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에 <한겨레>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53)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62-64)

영국 BBC 2002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149)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 7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163)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200)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236-237)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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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6)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 10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114)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 11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160)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179)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262-263)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266)

쥐잡기운동, 빈대잡기운동, 기생충 박멸운동 등도 병행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아마도 가장 괴로운 건 빈대의 습격이 아니었을까? 이상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날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도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312)

권투의 인기도 그러했을진대 축구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치하에서의 축구는 카타르시스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을 정화 또는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우리는 내부에 공격적 에너지의 저장소를 항상 지니고 있다고 가정한다. 늘 발산시켜버려야 할 공격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축구를 통해 그 공격성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국인들의 억눌린 상태는 해방이 되었다고 일시에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종류의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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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카메라는 간단한 기계여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도전이라면 그것으로 예술, 곧 참된 것과 아름다움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한 탐색은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일이다. 나는 투명한 가을 낙엽과 해변의 완벽한 모양의 소라에서, 여체의 등허리 곡선과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 조직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포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들에서도 찾는다. 때때로 암실에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작업하다가 한 사람의 영혼, 한 사건의 감동 또는 한 사물의 생동하는 본질을 만난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치솟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게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의 목적이다.


(252-253)

그녀는 세기가 바뀐 이래 칠레에 벌써 다섯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리 칠레인들은 악의가 없어 보이고 심지가 약하다는 평판도 있는 데다 심지어 저기요, 제발 물 한잔 좀 주실 수 있을까요?”하는 식의 비굴한 말투를 사용할 정도지만, 일단 기회만 닿으면 식인종으로 돌변한다고 했다. 우리의 난폭한 기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조상은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 중에서도 가장 노련하고 사나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태양에 시뻘겋게 달궈진 무기를 들고 최악의 자연 장애물을 이겨 내면서 걸어서 칠레까지 올 생각을 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고는 자신들 못지않게 용맹스러워서 결코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신대륙 부족이었떤 아라우칸족과 혈통을 섞었다. 아라우칸족은 포로들과 자신들의 추장 토키를 먹는 습성이 있었고 정복자들의 껍질을 말려 제식용 가면을 만들었는데, 특히 턱수염과 콧수염이 있는 사람들의 가죽을 선호했다. 자신들은 수염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인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백인들은 인디오를 산 채로 태워 창에 꽂은 뒤 팔다리를 자르고 눈알을 뽑았다는 니베아의 설명이었다. “그만해라, 됐다! 그런 끔찍한 얘기를 내 손녀딸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해라.” 할머니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348)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보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들려왔고 사회의 변화를 모르고 지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실외 스포츠와 실외 게임, 산책 등 카스티야 이레온 귀족의 느긋한 후손들보다는 외향적인 영국인들에게 맞는 놀이들을 광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예술과 문화의 바람으로 칠레의 분위기가 새로워졌고, 독일산 기계들이 중후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칠레의 오랜 식민기적 낮잠은 중단되고 말았다. 벼락부자에 교육도 받고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했다. 파업, 폭행, 실업, 칼을 뽑아 든 기마경찰의 공격 등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여서 칼레우푸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 년 전에 같은 침대를 썼던 고조부들처럼 여전히 농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20세기는 찾아들었다.


(430)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순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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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8-9)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겪지 않은 것과 다름없고,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끝내주는 음악은 끝난 뒤의 침묵도 끝내주죠. 죽여주는 영화는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잊어버리게 하고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그제 제대로 된 작품이라면 체험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게 아니라면 뭘 제대로 만든 게 아닌 거죠.


(17)

준연은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같지만, 진실도 그 진실을 체험하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누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나요? 또 누가 태어남에 대한 기억이나 감각을 갖고 있나요? 우리는 태어났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이야기로만, 체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증거로, 자료로만 알고 있어요. 시간도 마찬가지죠. 어떨 때는 1분이 한 시간 같지만 게임이라도 하면 사흘이 한나절 같잖아요. 그 두 가지 시간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우린 몰라요. 그저 같겠거니 생각할 뿐이죠.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겠거니, 하듯이요. 사실 우리한테 발생한 어떤 사건보다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인데도 그렇죠. 준연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은 말로만, 추측으로만 알고 있어요.


(27)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6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109-110)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했던 건 늘 그렇게 예쁨을 발견할 때였다. 내 기준에서, 연애란 예쁜 여자와 하는 게 아니었다. 예쁜 데가 있는 여자와 하는 게 연애였다. 객관적으로 예쁘건 말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뻐 보이려는 것도 나는 싫은 쪽에 가까웠다. 멋있어 보이려는 남자가 결코 멋있지 않듯 예뻐 보이려는 여자도 결국에는 예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금세 지루해졌고 대화가 지루하면 외모도 지루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창 술에 취해 있을 때조차 내가 왜 여기 앉아 이 술값과 시간을 버리고 있나 싶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하진은 아니었다. 계속 얘기하고 싶은 여자, 웃게 해 주고 싶고 나를 웃게 해 주는 여자였다. 아무리 웃고 예기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오히려 더 웃고 얘기하고 싶어지는 여자.


(127-128)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137-138)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쉽고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문제들은 어렵고 복잡해졌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적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늘 더 쉽고 더 가벼웠다. 똑 같은 외도라도 연애할 때는 바람이지만 결혼하고 나면 불륜이 되듯.


(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5-196)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214)

우리는 한 인생에서 오직 한 사람만 될 수 있어요. 인생은 하나고 우리의 시간은 하나니까요. 우리는 다 매여 있어요. 속박당해 있죠. 인생에, 시간에요.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방종이고 망상인 거고 거기에 갇히려고 하면 감상(感傷)이고 자박(自縛)인 거예요. 우리는 속박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해요. 벗어나려 하지도 갇히려 하지도 않은 채로요.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속박이라는 뜻이죠. 어떤 속박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자유예요.


(223)

우리에게, 남자들한테 사랑을 가르쳐 주는 건 늘 여자라고요. 안아 주고 보살펴 주는 최초의 어머니로서, 또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사람으로서도, 늘 여자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느끼게, 보여 주고 일깨워 주죠. 여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남자가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애초에 우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잖아요.


(270)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280)

살아 있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건, 사라지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해. 이렇게 생생하고 울창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메마르고 작아지겠지. 음악도 그래. 아름답지만 오직 만들어지는 그 순간에만 존재했다가 끝나면 사라져. 술도 아름다워. 솔직하고 속 깊은 얘기들, 울고 웃는 것들이 다 비워지는 술병과 함께 사라지지. 아름다운 건 다 살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만들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만든다는 건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거기에 만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만든다는 것만큼 살아 있다는 걸, 사랑한다는 걸 증거하는 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쓸모와 유용함을 일깨워 주니까. 우린 아름다운 걸 좋아해.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293)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296)

음악 안에서는 아무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규칙이 있을뿐 모든 게 상대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곡을 쓴다는 건 음표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런 맥락들을 엮고 쌓아올린 총체적인 구조고요. 거기서 가지 위에 잎이 돋듯 음표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음들은 300년 전에도 있었고, 2000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도 이미 있었어요. 음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표기법, 악기, 작곡법, 연주법 같은 것에 따라 발견되고 발전해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맥락과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게 한결같이 곡을 쓰는 사람의 몫이고 노동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어요. 시대나 사조마다 달라지는 것도 음악이나 음들이 아니라 이런 맥락과 구조에 대한 것일 뿐이죠.


(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381-382)

최악이라는 건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 우리 벌써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했잖아. 진짜 최악의 의미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아직 있다면 최악은 아니야. 그러니 최악이란 늘 접어 놔야 하는 거지. 할 수 있는 건, 언제 어디서든 늘 있어. 그게 없다면 어차피 안 되고 안 될 거, 그냥 불운이고 불행일 뿐이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건 그저 마음과 시간을 스스로 좀먹는 짓일 뿐이지. 거기에 붙들리면 아무것도 해 나갈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걸 피하고 대비할 만큼만 하게 되니까. 일이란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걸 해야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요구하는 걸 해야 하고, 그걸 할 때까지 해내는 거야. 그래야 성장이라는 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성장이라는 게 힘든 거고. 하진은 진지하게 나를 봤다.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해내야 하는 걸 하는 거, 그게 일이야. 그걸 알면 할 수 있어.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뭔가를 해내니까.


(488-489)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500)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659)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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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본적인 인권과 자치권을 회복하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적, 법적 노력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냉소와 경멸로 일관하고 있고 국제사회는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가자지구의 합법적 통치세력이었다. 저항하는 테러리스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토벌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식민정책 속에서 하마스전사들이 끊임없이 양성되고 있다.


(18-19)

정부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정부가 만드는 정책이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시민들이 폭넓게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개입을 허용하는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농업, 농촌, 식품산업 기본계획은 농정에 있어서 유일한 종합적 중기적 계획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철저히 농림축산식품부의 집안일이었다. 국책연구기관이 연구용역의 형태로 기본적 틀을 만들었고 최종 단계에서 이른바 전문가들의 의견을 형식적으로 청취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자체 판단으로 만들어졌다. 계획의 수립 주체가 정부인 것은 법이 정하고 있는 바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다. 5년간 농정의 기본적 틀을 만드는 일에 농민, 농촌 주민, 소비자, 환경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은 의견을 표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51)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다. 민주와 공화의 개념을 합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민주(民主, demokraita)와 공화(共和, res publica)는 기원과 담기는 내용이 서로 같지 않다. 기원에서, 전자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치, 후자는 로마의 공화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내용에서는, 전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다소간 시민들 간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 귀족공화정에서 유래한다.


(59)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동체의 선을 중시하였으나, 그 선은 국가의 획일적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덕성에 의해 실천되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경제적 소유 등에서 불평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불평등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적으로서,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역할, 책무의 수행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불평등이 바로 정치권력의 지배, 피지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국가의 목적 실현을 위한 공동체적 기여에 비례해서 배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는 배타적 특권이라기보다,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동반하는 것이다.


(60)

민주정치의 핵심은 민중주권이며, 그것은 민중에 의한 정책 결정권과 결정 절차로서의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현재 한국에서 민중주권을 현실화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담론이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민중을 우매한 존재로 보고 민중이 직접 결정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며, 그래서 남달리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뽑아 권력을 대신 행사하게 해야 한다는 대의제 담론이다. 둘째, 민중은 날 것 그대로서가 아니라 심사숙고하거나 교육과 훈련을 받아서만 올바른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도 민중을 완결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지도자 혹은 어떤 다른 기제에 의해서 교도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대의제와 같은 맥락에 있다.


(111)

예술은 인간을 넘어서 모든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문학이 사람을 갑자기 변화시킬 수야 없겠지요. 그래도 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학도 없고,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이 시대 교육과 문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나 문학을 비롯해서 교육과 문화가 타락하면서 인간이 대단히 왜소해졌어요. 뭔가 대중문화가 인간을 작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문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36)

그린뉴딜은 최근 수십 년래에 등장했던 어떤 제안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실업문제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과 주거를 보장하고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면서 전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안에는 장애물이 있다. 어떤 형태가 됐든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은 자연과 인간 삶의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삶의 질을 고양하면서 동시에 화석연료를 비롯한 에너지원의 사용을 줄이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진보적인 그린뉴딜이라면 에너지 삭감, 즉 에너지 보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에너지 사용 총량을 줄이는 것은 인류가 존속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73-174)

맞아, 애들이 안 움직이잖아요. 어제 TV를 보니까 서울시내 애들 중 놀 데가 없는 애들이 80%가 넘어요. 먹고 뛰어노는 게 기본인데 하루에 필요한 활동량을 계산한 게 있어요. 13세까지는 일일 활둉량이 2만보 이상이래요. 그래야 건강한 몸이 된답니다. 19세까지는 1 8,000보고, 어른들은 7,000보 이상이면 괜찮대요. 그런데 기분 좋게 걸을 데가 마땅치 않아요. 난 조금만 살펴보면 생명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생활운동은 아주 쉽다고 봐요. 문제는 지나친 디지털화예요. 이런 연구결과가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서 5살이 될 때까지 4만 회 이상 질문을 해야 뇌가 정상적으로 발육이 된다. 그런데 온갖 디지털 기기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차단하고 있어요. 애들이 자극적으로 빠른 것에만 반응을 해서 즉자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198-199)

나는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 아류 러다이트주의자다. 다시 말해 멈춤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찰적 과작자의 질문, “다시 묻는다. 인공지능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갈 또다른 과학의 발전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과학 기술은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는 불행하게 한다. 이익을 보는 이들은 지구를 버리고 화성에 가서 살고 싶은 극소수 자본가뿐이다.


(216)

그러나 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양곡법 개정안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소득을 높이려는 농정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대기업 미분양 아파트 구매하는 데는 혈세를 10~20조 원 들이면서 농민 쌀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혹독하냐?”고 항의했다. 실제로, 전국 곳곳의 미분양 아파트는 6만 가구에 육박하고, 이것을 정부가 사들이면 47조 원대에 이르는 주택도시기금(주택채권, 청약저축, 세금전입 등으로 구성)이 거론된다.


(239)

어느 인터뷰에서 현기영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제주 4.3 3만의 피해 통계로 쓰지만, 문학은 3만의 개개 사건으로 보는 거다라고, 얼마나 엄청난 선언인가. 3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죽음이 제주 곳곳에서 3만 번 벌어진 것이라니.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하여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 개별적으로 자기역할을 수행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창동 감독이 추천사에, “수많은 개인들의 삶과 목소리와 내면을 담아내는 섬세하고 인간적인 시선이라고 표현하면서, “읽는 내내 숨이 뜨거워지면서 거장의 숨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적었는데, 이는 결코 과찬이 아니다. 현기영은 최선을 다해 작품 속 인물들에게 독자성을 부여한다. 하나의 세계가 스러진 게 아니라, 3만 개의 세계가 그때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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