어디에 살았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은 결코 체포된 것이 아니며 국민의회의 요청에 따라 탕플 탑으로 옮겨갔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었다. 왕비의 죄목은 혁명 이전부터 오스트리아의 국왕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은 것, 민중의 땀과 열매인 프랑스 재정을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반역자인 대신들과 공모하여 낭비한 것, 황제에게 돈을 보내 자신을 섬긴 백성들을 공격한 것 등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여 외국 밀사와 거래하고 남편인 국왕을 선동해서 거부권을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비난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강력히 부정했다.


(305-306)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치욕적인 선고가 아닌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안도의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그분처럼 최후의 순간을 잘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아주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이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다정하고 마음씨가 착한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당신을 담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아이들에게 나의 축복을 전해주세요. 신념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 서로를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아이들이 어떤 처치에 놓이더라도 서로 힘을 합하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나눌 때 배가 되는 것이지요.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위해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품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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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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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구나. 7권의 부제는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란다. 일제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긴 한데, 간토대학살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구나. 일본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한자로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관동을 일본말로 간토라고 한단다. 그래서 간토대학살은 관동대학살이라고 해.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정부 지휘아래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그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 죽인 사건을 이야기한단다. 7권의 이야기를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였단다.

1920년대 중반이 되었는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서면서 독립의 희망은 점점 보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의열단원은 계속된 의거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단다. 1923년 김익상, 오성륜, 김상옥의 의거가 이어졌어. 하지만 그들의 단발성 폭력적 의거가 무슨 효과가 있냐고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의열단의 흔들리는 입지를 굳게 세워준 이가 단재 신채호였단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에 힘을 실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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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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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 일제 점령의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변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광수와 최남선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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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최남선은 1928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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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똑똑한 친일파 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단다. (1924 5) 이 대학을 통해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자 했고,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려는 자들은 경성제국대학을 목표로 했단다. 이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서울대가 되는데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울대학교의 설립년도를 검색해보면 1946년으로 나오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하였다고 했거든.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광복 후 서울대 출신이라고들 했다고 하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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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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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국내 사회의 흐름을 좀 이야기해줄게. 192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유행인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단다. 사회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단체가 만들어졌고, 당시 우리나라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박헌영의 인기도 높았대. 기독교가 점점 세를 확장해가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의 대립도 심화되었대. 1926 6 10일에는 조선의 부끄러운 마지막 왕 순종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단다. 이 때를 맞춰 좌우가 합작하여 다시 한번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니 6.10 만세 운동이었단다.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근대 문물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돈 있는 친일파들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단다. 대표적으로 축음기가 유행하였고, 가수들도 인기를 끌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를 윤심덕이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였단다. 신파극과 무성영화도 많이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5 8월에는 KAPF라는 진보적 문학예술단체도 생겨났고, 1926 6월에는 <개벽>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그 잡지에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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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41)

<개벽> 1926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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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성들은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 잃은 서글픔을 달랬단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붐을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일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참다 못한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대. 1929년에는 423 , 1930년에는 716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이 시절 전화도 어느 정도 대중화를 이루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전화를 이용한 범죄들도 성행했다. 그때도 보이스 피싱이 있었나 보구나. 스포츠 종목도 많이 유행했는데 축구도 유행을 했고, 당시에도 승부에 예민들 하셔서 심판의 판정에 시비가 붙어 응원단들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축구는 인기가 좋아서 대학에도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학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희전문대학과 한판 벌였는데, 4 0을 지고 나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구나. 그때도 한일전은 질 수가 없지. 당시 이 경기를 본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을 잠시나마 잊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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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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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도 인기가 있었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서울에 방문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조선 대표와 시험도 했대. 23 3으로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이기긴 했는데, 조선의 야구팀도 무려 3점이나 뽑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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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하고 미용실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여자들도 단발 머리로 자르는 이들이 있었고, 남자들은 장발이 유행하기도 했대.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다방과 카페도 유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는 점점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 갔단다. 이대로 일본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면 안될 텐데 말이야.


2.

한동안 뜸했던 의열단의 의거는 1926 12 28일 나석주 의거의 성공으로 건재함을 알렸어.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7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았단다. 장진홍이라는 분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터트렸고, 조명하라는 분은 타이완에서 육군대장을 독 묻은 칼로 공격했단다. 그 육군대장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8개월 뒤에 죽었어. 안타까운 것은 조명하 의사가 그보다 먼저 사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이 때 독립운동은 좌우의 합작 노력이 있었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인 1927 2 15일 결성된 신간회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였고, 신간회와 함께 여성단체인 근우회도 결성되었다고 하는구나.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희롱하고 모욕을 준 일이 있어났어. 이를 본 우리나라 남학생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 이 일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은 무조건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잘못을 빌라고 했대.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1929 11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단다. 이 운동은 전국의 학생들을 자극하여 1930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단다. 이 날을 기념하여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의 학창 시절 왜 학생의 날은 쉬지 않는 거냐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하는구나.

1926년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글을 만든 날을 기념하여 가갸날을 지정했어. 당시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확히 몰라서 음력 9 29일로 했다는구나.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0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단다. 한 동안 한글날에 쉬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의 이야기란다. 빼먹은 부분도 많은데, 늘 그렇듯이 이해 바라고이제 한국 근대사 산책은 3권이 남았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책의 끝 문장: 1930년대에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한국을 전시 체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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