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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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이구나. 6권의 부제는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로 되어 있단다. 사진신부가 뭐지? 이렇게 생각했다가 내용을 읽어보니 슬픈 내용이구나. 19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하와이에 이민을 갔잖아. 그런데 대부분 남자들이어서, 결혼적령기에 든 남자들이 결혼을 못하고 있던 거야. 그래서 하와이에 있는 남자들이 사진을 보내고 국내에 있는 여자들이 그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하와이로 가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 지금의 사진이 아니라 젊었을 때 사진을 보내서,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하고 보니 신랑이 아버지뻘인 경우도 있었대. 그래서 다시 도망하는 이들도 있었고참 슬픈 현실이구나.

1910 8 29일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단다. 그에 따라 일본의 대응도 더욱 강력해졌단다. 경찰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공포 정치로 우리나라를 통치했단다. 역사 시간에 무단 통치 시대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구나. 1910 12월 안중근의 동생인 안명근이 독립자금마련을 도모하던 중 체포되기도 하고, 105인 사건이라고 하는 신민회 사건도 일어났어. 신민회 사건은 총독암살모의 사건을 조작한 다음 독립운동가 105명을 투옥한 사건이란다. 신민회 사건을 이용하여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는데 이용했어. 당시 신민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도 투옥되었지. 안타까운 것은 윤치호는 3년 형을 마치고 나와서 친일파로 변절을 했다고 하는구나.


1.

국제적으로 세상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어. 1914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유럽에 많은 열강들이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던 와중에 유럽에서 지들끼리 싸움이 붙은 거야. 식민지를 제대로 볼 시간이 없어진 거지. 일본은 이때다, 싶을 것 같구나. 일본은 연합국 편에 들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구나. 완벽한 기회주의자. 유럽에 있는 독일에 무슨 선전포고냐고? 독일이 산둥반도를 점령하고 있었거든. 청일전쟁 후 일본이 산둥반도를 차지했다가, 열강들의 입김 때문에 뱉었는데, 거길 독일이 차지하고 있었잖니. 독일이 산둥반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곳에 맥주공장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칭다오 맥주의 기원이었고... 아무튼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꿀꺽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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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일본의 참전 목적은 유럽에서 전쟁 중인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음을 틈타서 힘의 공백상태에 있는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 안에 있는 독일 조차지(租借地)와 독일령 남양제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세한 규모의 독일군 병력을 공격하여 쉽게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을 침략을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일본은 유럽에는 군수품을 수출하고 동남아에는 생필품들을 수출하는 거대한 공급기지가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으킨 특수경기의 수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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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대립 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와도 같은 편이 되었어. 그래서 연해주 지역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희망이 사라져버렸지. 1918 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에 승리하면서 일본도 덩달아 승전국이 되었단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국가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건 패전국의 식민지들이지, 승리한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해당사항 없음이었다고 하는구나.

1910년대 일본의 무단통치는 조선왕조 지우기에도 열일을 했단다. 경복궁 등 많은 궁궐들을 파헤치고 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 같은 흉측한 건물들을 세우기도 했어. 그러면서 조선을 철저하게 없애려고 했단다. 신문도 다 폐쇄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같은 것만 남겨 두었단다. 을사늑약 이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백성들을 감동시켰던 장지연이 이 <대한신보>에 글을 실었다고 하는구나. 글들도 일본을 지지하는 글들을 써서 친일논란이 일었다고 하는구나. 그것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고 했어.

앞서 이야기했던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오독이든 연합국 식민지 국가와 관련이 없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란다. 그리고 파란만장하지만 무능했던 왕 고종이 세상을 떴단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의 독살설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계속된 일본의 강경 대응에 일본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 중심으로 1919 2.8독립선언이 있었단다. 윌슨의 민족자결권, 고종의 죽음으로 민심의 동요, 2.8 독립선언 등의 기류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단다. 아빠가 올해는 이 시대에 관련된 책들을 여럿 읽어서 3.1운동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한 것 같구나. 특히 <만세열전>을 읽고 나서 자세히 이야기했던 것 같네. 오늘은 3.1운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민족대표 33인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비판한 글만 하나 소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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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신복룡은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操舵手)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33인의 감옥생활은 길어야 3년이었던 데 반해 지방시위를 주도한 농민 지도자의 감옥생활은 15년이나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보는 “33인 개개인을 존경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들이 마치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을 지도한 것처럼 인식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3.1운동에서 표출된 전민족의 숭고한 민족해방의 의지와 정신을 손상해버릴 수 있다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을 민족대표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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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운동을 보고 깜짝 놀란 일본은 태세 전환을 한단다. 무단 통치 시대를 끝내고 일명 문화 통치 시대를 연단다. 강경책만 내세우는 것이 아닌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방법을 썼단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어. 신문들도 몇 개 허용했는데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출간했단다. 조선일보는 창간 때부터 친일신문이라서 일본이 허용하는데 어렵지 않았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지여서 일본이 그런 신문을 허용하는 것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니 일본의 꼼수였어. 눈에 보이는데 있으니 관리하기 편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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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일제가 1920년에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일보>는 친일단체에게 허가한 것이므로 굳이 그 속셈을 따질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의 경우엔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깊은 뜻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과장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한다는 청년들이 장래 조선의 치안을 소란테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심인물들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인물들을 항상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적을 알아야 이쪽의 방비책도 쓸 수 있을 줄 압니다. 저의 정보망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일조유사시에 일망타진하는 경찰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간이든 발행 중지든 마음대로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신문을 허용하는 것은 백 가지 이득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해도 없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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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여기저기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단다. 그랬다가 논의 끝에 상해에 통합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란다. 하지만 처음부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반발한 이들도 있었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도 크긴 한데, 시작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싶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계파 간 갈등도 많아지기도 했지. 임시정부 내에 공산당 세력과 주류 세력의 갈등은 우리 동족을 암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단다. 아빠가 지난 봄에 <독립 운동 열전>이라는 책에서도 소개해주었던 김립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었단다.

그 밖에 독립운동 투쟁도 다변화되었단다. 1919 11 9일에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이 의열단을 창단했어.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을 투척하여 경찰서장을 죽인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의열 활동을 했단다.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 준 홍범도 장군의 대학독립군도 이 즈음 활약했단다. 1920 6월 봉오동 전투가 있었고, 1920 10월에는 김좌진 장군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청산리 전투가 있었단다. 승리는 값졌지만 만여 명의 민간인을 사살한 일본의 참혹한 복수가 가슴이 아팠단다.(경신참변)

앞서 장지연의 친일논란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많은 이들이 변절하여 친일을 했단다. 그런 사람 중에 빠지지 않고 손 꼽히는 사람이 이광수란다. 이광수는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기고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1운도 이후 상해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회유로 인해 국내로 귀국 후 친일을 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상해에서 국내로 귀국한 이유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설도 있었어. 아무튼 이광수는 배신의 아이콘이란다. 그렇게 변절하여 아무도 그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익명으로 <개벽>이라는 잡지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썼단다. 글의 내용은 우리 민족이 열등하니 변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친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어. 그 글이 이광수의 글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자신이 친일을 한 것에 대한 변명거리밖에 안된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단다. 이광수뿐이겠니? 그들이 친일을 한 것은 개인적인 자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광복 후 그런 친일을 한 이들에 대한 별다른 처벌이 없었다는 것이 더욱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너무 관대하다 못해 그런 친일파들을 다시 정부 일을 맡겨 오늘날까지 친일파의 후예들이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니.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의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로 할게. 이제 4권이 남았구나.


PS,

책의 첫 문장: 1910 8 29일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었다.

책의 끝 문장: 이렇듯 겨레의 새싹으로 등장한 어린이는 훗날 가족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권이든 레닌의 민족자결권이든, 민족자결권에 대한 한반도의 오독은 이념적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윌슨의 그 유명한 ‘14개조’에는 ‘자결’이라는 용어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도 ‘민족자결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1863~1945)가 1918년 1월 5일 영국 노동조합연맹에서의 연설에서 볼셰비키의 ‘자결’이라는 용어와 윌슨의 ‘피치자의 동의’를 섞어 쓴 이후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역사 서술에서 ‘윌슨의 민족자결권’은 부동의 상식이자 진리다. ‘레닌의 민족자결권’ 또한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해석학적 오류의 생산성’을 잘 드러내준다. - P130

이완용이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스코필드는 ‘기독교를 믿으려면 먼저 이천만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한 김동관 프로듀서는 "우리가 모르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싶었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공공기관에서도 비무장, 비폭력 만세운동이 있었던 삼일절과 석호필 박사에 대한 만족할 만한 자료를 찾고 보여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며 "특히 석 박사는 유품으로 지갑과 여권만 남길 정도로 남에게 베풀고 검소한 삶을 살아갔다"고 전했다. - P180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들을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들을 자기의 물건 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해주십시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방정환의 연설이 끝나자 참석한 천도교, 기독교, 불교단체의 소년회장과 조선소년단장 등이 어린이, 어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계속 한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린이를 책망할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하게 타일러 주십시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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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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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오랜만에 읽은 시집을 소개해줄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란다. 시에 함축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시인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잘 모르겠더라구. 그런데 간혹 읽으면 바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도 있긴 했어. 그런 시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류시화 시인이란다. 류시화 님은 시뿐만 아니라 에세이와 여행기도 많이 쓰시는데

그런 책들도 모두 좋았어. 외국에 숨겨진, 좋은 책들도 번역해서 소개해 주시고, 아름다운 시들도 찾아서 엮어서 출간하시기도 하지. 류시화 님이 직접 지으신 시 말고, 류시화 님이 소개해 준 시들도 류시화 님의 시들처럼 읽으면 바로 받아지는 시들이었단다. 그래서 류시화 님이 다른 사람들의 시를 엮은 책들도 몇 권 읽었지.

이번에 읽은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라는 시집은 오랜만에 출간한 류시화 님의 시집이란다. 책 제목이 책의 역할을 다한 경우도 있는데, 이번 시집도 책 제목부터 울림이 남다르단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어떻게 부가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읽는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꽃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구나. 이 시집의 제목은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들 중 하나 인데, 시 전체도 좋아서 너희들에게 전체를 소개해 줄게. 추위에 시달리고 바람에 힘들어도, 그러니까 지금 삶이 힘들고 지치고 그래도 그건 너가 꽃이기 때문인 것이고, 곧 꽃이 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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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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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집을 읽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그 시집에서 좋았던 시 몇 편을 소개해주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 아빠가 이 시집을 읽고 따로 발췌 해 놓은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독서 편지를 대신하련다. 너희들도 이 시집을 한번 읽어보면 좋겠구나. 가끔 학교에서 시를 쓰는 숙제가 있는 것 같은데,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구나.

먼저 소개해 줄 시는

흉터를 재해석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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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5)

흉터의 문장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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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은 색다른 시선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길을 알려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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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3)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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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때론 힘들게 때론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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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3)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북극의 빙하는 무너지고

시리아 난민들은 영국 해협에서 떠오르고

카불의 여성들은 검은 히잡 속에 숨는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티베트 승려들은 몸에 불을 붙이고

후쿠시마에서는 원전수가 바다로 흘러가고

멕시코인 밀입국자들은 트럭 안에서 숨이 막힌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한에서는 바이러스가 폐를 잠식하고

갠지스강은 성스러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인도의 노동자들은 수천 리 걸어 집으로 간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바그바드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가 이어지고

미얀마에서는 시위 군중이 영화처럼 쓰러지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병원에 미사일을 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알래스카에서는 신생아가 울음을 터뜨리고

이스탄불에서는 수도승들이 회전춤을 추고

제주 바다에서는 해녀가 숨비소리 내며 자맥질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지구는 초속 30킬로미터로 태양 둘레를 내달리고

야생 기러기는 희망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건너고

혹등고래는 새끼 업고 북극해로 이동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신이 하루를 더 허락하고

맹인 소녀는 점자로 시를 읽고

아이는 나무 아래서 주운 새를 품에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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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달에 대한 예찬과 그 달을 닮은 이에 대한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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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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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몇 편의 시들을 더 발췌하긴 했는데 너희들에게는 이 정도만 소개해 주었단다. 이 시집은 가끔씩 기분이 우울하거니 정신이 복잡할 때 아무 페이지나 펴서 한 두 편 조용히 정독하면 좋을 것 같았어.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손을 내밀어 보라

책의 끝 문장: 다시 이곳에 돌아와 충분히 사랑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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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좋은 시를 감상할 수 있었네요.

bookholic 2023-12-06 23:08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한 달 남은 2023년 좋은 시와 함께 행복한 시간 되시길...
 
범도 2 - 봉오동의 그들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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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번에 이어서 방현석 님의 <범도> 2권을 이야기해줄게. 함경도를 거점으로 다시 의병대를 조직해서 홍범도는 참모총장으로 활약한다고 했잖아. 홍범도의 의병대가 또 활약을 하게 되자, 이번에도 전국 의병연합대에서 합류할 것을 제안 받았단다. 이미 1권에서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합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서 지휘부 회의를 거쳐 이번에는 보류하고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의병연합대를 지원하기로 했단다. 의병연합대를 알아보니 역시나 지휘부는 양반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단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뜻은 거룩하나, 아직 신분을 따지는 이 조직은 거룩하다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의병연합대를 이끌고 있던 대장 이인영은 일본군과 대전을 앞두고 부친상을 당하게 된단다. 그런데 부친상이 더 중요하다면서 고향으로 가버렸단다. 장례식 때문에 며칠 떠나 있는 것도 아니고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면 떠났다는구나. 유림의 입장에서 효()에 대한 예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미겠지. 그렇다고 그 거대한 의병대를 이끄는 대장이 개인적인 일로 의병대를 버린다는 것이 정말 황당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의병대도 따지자면 나라에 대한 충()을 위해 모인 것인데, ()은 유교의 으뜸 아니던가. 아무튼 전국 연합의병대를 와해되었어.

한편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일본의 하세가와가 이끄는 대규모 정규군과 결전을 벌였단다. 총대장 임창근과 참모총장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단다. 하지만 많은 희생들도 있었어. 총대장이었던 임창근이 전사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홍범도의 아들 양순도 총상을 입었단다. 의병대를 이끌고 있는 이가 홍범도라는 사실이 일본군에도 알려지면서 집에 있는 식구들이 걱정되었단다. 이를 눈치 챈 다른 동지들이 홍범도에게 식구들을 피신시키라고 하여 총상을 입고 치료중인 아들 양순을 보냈단다. 하지만 약속했던 날이 지나도 양순이 오지 않았어. 그러자 몇몇 동지들이 홍범도를 비난했단다. 자기의 아들만 빼돌렸다고 말이야. 제 발로 의병대를 찾아왔던 양순인데, 그럴 리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홍범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유가 있었어. 계속된 일본의 회유 정책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던 이들이었거든. 그리고 의병대 사정도 좋지 않았어. 식량 부족으로 늘 굶주리고 있었고, 병기도 부족했어. 결국 홍범도는 산을 내려가는 것은 자유의지에 맡겼고, 일부 사람들은 의병대를 떠나 산을 내려갔단다. 그들을 기다라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이나 감옥행이었단다. 일본의 간사한 말을 믿었던 대가였지. 일본에 속아 산에 내려갔던 이들 중에 차도선은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탈옥해서 홍범도에게 돌아왔단다.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면서홍범도도 물론 그를 다시 받아주었어.


1.

아들 양순이 몰골이 초췌해져서 돌아왔단다. 어머니의 편지를 들고 왔어. 양산의 어머니, 그러니까 홍범도의 아내는 일본군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어.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양순에게 보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회유하는 내용이었어. 홍범도는 보자마자 가짜 편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어머니를 위해서 회유하자는 아들 양순에게 홍범도는 총을 겨누고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사까지 했고 양순은 그 총에 귀를 맞아 다쳤단다. 주위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날 뻔했을 거야. 며칠 뒤 홍범도의 부인 수경이 일본군의 고문을 받다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홍범도는 슬픔을 머금고 일본군과 계속 전투를 이어갔단다. 승전보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어. 홍범도의 아들 양순도 전투 중에 죽고 말았단다. 아내는 고문 끝에 자결을 하고, 아들은 전투 중에 전사하고마음이 찢어지겠지만, 홍범도는 겉으로 슬픔을 드러낼 수 없었단다.

어느날 백무아가 찾아왔단다. 1권에서 수경을 만나기 전에 잠깐 썸을 탔던 여인, 백무아. 기억 나지? 백무아는 미국에 갔다고 했잖아. 백무아는 미국의 정보원이 되어 다시 우리나라에 왔어. 백무아는 이제 조선 안에서 활동하기에는 역부족한 상황이라면서, 국경 너머에서 활동하라고 조언을 했단다.

일본군의 반격은 야비했단다. 홍범도의 의병대를 도와주었던 백성들을 무차별 사살했단다. 백무아의 말대로 일본군의 화력이 막강하여 정면 승부를 할 수 없었어. 친일 앞잡이를 상대로 한 테러를 했고, 그들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했단다. 그리고 홍범도는 일단 국경을 넘어가기로 결정한단다. 그 많은 의병대를 다 데리고 가기가 어려워 의병대는 해산하고, 자신이 이끌었던 저격여단의 소수정예만 데리고 두만강 너머 연해주로 갔단다.


2.

당시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단다.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미래를 도모했단다. 홍범도가 연해주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전의 안중근도 있었고, 독립 운동의 대부 최재형도 있었고, 간도의 책임을 맡으며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윤도 있었단다. 그 밖에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아빠가 일일이 기억을 못하겠구나. 그리고 아빠가 다른 읽은 책들에서 등장하는 아들도 있었단다. 아빠가 몇 년 전에 책을 통해 알게 된 김 알렉산드리아도 나왔고, 얼마 전에 <독립운동 열전>에서 읽었던 철혈광복단의 조선은행 현금 탈취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단다. 안중근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엄인섭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이 이야기도 <독립운동 열전>에서 나왔었지. 이 소설에서 다시 한번 이 이야기가 나와서 머리에 다시 한번 새겼단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이 가장 의지했던 세력은 바로 러시아였단다.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일본의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거든. 독립운동가들은 이런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하려고 했어.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이어졌단다. 1914년 세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얼마 후 러시아와 일본 모두 연합국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단다. 그러니까 같은 편이 된 거야. 두 나라 모두 자신들의 나라에 이득이 되기 위한 선택이었단다. 그러니 둘이 싸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단다. 일본이 연합국에 참여한 것은 일본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산둥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술수였단다. 연합국에 참여하고 바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단다. 유럽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독일이 산둥반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러시아는 더 상황이 복잡했단다.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단다. 그러면서 1차 세계 대전에서 발을 뺐어. 독일이 망명 중이던 레닌을 소련 국내로 잠입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유도 바로 러시아를 세계대전에서 발을 빼도록 수를 쓴 거지. 러시아 혁명을 성공한 러시아는 다시 흰 파와 붉은 파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났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도 흰 파와 붉은 파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양분되기도 했어. 이 때 붉은 파 소속이었던 김 알렉산드라는 외무장관을 맡고 있었어. 홍범도는 대한독립군 소속으로 외무장관인 김 알렉산드라와 만났단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김 알렉산드라는 혁명 전쟁 도중 죽고 말았단다. 김 알렉산드라가 계속 살았다면 홍범도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3.1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연해주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가 더 뜨거워졌고, 홍범도도 대한국민회의를 통해 임시정부와 협력하게 되었단다.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이 되어 북간도 쪽으로 이동을 했고, 봉오동 전투를 치르게 된단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영화 <봉오동>은 한번 같이 보자꾸나. 아빠는 봤는데 한번 더 볼 의향이 있단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홍범도가 아니고 봉오동에 참여한 일반 의병들이긴 하지만 재미있게 봤단다.

봉오동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일본군의 야비한 복수극은 더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 가슴 아팠단다. 이 부분과 청산리 전투 부분은 아빠가 예전에 읽은 김삼웅 님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의 독서편지를 참고하렴. 그래서 그 때 쓴 독서편지 일부를 발췌해 보았단다. 아빠가 쓴 독서편지를 아빠가 쓰는 독서편지에 발췌하다니참 게으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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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6 7. 독립전쟁 제 1회전이라고도 부르는 봉오동 전투. 이것은 사실 작은 전투에서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소규모 헌병순찰대를 격파했는데이에 일본군의 반격이 있었고, 삼둔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냈단다. 이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이 있었어. 홍범도는 전략을 세웠어. 먼저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는 마을 공동화 작전을 폈고, 이후 유인 작전 전술을 폈어. 그날 날씨는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좋지 않았지만그것은 일본군에도 마찬가지. 봉오동에 있었던 전투에서 적군 5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단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다시 한번 대규모 보복전을 준비하였단다. 이번에는 중국군에 압력을 넣어 중국군까지 동원했어. 하지만 홍범도는 오히려 중국군을 회유했어. 하지만 계속된 일본군의 압박때문에 홍범도는 봉오동를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봉오동 전투가 있고 4개월 뒤일본군을 간도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보냈어. 홍범도는 그들을 용정촌에서 100여 리 떨어진 화룡현 삼도구로 유인하려고 했어. 그곳은 깊은 계곡으로 전략적으로 먼저 진을 치면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전지로 정했단다. 이번 전투에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도 함께 했단다. 한편일본군은 이 전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전에 음모를 벌였어. 마적단을 돈주고 사서 간도 내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여 아홉 명을 죽이는 자작극을 벌였어. 이 사건은 훈춘 사건이라고 한단다. 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은 간도에 주둔하게 되고, 1920 10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지역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이게 된단다.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맹개골 전투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천불산 전투고등하 골짜기의 전투까지… 사전에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우리 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단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란다. 이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은 1200 여명이 죽었어. 우리나라 독립군으로는 정말 큰 승리였단다. 홍범도도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단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가 빠진 교과서로 배워야 했을까. 홍범도가 나중에 소련공산당에 가입을 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한 사람의 의해서 역사의 왜곡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어.

잠시 그 이야기를 해볼게 나중에 해방이 된 후 북로군정서군의 장교로 있었던 이범석이 국무총리를 맡았는데, 그 이범석이 회고록을 썼어. 그런데 그 회고록에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서 쓰면서, 홍범도를 나쁘게 왜곡을 해서 쓴 거야. 홍범도가 도망치다가 아랫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말이야. 아주 노골적으로 왜곡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청산리대첩의 기록에는 홍범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청산리 대첩의 진정한 주역은 홍범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홍범도김좌진이범석의 세 주역들과 무명의 많은 독립군들그리고 간도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 이것이 청산리 대첩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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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이야기를 마치고 세월을 쭉 돌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후 홍범도 장군의 삶의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해주었단다.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자유시 참변 등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생략했어. 이 부분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아빠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을 읽고 쓴 독서 편지를 참고해도 될 듯싶어. 아니면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를 통째로 읽으면 더 좋고 말이야.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와 소설 <범도>를 연이어서 읽으면 홍범도 장군님에 대해서는 박사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홍범도 장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누가 그보다 치열하게 살 수 있을까 싶구나. 군대 없는 나라 잃은 조국에서, 10대 소년 때부터 평생 진정한 군인이었던 홍범도 장군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나라 군인의 뿌리라고 할 수 있겠구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홍범도 장군님의 진면목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육군사관학교가 더욱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야. 이 소설에서는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란다. 이름 없이 의병 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그들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었단다. 좀 두껍긴 하지만 너희들도 좀 커서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소문으로만 들었던 13도창의군의 통문을 내게 들고 온 것은 뜻밖에도 달음이었다.

책의 끝 문장: 정미공장은 고려극장 수위 자리를 잃은 그가 죽기 전에 몇 달 동안 품팔이를 했던 곳이었다.


스스로 싸우지 않는 자에게 차례질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 말입니다, 김알렉산드라가 했던 말 위로 아주 오래전 다른 한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겹치며 귓전에 울렸다. 부디, 당신이 양반과 침략자, 남자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선에서 양반보다 더한 계급이 남자입니다. 양반이나 아니나 다 그 더러운 계급의 혜택을 누린단 말입니다. 말입니다, 백무아가 조선을 떠나며 남긴 그 말을 들은 가을로부터 얼마나 많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간 다음, 나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가. 모든 차별과 억압, 침략에 반대하는 진정한 인민의 권력. 참된 민주공화정……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분신과 같은 소총을 꺼내들고 가늠자를 들여다 봤다. - P398

고려령 1고지를 떠나기 전에 나는 결과 특임분대 여덞 명의 분대장으로 남은 지휘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가 의병이 되어 목숨을 내걸고 싸운 것은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서는 아니었소. 이기고 지고를 떠나 오직 의로써 싸워왔소. 그렇게 싸우다가, 저격여단의 창설자 김수협과 항일연합포연대의 청년중대장 현창하, 부중대장 이정재,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전사했소. 박한과 리범진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며 항거했고, 허위와 박상진이 장렬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소. 그들이 싸워왔기에 오늘의 싸움이 있소. 오늘 싸워내야 내일의 싸움도 있소. 이번에 싸우지 않으면 다음 싸움도 없소.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언젠가, 대한의 누군가가 못다 한 우리의 이 싸움을 이어갈 것이오. 그렇지 않소?"
-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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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bookholic 2023-12-05 23:23   좋아요 1 | URL
늘 먼저 와서 축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올해도 어느덧 한 달 남았군요...
서니데이 님도 늘 그렇듯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범도 1 - 포수의 원칙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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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근 나랏일을 하는 이들 중에 이유를 좀체 알 수 없는 짓을 하는 이들이 많단다. 몇 달 전에 사회주의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나라 독립 운동에 평생을 하신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퇴출하겠다고 해서 시끄러웠단다. 많은 학계와 기사들이 육사 대변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질문을 했는데 육사 대변인은 제대로 된 답을 한 마디도 못했단다. 그 또한 윗사람 누군가 시켜서 한 일 같은데, 이런 일들이 어떤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실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게 독재국가이지, 민주국가라 할 수 있는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이 육군 사관학교의 뿌리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를 부정하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더구나. 역사 공부를 좀 하다 보면 일제 시대에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우리나라 독립에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알 텐데. 그리고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공산주의가 생기기 전이고, 당시 사회주의는 레닌의 사회주의로 하나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데 말이야. 정말 열 받더구나. 육군사관학교의 흉상 이전 논란이 있긴 해도 설마 이전하겠는가? 생각했는데속전속결로 일을 해치우더구나. 육사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은 아무리 군인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줄 알아야 진정한 군인 아닌가 싶은데, 다들 침묵하고 있더구나. 다들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더구나.

….

지난 정권 때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수십 년 만에 귀환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어떻게든 전 정부가 한 일을 흠집을 내려는 것 같았어. 하늘에 계신 홍범도 장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걸 보시고 어떤 생각들을 하려는지

아빠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책은 <홍범도 평전>이라는 평전과 <나는 홍범도>라는 소설, 이렇게 두 권을 읽었단다. 그 외에 일제 시대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통해서 홍범도 장군에 대해 여럿 읽었단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 보니 또 한번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더구나. 그런 와중에 알라딘 서점의 블로그에서 <범도>라는 책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단다. 방현석이라는 분이 쓴 소설로 2권짜리였단다. 이 책은 올 유월에 출간되었는데, 홍범도 흉상 논란이 있기 몇 달 전이로구나. 마치 이런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인지아무튼 <범도>라는 소설을 읽을 좋은 시기가 아닌가 싶어 주문해서 읽어보았단다. 전에 읽은 <나는 홍범도>라는 소설은 조금 실망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번 소설은 어떨까? 아참, 소설이다 보니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졌고, 그로 인해 가상의 인물들도 등장한다는 점은 감안하면서 읽어야겠구나.


1.

홍범도의 어머니는 홍범도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어. 그리고 어렸을 때 아버지 마저 돌아가셔서 홍범도는 아버지의 지인인 신포수에게 맡겨졌단다. 신포수는 신씨 성을 가진 포수라서 그렇게 부른 거야. 신포수와 함께 홍범도도 포수 일을 했단다. 사격에 재능이 있었어. 그래서 신포수는 홍범도를 군대로 보냈단다. 평양에 있는 군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나팔수로 일하다가 한양에 있는 군대로 파견을 가게 되었고, 우영사라는 높은 직책을 가진 민영익이라는 분의 경위관으로 일하게 되었단다. 민영익이라는 사람은 얼마 전에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를 이야기하면서 나온 적이 있는 사람인데 기억할는지미국까지 갔다 온 진보 인사였으나, 보수 쪽으로 돌아섰고, 그로 인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혁파와 갈라서게 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혁파들에게 총상을 맞게 되었잖아. 이 소설에서도 그 장면이 등장한단다. 직접적으로 갑신정변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난리통에 민영익이 중상은 입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때가 바로 갑신정변 때였단다.

홍범도는 군대에 있으면서 이번에는 농군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을 했어. 소설은 홍범도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농군이 일으킨 난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동학운동이었던 것이란다. 홍범도는 갈등을 했어. 저 농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에게 총칼을 겨누어 하는지 말이야. 이 진압 과정에서 홍범도는 친한 군 동기인 백무현을 잃고 말았단다. 그는 죽기 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자신의 동생에게 전해주라고 했어.

홍범도는 백무현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백무현의 고향인 평양에 와서 백무현의 동생 백무아를 만나 백무현의 슬픈 소식을 전하고 백무현이 전해주라는 반지를 전해 주었단다. 이때 홍범도와 백무현의 동생 백무아는 슬픈 와중에 애틋한 감정을 서로 느꼈단다. 백무아는 야소교도를 믿고 교회에서 지내고 있었어. 군대에서 나와서 할 일이 없던 홍범도에게 백무아는 초지 공장을 소개해 주었단다. 초지 공장은 책을 만드는 공장인데, 아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지공장과 비슷한 것 같았어. 홍범도는 그렇게 초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매년 백무현의 기일이 되면 무아가 찾아왔고 홍범도는 무아와 함께 백무현의 기일을 챙겼단다. 그런데 4년째 되던 날 무아가 오지 않았어. 나쁜 놈들한테 몹쓸 봉변을 당했다고 했어. 홍범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평양으로 갔어. 무아는 그 일이 있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다고 하는구나. 홍범도는 무아를 그렇게 만든 이를 찾아가 복수를 했단다. 한 놈은 죽이고, 한 놈은 그것을 못쓰게 만들었어. 법이 없는 세상, 홍범도는 자신이 법이 되려고 했어. 초지 공장의 사장이 금희네라는 여자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금희네는 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홍범도는 초지 공장의 사장을 죽이고 도망을 갔단다. 이때 갑신정변 때 죽은 친구 차이경의 동생들인 수경과 수이도 함께 데리고 갔단다. 홍범도가 차이경이 죽고 그들의 동생들을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 자신이 도망을 가고 나면 그들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들과 함께 간 곳은 신포수의 지인인 자담스님이 계시는 신계사라는 절이었단다. 그곳에서 차이경의 동생 수경과 수이는 수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단다. 예전에 <홍범도 평전>을 읽었을 때 홍범도가 신계사에 있을 때 비구니와 사랑에 빠져 절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범도>라는 소설에서는 이런 설정을 했구나. 홍범도와 수경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거든. 홍범도가 신계사에 숨어 있었지만, 일경이 그곳까지 쫓아오게 되었고, 홍범도는 수경, 수이와 함께 다시 도망을 갔는데 도망가는 중에 수경, 수이와 헤어지게 되었단다.


2.

홍범도는 우연히 김수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의기 투합하여 의병 활동을 하기로 했단다. 둘이서 일본군들을 처단했단다. 그러면서 주위의 다른 포수들과 농민들이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모였어. 그들은 어느 정도 조직도 갖추어지고, 일본군과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단다. 그러자 그들의 소식이 다른 의병들에게도 전해지고, 유인석이 자신의 의병대와 연합하자는 제의가 왔어. 유인석이라고 하면 당시 조직이 꽤 큰 의병대를 이끌고 있던 사람이거든. 그들의 합류 제의에 의견이 분분했어. 홍범도는 낯선 이들과 연합이 장점도 있겠지만 좀 꺼려했단다. 그런데 김수협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서 투표를 통해 연합하기로 결정했단다.

그런데 유인석의 의병대의 지휘부는 모두 유림 세력, 그러니까 양반들이었어. 유인석의 의병대는 신분제도가 아직 있었고, 그로 인해 미천한 신분에 대해 멸시하는 이들도 있었어. 그리고 홍범도의 의병대들이 다른 군장의 아래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어. 홍범도 의병대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조직 편대였지. 결국 일본군에 대패하고 말았어. 그의 정신적 동지였던 김수협도 죽고 말았단다. 결국 유인석 의병대와 연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홍범도는 남아 있는 자신의 의병대원들은 집으로 보내고, 혼자 활동했단다. 탄광에 위장취업을 해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친 다음 일본인 행사장에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기도 했어. 이 때 감옥에 투옥될 뻔했는데, 여염, 선형우 부부가 도와주어 피신할 수 있었단다. 여염과 선형우 부부는 홍범도를 함경도에 지내고 있는 러시아인 포수인 얀코프스키를 소개해주었고, 한동안 홍범도는 얀코프스키와 지냈단다. 그러면서 얀코프스키에게 러시아 총을 얻기도 했단다.

함경도에 지내면서 다른 포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신계사에서 도망갈 때 헤어진 수경, 수이 소식을 듣게 되었어. 그래서 수소문 끝에 수경의 집에 찾아가 재회했단다. 홍범도는 수경뿐만 아니라 아들 양순도 처음으로 만났단다. 양순은 어느덧 아홉 살이었어. 그곳에서 홍범도는 수경과 함께 지냈단다. 그의 고난한 삶 속에서 행복했던 몇 년이 그때였어. 둘째 아들 용환도 태어났어. 홍범도의 행복한 시간과 달리 나라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있었단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단다. 뿐만 아니라 민간들의 총기 소지도 금지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포수들의 총들도 압수한다는 거였어. 포수들에게 총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압수한다고? 홍범도는 함경도 포수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단다. 집에 있으면 총을 그냥 빼앗기게 되니까 말이야. 자연스럽게 다시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단다. 군대가 해산되면서 갈 곳 없어진 군인들도 의병을 하겠다고 왔어. 그 중에는 홍범도의 옛 군 동료들인 이정재, 이진도 있었단다. 특히 이진은 여자 포수 출신인데 명사수였단다. 이렇게 다시 모인 의병대는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단다. 홍범도의 첫아들 양순도 의병대에 합류했어. 의병대는 조직을 재건하면서 총대장을 임창근으로 하고 참모총장을 홍범도로 했단다.

여기까지가 1권의 이야기란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력이고, 어디까지 사실을 바탕으로 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의병들의 뜨거운 열정만은 모두 사실이었단다. 이렇게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의 헌신과 노력을 안다면 그들에게 그런 처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야. 지금보다 더 많은 보상이나 혜택을 줘도 부족할 판에 말이야.

그럼 오늘은 이만. 조만간 2권 이야기도 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연해주의 여름.

책의 끝 문장: 양순이는 이렇게 남정과 함께 항일연합포연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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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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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 신간 소개 코너에서 제목이 독특해서 책 소개를 읽어보고, 결국은 읽게 된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책이란다. 조선과 아인슈타인이 어울리지 않아서 책제목에 끌렸나 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05,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16,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생하던 시기였으니 나라밖 소식, 특히 과학에 대한 소식은 더욱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때라고 생각했거든. 일제 시대를 다룬 책들은 주로 독립 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 출간된 문학작품들이 대부분이었어.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과학을 다룬 책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구한말과 일제 시대의 이공계를 전공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과학에 대한 열의를 가진 사람이 없었을라구.. 어떤 이는 과학이 발전해야 나라가 힘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 거야. 그 어느 때보다 과학을 공부하기 힘든 그 시절, 과학에 대해 누구보다 열의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단다.

지은이는 민태기라는 분인데, 누리호와 차세대 발사체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분이라고 하더구나.  순도 100% 이공계 분인데,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쓰시더구나. 지은이 소개를 읽어 보니 아빠가 예전부터 읽으려고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책 <판타레이>도 이 분이 쓰신 거더구나. <판타레이>는 제목만 알고 있었거든.. 이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에는 당시 신문, 잡지 등에 실렸던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많이 있더구나.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고아빠가 최근에 가끔씩 읽고 있는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와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여 그 책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나오더구나.


1.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처음 탄 사람은 누구일까? 독립신문으로 유명한 서재필이라고 하는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 그곳에 의학을 전공했다는 구나. 안타까운 일은 미국 망명을 갈 때 식구를 남겨두고 혼자 갔는데 그의 아내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자살을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에서 생활하던 서재필은 미국인 뮤리엘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그들은 1895년 함께 귀국을 했대. 그런데 그때 미국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귀국을 했어. 그 자전거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자전거라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본 윤치호도 타고 싶어서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하여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구나. 윤치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직구를 한 사람인가? ㅎㅎ

귀국한 서재필은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립신문을 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정해서 활동을 했어. 독립신문에서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도했고…(이것도 전에 이야기해주었지?) 한글의 우수성을 논설로 신문에 실었대. 이 책에서는 당시 신문 기사를 그대로 실어주었는데, 옛말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가 알아보는 재미도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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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이처럼 <독립신문>은 가독성을 위해 한글 띄어쓰기를 채택했고, 이후 띄어쓰기가 대중화되고 정착되었다. 논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각국에셔난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난 법인데, 죠션셔난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 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하니 첫재난 배호기가 쉰이 됴흔 글이요, 둘재난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흘 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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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자전거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서재필이면, 자동차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였다구나. 이런 재미있는 상식을 알게 되는 깨알재미가 있구나.

서재필은 1898년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미국에서 줄곧 생활한단다. 독립운동에서도 참여하시면 미국에서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지만 이제 조선이 둘로 나뉘어진다는 소식을 접했어. 1949년 삼일절 경축사를 직접 남겼는데, 조선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 담겼고, 그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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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249)

타향에서 고국의 소식을 접하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1949 3.1절 경축사에 육성으로 남겼다. 3.1운동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건 서재필이기 미국에서 말하는 것이오. 나는 미국에 돌아온 뒤에 신체가 좀 강해지고, 시방 건강이 매우 좋지만은 아직도 언제 조선에 갈런지는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든지 안 가든지 다만 부탁하는 말은 아무쪼록 조선 살게들 하시오. 합하면 조선이 살 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죽을 일을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살 도리를 하시오. (…)

한 집안으로 4000년을 살았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안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나는 설령 미국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조선 사람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조선을 살게 해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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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나라에 아인슈타인을 처음 소개한 것은 <공우>라는 잡지였어. <공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들 모임인 공우구락부가 발간한 잡지라고 하는구나. 이후 여러 언론에서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는데, 동아일보에서는 독일로 유학 간 황진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대성이론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 중에 아인슈타인을 소개하는 도입부가 재미있어 발췌해 본다. 당시 쓰던 옛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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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8)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상대성이론 특집 기사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이어진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소개함니다. 물리학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양임니다. 우리 시대 위인인 아인스타인의 사촌 누이라 하는 한 여학생이 내게 말함은 오 년 전 스위스 쭈리히(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당신은 물론 아인스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하고 뭇난 데 대하야 아모 형편도 모르는 나는 부정사로 답하얏다. 긔가 막히여 우스면서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아인스타인의 존재 여부도 모르든 나는 이 여학생의 비소를 감수하얏다.

이후로는 아인스타인과 상대성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또 그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스나 (…) 책장을 넹길 때마다 츨라톤(플라톤)의 아카데미 문 앞에 설린 수학에 불통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이라는 구절을 기억치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씨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없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 수학에 정통히 못하고는 상대론의 진미를 모르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면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 그런대 유태인 배척이 이러케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야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러케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 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 과학적 공적이 위대함을 추상할 수 잇다. 그런데 그가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듣고(우리 학계에 기와 누차 명석하게 소개되얏슬 듯하다)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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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일본은 세계 석학들을 초대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아인슈타인을 초대했다고 하는구나. 그때가 1922년인데 아인슈타인이 아직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이래. 독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배 안에서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되었다고 하는구나. 일본에서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고, 노벨상 수상자가 온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는데향후 2차 세계대전에 유태인들은 학살하고 아인슈타인도 미국으로 쫓겨난 아인슈타인이 그 일본이 독일과 한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또는 당시 일본이 조선이라는 약소국을 무단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방문했다면 좀 실망스럽구나.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했지만 실패했다는구나.

당시 우리나라는 신문에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을 소개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어. 1923년에는 일본 유학생들인 최윤식, 김영식, 현위건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반응도 뜨거웠대.

….

양자역학은 최규남이라는 물리학자가 소개해 주었다고 하는구나. 최규남은 학창 시절에는 야구선수로도 활약을 해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했대. 연희전문학교를 야구 우승으로 이끈 주장이자 투수로 신문 기사에 났다는구나. 최규남은 후에 미국 유학을 가서 물리학박사가 되었어. 그런데 그의 러브스토리는 영화와 같더구나. 미국에서 유학중인 최규남은 신문을 통해서 조국의 소식을 접했는데, 신문에 실린 이화여대 교수이자 성악가인 채선엽의 기사를 읽게 되었어. 그리고 바로 채선엽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고, 채선엽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지만 채선엽의 오빠 등 주변에서 도와주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그런 채규남은 조선일보를 통해 양자역학을 소개하였다고 했어. 우리나라 과학자들도 현대 물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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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62)

1936 2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의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한다. 그의 시각은 시리즈의 첫 문장에 잘 드러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나날이 발전되는 신이론은 또다시 신이론 출현의 동인이 되여 물리학사상에 보기 드문 위관을 정하게 되엿다.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뿌라크리(드 브로이)’, ‘쉬레덴가(슈뢰딩거)’, ‘하이센벨크{아이젠베르크}’, ‘드랙(디랙)’, ‘풀랑크(플랑크)’, 여려 사람의 파동역학,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미더오는 인과율도 조상지육이 되엿고 따라서 자연과학의 기초적 개념에까지 동요를 주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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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학자 중에 양자역학에 있어. 공을 세운 사람 중에는 이태규라는 분도 있단다. 1922년 일본에서 유학을 했는데, 전공은 수학과 화학이었어. 이후에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여 양자화학이라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알아주는 석학이 되셨다고 하는구나. 해당후 1955년은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첫 노벨상 후보까지 되셨다고 하는구나. , 이런 과학자들이 있었구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초창기 친일파 우범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우장춘 박사란다. 우리나라 유전학계에 있어 엄청 유명한 사람이고, 그를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려졌다고 하는구나.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한 것이래.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적은 것은 아니야. 온갖 종자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식량 증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고 했어.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는 일본 사람으로 계속 일본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었으나, 해방 후 1950년에 귀국하였다고 하는구나. 우장춘 박사가 이미 일본에서도 유명한 학자였기에 보내주지 않으려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우장춘 박사는 편법까지 써서 우리나라에 귀국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농업과 유전학 연구를 계속하셨다고 했어.


3.

이 책에서는 몰랐던 재미있고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있었다고 했잖아.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는 지은이 민태기 님의 방식도 좋았어. 어떤 베트남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짜짠, 그가 호치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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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919년 응우옌은 파이레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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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가면 인하대학교가 있단다. 지금은 종합대학교이지만, 오래 전에는 공과대학만 있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인하공대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셔. 아빠가 학창시절도 인하대학교는 종합대학교였지만, 다른 학과보다 공학과를 더 인정해주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 이유가 있더구나. 인하대학교가 하와이 노동자들의 우리나라에도 MIT 공대 못지 않은 공대를 만들어달라며 기부한 돈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인하대학교였대. 인하의 은 인천의 이고, ‘하와이라고 하는구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재미있는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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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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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일제 시대에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계셨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했던 이야기를 새삼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런 분들이 시대의 흐름을 잃지 않고 과학을 꾸준히 연구하셔서, 오늘날 과학 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크게 성장을 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분들께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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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다짐한, 현식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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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시내에 뿌려진 신문이다.

책의 끝 문장: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


서재필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지만, 그날 조선의 달력은 11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1896년 1월 1일이 된다. 양력이 시행된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개국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은 ‘양력을 세운다’는 의미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력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양력보다 요일제가 먼저였다는 것. 1895년 5월에 주 7일 요일제가 시행되어, 양력보다 6개월 앞섰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단발령과 함께 진행된 양력에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종두법을 도입한 신지식인 지석영조차도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P20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일본 대학들과의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이들의 경기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여운형은 이 원정을 통해 국제 스포츠 경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여원형은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상하이에서도 야구를 즐겨 코치를 맡기도 하고, 유학생들을 모아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선수 중에는 문인 주요한도 있었다. 여운형은 나중에 유학생 축구팀까지 만들어 동남아 원정을 떠나 국제경기도 했다. - P148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교토 다키이 연구소에서 우장춘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우장춘은 가족에서 ‘일본이 이번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단언했고, 그들은 가장의 돌출 발언이 알려질까 봐 가슴 졸이며 전쟁을 견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디키이 연구소에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장춘이 기숙사에 찾아가 이들 조선인만을 상대로 강의했다는 것이다. 가끔 조선 청년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쳤고, 뒤이어 달래는 듯한 우장춘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우장춘이 이 무렵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 P188

사회자 : 선생님 지금 구십 평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선생님 일생을 간단히 한마디로 평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피천득 :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는 살려고 했는데, 그게 끝이고… (…)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 P205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머나먼 저곳까지 가서 3.1운동을 알리고, 레닌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림을 보면 전 세계에서 모인 공산주의자 모두가 붉은 깃발을 흔들 때, 유독 이들만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광장을 누비고 생소했던, 당시 러시아 화가의 눈에도 인상적이었기에 굳이 그림 중앙에 넣은 것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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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7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풍성한 내용들이 많이 담긴 리뷰글입니다.

bookholic 2023-11-27 08:1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에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