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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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박지리 님의 시작을 알리는 그 작품 <합체>라는 소설을 읽었단다. 이 책은 십여 년 전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박지리라는 작가를 세상에 알리게 된 작품이란다.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작가 수업을 받은 적 없던 당시 신인 작가 박지리 님의 화려한 등장이란다. 아빠가 처음 읽은 박지리 님의 작품이 박지리 님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다위 영의 악의 기원>이었고, 그 책을 읽고 나서 가끔씩 박지리 님의 책들을 찾아 있는데, 지금까지 실망을 안겨준 책이 없었단다. 이번에 읽은 <합체>라는 데뷔작부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천재작가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단다. 그 천재적인 능력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음이 안타깝구나.

이 책은 너희들에게도 추천할만한 청소년 성장 소설이었단다. 이 책이 예전에는 너희들 같은 청소년들의 추천 도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리스트에 빠져 있는 것 같더구나. 아무래도 박지리 님의 마지막 선택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그래도 아빠는 너희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더구나. 재미도 있고, 짠한 감동도 있고, 주인공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둘이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교훈적인 내용도 있고 말이야 ㅎㅎ


1.

소설의 제목 <합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두 개의 어떤 것이 하나로 합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의 제목의 사이의 별모양() 모양이 눈에 띄게 된단다. 소설의 제목 <합체>는 중의적인 제목이야. 하나는 원래 우리가 알고 있던 두 개의 어떤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의미한단다.

오합과 오체 쌍둥이가 그들이란다. 그들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합친 합체이고 그들의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책의 제목에 사이에 ★을 함께 적어 둔 거야. 주인공 오합과 오체의 아버지는 난쟁이란다. 오합과 오체의 아버지는 지방 순회를 다니는 공연단에서 난쟁이 쇼를 하셨는데, 후진하는 트럭에 치여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어. 트럭 운전사는 뒤에 분명히 보았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했어.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합과 오체는 어머니와 함께 셋이 생활했단다.

오합과 오체는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무척 작았고, 학교에서는 그것 때문에 놀림을 받곤 했단다. 쌍둥이 형인 오합은 모범생이고 공부를 무척 잘했으나 체력이 약했단다. 쌍둥이 동생 오체는 운동을 아주 좋아했으나 공부는 잘 못했어. 오합은 키가 작은 작은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체는 키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단다. 학교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선생님 중에도 오합과 오체를 놀리는 선생님이 있었단다. 특히 체육 선생님은 체육 시간에 농구 시합을 하는데 둘을 한 팀에 몰아 놓고 합체해보라고 하기도 했어.

오체는 어느 날 자신과 이름이 같은 유명한 사람을 한 명 알게 되고, 그를 우상으로 생각하게 된단다. 오체와 이름이 같다면 체? 너희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특히 아빠 세대들은 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단다. 바로 체 게바라. 쿠바 혁명의 영웅. 얼굴도 잘 생겨서 그의 얼굴을 새긴 옷도 많았단다. 오체는 체 게바라를 알게 된 이후, 그를 우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방에 체 게바라 사진도 붙여 놓고 그랬어. 이 책의 책 앞표지를 다시 보면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빨간 티셔츠를 볼 수 있을 거야. 그 옷을 아이가 오체겠구나.

오체는 농구 연습 하러 뒷산 약수터 근처 공터에 갔다가 천막 치고 지내는 도인 같은 노인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 노인은 뱀에 물렸는데, 오체가 도와 주어 살아났어. 그 이후로 그 도인 같은 노인을 알게 되었어. 어느날 반 친구 하나가 오체를 난쟁이라고 놀렸는데, 이 일로 오체는 그 친구와 치고 박고 싸움을 했단다. 이후 오체는 학교를 안 가겠다고 했어. 오합이 학교에 핑계를 잘 대서 잘 넘어갔고, 다행히 여름 방학이 되었단다.


2.

오체는 학교를 안 가고 뒷산에 갔다가 얼마 전에 만난 도인 같은 노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 키 작은 것에 대한 신세 타령을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도인 같은 노인은 키 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어. 도인 같은 노인은 자신이 계룡산에서 도를 터득한 계도사라고 했어. 그러면서 계룡산 동굴에서 33일간 도를 닦으면 키가 커진다고 했어. , 동굴에서 삼칠일 동일 마늘을 먹으면 사람이 되는 단군신화가 생각나는구나.^^

이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오체는 어느날 오합을 무작정 데리고 계룡산으로 갔단다. 엄마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편지 한 통만 남겨두고 말이야. 오합은 방학 동안 공부해야 한다고 하니, 오체는 공부할 것 다 싸가지고 왔다면서, 계룡산 동굴에서 공부를 하면 더 잘 될 거라고 설득했어. 그렇게 오합와 오체는 계룡산의 이름 없는 동굴에서 키 크는 수련을 시작했어. 오합은 오체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오합과 오체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계도사가 알려준 방법으로 수련을 했고, 오합은 수련하는 시간 이외에는 계속 공부만 했단다. 둘이 함께 지내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형제의 정을 더 키웠단다.

하루 이틀이 지날 때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하루 이틀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전체 수행 기간의 절반이 지나가도 효과나 나타나질 않아 오체는 거짓말인가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어. 오합은 수련을 하니 몸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

그들이 수련을 한지 24일째, 하루에 한 시간씩 듣는 라디오에서 사연이 하나 소개되었어.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찾는 사연인데 누가 들어도 계도사에 관한 이야기였어. 식구들이 말하길, 사람들을 자꾸 계룡산으로 보낸다고 했어. 이 방송을 들은 오체는 화를 마구 내면서 곧바로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엄마한테 엄청 혼나긴 했지만, 엄마는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단다.


3.

여름 방학이 그렇게 계룡산 해프닝을 끝나고 개학을 했단다. 오합은 집에 와서도 계룡산에서 했던 수련을 새벽마다 일어나 뒷산에 가서 계속 했단다. 얼마 후에는 오체도 합류해서 함께 했어. 어느날 오합과 오체는 라디오를 듣다가 계도사 할아버지의 또 다른 사연을 듣게 되었어. 사연의 주인공은 몇 년 전 수능을 망치고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계도사가 그의 자살을 막았다고 했어. 그러면서 계룡산에 가서 수련을 하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대. 수련을 하면 키가 큰다거나, 수련을 하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하니 엉터리이긴 엉터리인가 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사연의 주인공은 계도사 할아버지의 말대로 계룡산에 가서 수련을 했는데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건강해지게 되었대 그리고 다시 공부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서 갔다는 아주 훈훈한 사연이었단다. 오합과 오체도 키는 크지 않았지만, 계도사 할아버지가 알려준 수련법으로 몸이 더 튼튼해진 것 같았어.

….

2학기 중간 고사 체육 실기는 농구. 오체와 오합은 친구들의 무시를 당하곤 했어. 그런데 오합과 오체가 그동안 수련을 해온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어. 오체의 3점슛 2개와 오합의 마지막 골로 그들의 팀이 역전승을 했단다. 그리고 바짓단이 살짝 올라와 있는 것 같았어. 그렇게 소설은 해피하게 끝이 났단다.

이 소설에서 오합과 오체가 다니는 학교에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조세희 님의 소설을 읽는 장면이 있었어. 이 소설은 여러 교훈이 담긴 책으로 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알고 있단다. 아무리 교훈적인 글이긴 하지만,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키 작은 아이가 읽는다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오체가 수업 시간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라는 글을 읽는데 오체에게는 그것이 단순히 인용문을 읽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읽는 것이었어. 창피하고 떨리고 정신이 멍해졌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교과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박지리 님의 <합체>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오합과 오체라는 매력 만점 캐릭터들을 통해 <단군 신화>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박지리 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희들도 한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책의 끝 문장: 계절은 가을이었고, 바람은 상쾌했고, 하늘에는 누가 쏘았는지 모를 빛나는 공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늘에 이어 내일도 쉬지 않고 튀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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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왕자 - 전라북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재홍 옮김 / 이팝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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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얼마 전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경상도 사투리 버전으로 번역한 <애린 왕자>를 읽고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그러면서 전라도 사투리 버전도 있다고 있다고 했는데, 그 전라도 사투리 버전의 <에린 왕자>를 읽고 들었단다. 정확히는 전라북도 사투리 버전이라고 하는구나. 전라북도 사투리 버전의 <에린 왕자>도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북으로 있어서 일부분은 책으로도 읽고, 일부분은 오디오북으로 들었단다. 오디오북으로 들을 때 성우가 전라도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가 듣기에는 전라도 사투리의 맛을 잘 내서 읽으신 것 같았어. 그냥 책을 눈으로만 읽어도 귓속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리는 것 같았단다.

어린 왕자의 순수한 마음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도 읽어도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 같구나. 전라도 사투리 특유의 늘어지게 이야기하는 부분은 길게 읽으라고 : 라는 문장부호도 붙어 있었단다.

:심히 가잉

사람들은 으디 있냐?”

중요헌 건 눈에 안 뵈아.”

등 책 전체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도 되어 있어서 사투리 읽는 재미가 있었단다. <애린 왕자> <에린 왕자>는 사투리 버전의 번역으로 재미있게 기획을 한 것 같았단다. 문득 창작 소설이나 수필 전체를 사투리로 쓴 작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소설이나 수필 속에 등장인물의 대화체에 사투리가 섞여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투리 된 작품이 있는지 궁금했어.

아빠가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이 아니지만, 사투리로 읽다 보니 더 감기는 맛이 있어 재미있게 읽은 것 같구나. 다른 작품들도 기획하면 좋겠고, 몇 년 전 소문에 <어린 왕자>의 충청도 사투리 버전도 출간 예정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충청도 어린 왕자는 어떨지 또 궁금하구나. <어린 왕자>는 표준어 번역본 읽고 나서 책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오늘은 이상 짧게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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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여섯 살 먹었을 적에 <자연의 체험담>이라고 원시림에 관한 책으서 경장헌 그림을 하나 봤네.

책의 끝 문장: 갸가 다시 왔다고 나헌티 얼릉 펜지 한 통만 좀 써 주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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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09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투리 버전은 나름 성공한 마케팅으로 보입니다.ㅎㅎ

bookholic 2024-03-09 09:23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꽃샘추위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호시우행 2024-03-09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 영화의 상상력은 어떻게 미술을 훔쳤나
한창호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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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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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와 그림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해줄게. 이 책은 아빠의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란다. 한창호라는 분이 쓴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라는 책이란다. 이미 책 제목에 영화와 그림이 모두 다 들어가 있네. 아빠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그림은 음...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간혹 어떤 그림을 보았을 때, 마음에 드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유명한 그림을 찾아보러 가거나 그림에 감동 받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전에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에셔의 그림과 그런 스타일의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란다. 이과생이 좋아할 만한 그림…^^

책 제목에 영화라는 제목이 있으니 조금은 책의 진입 장벽이 높지는 않겠지, 하며 책을 펼쳤단다. 지은이는 한창호라는 분인데, 이탈리아에서 영화 공부를 위해 유학을 7년동안 했다는구나. 유학을 마무리를 하면서 귀국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네 21이라는 잡지책에서 칼럼 투고 제안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그때 문득 생각한 것이 영화와 미술을 접목한 글이었대. 당시만 해도 영화와 미술에 함께 다룬 시도를 우리나라에서는 한 적이 없어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고 하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05년이란다. 좀 오래되었지? 영화도 2005년 이전의 영화들이란다. 모두 너희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영화들^^

 

1.

이 책의 구성은 대충 이렇단다. 유명한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영상에 담긴 영화를 소개해주고, 그 그림과 영화의 한 장면을 비교 설명해 준단다. 그리고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말이야. 예를 들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젊은 여인의 초상>이라는 그림과 존 조스트의 영화 <뉴욕의 베르메르의 모든 것>의 한 장면. 베르메르의 <젊은 여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은 아빠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 그림을 보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그림이 떠오르게 된단다. 맞아.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화가가 바로 베르메르란다. 그 그림과 함께 소개해준 영화 <뉴욕의 베르메르의 모든 것>은 제목조차 처음 들어보는 영화란다. .. 지은이가 영화 전공자이다 보니, 참 많은 영화를 봤을 테고 그 중에 미술과 관련된 영화를 고르다 보면 아무래도 예술 영화로 부르는 영화를 많이 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단다.

그러면 아빠가 본 영화는 별로 안 나오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갑자기 이 책의 진입장벽이 높겠군, 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어. 그리고 책장을 책장을 펼쳐 읽어가는데, 정말 아빠는 본 영화가 안 나오는데, 본 영화는 둘째치고 제목이라도 들어본 영화가 안 나오는구나. 아빠도 나름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 책에서 소개해준 영화가 30편이 넘는데 아빠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영화는 팀 버튼의 <배트맨> 한 편 인 것 같구나. 보다가 중간에 관둔 영화가 두 편 정도 되는 것 같고대부분 안 본 영화,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영화로구나. 아빠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안되겠구나. 그런데 이 책에서도 소개된 영화 중에 보고 싶은 영화들도 몇 편 있는데, 이 오래된 영화들은 어디서 찾아봐야 하나.

아빠가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학창 시절 좋아하는 영화 OST가 있는데 그 영화도 이 책에서 소개가 되었단다. 영화 <바그바드 카페> 이 책의 줄거리를 소개해 주었는데, 한번 보고 싶더구나. 학창 시절 묘한 분위기의 이 영화의 OST “I’m calling you”만 좋아했지, 영화 <바그바드 카페>를 볼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 이 책에서 내용을 대충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보고 싶구나. “I’m calling you”를 좋아하며 듣던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유튜브에서 “I’m calling you”를 검색해서 들어보니, 옛 기억들도 같이 떠오르는구나. 이것이 음악의 힘인가. 영화와 그림에 관한 책을 이야기해주면서 아빠가 뜬금없이 음악을 칭찬하고 있구나. ㅎㅎ

이 책에서 소개한 영화들에 비해 그림과 화가들은 비교적 익숙한 그림과 화가들을 소개해 주었단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셀레, 르네 마그리트, 샤갈 등등 구스타프 클림트를 이야기해줄 때 빈에 사는 세 명의 유명한 구스타프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재미있더구나. 빈에서는 구스타프라는 이름이 유행했나 보구나.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슈니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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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9세기 말, 데카당스의 세련되고 퇴폐적인 기운이 가득한 도시, . 문학, 음악, 미술에서 세기 말 낭만주의의 정점에 있던 예술가 세 명이 바로 쇠락의 도시 빈에서 서로 이름을 떨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 구스타프 말러(1860~1911),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바로 그들이다. 슈니츨러와 클림트는 동갑이고, 말라는 이들보다 두 살 위다. 말러는, 레퀴엠보다 더 비극적인 <교향곡 5>에서 잘 보여줬듯, 지독한 비관주의자다. 그의 검은 음악은 우리를 죽음의 고요 속으로 이끈다. 반면, 클림트는 생명이 넘치는 황금빛 회화로 우리를 에로스의 환희로 초대한다. 이 두 예술가의 사이에, 곧 죽음과 에로스 사이에 슈니츨러의 문학 세계가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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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아빠가 이 책에 나온 영화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본 영화는 <배트맨>이 유일하다고 했잖아. <배트맨> 시리즈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아빠도 그 시리즈를 다 보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팀 버튼의 <배트맨>은 확실히 기억한단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공 배트맨 때문이 아니라 악당 조커 때문에그만큼 강렬한 캐릭터로 자리를 차지한 빌런, 조커. 아빠도 그 영화를 보면서 잭 니콜슨이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잭 니콜슨이 조커를 그렇게 강력한 캐릭터를 만들어서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조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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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

어떻게나 악당이 실감 나게 연기를 해대는지, 주인공 배트맨의 존재는 잘 기억나지도 않고 조커의 인상만 강렬하게 남은 영화가 <배트맨>이기도 하다. 만약 조커 일당이 무고한 사람들만 죽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로 캐릭터들 사이의 중심은 조커에게로 쏠려 있다. 조커 일당이 배트맨과 싸우는 방법도 아주 인상적이다. 배트맨은 첨단과학과 거대자본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무기들을 지고 하늘을 날고 땅 위를 쏜살같이 달린다. 반면에, 악당들은 재래식 소총을 들고 맨몸으로 배트맨과 싸운다. 어찌 보면 요즘 세상과 참 많이 닮은 전투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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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들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곤 한단다. 그런 원작 소설로 만든 영화 중에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라는 영화도 이 책에서 소개를 해주었단다. 토머스 하디의 원작 소설 <테스>는 우리 집에도 있는데, 아빠는 아직 읽지는 않았단다. 영화 <테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도 읽어보고 싶더구나. 먼저 <테스> 책부터 어디 있나, 찾아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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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연애소설 주에 토머스 하디의 <테스>만큼 인기가 높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 독자들에겐 더하다. 여성이 과거를 고백하는 게 과연 잘한 것인가 아닌가같은 소재는 우리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선 더욱 먹혀들었다. 테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 과거를 고백한 대가로 인생을 망치는 순진한 처녀다. 이런 간단한 연애 이야기의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문학적으로 승화된 언어 때문이지, 이야기의 독특함 때문은 아닌 듯하다. 특히 토머스 하디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자연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선배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뛴다며 자연에서 희망을 찾았다면, 하디는 이와 반대로 고독을 맛본다. 하디의 자연에는 절망이 있다. 쓸쓸한 고독 속에 방황하는 농촌 사람들의 무너진 인생이 하디 소설의 테마다. <테스>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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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책이 출간 당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나? 이 책이 주목을 맞고 인기를 끌었다면 후속작도 나올 법한데 검색해보니 없더구나. 하기야 아빠도 최근에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책이니 아주 큰 인기를 끈 것 같지는 않구나. 당시에는 후속작이 없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2024년 한번 써봐도 되지 않을까 싶구나. 그 사이에 수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그 영화들 속에서도 숨어 있는 미술 작품들이 있을 텐데 말이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책 제목이 영화가 들어 있어서 가볍게 시작했지만, 알 수 없는 영화 소개로 크게 공감은 갖지 못했지만, 영화 속 숨어 있는 명화들을 알게 된 좋은 기회인 것 같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1999년 여름 베로나에서의 일이다.

책의 끝 문장: 콘스터블, 토머스 하디 그리고 폴란스키를 연결하는 하나의 개념은 절망한 풍경이다.

 


모든 것이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집중됐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만발한 꽃이나 잘 익은 과일들이 이젠 기쁨이 아니라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이용됐다. 만발한 꽃은 곧 시들 듯, 우리도 곧 죽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소재가 정물화 속의 해골, 모래시계, 그리고 촛불일 것이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또 촛불이 다 타고 나면, 그 다음은 말 그대로 ‘무(無)’만 남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문리를 깨우치려고 붙잡고 씨름하던 ‘책’, 그리고 과학 관련 도구들도 바니타스의 단골 소재였다. 파우스트가 책 더미에 둘러싸여 진리를 깨우친 뒤, 결국 삶의 허무에 슬퍼했듯, 책과 과학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모두 허무하다고 화가들은 그린다. - P48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로코코의 시작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죽음(1715)과 일치한다. 베르사유 공전의 장대하고 영웅적인 17세기의 바로크와 고전주의가 물러나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작고 예쁜 실내 장식 같은 예술들이 18세기 초엽부터 시작됐다. 절대 권력자의 독재에 질린 귀족들이 궁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들의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 뒤, 궁전 예술과는 아주 다른 ‘사적인 취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이를 예술사에선 로코코라고 부른다. - P80

마르크 샤갈(1887~1985)도 경계인이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지금의 벨로루시공화국의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자유시민으로 살지 못하고 일종의 불법체류자처럼 숨어 살았다. 당시 유대인은 러시아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인도,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한 인물이다.
샤갈의 세상은 집시의 세상과 닮았다. 이성과 상식은 없고, 마법적인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결혼한 신랑 신부는 하늘을 날고, 동물의 머리를 한 신랑은 가냘픈 신부의 뺨에 입맞춘다. 집보다 닭이 더 크게 그려져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는 늘 지붕 위에 앉아 있다. 닭, 황소, 양들은 사람의 가장 절친한 이웃인 듯 빠짐없이 등장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은 늘 축제로 흥청망청이다. 샤갈의 세상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처럼 카오스의 미학이 지배하고 있다.
- P160

1916년 스위스의 취리히. 모든 유럽이 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을 때, 전쟁이 싫다는 이유로 몇몇의 삐딱한 젊은이들이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이 도시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의 학살 전쟁을 겪으며 이들은 우리 인류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예술 운동을 전재한다. 소위 ‘거부’의 미학운동이라 하는 아방가드르 ‘다다(Dada)’는 이렇게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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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0권 - 창씨개명에서 8.15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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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드디어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마지막 10권이구나. 10권을 쭉 읽었다면 더 몰입하고, 실제 그 시절을 사는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아빠가 이번에 읽은 것처럼 가끔씩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단다. 기억이 잊혀질 만할 때 다음 이야기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10권의 부제는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란다. 창씨개명은 일제 말기 1940년대에게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내세운 정책이란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단다. 그리고 여러 신문사들이 강제 폐간되었는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이때 폐간되었단다. 조선일보는 이때 폐간된 것을 두고, 후에 자신들은 친일 신문이 아니고 민족지라고 주장하였는데, 뻔뻔한 변명이 아닐 수 없구나. 보다 못한 한겨레 신문이 팩트 폭격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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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에 <한겨레>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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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독립운동도 침체기를 겪었단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충칭에 자리를 잡았어.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독립운동의 좌우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좌우합작노력도 진행되었단다. 그래서 김원봉이 이끈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했어. 그래, 이념 싸움은 나중에 나라를 되찾은 다음에 하고, 일단 하나로 뭉쳐야지.

당시 한국광복군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단다. 군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운영을 할 수가 없었어. 미주 동포들이 돈을 보내주었지만, 역부족이었어. 중국은 지원을 해주되 통수권을 요구해서 독립군을 화내게 했지만, 결국 군비 문제 때문에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단다. 하지만 중국도 광복군을 제대로 운영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임시정부는 다시 지휘권을 돌려달라고 했단다.


1.

일본은 그냥 땅만 점령한 것이 아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단다. 그 중에 731부대의 생체 실험은 너무 잔인한 것이란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실험을 한 것이란다. 학창 시절 엄청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본군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무서우면서 놀랬던 기억이 있구나. 사람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버젓이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생체 실험을 주도했던 이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이것에는 미국도 큰 책임이 있단다. 미국은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대. 하기야, 미국이 늘 겉으로는 평화를 위하는 것 같지만, 늘 자국의 이익이 제1순위인 나라 아니던가. 그들 또한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만행들이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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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4)

영국 BBC 2002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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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731부대뿐만 아니라 일본 감옥 안에서도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단다. 일본 감옥에서 자행된 생체 실험으로 돌아가신 분들 중에 윤동주 시인도 있단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로 전향하는 와중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단 시인 이육사 님도 끝내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셨단다.

일본의 무모한 제국주의 욕심을 끝을 몰랐어.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식민지에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은 아시아 여기저기를 점령했단다. 일본의 이런 확대에 미국의 신경이 거슬리게 되었고, 미국은 일본에 수출하던 석유에 제동을 걸었어. 그러자 일본은 미국을 기습 공격했단다. 1941 12 7일에 있었던 진주만 기습이었어. 일본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국은 약 2달간 열세를 보였고, 일본의 승전보는 이어졌단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승기를 미국이 잡아갔단다.

일본이 아시아 이곳 저곳에서 전쟁을 하고, 미국과도 전면전을 하다 보니, 군수 물품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어. 곡식과 각종 금속을 강제로 훔쳐갔고, 사람들도 강제로 잡아가 일을 시켰단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약 730만명이 강제로 끌려가 노동과 전쟁에 참가를 했다는구나. 정말 가슴 아픈 역사로구나. 더욱이 일본을 위해 싸우는 학도병 모집에 국내 지식인들이 앞다투었다고 하니 더 화가 나는구나. 그 지식인들 중에는 글을 쓰던 문인들이 많았는데, 타고난 글솜씨로 우리 젊은이들을 현혹했을 생각을 하면, 그들에게 그냥 친일파 딱지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다 처벌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종군위안부가 있었단다. 이것은 731부대의 생체실험만큼 잔인한 짓이었단다.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전쟁터로 보낸 것이란다. 군인들을 위한 종군위안부로그때 끌려가신 분이 약 20만명이라고 하는구나. 이 문제는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음으로써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다. 각종 국제 단체 등에서 사과하라고 압력을 가하니 마지못해 일본 정부는 사과를 했는데, 희한하게도 피해 국가인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미국에게 사과를 했다는구나. 별 그지 같은당시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일본 사람의 고백을 일본 정부는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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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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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이 벌인 많은 전쟁들.. 뱁새가 다리 찢어진 격이라고 할까. 일본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단다.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을 시작했단다. 오키나와 상륙 작전으로 일본 본토에 거점기지를 만들었어. 그런데 이때 일본 민간인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이 점령하자, 가족들이 서로 죽이고 자살하는 일들이 벌어졌구나. 일본군이 다른 점령지에서 한 짓을 알고,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그랬던 것일까.

강대국들은 전쟁 이후의 일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단다.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들이 이어졌어. 얄타회담은 19452 8일부터 8일간 미국, 영국, 소련이 모여서 논의를 했는데,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되, 신탁 통치를 해야 한다고 논의했다고 하는구나. 연합국이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가지고 오면서, 1945 4 28일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 당했고, 1945 4 30일에는 숨어 있던 독일 히틀러가 자살을 했단다.

그렇게 유럽은 전쟁이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추축국 중에 이제 일본만 남았어. 일본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미국, 영국, 소련은 1945 7 22일 포츠담 회담을 열어 다시 한번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준다고 했단다. 일본의 마지막은 잔인한 한방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비밀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단다. 작년에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되면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된 맨하튼 프로젝트로 만든 핵무기. 유럽이 이미 전쟁이 끝났고, 개발이 완료된 핵무기를 사용할 곳은 일본뿐이었단다. 1945 8 6일은 히로시마에, 8 9일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길고 길었던 전쟁도 끝났고, 그보다 더 길고 길었던 일제 강점기도 끝이 났단다.

그런데 이 핵폭탄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아무런 죄 없이 끌려간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었단다. 그 수가 4~5만 명이라고 하니 적지 않구나. 예전에 다른 책에서 핵무기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나라가 일본이고, 두 번째가 우리나라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단다. 일본에 끌려가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하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음이 또한 가슴 아프구나.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전범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이를 주도했던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 재판을 대충 했단다. 그런데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 조선인으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포로 감시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있었대. 일본의 적군이 보면 이들 또한 자신들의 적이잖아. 그래서 이들이 해방이 된 후 전범으로 낙인 찍혀 사형되었다고 하는구나.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 정부가 강제로 하라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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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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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억울한 사연을 갖고 운명을 달리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넋들이 여전히 일본 땅 전역에 떠돌고 계실 것 같구나.

, 이렇게 10권의 이야기를 해보았어. 결국에는 해방이 되었지만, 그 해방이 되는 과정이 괴로움의 연속이었구나. 그리고 만주 땅에서 일본에 맞서 싸워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광복군에 의한 해방이 아닌, 미국의 힘에 의한 해방이라서, 또 다른 시련들이 앞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이 분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국이자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했던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는가. 당시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다 보니 그런 결정을 한 것인데, 80년 가까이 그 분단이 이어지고 있으니, 당시의 결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지려나.

….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을 읽으면서 이 시절을 소설로 이야기한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과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가 생각났단다. 이 책들을 오래 전에 읽긴 했는데, 다시 한번 읽으면서 <한국 근대사 산책>을 소설로 복습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올해 독서계획으로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을 포함시켰단다. 그리고 주말마다 열심히 읽고 있는데, 이것도 곧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39 8 23일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밀약이 이루어졌다.

책의 끝 문장: 일제 36년의 유산이 잔재의 수준을 넘어선 현재를 재생산하는 실질적 원리로 기능하는 걸 재평가하고 성찰해보면서 사회의 운영 원리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보는 건 어떨까?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년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년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 P53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년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 P149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P163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 P200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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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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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이구나. 9권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일제 시대, 특히 193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 문화와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그래서 부제도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란다. ‘한국 근대사 산책이라는 제목 없이 부제만 본다면 오늘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오늘날도 연애열풍,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꼭 맞으니까 말이야.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가면서 강제로 근대화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도 그 사회에 적응을 해 나가는 듯 보였어. 그런 모습들은 9권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차례도 보면 여성문화, 대중문화, 소비문화, 생활문화, 중독문화 이렇게 되어 있단다. 지금까지 달리 역사적인 사건 없이 이야기가 펼쳐져 다시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았고, 보통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있었단다.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라고 하는 신세대 젊은이의 모습들이 등장하였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이 유행처럼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살을 하고,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특이 기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깨고 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나혜석이 아닐까 싶구나. 나혜석은 아빠가 여러 책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서 오늘은 건너 뛸게.. 다만 아빠가 나혜석에 대해 몰랐을 때는 그냥 신여성이자 화가라고만 알았는데,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뒤로는 나혜석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그렇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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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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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 박인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던져주고 이혼을 한 뒤에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다시 국내로 와서 이런저런 활동까지 했다는구나. 하지만 나중에 친일 활동을 했다고 하니 이미지가 확 추락하는구나.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현모양처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어. 그런데, 현모양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던 말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하는구나. .. 앞으로 이 말을 좀 쓰지 말아야겠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들어나면서 여성 운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월급을 주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단다. 일제는 우리나라 생활 문화에 이런 저런 간섭도 많이 했어. 예를 들어 조혼제, 그러니까 일찍 결혼하는 것을 폐지하였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장례를 간소화하여 간단히 하라고 했어. 일제의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강제로 우리 문화를 서서히 변화해갔단다.

 

1.

1930년대 대중 문화는 어땠을까? 대중 잡기가 성행하여 <삼천리>, <신동아>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잡지들이 출간되었대. 특히 <삼천리>리는 가장 오래 유지되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인데, 조선일보 기자답게 1937년 이후로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이전에는 돈 많은 집에서나 가질 수 있는 라디오가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로 인해 라디오 드라마가 급증하였고, 스포츠 실황도 라디오로 해주었대. 이렇게 라디오가 인기를 끌자, 일본은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선전용으로 적극 활용했단다. 이때도 언론과 방송의 힘은 권력의 노예가 되었구나. 하기야, 이것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게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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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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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영화도 유행하여 극장도 많이 지어졌단다. 한 동안 영화의 인기를 이끌었던 변사는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도 대거 유입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구나. 라디오와 함께 축음기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와 함께 가요도 같이 발전하였단다. 이때 활동했던 가수들과 유행했던 가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몇몇 노래들은 아빠도 알고 있는 노래들이었단다. 그 중에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가 가사를 통해서 몰래 항일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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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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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커피도 많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커피가 못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도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좋다고 하고,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하고그때나 지금이나커피는 몸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과하게 먹지 말라고 이해해야겠다. 커피가 유행하면 덩달아 커피를 파는 카페와 끽다라고 하는 다방이 함께 유행했단다. 카페는 에로로 문제가 되기도 해서 총독부에서 강한 규제를 하기도 했대. 그 밖에 음악 장르 측면에서는 재즈도 유행을 하고, 댄스도 유행을 했는데, 일제총독부에서는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일부 춤꾼들은 댄스홀 허가해 달라고 편지도 썼으나, 총독부는 끝내 허가하지 않았대.

 

2.

백화점도 생기기 시작해서,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은 서로 경쟁을 했는데, 화신백화점의 주인 박홍식은 민족주의 마케팅을 하고, 공격전인 할인을 통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였어. 그로 인해 동아백화점은 개업 반년 만에 화신백화점에 흡수 합병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여자들의 패션을 살펴보면, 머리는 단발, 파마 등 여러 가지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대. 남자들의 헤어스타일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대. 하지만 장발 단속이 이때도 있었나 보구나. 일제 시대 장발에 대한 탄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불우한 현대사를 갖게 되었으니, 일제가 장발에 대한 탄압은 잘못해도 엄청 잘못한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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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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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사이에서는 여우목도리도 유행을 했다고 하는구나. 최초로 패션쇼도 열렸다고 했어.

이 시대 전화 보급도 급증을 했대. 그러면서 전화 범죄도 발생했다는데, 보이스 피싱의 역사는 전화의 역사와 함께 했나 보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전화도 가능해졌다는구나. 일본 문화는 계속 물밀듯이 들어와서, 대중 목욕탕도 생겼는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는다는 것이 유교 주의 사회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테지. 크리스마스도 전래되어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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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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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유행은 그 이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구나. 이 시절 경성과 평양의 정기 축가 대항전이 있었대. 경평전이라고 불렀다는구나. 승부욕이 지나쳐서 경평전을 열기만 하면 난투극이 벌어졌고, 지역 갈등도 있었지만, 축구를 통해서 항일한다는 의미도 있었다는구나. 이때 평양팀의 김영근이라는 선수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이 경평전은 매년 펼치다가 해방이 되고 남북에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1946년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고 하는구나. 축구만큼 권투의 인기도 많았대. 서정권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 이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열이 엄청 났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입학정원이 적어서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데 평균 경쟁률이 6:1이나 되었대. 그렇다 보니 더욱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고,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DNA에 새겨져 있는 것 같구나.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의 이야기란다. 이제 한 권 남았는데, 아빠가 지금까지는 시간 간격을 두고 한 권씩 읽었는데, 마지막 10권은 그냥 연달아 읽어서 끝내버렸단다. 10권도 읽은 지 좀  되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너희들한테는 아직 이야기를 못해주었구나. 곧 해줄게. 9권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랑 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말이야.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20년대 도시 고학력층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모던 걸 1930년대에 이르러 숙성되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갔다.

책의 끝 문장: 각개약진할 때 하더라도 이젠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슬기가 필요하다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년 10월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46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년 11월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 P114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 P160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년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 P179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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