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혁명전사 김명시
안재성 지음 / 미디어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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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안재성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이 분은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위인을 찾아 소개를 해주시곤 한단다. 아빠는 그 동안 안재성 님의 책을 세 권 읽었어. <이현상 평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경성 트로이카> 세 권에서 다룬 인물들은 일제시대에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직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교과서에서 잘 실리지 않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는 알 수 없는 독립운동가들일 거야. 아빠가 이번에 읽은 안재성 님의 책은 <항일혁명전사 김명시>라는 책으로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명시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란다. 책 표시에 장총을 들고 한쪽 팔뚝에 부상을 입고 있는, 한 젊은 여자의 그림이 있단다. 그러니까 김명시라는 분은 여자 독립운동가인가 보구나. 장총을 들고 있는 모습에 어떤 삶을 사셨을지 궁금하구나. 영화 <암살>도 생각나고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도 생각나고

김명시라는 이름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 같아서, 아빠가 읽은 책들 중에서 찾아보니 정운현 님의 <조선의 딸, 총을 들다>라는 책과 임경석 님의 <독립운동 열전>에서 김명시를 짧게 소개해 준 적이 있더구나. 하지만 김명시라는 분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이번에 읽은 <항일혁명전사 김명시>를 통해서 또 한 명의 멋진 여전사를 만나게 되었구나. 뜨거운 열정으로 삶을 불살랐던 김명시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너희들이 공부와 숙제로 바쁘긴 하지만, 혹시 틈이 생기면 이 책을 한번 읽어봐도 좋을 것 같구나.


1.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오남매를 키우셨어.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명시는 13살이었는데, 엄마와 함께 삼일운동에 동참했단다. 김명시의 엄마는 주동자로 몰려 4월 중순까지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대. 김명시의 어머니도 대단한 분이시고, 그런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으신 것 같구나. 1925 4월에는 오빠 김형선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을 했단다. 당시만 해서 공산주의는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새로운 사상이었어. 이후 스탈린의 공산당, 김일성의 공산당으로 변질되기 전의 공산당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은 시절이었단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세계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 유학을 갈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20명이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중에 김명시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도 김명시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단다. 김명시는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이란 곳에서 공부를 했어. 그리고 그곳에서 권오채와 친해져 연인 관계가 되었단다.

김명시는 우수장학생으로 뽑혀 상해로 파견을 하게 되었어. 애인인 권오채는 모스크바에 남고, 혼자 상해로 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어. 당시 상해는 너희들도 알다시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으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고, 우리나라의 공산당원들도 활동을 많이 하는 곳이었단다. 상해에 도착한 김명시는 지령에 따라 조봉암과 찾아가 그와 함께 활동하였단다. 조봉암이라는 분도 독립운동을 하신 유명한 분인데,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구나. 김명시는 모스크바에서 함께 공부했던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에 대한 안부를 전해주자, 조봉암을 다시 난감해 하면서 상해에서 다른 여자와 생활하고 있다고 했어. 그의 사생활이라고 뭐라 할 수 없었지만, 다소 실망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지만 조봉암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어. 상해에 있으면서 오빠 김형선의 소식도 전해들 었단다. 광둥 지방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어.


2.

그런데 당시 중국 상황이 좋지 않았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지. 조선 공산당원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그런 중국의 내전 상황이 달갑지 않았지만, 중국 공산당을 지원해주어야 했어. 모스크바에 있던 권오채도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넘어왔고, 상해에 찾아와 김명시와 다시 만났단다. 1928년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 해체가 결정되었어.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 중국 공산당에 합류할 것이 결정된 거지. 상해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원들의 반발이 심했어. 우리나라가 나라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된 거니, 화가 났을 것 같구나. 김명시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지역에 가서 조선공산당 해체에 대해 당원에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반발이 커서 쉽지 않았단다. 이후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중국의 내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비참한 인민의 삶을 직접 목격하였단다.

임무를 마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는데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어. 연인인 권오채가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어. 무척 힘든 시간이었어. 김명시는 상해에 머무르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때 교류했던 이들 중에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고명자 등이 있었어. 이 분들은 아빠가 재미있게 읽은 조선희 님의 <세 여자>라는 책에 등장하는 분들이라 더 반갑더구나.

국내 공산당 재건을 위해 이상훈과 함께 국내 잠입을 하게 된단다. 7년만에 다시 온 조국이었어. 인천에 있는 성냥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는데, 갑자기 다른 명령을 받고 이동하게 되었고, 이때 고명자를 만나게 되는데, 고명시가 말하길, 김명시의 국내 잠입을 일본에서 알게 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다시 상해로 도망가라고 했어. 오빠인 김형선도 수배령이 내려져서 함께 도망가라고 했어. 하지만 도망가는 중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갇히게 되었단다. 온갖 고문이 이어졌고 힘든 감옥살이였어. 무려 7년이나 감옥에 있다가 1939년에 출옥했단다. 오빠 김형선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이었고, 엄마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

멀리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독재와 횡포 소식이 전해졌는데, 김명시에게는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을 거야. 공산주의 사상이 그들에게 희망이었는데, 한 사람의 독재로 그렇게 변질되고 말았으니 말이야.


3.

감옥에서 나온 김명시는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어. 팔로군에서 옛 동료인 김무정이 김명시를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듣고 김명시는 팔로군으로 이동하여 김무정과 해후한단다. 다시 조선의용군의 지휘관 자격으로 활동하는 김명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같은 부대를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것 같구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 지원했었고, 조선의용대의 화북지대 수속이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조선의용군은 공산당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조선의용군의 총사령관은 김무정이 맡게 되는데, 김무정과 만난 이후 김명시는 이 조선의용군의 지휘관이 된 거야. 위 내용은 이 책에 나온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인데,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차이를 좀더 찾아봐야겠구나.

조선의용군의 지휘관이 된 김명시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에 힘썼단다. 그들의 노력들이 커다란 독립운동 줄기에 보태져서 1945 8월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어. 조국에 돌아온 김명시. 하지만 1948년 공산당 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단다. 젊은 시절 내내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건만 기다리고 있던 것이 사상 검열에 의한 감옥행이라니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까.

더 가슴 아픈 소식은 김명시가 얼마 후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어. 당시 나이는 42살이었대. 이 자살 소식을 누가 믿겠니. 항일 투쟁에 젊음을 바친 여전사가 그깟 일로 자살을 하다니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자신의 체포의 부당함을 주장했을 텐데 말이야. 해방 후 우리나라의 역사는 더 아픈 역사로 가득 찬 것이 안타까울 뿐이로구나.

김명시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대부분 안 좋은 결말이었어. 오빠인 김형선도 감옥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얼마 안되어 병에 들어 죽었고, 동생 형윤은 광복 직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들의 이런 노력을 후세의 사람들이 알아주어야 할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22년에 김명시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고 하는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보상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행이구나. 우리들도 꼭 기억하자꾸나. 항일혁명전사 김명시.


PS,

책의 첫 문장: 썰매를 끄는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회색 짐승 서너 마리가 눈의 바다를 헤매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김명시 일가와 동지들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고 무려 77년이 지난 후였다.


김명시의 말에 늦잠을 자던 알료샤가 슬그머니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세 여자의 대화 속에 레닌이나 스탈린이란 단어만 나오면 잔뜩 긴장하던 알료샤였다. 하지만 고리키라는 이름이 나오면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세 여자가 고리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했다. 알료사뿐만이 아니었다. 혁명 소설가 고리키에 대한 러시아인의 특별한 사랑은 석류 알갱이처럼 붉고 투명한 연어알절임과 당근 빛깔이 나는 묽은 야채수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것 같았다. 세 여자가 열차 식당칸에서 고리키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알아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역시 레닌의 나라였다. 관공서 어디를 가도 1년 전에 사망한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 P11

"내가 보기엔 당신네 공산당도 오십보백보요. 나는 사서삼경도 못 읽는 촌부이지만 당신네들이 자유시에서 조선인 독립군을 수천 명이나 학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네들은 이번에 중국인 지주들을 때려죽이자는데, 아니 지금 우리가 못사는 게 정녕 그 사람들 때문이란 말이오? 오히려 반대가 아니오? 그 사람들 아니면 우리는 벌써 첫해에 굶어 죽었을 거요. 일본 놈들을 물리치자는 말까지는 알아듣겠지만 그 이상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소이다. 나는 자기네가 권력을 잡으면 다 될 것같이 떠드는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겠소이다. 어느 놈 할 것 없이 백성의 고통을 팔아서 권세를 누리려는 것뿐이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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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수학책 - 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벤 올린 지음, 김성훈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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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서 <더 이상한 수학책>이란 책을 알게 되었단다. 미적분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책 같았어. 예전에 읽은 <친절한 과학책> 같은 류의 책 같았어. 재미있는 그림과 함께 미적분을 설명을 해주는 책. 이제 몇 년 후면 너희들도 미적분을 배우게 될 텐데, 미적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책을 구매했단다. 알아보니 <더 이상한 수학책><이상한 수학책>의 후속편이더구나. 그래서 <이상한 수학책>도 구매를 해서 순서대로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이상한 수학책>을 먼저 읽었단다.

읽은 지는 꽤 되었는데, 우리가 여행을 다녀와서 이제서야 너희들에게 책 이야기를 하는구나. 책 읽은 지 며칠만 지나도 기억이 잘 나는데, 한 달이나 지나서 이야기하려니 ㅠㅠ  기대했던 것 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짧게 마쳐야겠구나. 여행으로 인해 밀린 독서 편지가 어마어마하구나.

<이상한 수학책>의 지은이는 벤 올린이라는 사람인데, 수학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고, 여러 매체에 수학과 교육 관련 글을 쓰기도 한대, 학교에서도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대. 이런 경력으로 자신이 쓴 글들과 경험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상한 수학책>인 것 같구나. 책의 시작은 수학과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어.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이야기이니까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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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

하지만 수학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수학자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전략을 채용한다. 바로 심상 만들기다. 수학자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 본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기술적 세부 사항들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연결해 본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자들은 읽을거리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곳에서 즐거움, 유머, 결벽증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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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학의 분야는 꽤 많은 편이란다. 너희들 수학 교과서의 차례만 봐도 꽤 되잖니. 이 책에서 다룬 수학의 분야는 기하학, 확률, 통계 이렇게 세 분야란다. 기하학, 확률, 통계에 관해서 이야기해준 이유는 이 분야들이 우리 일상 생활과 꽤 밀접한 분야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감탄사를 내뱉을 만한, 그런 내용들이 없어서 좀 아쉬웠단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학과 역사의 관련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는데, 지은이는 수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이지만 사회문제나 역사 관련된 부분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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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역사는 작은 규모에서는 단순하지만 큰 규모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하루 단위의 작은 규모에서는 거칠게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 평균하면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날씨와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역사는 코흐 곡선과 비슷해서 모든 수준에서 카오스가 등장하고 모든 규모에서 복잡성이 드러날까? 머릿속에서 이런 비유들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 마치 한 화면에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파일 세 개가 동시에 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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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지만, 읽은 지도 오래되었고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아주 짧게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원래 너희들에게 미적분을 설명해주려고 구입했던 <더 이상한 수학책>도 조만간 읽어야할텐데, 그 책은 좀 더 재미있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이 책은 수학에 관한 책이다.

책의 끝 문장: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어째서 수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을까? 수학은 어떻게 동전과 유전자, 주사위와 주식, 책과 야구 등 서로 상관없는 영역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수학이 생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된다. - P8

비안네가 드무아브르의 정리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안네는 자신을 지식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만면 나의 통찰은 두꺼운 머리뼈 안에 갇혀 어눌한 혓바닥을 통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없는 수학자는 그날의 나처럼 자기 생각 속에 섬처럼 혼자 고립되어 남에게 닿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 자신이 아는 진리를 공유할 수 있는 수학자는 사람들에게서 감사의 마음과 영웅 대접을 받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 P68

몸집이 큰 동물은 내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가 쉽다. 반면 작은 동물은 표면 비중이 높아서 체온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다. 손가락, 발가락, 귀 등 표면 비중이 높은 사지 말단이 추위에 제일 약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 북극곰, 물개, 야크(티베트산 들소-옮긴이), 무스(북미산 큰 사슴-옮긴이), 전설 속 설인 새스쿼치 같은 대형 포유류만 사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표면 비중이 높은 생쥐가 북극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중위도 지역에 사는 생쥐도 열 손실을 감당하려면 하루에 자기 체중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어야 한다. - P121

과학은 결과 절대적 확실성이나 슈퍼맨 같은 완벽함으로 정의되었던 적이 없다. 과학에서는 언제나 건강한 회의주의 시각에서 모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가능 중요했다. 이런 싸움에서 통계학은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이다. 통계학이 과학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데 한몫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한몫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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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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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정무 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 7권을 읽었단다. 5권부터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했어. 르네상스 이야기보다 보니 주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7권에서는 로마와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주로 이야기되었고,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우리가 로마, 피렌체 여행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거에 맞춰 읽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구나. 여행 중에 책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봤는데,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질 않아서 너희들에게 설명을 못 해준 것이 안타깝더구나. 이 놈의 저질 기억력.

로마는 고대 로마 이후 오랫동안 세계의 수도라 불리며 이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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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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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마가 14세기에는 암흑기를 겪게 돼. 쓰레기와 폐허의 도시로 불렸고, 인구도 2만도 안되었대.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10만이라고 했으니 로마를 암흑기라고 할 만했지. 로마에 머물고 있던 교황도 이때는 로마에 안 있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다고 하는구나. 15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다시 로마로 왔대. 그리고 15세기 후반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고, 16세기에는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지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본당은 1506년부터 1626년까지 120년이나 걸렸고, 광장을 정비하는데 50년이 더 걸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 선출에 있어 영향력 있는 집안들의 알력 다툼도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영향력이 셌던 메디치 가문에서 많은 교황을 배출했다고 하는구나. 16세기에만 메디치 가문에서 3명의 교황을 배출했대. 교황이 바뀔 때마다 건축 붐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로 인대 로마가 더욱 발전한 거 같구나.

16세기 유럽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고들 한단다. 교황과 황제. 여기서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란다. 당시 양쪽의 권력이 엇비슷하여 교회 성직자의 인사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대. 황제 가문 중 유명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15세기부터 300년 넘게 황제를 했다는구나. 합스부르크는 친족 결혼을 많이 해서 유전병이 발생했고, 심한 주걱턱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단다.  

합스부르크 출신 황제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카를 5세가 있었단다. 넓은 영지를 물려받아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어. 역시 땅이 힘이구나.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갖게 되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전쟁까지 벌여졌어. 그런데 당시 동쪽에서 오스만이 진격하고 있던 때라서, 교황 바오로 3세가 화해시켜서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단다. 로마가 발전하고 사람들도 모이다 보니 인문주의도 등장하였어. 특히 15세기 보급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책의 시대가 되었어. 이는 곧 지식혁명이라 할 수 있었지.


1.

당시 영향력이 많았던 메디치 가문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명력이 있냐를 기준으로 삼았대. 그래서 미술작품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작품의 대가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였단다. 미켈란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란다. 그가 남긴 조각의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단다. 너희들도 이미 들어봤을 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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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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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이었는데 활동은 주로 로마에서 했단다. 그는 건축에서 큰 재능이 있었는데,

그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교황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는구나. 라테라오 대성당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야. 중간에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카피톨리노 언덕도 있대. 그야말로 로마의 하이라이트로구나. 미켈란젤로는 칼피톨리노 광장과 주변 건물을 설계했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여한 건축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구나. 그곳에 있는 작품 중에는 <피에타>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이것을 미켈란젤로 24살에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서 너희들도 익숙하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인가, 싶어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외계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로마에서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정부의 요청으로 잠시 피렌체에 돌아와 작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란다.  그 높이가 5.17미터나 되는데,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이란다.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 상 기억나지?

다시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 율리오 2세 무덤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얼마 못가 중단되었어. 왜냐하면 더 큰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짓기로 한 거야. 먼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게 되었단다. 그 크기는 13.2x41.2미터라고 하니 그 크기가 엄청난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려 채운단 말이야. 그런데 천장에 그려야 한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겠니..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사양했대. 자신은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라고 했거든.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전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었대. 1504년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라는 곳에서 미켈로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각각 한쪽 벽면씩 맡아서 벽화를 그리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각자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 중단되었대. ,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엄청난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아쉽구나.

다행히 미켈란젤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아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성경 이야기를 구성하여 천장화를 그렸단다. 이 천장화에 유명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담의 창조>가 아닐까 싶구나. 이것도 기억 나지?^^ 당시 벽화를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기법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는 기법이래. 그건 그렇고 천장에 그림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그리면 목이 남아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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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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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도 경쟁자가 있었으니, 라파엘로였단다. 바티칸 박물관의 정문 위에는 두 사람의 조각상이 있는데,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고, 하나는 라파엘로의 조각상이란다. 안타까운 것은 라파엘로는 1483년생인데 37살에서 요절을 했단다. 그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거의 90세까지 살았대.(1564년 사망) 라파엘로는 우르비노라는 곳의 출신이니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보다는 출신은 좋지 않았단다. 하지만 실력 하나로 주류가 되었어. 교황집무실의 벽화를 그렸대. 교황의 신임을 얻은 건축가 중에 브라만테가 있었는데,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와 동향이라서 라파엘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력은 뛰어났단다. 참고로 브라만테가 만든 건축물 중에 유명한 것은 우리도 본 바티칸 시국의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라는 벨데데레 정원이라고 하는구나.

다시 라파엘로 이야기를 하면 그는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때 실력이 급상승했다고 했어. 이 시기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활약하던 시기라고 하니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승화시킨 것일 거야.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집무실의 벽화 중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테네 학당>이 있었지.

당시 고대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콜레세움의 아치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팔라초에 아치 형태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구나. 팔라토는 유력 가문의 저택으로 궁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구나.


2.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미안한데 건너뛰어야겠구나.

바로 피렌체로 넘어갈게. 피렌체라고 하면 아빠는 오래 전에 읽은 <열정과 냉정 사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는구나. 많은 인기를 끌어 영화까지 제작되었지만, 아빠의 취향은 아니었어. 아무튼 그 소설의 주요 배경이 피렌체였단다. 특히 두오모 대성당. 정식 명칭은 피렌체 대성당이란다. 피렌체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 5권 이야기하면서 해 준 것 같구나.

이번 책에서는 16세기의 피렌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피렌체의 강력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 그들이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기념하여 시민들에 의해 추진하여 만든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스 상이라고 하는구나.(1504)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점령하고 다비드 상에 대항마로 만든 것이 반디넬리의 헤라클라스 상이라고 하는구나. (1534) 헤라클라스는 근육도 더 크고 무섭게 만들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가문의 힘을 작품에 표현하려고 해서 그렇다는구나. 두 조각상은 모두 시뇨리아 광장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두 동상부터 먼저 찾아보았단다.

르네상스 후기에는 하이 르네상스라고 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비판하는 기류가 있었대. 그러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리모델링하는 만행도 했대. 하이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기 전인 1520년부터 1600년 정도까지를 매너리즘의 시대라고 한다고 한대.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하고피렌체의 대공 중에 코지모 1세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 그가 아내를 위해 지은 피티 궁전이 있는데, 그 크기를 보면 아내를 엄청 사랑한 것 같구나. 그리고 코지모 1세가 출퇴근하는 길을 회랑으로 만들었는데, 그 회랑을 바사리 회랑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 갔었던 베키오 다리의 그 길이 바로 바사리 회랑의 한 구간이었단다.

….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의 이야기도 했는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인 티치아노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팔라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읽고 직접 그곳에 가서 작품들을 보았더니 감회가 새롭더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록 아빠의 저질 기억력으로 많이 안 보였지만) 작품들도 새롭게 보였단다. 여행 다녀온 지도 꽤 지났는데, 아직 그 작품들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들이 괜히 명작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지만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번 강의는 로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책의 끝 문장: 바로크 미술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에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 P32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 P143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 P195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 P365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 P417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 P422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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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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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정지아 님의 신간 에세이를 읽었단다. 아빠가 정지아 님의 책은 이번에 세 번째구나. 앞선 두 작품이 너무 좋아서 신간 소식에 바로 주문했단다. 이번에 나온 책은 에세이란다. 책 제목은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책 제목에 느껴지는 한 글자 단어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이 떠오를 거야. 너희들처럼 어린 이들에게는 이 안 떠오르겠지만 말이야. 술을 먹어본 이들이라면 책 제목을 보면 술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구나. 그래, 이 책은 술에 대한 경험담을 적은 글이란다. 술에 대한 경험담으로 책 한 권을 낼 정도면 지은이 정주아 님은 애주가가 아닐까 싶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이런 애주가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알코올중독은 아닌 것 같구나. 술을 좋아하지만 적당히 술을 즐기고 절제하실 줄 아는 그런 분인 것 같았어.

지은이 정지아 님은 고향이 구례인데, 아빠도 구례에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구례라는 곳을 좋아한단다. 너희들도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구례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 산장에서 하룻밤 잔 적도 있고, 노고단 꼭대기에 올라가서 멋진 풍경도 감상을 했었잖니. 아마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날 거야. 너희들과 함께 간 것 이외에도 아빠는 여러 번 갔었단다. 주로 지리산 등반의 출발지로 갔었지. 아빠가 산을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지리산은 참 좋더구나.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큰 산답게 나를 안아주는 그런 느낌도 받았어. 다녀오면 다리가 아파서 며칠 절룩거리기도 하지만, 그 바람, 그 냄새, 그 경치는 잊을 수가 없단다. 지은이 정지아 님은 그런 구례가 고향이라고 하시고, 타지 생활하시다가 지금은 다시 구례에서 생활하신다고 하니  좀 부럽구나. 정지아 님도 지리산을 무척 좋아하셨나 봐. 타지에 사셨을 때도 지리산이 그리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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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그 시절,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지리산이 그리웠다. 백운산을 뒷산으로, 지리산을 앞산으로 보고 자란 탓인지 모른다. 서울 살 때도 나는 언제나 산 밑에서 살았다. 집을 고르는 조건의 첫째가 산이었다. 돈 없던 대학원 시절에는 북한산 밑에 살았고, 그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이어지는 곳에 살았다. 등 뒤에 산이 버티고 있어야 숨이 쉬어졌다. 서울 사방이 산인데 가진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는 수배자가 왜 산에를 못 갔냐고? 그 시절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산에 가면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나 푯말이 붙어 있었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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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학생 운동을 해서 지명 수배를 받고 3년간 숨어 지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지리산이 너무 그리워 수배자의 신분으로 무작정 지리산을 갔었다고 하는구나. 신분을 숨긴 채 뱀사골 산장에서 혼자 패스포트라는 싸구려 양주 한 잔 하고 있었는데, 정지아 님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대. 그렇게 숨어 다녔는데, 지리산 산골짜기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다니알고 봤더니 그날 그곳에 묵었던 다들 이들도 노동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랜 시월이 지나고 그들은 기억나지 않고 뱀사골 산장에서 마셨던 패스포트만 기억에 남는다고

 

1.

태어나서 처음 술을 마신 날은 다들 기억할 것 같구나. 고등학교 때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다들 먹었단다. 고딩 때 다들 조금씩 겉멋이 들어 있었고, 그 겉멋을 부리기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술이었으니아빠도 친구들과 맥주를 처음 먹어봤는데, 탄산 음료를 먹지 않던 아빠는 맥주 한 모금을 먹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단다. 지금이야 가끔씩 시원한 맥주를 즐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지은이 정지아 님도 처음 술을 함께 한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단다. 3 겨울방학 대입 시험을 끝나고, 친구들과 밤새며 놀던 시절, 지은이의 부모님이 술상을 차려 주시고 자리까지 비켜주신 에피소드그 글을 읽는데, 괜시리 아빠도 눈이 뜨거워지더구나. 그래, 그렇게 친구들과 밤샘 이야기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적이 있었지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어 보이는데 갈 수 없다는 것이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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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 중 둘은 미국에 있어 얼굴 보기 어렵고, 국내에 있는 친구들도 각자의 일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드문드문 안부 전화나 주고받는 정도다. 그래도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거나 어색한 날이면 포천에서 그날 밤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

….

지은이 정지아 님은 술 종류에 관계없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특히 양주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시바스리갈, 조니 워커 블루, 오량 살루트, 맥켈란 1926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고, 위스키, 보드카 등에 관한 에피소드들도 있더구나. , 아빠는 양주는 너무 독해서 잘 안 먹었는데, 지은이 정지아 님께서 너무 예찬을 하시다 보니 아빠도 그런 술들을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구나. 술까지 땡기게 하는 책이로구나. 술 회사들이 이 책에 광고비를 좀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

술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다 보니 아무래도 친구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해주더구나. 그러면서 아빠의 옛 추억 속의 사람들도 많이 생각나게 했어. 아빠가 최근에는 술자리가 많지 않아서 아빠의 술에 관한 추억은 거의 오래 전 일이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많이 떠올랐단다. 다들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이 책은 지은이 정지아 님의 글 솜씨로 재미를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추억을 잔뜩 소환해 주었단다. 그것이 더욱 좋았어.

작년에 처음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처음 알게 된 정지아 님. 그 동안 어디 숨어 계셨던 건 가요? 정지아 님의 책들이 다 재미있구나. 이 책에도 소개 된 <빨치산의 딸들>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 때문에 수배를 당하기도 하셨다고 하는데, 책 제목부터 강렬하구나.

 

PS,

책의 첫 문장: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 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을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의 블루와 요즘 나의 벗이 된 참이슬에게 바친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 P106

이런 젠장, 달팽이가 존나 빨라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존나 빠른 달팽이는 시바스리갈 700밀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꽐라가 되었다. 가관이었겠지만 뭐 괜찮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A는 맥주 세 캔에 취해서 나보다 빨리 기억이 끊겼고, 내 기억도 끊겼으니,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쿨하게. 어디에 가닿건 존나 빨리는 달려보자.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 P164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보다 깊고 넓다고 생각했던 A 또한 나와 똑같이 청춘의 허세를 부렸을 뿐이라는 걸. 청춘은 허세다. 그러니까 청춘이지. 스무 살 언저리의 A는 인생도 문학도 독고다이, 쓸쓸하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런 찬란하게 유치한 마음으로 홀로 걷고 홀로 마셨던 것이다. - P195

다정한 제자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 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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