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18)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19)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31)

예민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축복이다. 관계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예민함은 바로잡아야 할 심리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의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응력을 갖는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꽃이 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44)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103-104)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122-123)

해 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한 삶은데도.


(130-131)

반복해서 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특출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결과이다. 창조적이 되는 비밀은 창조적이 될수록 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미국 팝아트 선구자 앤드 워홀은 말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완성하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라.”


(186-187)

사람들은 상자 안에 살면서 그 상자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문제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수성이 날카롭고 낯가림이 심해 사회 적응자처럼 살아갈 수 없을 때, 아무리 해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상자 안데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간다고 죽지 않는다. 강물은 강폭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넘쳐 자신의 길을 만들 뿐이다.

세상의 기분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자신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191)

그렇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길을 가지 않은 길로 남겨 두는 것을 의히한다. 삶은 선택인 동시에 포기의 길이다. 나는 결국 시인의 무화과를 선택했고, 특파원이나 사진작가나 다른 멋진 미래들은 신문지처럼 접어 안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단지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쓰고 나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글을 써야 함을 의미했으며, 정오부터 저녁까지 다음 글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의미했고, 병원 신세를 지든 자신의 예민함에 질리든 단어들을 수정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218)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235)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트워스키 박사는 말한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기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240)

나는 곳 그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그 후 두 사람이 어떤 여행을 펼쳐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낯선 여행을 주저하던 여성도 잘못된 여행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배낭끈을 단단히 여미고 떠났을 것이다. 훗날 자신의 여행을 뒤돌아 볼 때,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 불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이유는 여행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길들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실패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247-248)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 물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물었다.

물 맛이 어떤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맑은 호수에 똑 같은 소금 한 줌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맛보게 했다. 물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원합니다.”

짜지 않느냐?”라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전혀 짜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담는가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호수라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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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이제 하는 말이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취조와 재판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때 많은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33인 중에서 고문을 끝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재판정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은 한용운 선생 한 분뿐이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였다는 것에 놀랐고, 만약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나도 두려움에 떨며 꺾였을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 선생처럼 꿋꿋했을 것인가, 많이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용운 선생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꺾이고 말 것 같기도 했고, 영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보다는 꽤 강해진 것 같습니다만, 변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를 살펴보곤 하게 됩니다.”


(126)

임시대통령 <리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리승만> 범과의 사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었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반항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갖이고 임시 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간주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 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하였아.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미주에 앉어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어서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아지 못하게 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의 고립상태를 주출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서 파쟁을 계속 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132)

최고로 많이 배워 박사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이란 자기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 아닌가? 그 일이 어렵고 장해서 뼈빠지게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던가? 우리같이 무식한 것들도 다 아는 그 일을 이승만이란 사람은 몰랐는가? 그 유식하고 유식한 사람이 몰랐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독립자금을 제멋대로 범포해 버린 것일까? 그게 도대체 어찌 된 맘보일까?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것인가?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배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승만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 개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을 짐승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아닌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144)

보시오 지 동지, 어디 독립운동을 독립군만 하는 것이오? 이 만주땅에 조선농부들이 없고서야 독립군들이 어찌 있을 수 있소. 농부들이 피땀 흘려 뒷바라지하니까 독립군들이 앞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농부들도 독립운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다람 앞으로 나선 것하고 뒤에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을 뿐이오. 또 독립운동이 어디 한두 가지요? 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소학교 선생을 하겠소? 우리 대종교 활동은 또 뭐요? 친일모리배들을 빼놓고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고르면 될 것 아니겠소. 공부에 더 열중하게 해서 소학교 선생을 시켜도 좋고, 대종교 일을 보게 해도 좋지 않겠오?”


(149-150)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끝내 합일체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걸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이라거나 독립운동 세력의 파쟁이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들을 내걸고 나라를 되찾자는 것은 나라를 탈취한 자들만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의 잘못까지도 단죄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되찾은 새 나라의 국체는 마땅히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가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복벽주의자들은 또 나라 빼앗긴 죄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망동이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한 절대적 의미는 국체를 공화주의로 세운 것이었다.


(215)

무슨 생각 하느냐고? 아리랑을 생각하고 있었지. 아리랑, 아리랑, 그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관중들의 합창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리랑에서 팔을 묶여 끌려가던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아나? 그게 주인공 김영진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바로 송중원이야.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그리고 그 열렬한 관중들의 합장은 수많은 송중원에게 보내는 지지고 기대고 열망이야. 나는 이번에 놀랐어. 아리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리랑 노래가 선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어. 나는 도망다니면서 사람들이 독립을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 왜놈들의 종으로 살기로 독립을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회의했었어. 허나 그건 외로움과 두려움에 몰리고 있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아리랑을 보고 내 잘못을 깨달은 거지. 활동사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노래가 그렇게 퍼져나가는 건 뭘 말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조선사람들이 가슴 가슴마다 독립의 염원을 뜨겁게 품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평소에는 다만 표를 내지 않았을 뿐이야. 그 뜨거운 염원이 있는 한 송중원은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끝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 거야. 어때, 내 말이.”


(277)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왜 중국의 싸움에 나섰겠는가. 그건 전체 아시아사람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전 아시아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차별없이 잘살려면 중국에서는 군벌들을 타도해야 하고,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지금 2천만 조선사람들은 우리가 중국군벌을 타도하고 조선으로 오기를 기다리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아, 당신들은 어째야 하겠는가. 군벌들은 당신들의 재산과 곡식을 빼앗아갔고, 탄압하고 괴롭혔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원수인 군벌들을 없애려고 총을 들고 나섰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의 편이다.”


(288)

삼부회의는 만주의 동포사회를 지역적으로 삼등분해서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있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삼부는 1924년과 25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었다. 정의부는 남만주의 통화를 중심으로 길림 일대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참의부는 남만주의 집안현을 거점으로 압록강변 일대의 현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신민부는 일본세력 아래 장악된 용정이나 국자가 일대를 피해 북만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삼부는 지역이 서로 다르면서도 부()라는 명칭을 단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때 부라는 명칭을 가진 단체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발족된 한성과 연해주의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그 명칭과 기능을 통합하게 되자 만주의 단체도 부라는 명칭을 취소했던 것이다. 그로써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임시정부>라는 유일성의 법통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정은 기호파와 관서파의 내분으로 정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그 수습을 위해 국민대표회를 연 것이 1923 1 3일이었다. 그 회의에서는 임정의 조직을 개편 보완하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자는 창조파의 팽팽한 대립으로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 회의 결과 상해임정은 그전의 삼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에 만주지역의 단체대표나 독립군대표들이 단연 많이 참석했고, 그들이 창조파였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적과 멀리 떨어져서 내분이나 일삼고 있는 임정과 그 간부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292-293)

만주를 지배하는 봉건군벌 장작림은 조선총독부와 2년 전에 삼시협정을 체결하고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4월에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중앙권력을 장악하려고 대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치고 들어갔다. 뒤이어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장작림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의 세력권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없애라는 소탕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만주에서는 폭력과 체포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사람들은 그 거친 바람에 심하게 휘말렸다. 조선사람들 중에 공산주의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중국경찰들은 조선사람들을 걸핏하면 잡아가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조선독립을 놓고 한동안 우호적이었던 관계가 깨져나가고 있었다. 특히 부패한 중국관헌들은 공산당 일소를 빌미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돈을 받아먹고는 풀어주었다. 타락한 관헌들에게 공산주의자 소탕령은 더없이 좋은 치부의 기회였다. 그런데 중국관헌들의 그런 횡포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독립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에 머무는 처지에서 총질을 했다간 그나마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신속하게 뒷손을 써서 잡혀간 사람들을 빼내는 정도였다.


(307)

그러나 정작 무식한 것은 하시모토였다. 그 금줄은 터무니없는 미신이 아니었다. 숯은 병균이나 오물의 여과기능이 강했다. 더러운 물을 여과시킬 때 모래와 숯을 여러 층으로 쌓아 통과시키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조선사람들이 간장을 담글 때 간장독에 숯덩이들을 띄우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금줄에 숯을 끼우는 것은 아직 병에 약한 갓난아이와 산모에게 병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식구들이 들어올 때 미리 문간에서 소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솔가지도 미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은 가시가 매서운 탱자나무 대추나무와 함께 소나무 가지도 온갖 잡귀들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소나무의 그 사철 푸르른 바늘잎을 가시와 똑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미신적 요소였다. 그러나 실제로 소나무의 향과 송진은 여러가지 해충이나 독충을 죽이고 쫓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나무에 잡벌레가 슬지 못하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특히 송진은 인체 내의 기생충을 제거하는 약으로 쓰이고 있었고, 가벼운 외상의 지혈과 치료에 특효였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금줄을 드리워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는 것도 지극히 과학적이었다. 세상의 여러가지 유행병에 무방비상태인 갓난아이가 그 21일 동안에 엄마의 젖을 빨며 차츰 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었다. 산모의 몸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여러가지 면역성이 젖을 통해서 갓난아이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가 정상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기간이 바로 21일 동안이었다. 그리고 산고를 치른 산모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기간도 21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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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120-121)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318)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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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6)

우리와 다른 외계인, 진정한 천재가 존재한다니. 전교생이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 살에 글을 깨쳤다고 했다.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여섯 살에 암산으로 여덟 자리 숫자 두 개를 나눗셈할 줄 알았으며, 한번은 여름방학 때 펜싱 교사 머리에 불을 붙인 벌로 아버지 서재에 감금되었다가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혼자 깨쳤고 급기야는 마흔다섯 권이나 되는 빌헬름 옹켄의 일반 역사서를 달달 외웠다. 모든 소문을 진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 내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직 통통하게 살이 찌기 전이었음에도 움직일 때 어쩐지 투실투실하고 굼뜬 느낌이 났다.


(111)

수학이란 신의 정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숭배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수학에는 진정한 힘이 깃들어 있으며, 그 힘은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그 힘은 오직 인간만이 소유한 능력에서 탄생했는데, 은혜로운 우리의 신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과 발톱 대신에, 그만큼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힘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에 관해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떠한 심판이 내려지건 간에, 차마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가 미래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내가 누구보다 먼저 보았음을. 그가 가진 능력이란 참으로 진귀하고 아름다워서 지켜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다른 것도 보았다. 우리 모두를 묶어두는 자제력을 상실한, 사악하고 기계 같은 지성. 그런데 왜 침묵했냐고? 그가 너무 우월했으니까. 나보다도. 우리 모두보다도.


(153-154)

실험 직후 우리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서신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을 상대로 폭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대통령을 설득하는 탄원서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 중 백오심 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유럽의 전쟁은 끝난 후였다. 히틀러도 이미 총을 쏴 자결했으니, 우리가 실제 그랬던 것처럼 일본 민간인 이십만 명을 죽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일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면, 일본 장군이 단 한 명이라도 폭탄 실험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탄원서는 트루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탄원서가 결과를 바꿨으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만든 폭탄은 이미 군의 손에 넘어가 있었으니 어쨌거나 그들은 그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최상의 표적을 고르기 위해 위원회도 벌써 꾸린 터였다. 그런데 폭탄을 지면이 아니라 높은 공중에서 터뜨려야 한다고 군을 설득한 다름 아닌 폰 노이만이었다. 그래야 폭풍파의 피해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는 최적의 높이가 600미터, 대략 2천 피트쯤이라는 계산도 직접 도출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높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예스러운 목재 가옥 지붕 위로, 우리가 만든 폭탄이 폭발했다.


(176)

정말 모든 상황마다 합리적인 행동 경로라는 게 있을까? 조니는 이를 의심할 여지 없이 수학적으로 증명해냈으나 그건 오직 양측의 목적이 정반대로 다를 경우에 한정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추론에는 관찰안이 좋은 사람이면 단박에 발견해낼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이론 전체의 틀을 떠받치는 최대최소정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런 주체는 오직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며,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전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할 뿐 아니라, 게임이 한 단계 진행될 때마다 자신과 상대방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를 오차 없이 파악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확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조니 폰 노이만뿐이다.


(186)

에니악의 특징은 계산이 일어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내부로 걸어들어가면 비트값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구도 숫자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실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조니는 예외였다.

계산의 현장 한가운데 잠자코 서서 눈앞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던 그를 기억한다.

기계가 또다른 기계 안에 들어가 생각하는 모습을.

그는 다음날 나를 고용했다. 고등연구소에서 더 다은 기계를 함께 만들자는 거였다.

나는 곧장 연구소로 가는 기차를 탔다.


(213)

기계가 못하는 일이 있다고들 한다. 기계가 못하는 일이 정확히 뭔지 내게 말한다면, 나는 언제든 그걸 해내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

- 존 폰 노이만


(270)

클라리는 자기 남편이 그렇게나 컴퓨터를 좋아하더니 아예 컴퓨터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연치는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산했고, 그게 아니면 루프에 빠지거나 서서히 멈춰버리거나 오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절대 미친 것이 아니었다. 대화할 때는 어느 때보다 명민했고, 사후 출간되어 읽은 그의 말년 연구는 생각할 거리가 풍부했으며, 수학적으로 아름다웠고, 기술적으로는 역시나 그의 연구답게 빈틈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선을 넘어 이성이 굴레이자 제약이 되는 세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성을 옆으로 치워두어야만 하는 영역으로 들어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표면적으로 암시한 신호는 단 하나, 암이 그의 혈액뇌장벽을 넘어서기 직전 그의 조지타운 집에서 내가 목격한 참으로 혼란스러운 일화였다.


(294)

어떻게 기계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가? 튜링이 그의 기계를 구상한 것처럼 나도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식화할 수 있을 것 같네.” 연치는 죽기 몇 달 전 내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알레프제로(Aleph-zero)라고 명명한 일종의 자동기계가 존재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데, 만일 당신이 알레프제로에게 무엇에 관한 서술을 제시하면 그 정보를 흡수해 두 개의 사본을 생성한다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할 계획을 이미 세웠다고 했다. 튜링이 컴퓨터의 탄생으로 이어진 사고실험을 고안했을 때, 또 괴델이 불완전성정리를 증명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논리 방법, 자기 참조적이며 재귀적인 추론을 사용해, 단순히 1 0의 문자열이 아닌,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을 생성하는 이론적 기계를 설계해낸 것이다. 그는 일종의 임계점, 티핑 포인트가 존재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기계의 진화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317)

미래를 감춰놓은 베일을 걷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과학이 다음에 어디로 진일보할지, 다가올 세기에 일어날 과학 발전의 비밀이 무언지 일별할 수 있다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다비트 힐베르트


(323)

이세돌, 쎈돌, 바둑 9, 동시대 누구보다 창의적인 바둑 기사. 첨단 인공지능 시스템과 대전을 치러 패배를 안긴 유일한 인간, 그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목소리를 잃었다.

한반도 서쪽 끝자락의 작은 섬 비금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오 년째, 프로 바둑 기사가 된 지는 육 개월째이던 1996, 폐에 알 수 없는 병증이 생겼다. 기관지가 상해 성대가 마비되었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나 희한하게도 일부 단어를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일시적이었던 실어증의 근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질병(심오한 내적 혼란의 징후가 아니라 정말 질병이었다면)의 여파로 결국 기관지 신경이 영구적으로 마비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장난감 인형에서 나올 법한 독특하고 새되고 밭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329-330)

그에게 바둑이란 호흡과 같아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바둑을 생각한다. 머릿속에 바둑판이 하나 있어서 새 전술이 떠오르면 그 바둑판에 돌을 둔다. 술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고 당구를 칠 때도 늘 그런다.” 지금껏 눈 뜨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바둑에 바치느라 놓친 것들이 아쉽지는 않은지, 사실상 정규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고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를 앞두었는데 곧 닥쳐올 일에 맞설 준비는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인간 정신의 내적 작동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며, 바둑의 전술과 수수께끼와 풀 수 없어 보이는 난해함이 바둑을 우리 우주의 아름다움, 혼란, 질서를 유일하게 비견할 인간의 창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돌의 위치와 관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세에 숨겨진, 거의 감지할 수조차 없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신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세돌에게는 승패보다는 바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전부 이해하기 전까지는 절대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김지석은 말했다. “한번은 이세돌과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자기가 막 이기고 온 대국을 만취한 채로 복기하겠다며 흑돌과 백돌의 수 하나하나 다시 두기 시작했다. 이기기는 했으나 딱 한 수가-심지어 자신이 두었던 수인데!-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347)

바둑판에서 가능한 자리의 수, 즉 두 사람이 대국할 때 발생하는 고유한 돌 배열의 가짓수는 너무 커서 2016녀네 이르러서야 제대로 규명되었다.

208,168,199,381,979,984,699,478,633,344,862,770,286,522,453,884,530,548,425,639,456,820,927,419,612,738,015,378,525,648,451,698,519,643,907,259,916,015,628,128,546,089,888,314,427,129,715,319,317,557,736,620,397,247,064,840,935


(370)

사실은 알파고가 확률을 계산하는 기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를 본 순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알파고는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 수가 알파고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었어요. 바둑에서 창의성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좋은 수, 위대한 수, 강력한 수를 두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수를 두는 능력이죠.” 대국이 끝난 후 인터뷰를 진행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그는 말했다. 이세돌은 평소였으면 포기했을 시점을 훌쩍 넘겨 세 시간을 어 기계와 싸웠다.


(401-102)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제대로 결정타를 날렸죠.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바둑을 뒀습니다. 그때 바둑은 예의와 매너가 전부였어요. 게임보다 예술을 배우는 것에 가까웠죠. 크고 난 후에야 바둑을 두뇌 게임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배울 때는 예술이었어요. 바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달라졌어요. AI가 도래하면서 바둑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에요. 알파고는 나를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로는 계속 바둑을 뒀지만, 은퇴는 진즉에 결심했어요. AI가 등장한 후로는 내가 최정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복귀해서 미친듯이 노력해 최고의 바둑기사가 되더라도, 최고일 수는 없어요. 세계 최고가 되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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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천지에 가득한 그 아름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연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는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더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 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


(90)

만주에 퍼져 있는 일본영사관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는 중국관리들에게 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고 군대까지 철수시킨 그들은 중국관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계획이 바로 이화제한(以華制韓)이었다. 중국의 힘으로 한국을 제재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의 이한제한(以韓制韓)의 수법에다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었다. 조선인 친일파와 밀정들을 투입하여 독립투쟁 세력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이 이한제한이었다.


(165)

그래, 자네의 판단이 정곡을 찌르고 있네. 여기 서간도가 북간도보다 다소 덜할지는 모르나 여기 동포들의 동향도 대동소이하네. 경신년 참변 때 이곳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독립군들이 이동을 단행한 것은 무고한 동포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려는 작전계획으로,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취하는 군사행동이지. 그 작전에 왜병들은 당당한 작전으로 맞서지 않고 한다는 짓이 양민들을 대량학살한 것이네. 그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열함이고 잔혹함일세.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네. 그게 무언고 하니, 동포들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이 바로 왜놈들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목적이고 노렸던 바란 사실이네. 우리 동포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고, 또한 독립군을 불신하게 하고, 협조를 못하게 만드는 술수, 그게 바로 왜놈들이 조작해 내는 이간책동술이네. 그러니까 지금 독립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무작정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왜놈들의 그런 이간책동을 바르게 알리고 이해시켜 가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동포들이 곧 조선이고, 동포들이 없고서는 그 어떤 독립투쟁 단체들도 존속할 수 없으니까.”


(210)

저런 인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자들인가. 저런 것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종자들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가. 영원히 일본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믿는 것인가. 저런 놈들한테 꼼짝없이 끌려가야 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왜 튀어나온 것인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이광수는 왜 저런 못된 인종들을 질타하고 정신차리게 하지 않고 민족 전체를 비하시키고 흉보고 흠집 내고 있는가. 이광수는 3.1운동을 보지도 않았는가. 아니, 지금도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것일까. 이광수는 왜 그 따위 글을 쓴 것일까. 그건 바로 일본놈들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광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나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235)

보라, 조선의 사나이 된 자들이, 더욱이 배움을 갖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항일이냐, 친일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또 하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항일도 친일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친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친일인가? 조선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배움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 책무가 더 커진다. 그런데 왜놈들의 범죄를 방관하다니. 범죄를 방관하는 것은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고 동조하는 또다른 범죄다. 그러니 그게 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가 된 이 땅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고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배움도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왜놈들의 착취정책을 피할 능력이 없이 매일매일을 고통에 시달리며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살 수밖에 없다.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생활, 그건 바로 항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방관에 비하면 그건 적극적인 항일이 된다.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들을 구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게 지식의 대의며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바쳐 그들이 못배운 바를 일깨워야 하고, 깨달음에서 생성된 힘을 한덩어리로 뭉치게 해야 한다. 자각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항거, 그건 그들의 해방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이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마음을 크게 열고 세상을 대하라. 식자들이 망친 나라를 식자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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