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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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정무 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 7권을 읽었단다. 5권부터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했어. 르네상스 이야기보다 보니 주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7권에서는 로마와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주로 이야기되었고,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우리가 로마, 피렌체 여행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거에 맞춰 읽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구나. 여행 중에 책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봤는데,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질 않아서 너희들에게 설명을 못 해준 것이 안타깝더구나. 이 놈의 저질 기억력.

로마는 고대 로마 이후 오랫동안 세계의 수도라 불리며 이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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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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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마가 14세기에는 암흑기를 겪게 돼. 쓰레기와 폐허의 도시로 불렸고, 인구도 2만도 안되었대.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10만이라고 했으니 로마를 암흑기라고 할 만했지. 로마에 머물고 있던 교황도 이때는 로마에 안 있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다고 하는구나. 15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다시 로마로 왔대. 그리고 15세기 후반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고, 16세기에는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지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본당은 1506년부터 1626년까지 120년이나 걸렸고, 광장을 정비하는데 50년이 더 걸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 선출에 있어 영향력 있는 집안들의 알력 다툼도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영향력이 셌던 메디치 가문에서 많은 교황을 배출했다고 하는구나. 16세기에만 메디치 가문에서 3명의 교황을 배출했대. 교황이 바뀔 때마다 건축 붐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로 인대 로마가 더욱 발전한 거 같구나.

16세기 유럽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고들 한단다. 교황과 황제. 여기서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란다. 당시 양쪽의 권력이 엇비슷하여 교회 성직자의 인사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대. 황제 가문 중 유명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15세기부터 300년 넘게 황제를 했다는구나. 합스부르크는 친족 결혼을 많이 해서 유전병이 발생했고, 심한 주걱턱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단다.  

합스부르크 출신 황제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카를 5세가 있었단다. 넓은 영지를 물려받아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어. 역시 땅이 힘이구나.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갖게 되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전쟁까지 벌여졌어. 그런데 당시 동쪽에서 오스만이 진격하고 있던 때라서, 교황 바오로 3세가 화해시켜서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단다. 로마가 발전하고 사람들도 모이다 보니 인문주의도 등장하였어. 특히 15세기 보급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책의 시대가 되었어. 이는 곧 지식혁명이라 할 수 있었지.


1.

당시 영향력이 많았던 메디치 가문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명력이 있냐를 기준으로 삼았대. 그래서 미술작품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작품의 대가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였단다. 미켈란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란다. 그가 남긴 조각의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단다. 너희들도 이미 들어봤을 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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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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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이었는데 활동은 주로 로마에서 했단다. 그는 건축에서 큰 재능이 있었는데,

그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교황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는구나. 라테라오 대성당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야. 중간에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카피톨리노 언덕도 있대. 그야말로 로마의 하이라이트로구나. 미켈란젤로는 칼피톨리노 광장과 주변 건물을 설계했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여한 건축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구나. 그곳에 있는 작품 중에는 <피에타>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이것을 미켈란젤로 24살에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서 너희들도 익숙하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인가, 싶어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외계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로마에서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정부의 요청으로 잠시 피렌체에 돌아와 작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란다.  그 높이가 5.17미터나 되는데,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이란다.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 상 기억나지?

다시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 율리오 2세 무덤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얼마 못가 중단되었어. 왜냐하면 더 큰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짓기로 한 거야. 먼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게 되었단다. 그 크기는 13.2x41.2미터라고 하니 그 크기가 엄청난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려 채운단 말이야. 그런데 천장에 그려야 한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겠니..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사양했대. 자신은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라고 했거든.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전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었대. 1504년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라는 곳에서 미켈로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각각 한쪽 벽면씩 맡아서 벽화를 그리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각자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 중단되었대. ,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엄청난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아쉽구나.

다행히 미켈란젤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아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성경 이야기를 구성하여 천장화를 그렸단다. 이 천장화에 유명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담의 창조>가 아닐까 싶구나. 이것도 기억 나지?^^ 당시 벽화를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기법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는 기법이래. 그건 그렇고 천장에 그림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그리면 목이 남아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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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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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도 경쟁자가 있었으니, 라파엘로였단다. 바티칸 박물관의 정문 위에는 두 사람의 조각상이 있는데,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고, 하나는 라파엘로의 조각상이란다. 안타까운 것은 라파엘로는 1483년생인데 37살에서 요절을 했단다. 그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거의 90세까지 살았대.(1564년 사망) 라파엘로는 우르비노라는 곳의 출신이니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보다는 출신은 좋지 않았단다. 하지만 실력 하나로 주류가 되었어. 교황집무실의 벽화를 그렸대. 교황의 신임을 얻은 건축가 중에 브라만테가 있었는데,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와 동향이라서 라파엘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력은 뛰어났단다. 참고로 브라만테가 만든 건축물 중에 유명한 것은 우리도 본 바티칸 시국의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라는 벨데데레 정원이라고 하는구나.

다시 라파엘로 이야기를 하면 그는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때 실력이 급상승했다고 했어. 이 시기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활약하던 시기라고 하니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승화시킨 것일 거야.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집무실의 벽화 중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테네 학당>이 있었지.

당시 고대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콜레세움의 아치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팔라초에 아치 형태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구나. 팔라토는 유력 가문의 저택으로 궁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구나.


2.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미안한데 건너뛰어야겠구나.

바로 피렌체로 넘어갈게. 피렌체라고 하면 아빠는 오래 전에 읽은 <열정과 냉정 사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는구나. 많은 인기를 끌어 영화까지 제작되었지만, 아빠의 취향은 아니었어. 아무튼 그 소설의 주요 배경이 피렌체였단다. 특히 두오모 대성당. 정식 명칭은 피렌체 대성당이란다. 피렌체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 5권 이야기하면서 해 준 것 같구나.

이번 책에서는 16세기의 피렌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피렌체의 강력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 그들이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기념하여 시민들에 의해 추진하여 만든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스 상이라고 하는구나.(1504)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점령하고 다비드 상에 대항마로 만든 것이 반디넬리의 헤라클라스 상이라고 하는구나. (1534) 헤라클라스는 근육도 더 크고 무섭게 만들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가문의 힘을 작품에 표현하려고 해서 그렇다는구나. 두 조각상은 모두 시뇨리아 광장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두 동상부터 먼저 찾아보았단다.

르네상스 후기에는 하이 르네상스라고 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비판하는 기류가 있었대. 그러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리모델링하는 만행도 했대. 하이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기 전인 1520년부터 1600년 정도까지를 매너리즘의 시대라고 한다고 한대.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하고피렌체의 대공 중에 코지모 1세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 그가 아내를 위해 지은 피티 궁전이 있는데, 그 크기를 보면 아내를 엄청 사랑한 것 같구나. 그리고 코지모 1세가 출퇴근하는 길을 회랑으로 만들었는데, 그 회랑을 바사리 회랑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 갔었던 베키오 다리의 그 길이 바로 바사리 회랑의 한 구간이었단다.

….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의 이야기도 했는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인 티치아노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팔라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읽고 직접 그곳에 가서 작품들을 보았더니 감회가 새롭더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록 아빠의 저질 기억력으로 많이 안 보였지만) 작품들도 새롭게 보였단다. 여행 다녀온 지도 꽤 지났는데, 아직 그 작품들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들이 괜히 명작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지만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번 강의는 로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책의 끝 문장: 바로크 미술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에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 P32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 P143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 P195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 P365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 P417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 P422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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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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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정지아 님의 신간 에세이를 읽었단다. 아빠가 정지아 님의 책은 이번에 세 번째구나. 앞선 두 작품이 너무 좋아서 신간 소식에 바로 주문했단다. 이번에 나온 책은 에세이란다. 책 제목은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책 제목에 느껴지는 한 글자 단어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이 떠오를 거야. 너희들처럼 어린 이들에게는 이 안 떠오르겠지만 말이야. 술을 먹어본 이들이라면 책 제목을 보면 술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구나. 그래, 이 책은 술에 대한 경험담을 적은 글이란다. 술에 대한 경험담으로 책 한 권을 낼 정도면 지은이 정주아 님은 애주가가 아닐까 싶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이런 애주가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알코올중독은 아닌 것 같구나. 술을 좋아하지만 적당히 술을 즐기고 절제하실 줄 아는 그런 분인 것 같았어.

지은이 정지아 님은 고향이 구례인데, 아빠도 구례에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구례라는 곳을 좋아한단다. 너희들도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구례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 산장에서 하룻밤 잔 적도 있고, 노고단 꼭대기에 올라가서 멋진 풍경도 감상을 했었잖니. 아마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날 거야. 너희들과 함께 간 것 이외에도 아빠는 여러 번 갔었단다. 주로 지리산 등반의 출발지로 갔었지. 아빠가 산을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지리산은 참 좋더구나.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큰 산답게 나를 안아주는 그런 느낌도 받았어. 다녀오면 다리가 아파서 며칠 절룩거리기도 하지만, 그 바람, 그 냄새, 그 경치는 잊을 수가 없단다. 지은이 정지아 님은 그런 구례가 고향이라고 하시고, 타지 생활하시다가 지금은 다시 구례에서 생활하신다고 하니  좀 부럽구나. 정지아 님도 지리산을 무척 좋아하셨나 봐. 타지에 사셨을 때도 지리산이 그리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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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그 시절,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지리산이 그리웠다. 백운산을 뒷산으로, 지리산을 앞산으로 보고 자란 탓인지 모른다. 서울 살 때도 나는 언제나 산 밑에서 살았다. 집을 고르는 조건의 첫째가 산이었다. 돈 없던 대학원 시절에는 북한산 밑에 살았고, 그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이어지는 곳에 살았다. 등 뒤에 산이 버티고 있어야 숨이 쉬어졌다. 서울 사방이 산인데 가진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는 수배자가 왜 산에를 못 갔냐고? 그 시절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산에 가면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나 푯말이 붙어 있었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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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학생 운동을 해서 지명 수배를 받고 3년간 숨어 지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지리산이 너무 그리워 수배자의 신분으로 무작정 지리산을 갔었다고 하는구나. 신분을 숨긴 채 뱀사골 산장에서 혼자 패스포트라는 싸구려 양주 한 잔 하고 있었는데, 정지아 님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대. 그렇게 숨어 다녔는데, 지리산 산골짜기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다니알고 봤더니 그날 그곳에 묵었던 다들 이들도 노동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랜 시월이 지나고 그들은 기억나지 않고 뱀사골 산장에서 마셨던 패스포트만 기억에 남는다고

 

1.

태어나서 처음 술을 마신 날은 다들 기억할 것 같구나. 고등학교 때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다들 먹었단다. 고딩 때 다들 조금씩 겉멋이 들어 있었고, 그 겉멋을 부리기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술이었으니아빠도 친구들과 맥주를 처음 먹어봤는데, 탄산 음료를 먹지 않던 아빠는 맥주 한 모금을 먹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단다. 지금이야 가끔씩 시원한 맥주를 즐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지은이 정지아 님도 처음 술을 함께 한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단다. 3 겨울방학 대입 시험을 끝나고, 친구들과 밤새며 놀던 시절, 지은이의 부모님이 술상을 차려 주시고 자리까지 비켜주신 에피소드그 글을 읽는데, 괜시리 아빠도 눈이 뜨거워지더구나. 그래, 그렇게 친구들과 밤샘 이야기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적이 있었지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어 보이는데 갈 수 없다는 것이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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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 중 둘은 미국에 있어 얼굴 보기 어렵고, 국내에 있는 친구들도 각자의 일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드문드문 안부 전화나 주고받는 정도다. 그래도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거나 어색한 날이면 포천에서 그날 밤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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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정지아 님은 술 종류에 관계없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특히 양주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시바스리갈, 조니 워커 블루, 오량 살루트, 맥켈란 1926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고, 위스키, 보드카 등에 관한 에피소드들도 있더구나. , 아빠는 양주는 너무 독해서 잘 안 먹었는데, 지은이 정지아 님께서 너무 예찬을 하시다 보니 아빠도 그런 술들을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구나. 술까지 땡기게 하는 책이로구나. 술 회사들이 이 책에 광고비를 좀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

술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다 보니 아무래도 친구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해주더구나. 그러면서 아빠의 옛 추억 속의 사람들도 많이 생각나게 했어. 아빠가 최근에는 술자리가 많지 않아서 아빠의 술에 관한 추억은 거의 오래 전 일이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많이 떠올랐단다. 다들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이 책은 지은이 정지아 님의 글 솜씨로 재미를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추억을 잔뜩 소환해 주었단다. 그것이 더욱 좋았어.

작년에 처음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처음 알게 된 정지아 님. 그 동안 어디 숨어 계셨던 건 가요? 정지아 님의 책들이 다 재미있구나. 이 책에도 소개 된 <빨치산의 딸들>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 때문에 수배를 당하기도 하셨다고 하는데, 책 제목부터 강렬하구나.

 

PS,

책의 첫 문장: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 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을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의 블루와 요즘 나의 벗이 된 참이슬에게 바친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 P106

이런 젠장, 달팽이가 존나 빨라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존나 빠른 달팽이는 시바스리갈 700밀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꽐라가 되었다. 가관이었겠지만 뭐 괜찮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A는 맥주 세 캔에 취해서 나보다 빨리 기억이 끊겼고, 내 기억도 끊겼으니,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쿨하게. 어디에 가닿건 존나 빨리는 달려보자.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 P164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보다 깊고 넓다고 생각했던 A 또한 나와 똑같이 청춘의 허세를 부렸을 뿐이라는 걸. 청춘은 허세다. 그러니까 청춘이지. 스무 살 언저리의 A는 인생도 문학도 독고다이, 쓸쓸하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런 찬란하게 유치한 마음으로 홀로 걷고 홀로 마셨던 것이다. - P195

다정한 제자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 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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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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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이구나. 6권의 부제는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로 되어 있단다. 사진신부가 뭐지? 이렇게 생각했다가 내용을 읽어보니 슬픈 내용이구나. 19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하와이에 이민을 갔잖아. 그런데 대부분 남자들이어서, 결혼적령기에 든 남자들이 결혼을 못하고 있던 거야. 그래서 하와이에 있는 남자들이 사진을 보내고 국내에 있는 여자들이 그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하와이로 가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 지금의 사진이 아니라 젊었을 때 사진을 보내서,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하고 보니 신랑이 아버지뻘인 경우도 있었대. 그래서 다시 도망하는 이들도 있었고참 슬픈 현실이구나.

1910 8 29일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단다. 그에 따라 일본의 대응도 더욱 강력해졌단다. 경찰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공포 정치로 우리나라를 통치했단다. 역사 시간에 무단 통치 시대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구나. 1910 12월 안중근의 동생인 안명근이 독립자금마련을 도모하던 중 체포되기도 하고, 105인 사건이라고 하는 신민회 사건도 일어났어. 신민회 사건은 총독암살모의 사건을 조작한 다음 독립운동가 105명을 투옥한 사건이란다. 신민회 사건을 이용하여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는데 이용했어. 당시 신민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도 투옥되었지. 안타까운 것은 윤치호는 3년 형을 마치고 나와서 친일파로 변절을 했다고 하는구나.


1.

국제적으로 세상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어. 1914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유럽에 많은 열강들이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던 와중에 유럽에서 지들끼리 싸움이 붙은 거야. 식민지를 제대로 볼 시간이 없어진 거지. 일본은 이때다, 싶을 것 같구나. 일본은 연합국 편에 들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구나. 완벽한 기회주의자. 유럽에 있는 독일에 무슨 선전포고냐고? 독일이 산둥반도를 점령하고 있었거든. 청일전쟁 후 일본이 산둥반도를 차지했다가, 열강들의 입김 때문에 뱉었는데, 거길 독일이 차지하고 있었잖니. 독일이 산둥반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곳에 맥주공장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칭다오 맥주의 기원이었고... 아무튼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꿀꺽했다는구나.

===============

(45)

일본의 참전 목적은 유럽에서 전쟁 중인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음을 틈타서 힘의 공백상태에 있는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 안에 있는 독일 조차지(租借地)와 독일령 남양제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세한 규모의 독일군 병력을 공격하여 쉽게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을 침략을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일본은 유럽에는 군수품을 수출하고 동남아에는 생필품들을 수출하는 거대한 공급기지가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으킨 특수경기의 수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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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대립 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와도 같은 편이 되었어. 그래서 연해주 지역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희망이 사라져버렸지. 1918 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에 승리하면서 일본도 덩달아 승전국이 되었단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국가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건 패전국의 식민지들이지, 승리한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해당사항 없음이었다고 하는구나.

1910년대 일본의 무단통치는 조선왕조 지우기에도 열일을 했단다. 경복궁 등 많은 궁궐들을 파헤치고 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 같은 흉측한 건물들을 세우기도 했어. 그러면서 조선을 철저하게 없애려고 했단다. 신문도 다 폐쇄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같은 것만 남겨 두었단다. 을사늑약 이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백성들을 감동시켰던 장지연이 이 <대한신보>에 글을 실었다고 하는구나. 글들도 일본을 지지하는 글들을 써서 친일논란이 일었다고 하는구나. 그것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고 했어.

앞서 이야기했던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오독이든 연합국 식민지 국가와 관련이 없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란다. 그리고 파란만장하지만 무능했던 왕 고종이 세상을 떴단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의 독살설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계속된 일본의 강경 대응에 일본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 중심으로 1919 2.8독립선언이 있었단다. 윌슨의 민족자결권, 고종의 죽음으로 민심의 동요, 2.8 독립선언 등의 기류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단다. 아빠가 올해는 이 시대에 관련된 책들을 여럿 읽어서 3.1운동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한 것 같구나. 특히 <만세열전>을 읽고 나서 자세히 이야기했던 것 같네. 오늘은 3.1운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민족대표 33인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비판한 글만 하나 소개하련다.

===============

(158)

신복룡은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操舵手)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33인의 감옥생활은 길어야 3년이었던 데 반해 지방시위를 주도한 농민 지도자의 감옥생활은 15년이나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보는 “33인 개개인을 존경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들이 마치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을 지도한 것처럼 인식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3.1운동에서 표출된 전민족의 숭고한 민족해방의 의지와 정신을 손상해버릴 수 있다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을 민족대표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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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운동을 보고 깜짝 놀란 일본은 태세 전환을 한단다. 무단 통치 시대를 끝내고 일명 문화 통치 시대를 연단다. 강경책만 내세우는 것이 아닌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방법을 썼단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어. 신문들도 몇 개 허용했는데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출간했단다. 조선일보는 창간 때부터 친일신문이라서 일본이 허용하는데 어렵지 않았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지여서 일본이 그런 신문을 허용하는 것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니 일본의 꼼수였어. 눈에 보이는데 있으니 관리하기 편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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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일제가 1920년에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일보>는 친일단체에게 허가한 것이므로 굳이 그 속셈을 따질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의 경우엔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깊은 뜻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과장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한다는 청년들이 장래 조선의 치안을 소란테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심인물들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인물들을 항상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적을 알아야 이쪽의 방비책도 쓸 수 있을 줄 압니다. 저의 정보망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일조유사시에 일망타진하는 경찰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간이든 발행 중지든 마음대로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신문을 허용하는 것은 백 가지 이득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해도 없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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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여기저기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단다. 그랬다가 논의 끝에 상해에 통합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란다. 하지만 처음부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반발한 이들도 있었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도 크긴 한데, 시작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싶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계파 간 갈등도 많아지기도 했지. 임시정부 내에 공산당 세력과 주류 세력의 갈등은 우리 동족을 암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단다. 아빠가 지난 봄에 <독립 운동 열전>이라는 책에서도 소개해주었던 김립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었단다.

그 밖에 독립운동 투쟁도 다변화되었단다. 1919 11 9일에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이 의열단을 창단했어.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을 투척하여 경찰서장을 죽인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의열 활동을 했단다.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 준 홍범도 장군의 대학독립군도 이 즈음 활약했단다. 1920 6월 봉오동 전투가 있었고, 1920 10월에는 김좌진 장군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청산리 전투가 있었단다. 승리는 값졌지만 만여 명의 민간인을 사살한 일본의 참혹한 복수가 가슴이 아팠단다.(경신참변)

앞서 장지연의 친일논란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많은 이들이 변절하여 친일을 했단다. 그런 사람 중에 빠지지 않고 손 꼽히는 사람이 이광수란다. 이광수는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기고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1운도 이후 상해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회유로 인해 국내로 귀국 후 친일을 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상해에서 국내로 귀국한 이유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설도 있었어. 아무튼 이광수는 배신의 아이콘이란다. 그렇게 변절하여 아무도 그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익명으로 <개벽>이라는 잡지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썼단다. 글의 내용은 우리 민족이 열등하니 변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친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어. 그 글이 이광수의 글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자신이 친일을 한 것에 대한 변명거리밖에 안된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단다. 이광수뿐이겠니? 그들이 친일을 한 것은 개인적인 자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광복 후 그런 친일을 한 이들에 대한 별다른 처벌이 없었다는 것이 더욱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너무 관대하다 못해 그런 친일파들을 다시 정부 일을 맡겨 오늘날까지 친일파의 후예들이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니.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의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로 할게. 이제 4권이 남았구나.


PS,

책의 첫 문장: 1910 8 29일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었다.

책의 끝 문장: 이렇듯 겨레의 새싹으로 등장한 어린이는 훗날 가족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권이든 레닌의 민족자결권이든, 민족자결권에 대한 한반도의 오독은 이념적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윌슨의 그 유명한 ‘14개조’에는 ‘자결’이라는 용어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도 ‘민족자결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1863~1945)가 1918년 1월 5일 영국 노동조합연맹에서의 연설에서 볼셰비키의 ‘자결’이라는 용어와 윌슨의 ‘피치자의 동의’를 섞어 쓴 이후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역사 서술에서 ‘윌슨의 민족자결권’은 부동의 상식이자 진리다. ‘레닌의 민족자결권’ 또한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해석학적 오류의 생산성’을 잘 드러내준다. - P130

이완용이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스코필드는 ‘기독교를 믿으려면 먼저 이천만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한 김동관 프로듀서는 "우리가 모르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싶었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공공기관에서도 비무장, 비폭력 만세운동이 있었던 삼일절과 석호필 박사에 대한 만족할 만한 자료를 찾고 보여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며 "특히 석 박사는 유품으로 지갑과 여권만 남길 정도로 남에게 베풀고 검소한 삶을 살아갔다"고 전했다. - P180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들을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들을 자기의 물건 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해주십시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방정환의 연설이 끝나자 참석한 천도교, 기독교, 불교단체의 소년회장과 조선소년단장 등이 어린이, 어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계속 한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린이를 책망할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하게 타일러 주십시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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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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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오랜만에 읽은 시집을 소개해줄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란다. 시에 함축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시인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잘 모르겠더라구. 그런데 간혹 읽으면 바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도 있긴 했어. 그런 시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류시화 시인이란다. 류시화 님은 시뿐만 아니라 에세이와 여행기도 많이 쓰시는데

그런 책들도 모두 좋았어. 외국에 숨겨진, 좋은 책들도 번역해서 소개해 주시고, 아름다운 시들도 찾아서 엮어서 출간하시기도 하지. 류시화 님이 직접 지으신 시 말고, 류시화 님이 소개해 준 시들도 류시화 님의 시들처럼 읽으면 바로 받아지는 시들이었단다. 그래서 류시화 님이 다른 사람들의 시를 엮은 책들도 몇 권 읽었지.

이번에 읽은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라는 시집은 오랜만에 출간한 류시화 님의 시집이란다. 책 제목이 책의 역할을 다한 경우도 있는데, 이번 시집도 책 제목부터 울림이 남다르단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어떻게 부가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읽는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꽃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구나. 이 시집의 제목은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들 중 하나 인데, 시 전체도 좋아서 너희들에게 전체를 소개해 줄게. 추위에 시달리고 바람에 힘들어도, 그러니까 지금 삶이 힘들고 지치고 그래도 그건 너가 꽃이기 때문인 것이고, 곧 꽃이 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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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

1.

시집을 읽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그 시집에서 좋았던 시 몇 편을 소개해주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 아빠가 이 시집을 읽고 따로 발췌 해 놓은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독서 편지를 대신하련다. 너희들도 이 시집을 한번 읽어보면 좋겠구나. 가끔 학교에서 시를 쓰는 숙제가 있는 것 같은데,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구나.

먼저 소개해 줄 시는

흉터를 재해석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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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5)

흉터의 문장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

….

그 다음은 색다른 시선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길을 알려준 시

======================

(52-53)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때론 힘들게 때론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시.

======================

(82-83)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북극의 빙하는 무너지고

시리아 난민들은 영국 해협에서 떠오르고

카불의 여성들은 검은 히잡 속에 숨는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티베트 승려들은 몸에 불을 붙이고

후쿠시마에서는 원전수가 바다로 흘러가고

멕시코인 밀입국자들은 트럭 안에서 숨이 막힌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우한에서는 바이러스가 폐를 잠식하고

갠지스강은 성스러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인도의 노동자들은 수천 리 걸어 집으로 간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바그바드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가 이어지고

미얀마에서는 시위 군중이 영화처럼 쓰러지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병원에 미사일을 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알래스카에서는 신생아가 울음을 터뜨리고

이스탄불에서는 수도승들이 회전춤을 추고

제주 바다에서는 해녀가 숨비소리 내며 자맥질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지구는 초속 30킬로미터로 태양 둘레를 내달리고

야생 기러기는 희망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건너고

혹등고래는 새끼 업고 북극해로 이동한다


우리가 입맞춤하는 동안

신이 하루를 더 허락하고

맹인 소녀는 점자로 시를 읽고

아이는 나무 아래서 주운 새를 품에 안는다

======================

마지막으로 달에 대한 예찬과 그 달을 닮은 이에 대한 예찬.

======================

(135)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

아빠가 몇 편의 시들을 더 발췌하긴 했는데 너희들에게는 이 정도만 소개해 주었단다. 이 시집은 가끔씩 기분이 우울하거니 정신이 복잡할 때 아무 페이지나 펴서 한 두 편 조용히 정독하면 좋을 것 같았어.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손을 내밀어 보라

책의 끝 문장: 다시 이곳에 돌아와 충분히 사랑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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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좋은 시를 감상할 수 있었네요.

bookholic 2023-12-06 23:08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한 달 남은 2023년 좋은 시와 함께 행복한 시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