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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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출간한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라는 책은 책표지로 인해 눈에 확 띄었단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소녀가 소총으로 겨누고 있는 그림은 호기심을 갖게 충분하였단다. 그리고 책 제목도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로 강렬했어. 역시 책 제목과 책 디자인은 무척 중요하구나. 책 소개를 읽어보니, 일본 서점대상을 수상하고, 애거서 크리스트상을 최초로 심사위원 전원이 만점을 준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홍보 문구에 속으면 안 되는데, 아빠는 이런 홍보 문구에 잘 넘어간단다.

일본 소설이니까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소련과 독일이 2차 세계 대전 때 벌인, 일명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했다는구나.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배경이 되었고 말이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아빠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있는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투가 아니겠니. 그렇다 보니 이 소설이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쑥 올라갔단다.

지은이 아이사카 토마는 일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고 하는구나. 퇴근 후 집에서 책을 썼는데,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가 그의 데뷔작이고, 그 책이 온갖 상을 휩쓸고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라고 하는구나. 이 정도면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을 것 같은데, 그 동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니얼마나 손이 근질근질했을까.  지은이 아이사카 토마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쟁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은 아빠도 읽어보겠다고 몇 년 전에 샀다가 아직 읽지 않고 있는 책인데,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책을 찾는데 좀 애를 먹겠지만 말이야.


1.

그러면 <소지 동지여 적을 쏴라>라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해볼게. 1940년 모스크바 인근 시골 마을에 세라피마는 엄마랑 둘이 살고 있었단다. 세라피마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책에 나왔던 것 같은데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차 세계 대전 때 얻은 병 때문인 것으로 아빠가 기억한단다. 세라피마는 엄마와 함께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갔어. 엄마와 둘이 살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두 친하게 잘 지내서 외로움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단다. 그렇게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도 전쟁의 기운이 돌았단다.

1942년 어느 날 독일군들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단다. 세라피마만 간신히 살아났어. 독일군들이 세라피마에서 몸쓸 짓을 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소련군들이 와서 독일군을 몰아냈단다. 세라피마는 그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어. 마을에 온 러시아군들은 세라피마의 엄마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모두 불태우고 마을도 모두 불태웠단다. 독일군들이 마을을 이용하지 못하게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추억이 담긴 마을은 그렇게 불타 없어졌고, 엄마의 시신도 불태워져 사라지고 말았단다. 세라피마는 독일군도 미웠지만, 그렇게 마을과 엄마의 시신을 불태운 소련군도 미워했어. 특히 그걸 지시한 이리나에게는 적개심을 갖고 이리나에게도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단다. 하지만 지금 혼자 지낼 수 없어서 이리나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단다.

이리나는 세라피마를 데리고 여자 저격병 군사학교에 데리고 갔어. 그곳은 여자들만 저격병 훈련을 받는 그런 곳이었단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다들 독일군에게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잃고 혼자가 된 이들이었어. 훈련은 쉽지 않았단다. 실제 전쟁에 참가해서 저격병으로 임무를 해야 하니 훈련도 실전처럼 했단다. 중간에 탈락자도 생기고 그랬어. 저격병 군사학교를 졸업할 때는 5명만 남았단다. 시골 귀족 출신이지만 그 출신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샤를로타를 비롯해서 아야, 야나, 올가, 그리고 세라피마 이렇게 다섯 명이었어.

그런데 그 중에 올가는 사실 이리나의 라이벌인 하투나가 보낸 내부 첩자였단다. 같은 러시아 군이긴 한데 그곳에서도 경쟁이 있다 보니, 하투나가 이리나의 사정을 살펴보려고 보냈던 사람이었어. 그러나 이리나도 진작에 올가가 하투나의 사람이란 것을 눈치챘는데, 그걸 오히려 역이용 하는 등 모른 척 했었단다. 올가를 제외한 세라피마, 샤를로타, 아야, 야나, 이렇게 네 명이 진정한 이리나의 제자였단다. 저격병 군사학교를 졸업한 그들은 한창 전쟁 중인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되었단다. 이리나가 네 명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단다. 이제부터 실전이다.


2.

세라피마의 시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전에 군대에 입대한 세라피마의 친구 미하일은 그 참변을 피할 수 있었어. 미하일은 참변 소식을 듣고 오열했단다.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마피마도 죽은 줄 알았어. 그래서 더욱 슬픔에 가슴 아팠지. 세라피마와 미하일은 동갑내기 친구였지만,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거든. 미하일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더 끓어올랐고, 군생활도 열심히 해서 상사로 진급하였단다.

한편 이리나가 이끈 저격부대는 첫 작전에 투입하게 되었어. 스탈린그라드를 역포위하는 천왕성 작전이었단다. 소녀 저격부대에서 가장 사격술이 뛰어난 이는 아야였는데, 뛰어난 실력답게 첫 작전에서 적군을 12명이나 사살이라는 공을 세웠단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실수를 했단다. 저격병은 한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룰이 있는데, 이 룰을 지키지 않고 한 자리에서 적에게 총을 쏘다가 위치가 노출되어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힘든 저격 훈련 학교를 졸업한 가장 유능한 저격병이었는데, 첫 작전에서 허망하게 죽고 만 거야. 다른 소녀들은 슬펐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단다. 계속 전투는 이어졌어. 세라피마를 비롯한 나머지 저격병들의 활약과 때마침 아군의 전차부대가 공격하여 천왕성 적전은 성공하였단다. 이 때 타냐라는 소녀 의무병이 저격부대와 합류했단다.

두 번째 작전은 12대대를 지원해주는 것이었단다. 대대라고 하면 엄청 큰 군대 단위인데, 전투 중에 죽거나 흩어져서 지금은 4명만 남아 있었어. 막심 대장이 그들을 이끌었어. 그들은 적군의 감시망 때문에 이동을 할 수 없고, 현재 머무르고 있는 진지를 지켜야 했어. 그런데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진지는 사실은 막심 대장이 집이었단다. 그곳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거야. 적군에도 저격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단다. 이번 전투는 저격병들 사이의 전투라고 할 수 있었고, 상대방이 허점을 보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

독일군이 야비한 작전을 펼쳤단다. 전쟁과 관련 없는 마을 아이들을 공격하여 아군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려고 했던 거야. 보그단이라는 군인이 부상 당한 아이들을 대피시키려고 했다가 그만 적의 저격병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말았어.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되었단다. 세라피마는 은폐된 곳에서 적의 저격병이 나타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단다. 그리고 적의 저격병이 가늠자에 들어오자 죽였단다. 그리고 다른 적군들도 유인하여 몇 명을 더 죽였어. 자신도 모르게 적군을 죽이면서 희열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어. 그 희열 때문에 저격병은 한 곳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룰을 잊고 있었어. 다행히 이리나가 와서 세라피마를 데리고 가서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단다. 세라피마는 적을 사살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던 자신을 혐오하기도 했단다. 전쟁은 이렇게 사람들을 모두 미치게 하는구나.

적군인 독일군은 우연히 소련군의 여성 파르티잔 두 명을 체포했단다. 그 둘을 이용하려고 했어. 두 파르티잔을 소련군이 보이는 곳에서 처형을 하려고 했단다. 그 장면을 본 12대대 소속 유리안이 깜짝 놀랐어. 그 두 파르티잔들은 바로 자신의 대학 동기였거든…. 참지 못하고 유리안이 독일군을 향해 총을 쐈어유리안의 위치가 노출되었단다. 이걸 독일군이 노린 것이었어. 유리안은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그만 죽고 말았단다.

소련군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중대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였단다. 막심대장은 지원 요청을 했지만 철수 명령을 받았어. 하지만 막심대장은 자신의 집을 버릴 수 없었어.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독일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겠다고 했단다. 결국 막심대장만 두고 나머지는 철수를 했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그 이후에도 공방전을 펼치다가 1943 1 31일 독일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단독 항복으로 끝이 났단다. 소련이 독일로부터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냈어.


3.

시간이 흘러 1945 3.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단다. 세라피마는 군인이다 보니 남자군인들과 더 많은 생활을 했어. 그런데 아군의 어떤 보병이 전쟁 중에 독일 여자를 능욕한 것을 자랑하듯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 전쟁 중에 힘없는 여자를 능욕한 것을 자랑하는 이야기를 세라피마는 참을 수 없었어. 그것은 여성 전체에 대한 모욕이었어. 뿐만 아니라 같은 편인 저격병 여자들한테도 숨어서 총이나 쏜다면서 무시하고 성희롱도 했어. 이에 격분한 세라피마는 그 남자보병과 다툼까지 했단다. 그곳에서 세라피마는 우연히 미하일을 만났어. 미하일은 포병 소위가 되어 있었어. 고향에서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났는데, 감회가 새롭기도 했지만, 고향 생각에 슬픔에 잠기기도 했어. 죽은 줄 알았던 세라피마를 만난 미하일도 무척 기뻐했단다. 세라피마는 아까 보병이 했던 이야기를 미하일에게 물어보자, 미하일은 소련군이 독일여자를 능욕했던 일들이 사실이라고 했어. 세라피마은 인간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

세라피마 등 저격대는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에 참가했단다. 그 전투에서 야나는 부상당한 독일 아기를 구하려다가 총상을 입고 중상을 입었어.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단다. 세라피마는 독자 행동을 하다가 독일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어. 고문을 당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해 성공했어. 그러나 여전히 적지라서 어려운 상황이었단다. 그런데 어디선가 올가가 나타났어.

올가 기억나지? 저격병 학교에서 이리나의 라이벌 하투나의 접차였던 사람. 그러니까 지금까지 반대편으로 나쁜 역할이었는데, 그 올가가 나타나서 세라피마를 구출해주었단다. 올가도 착한 사람이었지만, 군대라는 지휘체계에서 반대편에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만 올가는 적군의 총격으로 죽고 말았어. 총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았어. 이리나가 와서 도와주어 세라피마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단다. 탈출하면서 그들은 말로만 듣던 소련군의 치욕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돼.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 민간 여자를 능욕하는 장면을 보았어.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짓을 한 자가 미하일이었어. 세라피마는 미하일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어. 갈등을 느끼기도 했지만, 세라피마는 미하일을 저격했단다. 전쟁 성범죄에 대한 직결처분.

….

전쟁이 끝나자 여자 저격병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어. 국가는 그들에 대한 대우를 하지 않았단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쟁 중에 했던 것이 가치가 있었는가.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스탈린 독재정치로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어. 이런 것을 위해 전쟁을 했던 것인가. 그리고 스탈린이 죽고 나서 스탈린 지우기에 나선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이름도 볼고그라드로 바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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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스탈린 체제가 공포정치였다면, 그것을 떠받들며 싸운 우리는 대체 뭐였지?

어쨌거나 스탈린은 극악무도한 자였던 만큼 그의 업적을 모조리 부정해야 하기에, 보존했던 시신을 매장하고 동상을 부수고 각종 서적을 다시 썼다. 당연히 스탈린그라드도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그렇다고 옛 이름인 차리친은 차르, 즉 황제를 연상시키므로 사회주의국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볼가강에 가깝다는 이유로 볼고그라드라는 무미건조하고 중립적인 이름을 대충 가져가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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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저격대원들은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에게 잊혀져서 평범하게 살았단다. 세라피마와 이리나는 세라피마의 고향에 돌아와서 같이 지냈어. 그들은 세라피마의 고향을 재건하면서 살고 있었단다. 야나와 샤를로타는 전쟁 때부터 소원이었던 빵공장에서 일했단다. 간호병으로 합류했던 타냐는 간호사로 지냈어.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이 소설의 지은이 아이사카 토마가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책제목처럼 전쟁은 여자들은 무시당하고 힘없는 존재였어. 소련과 독일은 전쟁 중에 수많은 여성 피해자들에 대해서 서로 암묵했단다. 아무도 전쟁성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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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소련에서도 독일에서도 전시 성범죄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는 여성들이 입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혐오하는 각 사회의 요구가 합쳐진 결과였다.

마치 교환 조건이 성립된 것과 같았다. 소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독일 국방군과 독일인에게 폭력을 저지른 소련군은 사이좋게 입을 다물고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기본 좋은 영웅적 이야기. 아름다운 조국의 이야기.

참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 무자비한 독재의 이야기.

그것은 독일에서도 소련에서도,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병사는 반드시 남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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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예전의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니야. 현재 전쟁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포로에 대한 성폭행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단다. 전쟁 자체가 사라져야 할 것인데, 여전히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그 속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지금은 온 지구인들이 기후위기에 맞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으니,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니.

지나친 홍보 문구에 재미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재미있게 술술 잘 읽혔단다. 독소 전쟁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고,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힘없는 여자들의 희생 또한 알게 되었단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조만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을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장작 패는 소리가 봄의 도래를 알리는 새벽종처럼 작은 마을에 울려 퍼졌다.

책의 끝 문장: 그곳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질문의 의도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유르겐은 자기 인생을 돌이켜 봤다.
십대 중반까지, 독일의 축구 국가대표가 되어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하여 배를 타고 여러 나라에 가서 축구를 하고 환성을 듣고 싶었다. 외국 선수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코치들에게 제2의 제프 헤르베르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병역이 없었다면, 또 올림픽과 월드컵이 중지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네 동료가 쏜 여성은 두 아이의 엄마였어. 그 후에도 엄마로 있고 싶어했지. 잃어버린 아이들을 키워서, 언젠가 손주를 만나고 싶어 했어."
- P455

"나는 멈출 수 없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나는 지금 죽을 수 없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전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끔찍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전부 전쟁이 나쁜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잘 용서해 줘." - P479

소련이라는 이름의 국가는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쇄빙선과도 같았다.
크고 작은 얼음을 부수며 나아가던 선체가 각종 사회적 모순으로 타격을 받아 언젠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가 가라앉으면 보트에 나눠 타서 혹한의 바다로 노를 저을 수밖에 없다. 항해 도중에 선장이 바뀌는 것처럼 권력자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진다.
-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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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7
리베카 미첼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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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년 전에 아빠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의 연주를 찾아보다가 임현정 님이 연주하는 라흐마느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들었단다. 아빠 귀가 막귀이긴 하지만, 임현정 님의 파워풀한 연주는 딱 아빠 취향이더구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워낙 유명하니까, 선율이 익숙했고 다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도 나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라흐마니노프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단다. 아빠가 음악가의 삶과 음악에 담긴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좋아하는 편이잖니.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도 검색해 보았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 중에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책이 없었어. 책이 무수히 출간되고 있지만, 아직 원하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구나. 우리나라 출판업계 더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아무튼아빠가 원서를 읽을 수도 없고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신간 코너에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된 것을 보았단다. 낯익은 얼굴이 책 표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어.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라흐마니노프 전기가 출간되었구나. 책 표지 색상이 심각한 표정의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더구나. 너희들도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빠가 짧게 이야기해줄게.


1.

라흐마니노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출신으로 1873 4 1일에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태어난 시기가 참 절묘하구나. 아빠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 황제, 계속된 혁명, 소비에트의 탄생 등 러시아 국내에도 굵직한 사건이 많았던 시기이고,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많던 시기였어. 좀더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서 음악 활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음악에 그 시대의 색이 덧칠해져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평화로운 시기에 음악 활동을 했다면 다른 색의 음악을 했을 수도

라흐마니노프는 쇠락 위기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단다. 특히 어머니가 장군의 외동딸로 재력이 있으셨지만,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단다. 육 남매 중에 네 번째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별거를 하셨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사셨대. 어렸을 때 누나 두 명이 일찍 병으로 죽어 라흐마니노프는 충격을 받았어. 이런 저런 이유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어. 그래도 음악의 재능이 있어서 즈베레프라는 음악가의 제자가 되어 음악을 하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스승을 통해 차이코프스키 등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들도 만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16살에 즈베레프와 의견 충돌로 결별하게 되었단다.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라흐마니노프는 고모의 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안정을 찾았단다. 고모의 자녀들, 그러니까 라흐마니노프의 고종 사촌들이 4명이 있었는데, 모두 라흐마니노프에게 잘 해주었단다. 그 중에 나타샤와는 나중에 결혼도 하였단다. 안정을 되찾고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도 제대로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했어. 작곡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1895 1번 교향곡을 작곡했어. 2년 뒤인 1897 1번 교향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혹평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당시 지휘를 맡았던 글라루노프가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작품의 실패로 라흐마느니프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좌절했다고 하는구나.

첫 번째 작품인데 너무 실망하긴 이른 거 아닌가, 힘 내야지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해줬겠지? 그렇게 격려해 준 사람 중에 톨스토이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달 박사의 최면치료로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사촌인 나타샤도 적극적으로 라흐마니노프를 도와주었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작곡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에 만든 곳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이라고 하는구나. 처음 2악장과 3악장만 먼저 만들어 연주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년 뒤에 1악장을 추가하여 완성했다고 했어. 이 곡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한 단계 올라선 음악가가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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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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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02년 나타샤와 결혼했단다. 사촌 간 결혼했다는 것이 오늘날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가 싶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도 사촌 간 결혼은 할 수 없었대. 어렵게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1903년에는 첫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1904 3월에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를 맡게 되었단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러시아는 혼돈과 불안의 시기였단다. 사회는 빠르게 현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제정군주가 통치하던 모순된 사회

1905년 노동자들의 불만이 퍼져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총으로 대응하면서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단다. 이런 혼란은 라흐마니노프에게도 영향을 주었어. 3년간 독일 드레스덴에서 지내다가 러시아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1909년에는 처음 미국 순회 공연을 갔는데,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되었단다. 이 시절 또 하나의 대표곡 <피아노 협주곡 3>을 작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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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77)

<피아노 협주곡 3>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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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유럽 이곳 저곳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그 공연들도 중단되고 말았단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대상자였기 때문에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마음에 늘 불안해 했다고 하는구나. 결국 징병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1차 세계 대전과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대.

1917 2월에는 러시아에서는 군주제가 막을 내렸단다. 라흐마니노프도 구세대 유물이었던 군주제가 끝난 것을 환영했단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혁명 세력의 주동자들인 농노들은 지주를 압박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장인도 지주였고, 그들의 집도 저택이라서 농노의 공격 대상이었단다. 그들도 언제 공격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외국에 가 있는 것을 고려했어. 1917 9 5일 러시아에서 마지막 연주를 했단다. 곧바로 1917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라흐마니노프는 식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단다.

이 전에 미국에서 순회 공연에서 큰 인기를 끌어서 미국에 정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 여러 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하였단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정신적으로도 정착하고 안정을 찾는 것도 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더욱이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를 무척 사랑했는데


3.

미국에서의 생활은 음악에 대한 열정, 그 자체였단다. 미국은 이미 녹음 기술도 발명이 되어서 유명한 음악가의 음반 산업도 활발했어. 라흐마니노프도 피아노 녹음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지만 러시아와 유럽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나 봐. 1930년에는 스위스 루체른 근교에 빌라를 새로 지었는데, 빌라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세르게이와 아내 나타샤의 이름을 합쳐 세나르라고 지었단다. 이곳에서 교향곡 3번을 작곡하는 등 많은 작곡 활동도 했대. 1930년대면 그의 나이도 이제 육십 대에 들어섰어. 몸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지.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치명적인 관절염도 있어서 의사가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권고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음악과 연주에 열정이었단다. 무대에서 죽는 것이 그의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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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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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루체른의 생활은 히틀러에 의한 유럽 정세가 심상치 않게 되면서 마무리 되었단다. 1939 8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그가 미국으로 떠난 지 일주일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이때 함께 오지 못한 둘째 딸 타타냐와 루체른의 빌라 세나르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하는구나. 1942년에는 베벌리힐즈 에 주택을 장만하고 죽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어. 1942년 데뷔 50주년이 되던 해라서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도망 온 러시아에서도 축하 선물을 보내주었다고 하는구나. 1943년 피부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2 5일 생애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3 28일 눈을 감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죽기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구나.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 피아니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평생 마음 한 곳이 허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야.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웃는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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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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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책의 첫 문장: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상상 속 그의 손끝에 있는 건반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각별히 선호한 독일제 베히슈타인이 아니라, 1934년 라흐마니노프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악기를 가능케 한다고 칭찬했던 민첩한 액션으로 무장한 스타인웨이의 감응력 좋은 현대식 피아노였을 것만 같다.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펼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 P12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 라흐마니노프는 첫 공개 연주회 장소도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골랐다. 바로 1892년 9월 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피아노 협주곡 4번> 제 1악장,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아울러 전 세계 청중에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알릴 최신곡도 초연했다. 다름 아닌 <전주고 c샤프단조>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그해 가을에 작곡한 네 편의 피아노곡과 묶어서 출판업자 구트하일에게 건넸고, 구트하일은 다섯 편의 피아노곡을 <환상적 소품집, 작품 3>으로 출판했다." 출판 악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스승 안톤 아렌스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 - P74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을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른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페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 P197

<피아노 협주곡 4번>의 뿌리는 러시아이지만, 마틴은 이 곡이 "주로 뉴욕에서 쓰였고 서유럽에서 완성되었으며 게다가 섬세하고 명석한 작곡가의 작품이니 그가 수년간 주로 생활한 나라의 경치와 소리에 영향받은 게 당연하다"면서 "낭만파의 희뿌연 실안개는 영영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1924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재즈와 안면을 튼 상태였고, 심지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도 참관한 다음이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한층 간결해진 주제를 사용하는 등 라흐마니노프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곡 스타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P274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읽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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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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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알게 된 스릴러 소설 <퍼핏 쇼>를 읽었단다. 지은이는 M.W. 크레이븐이라는 영국 사람인데, 주인공 워싱턴 포를 내세운 <워싱턴 포> 시리즈가 유명한가 보구나. 아빠는 물론 지은이 이름도 <워싱턴 포> 시리즈도 모두 처음 들어봤단다. 아빠가 읽은 <퍼핏 쇼> <워싱턴 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2018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는구나. 영국 범죄문학상인 골드 대거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읽기 전 이런 것에 현혹되면 괜히 기대감만 상승하고 나중에 실망할 수 있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단다.

2018년에 출간된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작년에 소개되었으니, 요즘처럼 초스피드 시대에 좀 늦게 소개된 것 같구나. 책을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구인지 대략 예측이 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빠른 전개와 잘 짜여진 짜임새로 인해 재미있게 읽었단다. <워싱턴 포> 시리즈가 또 번역 출간되면 눈여겨봐도 될 듯 싶구나.

….


1.

이멀레이션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왔어. 종교 제물로 바치려고 죽이는 일을 뜻하고, 특히 불로 죽이는 일이라고 하는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의 별명이 이멀레이션 맨이란다. 이멀레이션의 뜻을 이야기해주었으니 이멀레이션 맨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잔인하게 죽이는지 예상이 되겠지.

영국에 신석기 또는 청동기 고대 유물인 환상열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멀레이션 맨은 이 환상열석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지금까지 3명이 불타 죽었는데, 모두 60대 남자들이었단다. 3 건의 유사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중범죄 분석섹션의 경찰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단다. 중범죄 분석섹션의 스테파니 플린 경위가 이 사건을 맡았어. 플린 경위와 함께 일하는, 틸리 블래드쇼라는 데이터 분석관이 중요한 단서를 잡았단다.

틸리 블래드쇼는 천재 기질을 보이는 사람으로 데이터 분석에는 유능하지만, 사교적으로는 상당히 부족한 사람으로 마치 사회부적응자로 보였어. 어렸을 때부터 거의 집에서만 지냈다고 하더구나. 자기 스스로도 온실 속 화초라고 이야기했어. 틸리가 시신에 숨겨져 있는 정보를 하나 찾았는데, 거기에는 얼마 전부터 정직 중인 경찰 워싱턴 포의 이름이 있었고, 숫자 5가 있었어. 워싱턴 포는 중범죄분석섹션 경위로 있었는데 사고를 치고 지금은 정직 중으로 농장에서 지내고 있었단다.

스테파니 플린은 워싱턴 포를 찾아갔고, 연쇄 살인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 어쩌면 자신이 다섯 번째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경사로 복직하였단다. 그리고 스테파니와 틸리와 함께 이멀레이션 맨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단다. 얼마 후 네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단다. 워싱턴 포가 머무르고 있던 농장 근처였어. 그럼 다음은 워싱턴 포인가? 워싱턴, 스테파니, 틸리는 함께 현장에 출동하였단다. 현장에는 이 사건이 담당 경찰 리드가 나와 있었는데, 리드는 워싱턴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였단다. 리드와 워싱턴은 범인을 찾기 위한 도움으로 주었어.

어느날 워싱턴의 집에 전달된 의문의 엽서에 워싱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단다. 그리고 퍼컨테이션 포인트도 같이 적혀 있었어. 퍼컨테이션 포인트를 물음표를 거울에 비춘 모양 ("") 이란다. 퍼컨테이션 포인트는 아이러니 부호라고도 하고, 문장의 수사의문문에 쓰이기도 하고, 비꼼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문장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을 때도 사용한다고 하더구나. ,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워싱턴 일행들은 퍼컨테이션 포인트 ("")를 보고선 한 가지를 떠올렸단다. 세 번째 시신에서 발견된 숫자 5는 숫자가 아니고 퍼컨테이션 포인트 ("")였다는 거야. 그렇다면 범인은 왜 워싱턴에서 퍼컨테이션 포인트 ("")와 워싱턴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보냈을까?

엽서를 보낸 것은 범인이 맞을까?


2.

지금까지 벌인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지능이 높아 보였단다. 그리고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복수 등의 목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피해자들 간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워싱턴과 틸리는 이것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했고, 이 사건은 오래 전 존재했던 세븐 파인스라고 하는 보육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들 희생자들은 모두 비밀스러운 모임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이고, 그 명단도 찾아냈는데, 피해자들 중에 없는 카마이클이라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초대에는 당시 보육원 사회복지사였던 힐러리 스위프트가 연관되어 있었어.

20여년 전의 일이라서 힐러리 스위프트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단다. 워싱턴과 리드가 힐러리 스위프트를 찾아갔고, 힐러리가 준 차를 먹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단다. 정신을 잃으면서도 워싱턴은 스테파니한테 전화를 했어. 워싱턴이 정신을 차려 보니 힐러리는 이미 사라져 있었단다. 그렇다면 힐러리가 이멀레이션 맨? 아니 이멀레이션 우먼? 그런데 지금까지 범행을 보면 힐러리 같은 할머니가 혼자 할 수 있는 범행이 아닌데그렇다면 공범이 있는 것인가?

20여 년 전 보육원에서 있었던 비밀 모임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6년 전이었어. 몇몇 부유층 인사들한테 은밀한 초대장이 보내졌고, 그 모임은 커다란 크루즈 안이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보육원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몹쓸 짓을 했단다. 당시 그 일을 꾸민 사람이 힐러리 스위프트와 카마이클이란 사람이었단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에게 죽음까지 당했지만, 이 일에 연루된 어른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단다. 아마 뒷돈으로 조치를 했겠지. 이 일은 워싱턴 포는 이번에 조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왜 범인은 워싱턴 포의 이름을 시신에 남기고, 워싱턴 포에서 엽서를 보냈을까? 워싱턴 포의 지인이 범인이란 말인가?

그렇단다. 이런 스릴러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읽는 이도 범인이 누구일까? 추리하면서 읽게 되는데,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 중에 있단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범인은 26년 전 십대일 가능성이 높으니, 범인이 갑툭튀가 아니라면 대충 예상을 할 수 있게 된단다. 그리고 그 예상했던 사람이 범인이 맞았단다.  보육원 출신으로 그 크루즈에 들어갔던 소년들 중에 한 명. 그런데 범인이 밝혀진 이후에도 아직도 소설의 분량이 꽤 남아 있었단다.

범인은 밝혀졌지만 아직 잡지는 못했어. 범인은 아직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어. 힐러리 스위프트그리고 그 사건을 이 세상에 알리는 것. 그 이후 범인은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고 자신 스스로도 죽은 친구들에게 가는 것을 선택했단다. 아니, 그렇게 보이게 했는데 범인은 실제로는 죽지 않은 것 같았어. 주인공 워싱턴이 그렇게 추리를 했지. 범인이 연쇄 살인을 한 것은 잘못한 것이 맞는데, 법으로 응징할 수 없었던 것을 스스로 응징한 것이기에 그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구나. 그리고 워싱턴이 생각한 것처럼 그 범인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앞서 범인이 26년 전 사건에 대한 모든 증거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었잖아. 그 사건의 모든 증거가 담긴 usb 메모리가 워싱턴의 손에 들어오게 된단다. 그것이 사회의 많은 풍파를 일으킬 것이 예상되었지만, 워싱턴의 정의는 그것을 신문사에 보내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어.

….

스포방지를 위해서 범인의 정체는 너희들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다시 편지를 읽어보니 다른 내용들은 스포를 엄청 많이 했구나. 이 책의 표지을 본 Jiny가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내용이 무섭고 좀 자극적이니, 좀 커서 봤음 좋겠다.

그럼 <워싱턴 시리즈>의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 환상열석은 수천 년을 품은 평온한 장소다.

책의 끝 문장: 포는 전송을 누르고, 뒤로 기대고는 다가올 미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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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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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구나. 7권의 부제는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란다. 일제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긴 한데, 간토대학살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구나. 일본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한자로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관동을 일본말로 간토라고 한단다. 그래서 간토대학살은 관동대학살이라고 해.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정부 지휘아래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그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 죽인 사건을 이야기한단다. 7권의 이야기를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였단다.

1920년대 중반이 되었는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서면서 독립의 희망은 점점 보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의열단원은 계속된 의거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단다. 1923년 김익상, 오성륜, 김상옥의 의거가 이어졌어. 하지만 그들의 단발성 폭력적 의거가 무슨 효과가 있냐고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의열단의 흔들리는 입지를 굳게 세워준 이가 단재 신채호였단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에 힘을 실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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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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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 일제 점령의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변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광수와 최남선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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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최남선은 1928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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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똑똑한 친일파 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단다. (1924 5) 이 대학을 통해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자 했고,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려는 자들은 경성제국대학을 목표로 했단다. 이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서울대가 되는데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울대학교의 설립년도를 검색해보면 1946년으로 나오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하였다고 했거든.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광복 후 서울대 출신이라고들 했다고 하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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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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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국내 사회의 흐름을 좀 이야기해줄게. 192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유행인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단다. 사회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단체가 만들어졌고, 당시 우리나라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박헌영의 인기도 높았대. 기독교가 점점 세를 확장해가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의 대립도 심화되었대. 1926 6 10일에는 조선의 부끄러운 마지막 왕 순종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단다. 이 때를 맞춰 좌우가 합작하여 다시 한번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니 6.10 만세 운동이었단다.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근대 문물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돈 있는 친일파들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단다. 대표적으로 축음기가 유행하였고, 가수들도 인기를 끌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를 윤심덕이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였단다. 신파극과 무성영화도 많이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5 8월에는 KAPF라는 진보적 문학예술단체도 생겨났고, 1926 6월에는 <개벽>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그 잡지에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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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41)

<개벽> 1926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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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성들은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 잃은 서글픔을 달랬단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붐을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일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참다 못한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대. 1929년에는 423 , 1930년에는 716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이 시절 전화도 어느 정도 대중화를 이루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전화를 이용한 범죄들도 성행했다. 그때도 보이스 피싱이 있었나 보구나. 스포츠 종목도 많이 유행했는데 축구도 유행을 했고, 당시에도 승부에 예민들 하셔서 심판의 판정에 시비가 붙어 응원단들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축구는 인기가 좋아서 대학에도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학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희전문대학과 한판 벌였는데, 4 0을 지고 나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구나. 그때도 한일전은 질 수가 없지. 당시 이 경기를 본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을 잠시나마 잊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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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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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도 인기가 있었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서울에 방문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조선 대표와 시험도 했대. 23 3으로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이기긴 했는데, 조선의 야구팀도 무려 3점이나 뽑았다니

….

그 밖에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하고 미용실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여자들도 단발 머리로 자르는 이들이 있었고, 남자들은 장발이 유행하기도 했대.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다방과 카페도 유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는 점점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 갔단다. 이대로 일본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면 안될 텐데 말이야.


2.

한동안 뜸했던 의열단의 의거는 1926 12 28일 나석주 의거의 성공으로 건재함을 알렸어.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7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았단다. 장진홍이라는 분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터트렸고, 조명하라는 분은 타이완에서 육군대장을 독 묻은 칼로 공격했단다. 그 육군대장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8개월 뒤에 죽었어. 안타까운 것은 조명하 의사가 그보다 먼저 사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이 때 독립운동은 좌우의 합작 노력이 있었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인 1927 2 15일 결성된 신간회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였고, 신간회와 함께 여성단체인 근우회도 결성되었다고 하는구나.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희롱하고 모욕을 준 일이 있어났어. 이를 본 우리나라 남학생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 이 일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은 무조건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잘못을 빌라고 했대.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1929 11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단다. 이 운동은 전국의 학생들을 자극하여 1930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단다. 이 날을 기념하여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의 학창 시절 왜 학생의 날은 쉬지 않는 거냐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하는구나.

1926년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글을 만든 날을 기념하여 가갸날을 지정했어. 당시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확히 몰라서 음력 9 29일로 했다는구나.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0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단다. 한 동안 한글날에 쉬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의 이야기란다. 빼먹은 부분도 많은데, 늘 그렇듯이 이해 바라고이제 한국 근대사 산책은 3권이 남았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책의 끝 문장: 1930년대에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한국을 전시 체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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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장세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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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 평점이 좋은 책을 하나 읽었단다. 장세아 님의 <런어웨이>라는 소설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지은이 장세아 님으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책 한 권만 조회가 되어 신인작가인가 싶었는데, 회사원으로 웹소설도 쓰고 북리뷰 채널을 운영하는 등 내력이 꽤 되시는 분인 것 같더구나. <런어웨이>는 책이 두껍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것이 재미있구나. 다만 다른 소설에서 본 듯한 구성과 예상되는 결론이 다소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래도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단다.


1.

, 그럼 책 이야기를 해볼게. 동거 중인 폭력적인 남자친구 현욱의 폭행에 참지 못하고 반격을 가하다 돌발적인 사고로 치명상을 입고 남자친구를 두고 도망친 재영. 어쩌면 남자친구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무작정 그곳을 떠나려고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갓난 아기를 데리고 탄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를 만났단다. 갑부집 아들과 도둑 결혼을 한 후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남자한테 배신을 당해서 아이만 시댁에 맡기려고 하는 길이라고 했어. 그 사람 또한 처지가 만만치 않구나. 그런데 잠시 아이를 재영에게 맡기고 화장실에 간 그 여자가 사라져 버렸단다. 아기 옆에는 쪽지가 있었는데, 재영에게 아기를 시댁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어. 얼떨결에 재영은 아이를 맡을 수밖에 없었어.

재영은 아이를 데리고 그 여자가 적어 놓은 주소를 찾아갔는데, 그 집은 그냥 갑부집이 아닌 것 같았어. 누가 봐도 으리으리한 저택이었어. 재영은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온 사연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재영을 형수님, 며느리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어. 재영은 지금 이 곳을 나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하루 이틀 머물 생각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냥 두었어.

그 저택의 가족구성원을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 저택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은 두 사람인데 그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집 나간 첫째 아들이 있는데, 그가 바로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아빠 되는 사람이란다. 첫째 아들이 집 나간 지 7년이 되었고,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할아버지 되는 최 회장님이 있는데, 최 회장님은 중풍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어. 재영을 스스럼 없이 진짜 형수님처럼 대해준 이가 있는데 둘째 아들 수현이 있었어. 그런데 수현은 최 회장님의 혼외자였단다. 엄마와 밖에서 따로 살다가 엄마가 죽고 나서 열 살 때 이 집에 들어온 거야. 그때 이복형이 잘 보살펴주어 그를 잘 따랐고, 수현의 우상이 되었어. 그런 수현은 성격이 밝고 싹싹해서 재영을 진짜 형수님처럼 스스럼 없이 대했단다.

재영이 그곳에 며칠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은 수현의 이런 접대 때문이었을 거야. 7년 전 형이 집을 나간 이유는 형의 어머니가 충격적인 일로 돌아가신 이후라고 했어. 형의 어머니는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그 음식을 만든 것도 실수인데, 하필 그때 비상약이 보이지 않아서 응급처지를 못했던 거야. 그 일이 있고 형이 집을 나가고 아직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어. 그 외에 이 저택에서는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어지는 주는 사람들, 집안 일과 부엌 일을 하는 분들이 계셨어. 재영은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봐서 그 집에서 나오려고 했단다. 마음 바뀐 아기의 엄마가 찾아올 수도 있고, 집 나간 첫째 아들이 들어오기라고 하면 큰일 나니까 말이야.


2.

특별한 직업이 없어 보이는 수현은 재영을 따라 다니면서 쇼핑도 도와주고, 브런치도 같이 먹고 그랬어. 재영은 태어나서 처음 누려보는 생활을 며칠 하다 보니 자꾸 이곳에 머물고 싶은 위험한 생각이 들었단다. 재영은 일단 자신의 옛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 속 사진을 지우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수현이 그걸 보고 있네재영은 당황하며 어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수현이 사진 속 재영의 남자친구를 보면서 형은 여전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자신이 때려눕히고 온 남자친구인 현욱이 집 나간 이 집 큰 아들이라고? 재영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단다. 뭐야, 그 남친 새끼가 양다리였고, 아기까지 낳은 거야?

그러면서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단다. 재영의 핸드폰으로 잘 지내냐는 안부 메시지를 받고 이런 생각은 더 심해졌단다. 이런 문자를 보낼 사람은 남자친구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남자친구가 죽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은 살인자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단다.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지? 근데 분명 피칠을 한 남자친구가 정신을 잃었는데재영은 떨리는 마음에 몰래 남자친구가 쓰러져 있던, 함께 동거하던 반지하집을 찾아가 보았단다. 뭐야.. 집이 아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어. 남자친구도 사라지고 그 많던 피도 모두 깨끗하게

그런데 재영이 깜짝 놀랬단다. 수현이 그녀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야. 재영은 깜짝 놀랐는데, 수현은 미안하다면서 재영을 따라 오면 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 안하고 따라온 것이라고 했어. 뭐야.. 점점 수현의 행동이 이상하잖아. 얼른 이 저택에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또 새로운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단다.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던 사람이 그만 두고 최효진이라는 사람이 새로 왔는데 바로 아기 엄마였단다. 이젠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이 집에서 도망가야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 효진이라는 사람이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거야. 자신이 아기 엄마라는 사실도 이야기하지 않고, 재영을 보고도 처음 뵙겠다고 하고이건 또 무슨 꿍꿍이 속?


3.

자 이제부터 사람들 관계는 더 꼬이고 꼬인단다. 효진은 사실 이 저택에 오래 전에 머무른 적이 있었어. 효진의 엄마가 이 곳에서 머물면서 일하셨거든. 그러니까 효진은 어린 시절부터 수현과 그의 형, 그러니까 재영의 남자친구였던 현욱과 아는 사이였던 거야. 무척 친했던 것 같아. 이런 인연으로 효진은 나중에 커서도 최회장님을 보살펴 드렸던 거란다. 이 정도 사이였는데, 효진은 왜 아기를 재영에게 두고 간 것인가. 효진은 왜 모른 척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효진은 재영을 알고 접근한 것은 아닌가. 이 모든 시나리오는 누가 짠 것인가?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이 자꾸 의심이 된단다.

현욱이 집을 나간 이유, 현욱의 엄마가 알레르기 음식을 죽고 죽은 이유, 효진이 아이를 재영에게 맡긴 이유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한 사람에 귀결이 되는데아빠가 이야기해준 이후 소설은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단다. 아빠가 보통 스포일러 무시하고 결론까지 다 이야기를 해주긴 하는데, 이 소설은 여기까지 하고 스포일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밖에 이유도 있지만 말이야. 아무튼 지은이께서 소설의 결말을 깔끔하게 마무리 하신 것 같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인생을 리셋할 수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어떤 인생은 새롭게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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