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방실판막은 심방에서 심실로 들어가는 혈액을 조절하지만, 동시에 심실이 수축해서 온몸으로 혈액이 심방으로 역류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혈액의 역류를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질긴 섬유인 힘줄끈(건삭)을 흰김수염고래의 심장에서 열 줄 이상 볼 수 있다. 진짜 끈처럼 생겨서 심금이라고도 부르는 이 끈의 주요 성분은 콜라겐이라고 하는 구조단백질이다. 힘줄끈의 한쪽 끝은 심실 바닥에 튼튼하게 박혀 있고 반대편 끝은 판막첨판에 붙어 있어서, 심실이 수축할 때 판막첨판이 심방까지 밀려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심방과 심실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47-48)

이렇게 작은 동물들이 조증환자 같은 행동을 유지하려면 세포에 극단적으로 많은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해야 한다. 그만큼의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하려면 심박수를 늘려서 혈액을 더 자주 펌프질해 산소와 영양분을 신체의 각 부위로 보내주어야 한다. 그 결과 이런 동물들의 심박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높다. 벌새의 심박수는 분당 1260회에 달하고 뒤쥐는 척추동물 중에서 최고에 속하는 분당 1320회에 이른다. 대략 35세 인간의 최고 심박수의 일곱 배에 달한다.


(74)

하지만 투구게는 회복력이 뛰어나다. 가장 로해된 쿠구게의 화석기록은 4 45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최초의 공룡 출현보다 대략 2억 년이나 빠른 시기다. 투구게는 삼엽충을 포함해 한 때 번성했던 절지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며, 아마도 가장 유명한 고대 무척추동물일 것이다. 투구게만큼 지구상에서 오래 존재해온 동물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을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


(85)

헤모글로빈은 철을 함유하고 있어, 산소가 철과 결합한다. 또 헤모시아닌과는 달리, 헤모글로빈은 혈액 안을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는다. 헤모글로빈은 적혈구라는 세포에 의해 운반되는데, 적혈구의 수명은 대략 4개월이다. 또한 헤모글로빈의 중요한 구성 성분은 구리가 아니라 철이기 때문에, 혈액은 산화되어도 파란색을 띠지 않는다. 산소와 결합하는 분자의 색깔 변화는 우리 환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경계나 출입제한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된 철조망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면 붉게 녹이 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176)

박쥐를 비롯해 동면하는 동물들은 겨울철에 산소와 영양분을 덜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온도 외에도 위와 같은 대사율 하락은 동면의 중요한 특징이다. 동면하는 곰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떨어지듯이, 평소에 분당 500~700회까지 올라가는 박쥐의 심박수도 동면 기간에는 분당 20회까지 떨어진다. 이 기간에는, 추위에 또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박쥐도 혈액을 사지로 보내지 않고 몸의 핵심부로 보내 가장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고 온도를 유지한다. 추위에 떠는 사람과 동면하는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동면하는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동면하는 동물의 심장은 저온저산소 조건에서도 세동을 일으키지 않고 정상적으로 가능하도록 진화했다는 점이다. 세동은 심장근육 섬유가 불규칙으로, 동기화되지 않고 수축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186)

돼지의 심장은 크기나 해부학적 구조, 기능에 있어서 인간의 심장과 매우 비슷하다. 암퇘지는 한배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는 점도 중요했다. 조직부적합성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실험용 돼지의 장기가 사람의 면역계에 의해 거부당하는 사태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돼지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PERV)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유전자 시퀀스를 제거할 수도 있다. PERV는 사람에게도 감염될 수 있기에 이는 매우 중요한 진보다. 최근 들어 연구자들이 이렇게 유전자를 재조합한 돼지의 장기를 인간이 아닌 영장류에게 이식하기 시작했고, 2021년 이후에는 임상 전 연구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된다.


(252)

다윈이 사망한 이후 140년의 세월 동안 여러 연구자들이 이 위대한 과학자의 죽음의 원인을 가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진단 내린 병명에는 불안장애의 일종인 광장공포증, 브루셀라증이라 불리는 박테리아 감염증, 만성 비소중독, 만성 불안증후군,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쇠약, 만성 장 질환인 크론병, 주기성 구토 증후군, 우울증, 극도의 심기증, 위궤양, 통풍, 유당 불내증, 내이의 장애로 발생하는 메니에르병, 공황장애, 미토콘드리아성 뇌근육병증, 젖산산증, 뇌봉중양증상, 모계유전의 신경근계 이상, 정신신체증 피부질환 그리고 동성애 억제 등이 있다.


(274)

이러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의 패션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길고 치렁치렁하게 끌리던 치마는 집 안까지 박테리아를 몰고 들어온다는 이유로 더 이상 입지 않았으며, 코르셋은 혈행을 막는다는 이유로 판매량이 급감했다. 복잡한 속옷 역시 결핵의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남성들의 스타일도 영향을 받았다. 구레나룻이든 턱수염이든 병균이 꼬인다고 생각해서 인기가 시들어졌다.


(314-315)

육류 소비도 증가하고 있다. 세계 전체의 육류 소비량은 지난 50년 사이에 네 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순환계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비교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있다. 전쟁으로 인해 스트레스는 크게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노르웨이에서는 심장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환자는 20퍼센트가 감소했다. 왜 그랬을까? 가축을 모조리 독일군에게 징발당하여 육류나 계란, 유제품을 먹을 수 없었던 노르웨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채소, 곡류, 과일 같이 저지방 식품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심장질환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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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양쪽 강변에 완만하고 묵직한 자태로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는 진초록으로 치장한 몸을 압록강에 그림자로 담그고 있었다. 느린 파도의 굽이침처럼 봉우리 봉우리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그 긴 산줄기는 동쪽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지고 억세지면서 그 모습을 아스라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 산줄기를 따라서 따라서 가면 이르게 되는 곳, 그곳이 백두산이었다. 그러니까 압록강 양쪽으로 뻗어내리고 있는 산줄기는 사방팔방으로 뻗치고 있는 백두산의 서쪽 일부 자태였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서 자취를 감추는 산줄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드리워진 백두산의 머리카락 그 한오라기 끝이었던 것이다.

(14)


나남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식으로 꾸며졌다고 했다. 나남은 그야말로 군대가 중심이고 군이니 주인인 도시였다.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건물이 시가지 중앙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원형공원을 중심으로 해서 일곱 개의 도로가 방사선으로 곧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로들에서 다시 가지를 치며 다른 도로가 뻗어나가기도 했다. 나남은 억센 산줄기 많기로 유명한 함경북고의 산들로 에워싸여 있는 자연요새 같은 분지였다. 그 궁벽한 오지에 어찌 그리 멋들어진 서양식 건물들을 즐비하게 세워 도시를 이루어낸 것인지 양치성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나남에서는 조선사람들의 집이라고는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간에 단 한 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온통 서양식 관공서들과 일본식 상점이나 집들로 차 있는 것을 양치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군산이 개명한 줄 알았는데 군산은 나남에 댈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의문은 한마디의 설명으로 쉽게 풀렸다. 일본군이 처음 나남에 주둔한 것은 노일전쟁이 끝나면서였고, 그때 나남은 조선사람들 3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산 한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10년 세월 동안에 순전히 일본사람들 손으로 새 도시가 꾸며졌으니 한옥이 있을 리 없었다.


(27)

나철은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통해 자신이 왜 목숨을 바치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첫째 배달민족의 번성이 걸린 대교를 위해 죽는 것이며, 둘째 한배님의 은혜를 갚지 못한 죄로 한배님을 위해 죽는 것이며, 셋째 온 천하의 동포 형제자매가 암흑세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대종교가 더욱 번창하고, 그 힘으로 일본을 물리쳐 배달민족이 광명을 되찾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84)

동회는 향촌 어디에서나 저마다 운영하는 마을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동네마다 당산나무가 있듯 동회가 없는 마을은 없었다. 동회에서는 마을을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하는 대소사에서부터 공동의 질서와 규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모임이었다.

동네제사 날짜, 계모음, 두레와 품앗이 순서, 농로나 수로 보수의 부역, 명절놀이 계획, 예절과 풍기, 각종 부고, 남녀 품삯, 구휼 같은 것을 결정해서 서로서로 힘을 합쳐 돕고 마을이 화목하고 평온하게 유지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여러가지 마을일들을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규범이 바로 향약이었다.


(109)

윤철운은 앉음새를 고치며 목례를 차리고는, “제가 동지들을 만나고자 한 뜻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연해주는 사태가 급박합니다. 일본군은 반혁명군인 백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우리 조선 사람들을 회유하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적군을 지원하면서 일본군을 치는 빨치산투쟁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건 소비에트 혁명을 돕는 길인 동시에 우리 조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일본군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내야만 우리의 독립투쟁지를 회복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혁명을 도와야 혁명이 완수되면 소비에트는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선언에 입각해 우리의 독립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돕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단을 조직했고, 단원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동지들이 오셨다기에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찾아뵌 것입니다.”


(120)

만주땅의 가을은 너무 짧아 9월로 접어들면서 며칠 간 가을빛이 스치는 것 같으면서 나뭇잎들이 와짝 단풍이 들었다. 그 단풍들도 며칠이 못가 낙엽 지며 10월의 문턱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리고 설한풍이 몰려오는 11월의 만주땅에 뜻밖의 열풍이 일어났다. 독립지사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이었다. 그 독립선언서는 만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은식 신채호 박규식을 대표로 하여 중국 전역을, 이동휘 이범윤 등을 대표로 하여 노령 일대를,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을 대표로 하여 미주지역까지 포괄하는 그야말로 범민족적 대표성을 확보한 최초의 대한독립선언서였던 것이다. 1918 11 13일 터져오른 함성이었다. 사람들은 그 선언을 무오(戊午)독립선언이라고도 불렀다.


(135)

백관수 : ……오족(吾族)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모든 자유행동을 수()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열혈의 투쟁을 불사할 것이다. …… 일본이 만약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응치 않으면 오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겠다. …… ()에 오족은 일본 또는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여 만불성(萬不成)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한다.


(203-204)

, 그 말언 맞구만요. 허나 독립단체라고 혀서 다 똑겉지가 않다는 것얼 명백허니 알아둬야 헐 것이구만요. 시방 독립운 단체덜언 서로 다른 두 가지 주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디, 그것이 무엇인고 허니 보황주의허고 공화주의로구만요. 요것이 무신 뜻이냐 허면 우리가 뺏긴 나라럴 되찾자고 독립투쟁얼 허기넌 허는디, 누구럴 위허는 어떤 나라럴 세울 것이야 허는 중대서럴 논허는 것이올시다. 다른 말로 복벽주의라고도 하는 보황주의넌 나라에 주인언 임금이니 독립운동도 임금얼 다시 받들기 위해 해햐 헌다는 것이고, 공화주의넌 그 반대로 나라에 주인언 백성이니 독립운동도 온 백성의 뜻얼 받드는 나라럴 세우기 위해 해야 헌다는 것이오. 우리 군정부에서넌 공화주의럴 내세우는 것이고, 아까 그 대한독립단언 복벽주의럴 내세움스로 여러분덜얼 끌어갈라고 헌 것이구만요. 그러니 쌈이 안 일어날 수가 있겄소?”


(213)

본국에서 3.1 만세가 일어나고 그 불길이 서간도로 옮겨붙자 북간도의 여러 단체들은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 단체들은 대종교의 중광단, 기독교계의 간민회, 공자를 모시는 공교도, 성리교 단체 등이었다. 그들은 시위가 벌어진 그날 저녁 연길현 국자가에서 통일조직으로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4월에 접어들어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바꾸면서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간부직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광단에서는 그 사태를 묵과하지 않았다. 외래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대종교들로서는 기독교인들의 그런 독주를 용납할 수 없었고, 또 그동안 많은 학교를 세우고 무오독립선언을 추진하는 등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왔던 중광단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광단은 5월에 대한국민회를 탈퇴하여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것이다.


(219)

11월의 만주는 한겨울이었다. 북풍은 칼날이었고, 하늘도 땅도 다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엮어내는 소문이나 소식들은 전혀 얼어붙을 줄을 모르고 싱싱하게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서간도의 군정부가 명칭을 바꾸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새로 붙인 이르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고 했다. 그 까닭인즉 상해임시정부에서 여운형을 파견하여 군정부도 상해임시정부에 통합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군정부의 총재 이상룡은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정부를 가져서야 되겠느냐고 간부들을 설득하여 <군정부>라는 명칭을 양보한 것이라 했다. 그것은 곧 상해임시정부를 유일 정부로 인정함과 아울러 그 위상을 높여주는 조처였던 것이다.


(249)

자아, 들어보시오.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학사가 되실 정도로 철저한 유학자셨오. 헌데 열강의 세력들이 우리나라에 뻗치면서 국운이 쇠퇴해가자 그분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소.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유학으로 안된다는 걸 깨달으신 것이오. 그래 구분은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면서 신문에 논설을 쓰는 논객으로 변모한 것이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길 것이 확실해지자 백성들을 일깨우고 힘을 주기 위해 을지문덕이며 이충무공의 전기를 짓기도 했오. 그러다가 왜놈들의 마수를 피해 독립운동을 펼치려고 만주로 망명했소. 만주에서 그분은 대종교도가 되셨소. 대종됴는 조국의 독립 실현을 목표로 삼는 단군신앙이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상해임정의 설립을 놓고 보황주의냐 공화주의냐로 국체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때 공화주의를 가장 열렬하게 주장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요? 바로 신채호 선생이시오. 보황주의자들은 수만 많았지 논쟁에서 신채호 선생을 이길 수 없으니까 어찌했소? 젊은이들을 시켜 감금까지 시켜가며 국체를 보황주의로 결정하려고 했소.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소.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이 아니었더라면 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우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채호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절대적인 목표로 세워놓고 일거일동을 그 수단으로 총동원하시는 거요. 이동휘 선생도 신채호 선생과 마찬가지라 생각하오.”


(250)

그러니까 그 문제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게 없소. 아까 말한 것과 똑같이 이해하면 되는 거요. 상해임정이야말로 최대 목표가 뭐겠소? 대한민국의 독립 아니겠소? 그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상해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운 속에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들이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오. 그 연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고, 소중한 결실인 것이오. 그런데 그렇게 주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정부를 이룬 것은, 내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 임정 요인들은 독립을 달성시켜야 하는 우리의 특수 상황을 이해해서 서로가 양보하고 인내해 가며 세계에서 유일한 성격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자니 오랜 논쟁을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런데 총독부의 왜놈들은 그 건설적인 논쟁을 조선놈들의 고질적인 파당싸움이니, 지방색을 드러낸 파벌싸움이니 했다는 것이오. 그건 임정이 설립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왜놈들이 고의적이고 악질적으로 임정을 모함하고 헐뜯으려고 지껄여대는 소리요. 그리고 왜놈들한테는 군국주의 하나밖에 없으니까 못하는 야만인들이오. 다시 말해 임정의 연합은 독립운동 방책의 시범이고 모범을 보인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들은 잘 이해해야 할 것이오. 다들 그렇게 이해가 됩니까?”


(286)

그 노랫소리는 금방 독립군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많은 목소리들이 그 노랫소리에 합해졌다.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노랫소리는 모든 독립군들의 마음을 끌어잡으며 뒤흔들고 있었다. 노래는 마침내 합창이 되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십년 동안데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대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탄환이 빗발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을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한 독립군사야

           나아가고 나아가고 다시 나아가라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최후의 네 살점이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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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대부분의 용어는 어원만 제대로 알아도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융도 마찬가지예요. 금융은 한자로 금 금()자 녹일 융()자를 써요. 여기서의 금은 광물 금(gold)이라기보다 돈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융의 경우 좁게는 녹인다는 뜻이지만, 크게는 기존과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융합’, ‘융통성등에 쓰이는 한자고요.


(33)

저축은행은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회사에 가깝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차이를 모르지만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은행인지 아닌지에 따라 문제가 생겼을 때 구제받을 수 있는 범위가 다르거든요. 은행은 사회 공익적인 업무를 일부 담당하는 만큼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습니다. 대신 관리 감독을 열심히 받아야 하고요. 은행 아닌 금융기관에는 그런 혜택을 주지 않는 대신 규제를 좀 더 느슨하게 적용하죠. 아무튼 이처럼 우리 주변엔 은행이 아닌 금융기관이 생각보다 많고, 보험사도 그중 하나예요.


(99)

금본위제 사회에선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비싼 금을 일일이 다 싸들고 다녀야 했으니 위험하고 비효율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은행에 금을 넣어두고 금 보관증을 받아 지폐처럼 사용하는 방식이 자연스레 발달한 거예요.

지폐가 있으면 금이 일상에서 사용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은행이 금고에 보관 중인 금보다 더 많은 액수의 지폐를 발행하면 돼요. 실제로 금본위제 당시 영국 중앙은행이 보관하고 있던 금의 양은 실제 유통되는 지폐의 액면가액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103)

결국 본위제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던 거죠. 시장 규모는 점점 커지는데 금과 은의 양은 한정돼 있으니 말입니다. 화폐를 새로 찍기 위해서는 광산을 뚫어 금은을 더 캐거나 국가와 가계, 기업이 금은 생산량에 맞춰 씀씀이를 줄이는 수밖에 없는데 현실적으로 둘 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된 미국이 금 실물을 화폐와 연동하는 일을 시도했습니다만 결국에는 한계를 느껴 포기하게 되죠.


(242-243)

실제로 당시 미국이 보유한 금은 세계 곳곳에 뿌려진 달러화와 교환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전면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어요. 금과 달러의 연약한 고리가 마침내 끊어진 거죠. 모두가 금 교환증이라 믿었던 미국의 달러화를 포함해 전 세계의 통화는 이때부터 한낱 종이쪼가리로 전락할 가능성을 안게 됩니다. 돈과 금을 영원히 결별하게 만든 이 사건을 닉슨쇼크라고 합니다.


(252)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달러의 지위를 지키려 하고, 중국은 달러화 대신 위안화로 석유 결제가 되도록 페트로위안 시스템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통화, 즉 기축통화를 발생하는 나라가 누릴 수 있는 막대한 정치, 경제적 이익 때문입니다.


(276)

게다가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는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화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해요. 만약 일본 국채를 해외에서 많이 샀더라면 이미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족족 일본 중앙은행을 비롯해 보험, 연기금 등이 대부분 사들이고 있어요. 쉽게 말해 일본 기관들의 자금을 정부가 매해 국채를 통해 빨아들이면서 다시 예산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288)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측정할 수 없다.

 - 아이작 뉴턴(추정)


(350)

예를 들어 지금의 A사의 주식이 7만 원이라고 칩시다. 증권사를 통해 익명의 누군가에게 7만 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린 주식이니까 나중에 사서 갚아야겠지요? 이틀 뒤에 A사 주식이 4만 원으로 폭락할 때 주식을 다시 사서 빌린 사람에게 갚습니다. 4만 원의 지출이 생긴 거죠. 그럼 주식 한 주를 빌려서 팔고, 나중에 빌린 주식을 갚는 것뿐인데도 7만 원 -4만원=3만원의 차액을 얻을 수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시세차익을 노리는 게 공매도입니다.


(417-418)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은 인간의 욕망에 이끌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해 여러 금융자산 사이로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돈은 미래의 이익을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가져다줄 것인가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는 앞서 은행, 보험, 채권, 환율, 주식, 펀드, 암호화폐 등이 각자의 방식대로 작동하는 동시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배웠죠. 물길이 더 낮고 깊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 것처럼 돈은 언제나 더 안전하고 더 많은 이익을 주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금융의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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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중국사람들은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메기>라고 불렀다. 한사코 물가를 찾아가 논을 일구기 때문에 붙인 별명이었다. 그런 별명을 붙여 놀리는 것은 중국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만주로 건너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자기네들의 농토가 줄어들까봐 갖게 된 적대감이었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물 가까운 습지나 저지를 찾아다니며 논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그러자 밭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중국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102)

신세호는 또 신비스러운 변화에 경이감을 느끼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면 이슬이 내리면서 안개가 끼고, 아침에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그 범상 속에 감추어진 자연의 오묘한 신비와 경이를 갈수록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해의 그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새로운 깊이로 생각하게 되고, 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다시금 음미하게 되고, 삶의 소중함과 자연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고…… 손수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눈과 마음이 더 깊고 넓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38)

일본관리들이 조선말을 강습받고 조선으로 건너왔고, 그들이 조선말을 익히려고 애쓴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삼 년 전부터는 함부로 욕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가 아닌 군인이 더듬거리지도 않고 그렇게 유창하게 조선말을 하는 것을 보고 공허는 새삼스럽게 나라 잃어버린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경지역이라 특별히 조선말을 잘하는 자들을 골라서 배치했다 하더라도 그 충격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세월은 그렇게 해마다 달라져 가며 조선사람들의 마음까지 빼앗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43)

마적떼는 장사꾼들한테만 걱정거리가 아니라 만주땅에 흩어져 사는 모든 동포들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몹시 흉포한 도둑떼들이었다. 그 마적떼들이 갈수록 불어난다는 것은 왜놈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마적떼들이 동포들의 마을을 기습해서 생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그만큼 독립투쟁의 힘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왜놈들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183-184)

나도 무식헌 놈이제만 용석이허고 한고향 동무고 헝께 한마디만 허겄소. 남정네덜이 날마동 땡볕 속이서 일허는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겄소? 하로 세 끄니 밥 지대로 챙겨묵는 디서 나오는 것이요. 아까 밥 한 끄니가 머시가 그리 중허냐고 혔는디, 고것이야 우리겉이 몸띵이 하나 부려감서 묵고 사는 사람덜헌티넌 중허고말고라. 거그서 말허는 것 찬찬이 듣자닝게 이승만 박사가 허는 일언 중허고, 우리겉이 몸띵이 굴리는 일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말인디, 그 말언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잘못 되야도 아주 잘못된 말이오. 이승만 박사가 핵교럴 세우고, 잡지럴 내고, 묵고 살고 허는 돈은 다 어디서 나온 것입디여? 하늘서 떨어졌소 땅에서 솟았소? 그 한푼, 한푼이 다 우리 겉은 무식쟁이 농사꾼덜이 사시장철 땡볕 속에서 살가죽이 타들고 뼉다구가 녹아내리게 일혀서 아까운지 몰르고 성금으로 낸 돈이다 그것이오. 막말로 우리가 눈 딱 감고 성금 안 내불먼 판이 어찌 되는지 알기나 허요? 그놈에 핵교고 잡지고 머시고 다 문 닫아걸어야 된다 그것이오. 근디도 이승만 박사가 허는 일만 장허고 우리 겉은 사람이 허는 일언 쥐조도 아닝게……”

방영근은 여기서 멈칫했다. 말을 하다보니 성질이  돋아서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방영근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내처 말을 해나갔다.

서방 밥얼 굶겨도 괜찮허다 그런 말인갑는디, 고것만언 어디다가 내놔도 편들 사람 하나또 없구만이라. 이승만 박사라고 편들어 주겄소?”


(186)

그즈음에 이승만은 자신이 펴내는 <태평양> 잡지에 박용만이 이끌고 있는 국민군단을 맹렬히 비난해대고 있었다.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 세력을 물리친다는 것은 전혀 가망이 없는 철부지한 짓이며 허황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박용만은 불필요한 일을 시작해 동포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비축한 국민회의 경비를 탕진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그런 가망없는 짓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무식한 동포들을 교육시켜 독립할 준비를 해나가는 동시에 대국인 미국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국민군단은 마땅히 해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87)

그런 이승만의 공격을 받고 박용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박용만은 국민회의에서 발간하는 <신한국보>를 통해서 이승만의 비방에 맞서고 나섰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조선백성들이 무식해서인가 아니면 나라의 무력이 약해서인가. 그런 재론의 여지도 없이 나라의 무력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힘은 왜 약해졌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층층이 부패하고 타락하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동의 엄연한 사실을 두고 망국의 책임을 어찌하여 백성의 무식함으로 돌리려 하는가. 또한 나라를 되찾는 데 있어서 백성이 무식해서 안된다는 말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저 치욕의 을사보호조약 직후부터 전국토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들을 보라. 그들 중에 유식한 양반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열 배가 더 많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며,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도 무식한 백성들이었음을 하늘이 다 아는 바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무식함을 탓할 것인가. 그리고 또 직시할 바가 있다. 무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무력이 아니고서는 물리칠 수가 없다는 천고의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왜놈의 무력 앞에 무력으로 맞서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그 어떠한 방도도 없다. 무식한 동포들을 교육시켜 가면서 독립을 준비하자고 하나, 교육이란 하루이틀에 되는 것이 아닐 뿐더더, 우리가 교육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왜놈들은 우리 동포들의 피를 빨아 더욱 강대해질 뿐이며 우리 동포들은 핍박 속에서 갈수로 허약해질 뿐이다. 또한, 우리가 동포들을 교육시켜 모두가 유식해진 10년이고 20년 후에 그때 가서 왜놈들과 학식으로 겨루자고 할 것인가. 물론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책일 수는 없다. 무력을 양성하면서 동시에 교육을 실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겠다 함인데,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가. 우리와 일본은 원수지간이지만 미국과 일본은 원수지간이 아니며, 우리에게 독립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지만 미국에게 조선의 독립은 강 건너 불일 뿐이다. 미국은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약간은 협조를 할지 모르지만, 전적으로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겠다 함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몽상일 뿐이다. 그리고 끝으로 밝히는 바는, 국민군단은 훈련소 낙성식을 최종으로 하여 더 이상 동포들의 혈전(血錢)을 모금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병사들이 이미 확보된 파인애플농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받는 노고 속에서 자립을 구축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231)

고무신바람에 들린 것은 특히 여자들이었고, 여자들 중에서도 처녀들이었다. 한 마을에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새로 나온 희한한 물건은 값이 너무 비싸 부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 귀한 물건은 그야말로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였고 구경거리였다. 그 누구나 고무신을 손에 쥐었다 하면 이리저리 매만져보고, 엎어서 밑바닥을 보고, 고개를 돌려가며 코 안을 들여다보고, 주인의 눈길을 피해 잡아늘여 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하고 매끈하게 생긴 고무신을 신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24-325)

늙은 거지는 깨진 바가지를 끌어다가 발 굵은 소금을 손가락끝으로 집어 입에 털어놓고는 어험 큼큼 목청을 다듬었다.

짜아 시구시구 들어가는디이,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어절시구 들어간다아 저절시구 들어간다아, 푼파바 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허이 작년에 왔든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리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일본놈에 시상 되어 10년 세월 다 돼가니,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이 시상이 지옥살이 2천만이 통곡헌다, 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야 3천리라 금수강산 토지조사로 묶어놓고, 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4년이고 5년이고 땅뺏기에 혈안이라, 오자나 한자나 들고아 봐아, 오지겄다 왜놈덜어 그 맛이 꿀맛이겄다, 푼파바 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과 자리헌다아,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품바 품바 들어간다아, 육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야 육십 영감 분통터져 감나무에 먹얼 매고, 칠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칠십 할멈 절통혀서 저수지에 뛰어드네, 팔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팔자에 없는 만주살이 떠나는 이 그 누군가, 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구만리 장천에 기러기도 슬피 우네, 십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세 10년이야 넘겄느냐 왜놈덜아 두고 보자, 어허 품바 자리헌다.”


(339)

수전민족이 왜 부지런하고 끈질긴 기질을 가졌으며 대체로 영리한가? 그건 바로 논농사의 특성과 맞통하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논농사의 특이한 점을 먼저 파악하면 조센징의 그런 기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겁니다. 봅시다, 논농사는 밭농사와는 정반대로 물이 없으면 지을 수가 없는 농사입니다. 또한, 농사를 짓기 이전에 농토를 조성할 때부터 논과 밭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녀지나 미간지를 논과 밭으로 개간할 때, 밭은 수목을 뽑아내고 잡초뿌리를 캐내고 돌이나 자갈들을 골라내면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밭과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개간을 하고 나서도 일은 또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물 때문입니다. 가까운 개울이나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수로를 또 파야 하고, 물을 논에 가두기 위해 논둑을 튼튼하게 쌓아야 하고,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도량을 빼야 합니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밭 개간에 비해 논 개간이 훨씬 더 힘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농사를 짓게 되면 논농사는 밭농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것 또한 물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잠시도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이 수전농사입니다. 왜냐하면 비가 많이 오면 벼가 침수되어 상하고, 비가 안 오면 땅이 메말라 벼들이 고사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침수를 막기 위해 자다가도 일어나 논에 나가는 것이 수전농민들입니다. , 적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민들은 벼가 말라죽지 않게 하려고 들녘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며 물을 퍼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지지 않고 가뭄이 들지 않은 보통 때에도 벼가 자라는 것에 따라 수량을 조절해 줘야 하기 때문에 농부들은 아침저녁으로 논을 살피며 물꼬를 트고 막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객토니 모내기니 하는 다른 자세한 것들은 생략하고 이런 점들만 대출 살펴보더라도 논농사가 밭농사보다도 얼마나 더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드는 것인지는 농사 경험이 없는 여러분들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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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시간의 흐름은 그와 동행하는 세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는 자기 내부의 변화에서 드러났다. 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비바람에 노출되어 거칠어졌다. 얼굴 아래쪽에 까칠하게 자란 수염은 피부가 거칠어지면서 부드러워졌고, 손등은 햇볕에 타 빨개졌다가 갈색이 되었다가 까매졌다. 몸이 점점 여위고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가끔 자신이 새로운 몸, 또는 비현실적인 부드러움과 창백함과 매끄러움의 층 아래 숨어있었던 진정한 몸 안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

윌 앤드루스의 가죽 벗기는 기술은 점점 능숙해졌다. 손은 강하고 단단해졌다. 칼은 새것 같은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점점 더 확실하게 가죽을 잘라 냈다. 이제 앤드루스는 슈나이더가 두 마리의 가죽을 벗겨 낼 때 한 마리는 해낼 수 있었다. 들소가 악취가 나도, 뜨뜻한 살이 손에 닿는 느낌이 들어도, 피가 엉긴 걸 보아도 점점 더 아무렇지 않아졌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가죽 벗기는 작업을 마치 자동 기계처럼 했고, 죽은 들소의 가죽을 벗겨 내 땅에 놓으면서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가죽을 벗긴 들소 위에 파리가 새까맣게 들끓어도 그 사이로 다닐 수 있었고, 썩은 살에서 나는 악취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304)

자네 신세는 자네가 망쳤어. 자네와 자네 같은 인간들이. 자네가 살면서 매일 하는 일이, 자네가 하는 모든 일이. 아무도 자네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했어. 그러지 않았어. 죽인 사냥감들의 악취로 땅을 뒤엎으며 제멋대로 살아왔지. 가죽을 무더기로 풀어 시장을 망하게 하고는 이제 와서 자넬 망쳤다고 징징거리는군.” 맥도널드의 목소리가 점점 노기를 띠었다. “자네는, 자네들 모두는 내 말을 귀담아들어야 했어. 자네들은 자네들이 죽인 짐승들보다 나을 게 없어.”


(306)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336-337)

그 허영심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거리던 합숙소 등불의 불빛 아래서 맥도널드가 말했던 그 무()였다. 찰리 호지의 시선에 있었던 밝고 푸른 공허감-그는 찰리의 눈 안에서 그 공허감을 언뜻 보고 프랜신에게 말해 주려 애썼다-이었다. 슈나이더가 강에서 말발굽이 얼굴을 당혹하게 만들기 직전에 보였던 경멸적인 표정이었다. 산에서 하연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밀러의 얼굴에 나타났던 맹목적인 인내심이었다. 찰리 호지가 꺼져 가는 불에서 몸을 돌려 밀러를 따라 밤 속으로 따라가기 전에 그의 눈에 있었던 텅 빈 반짝임이었다. 맥도널드가 가죽이 불타 버리는데 광분해 밀러를 쫓아다니는 동안, 얼굴에 격노한 가면을 쓴 것처럼 만든 끝없는 절망이었다. 베개 위에 죽은 듯 늘어진 프랜신의 잠든 얼굴에서 지금 보고 있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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