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리고 이 모든 일에는 에너지가 끝없이 요구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보를 전송하고 보관하고 처리하는 기반시설은 지금껏 인류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기계인데 지금도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비대해지고 있다. 2025년이 되면 데이터 처리를 위한 설비가 잡아먹는 전력이 전 세계 전력 소비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거기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세계 전체 배출량의 5%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국 환경사회학자 리처드 요크에 따르면, 재생에너지원들이 늘어나서 예전보다 전체 에너지 생산에서 비중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화석연로 소비가 줄어들고 있지는 않다. 생산되고 있는 에너지 총량이 확대되고 있을 뿐이다. 2023년에 전 세계 석유 수요는 역사상 최대치에 이르렀고, 인구 1인당 전력 소비량도 정점을 찍었다. (모든 에너지원으로부터의) 에너지 소비는 꾸준하게 해마다 1~2% 증가하고 있다.


(11)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차악(次惡)을 선택할 것인가, 소신껏 투표를 해야 할 것인가, 혹은 냉소적 무관심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투표 용지 바깥으로도 눈을 돌려보자. 제약이 많이 여건 아래에서도 창조적으로 자율적 상호부조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자립적 자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들도 민중(demos) 가운데에 나오는 힘(kratos)이 있다면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다운 세상은 우리 각자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자. 그리고 자치(自治), 즉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만 이것은 4년에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매일 같이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20)

기술과 법에 의존하는 태도는 오히려 다양한 우회로와 부작용을 만들어낼 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 인지능력은 기술과 달리 거의 진화하지 않는다.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싱크 어게인>에서 대상이 물건일 때 사람들은 열정을 다해 업데이트하지만 대상이 지식이나 견해일 때는 기존 것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개발한 도구는 인간지능을 넘어설 정도로 똑똑하고 강력해졌지만 인간은 그 똑똑한 도구에 압도당할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사람은 살아가는 양복 입은 구석기인으로 불린다. 하버드대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류의 진짜 문제는 인간 정서는 구석기 시대에, 제도는 중세에 머물러 있는데 기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27-28)

언론은 2024 1월 다보스포럼에서 인공지능으로 인해 생길 에너지 부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인공지능이 생각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쓸 것이므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핵융합에너지 기술의 개발과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2027년 인공지능이 연간 사용할 전력량이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스웨덴 같은 국가들이 각각 1년간 소비할 전력량과 비슷하다고 추정했다. 다보스포럼에서 한 기업가는 인공지능이 활성화되면 데이터센터 등 컴퓨터 전력 수요가 늘어나고, 전기사용량이 2050년쯤엔 지금의 1,000배가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40)

디스토피아는 인공지능 대 인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권력을 흡수한 거대기업이 인공지능을 내세워 시민(노동자)을 일터에서 내쫓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먼저 뿌리쳐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현대판 애니미즘신앙이다. 김진석에게서도 얼핏 볼 수 있었던 이런 신앙의 문제점은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가치(인문적)로 푸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항상 해결책이라는 기술우월주의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점점 인공지능의 볼모가 된다.


(64)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인간 능력을 최고로 일깨워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별적인 인간 정신과 육체들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지식 네트워크에 연결시켜서 생물학적 지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니다. 슈퍼컴퓨터 사이보그 신체로 기억 데이터를 다운로드하여 초월성을 획득하는 일도 아니다. 우리의 뇌를 곧 도래한다고 하는 특이점이라는 시뮬레이션 현실과 융합시키는 일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임무는 그와 정반대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이 육신에 깃들여 있는 인간성을 개발하여 우주질서와 우리 자신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큰 일관성을 손에 넣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영혼을 영원(永遠)으로 업로드해야 할 것이다.


(80)

(윤현식) 현 정치구조 아래에선 지방소멸을 막겠다는 정책 자체가 지방소멸을 가속화하게 돼 있습니다. ‘잘산다는 모델이 서울이고, 정책의 방향이 서울을 따라잡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전국정당이 대중에게 내놓는 정책의 모델은 서울입니다. 그런데 지방에서 사는 사람이 자기 동네가 서울처럼 되길 기다리는 게 빠를까요, 그냥 서울로 이주하는 게 나을까요? 지방은 서울을 모델로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집권을 위한 장단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서울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자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중앙에서는 나올 수 없어요. 군소정당도 전국적 지지에 갈급하니까 거시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죠. 미시적인 의제는 들어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다른 얘기가 안 나오는 한 이 구조를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90)

(황종규) 그건 관이 파트너를 선택하기 때문이에요. 지역정당, 자치 그리고 시민적 실천, 이런 것들이 지금 굉장히 힘든 상황인 건 틀림없어요. 그러나 양대 정당의 정치적 독점 문제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죠. 세계 어디에서든 대의제는 주민들의 생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을 방법도 없고, 원래 그런 제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대의제에 그걸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회적 위기, 질곡을 해결하려면 작은 생활권 단위의 정치를 복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생활권 단위 당사자로서의 주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주민자치를 입법화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주민자치를 진짜 지방자치라고 말은 하지만, 법에 주민의 자치권이 명시되어 있지 않거든요. 자치권을 갑고 있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입니다.


(108)

경기 수도권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시한폭탄 같다. 재정자립도가 높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가는 지역의 생태환경을 우회적으로 증거하는 척도이다. 개발수익이 나면 그 개발수익 전체를 다시 자연을 정화하고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일에 쏟아부어도 제로포인트에 근접하지 못할 지경인데, 그 수입을 또다른 개발을 위한 개발에 투자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지역의 정치인들이나 단체장들은 인사말을 이렇게 열어야 할 것이다-플라스틱 사용을 줄입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이고 친환경농법 예산을 늘립시다, 일정량의 탄소배출 업체는 앞으로 우리 지역에 발 디딜 수 없도록 합시다, 지금 당장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미래는 없습니다.


(154-155)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과연 기업이 주도하는 데이터 기반 스마트농업은 이미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현행 농식품체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농기계를 사용하는 정밀농업은 에너지와 투입재 사용을 줄이면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가? 더 많은 실증적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도출되는 답은 아니요에 가깝다.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 투입재에 대한 농민의 의존성을 높이고, 농민의 권리와 자율성을 침해할 공산이 크고, 에너지와 투입재 사용을 줄인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 여기에 더해, 농업분야의 금융화화 농민의 부채,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탈숙련화를 가져오고, 이들에 대한 착취, 감시가 확대되는 등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81-182)

바닷가 모래밭은 누구의 것인가? 모두의 것이다. 환경주의의 과격한 주장이 아니라 법에서 바닷가 모래밭은 공유수면이고, 모두의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두의 것인 바닷가 모래밭을 특정인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독점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온당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바닷가 모래밭을 누릴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것을 빼앗기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함께 바닷가 모래밭을 지켜야 한다. 바닷가 모래밭을 지키기 위해서 소송을 하고 시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닷가 모래밭이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바닷가 모래밭을 누군가가 독점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모래밭을 특정인이 독점하는 방식의 상업행위는 확산되기 어려워진다. 지차체들도 허가를 내주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나도 이번에 양양에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바닷가 모래밭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닷가 모래밭을 빼앗기도 나서야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바닷가 모래밭을 지켜야 한다.


(231)

첫째는 음식물 업사이클링이다.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인구에 비해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양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문제다. 맛과 영양에 문제가 없지만 크기와 모양이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농장에서 그냥 썩어가는 작물의 양이 상당하다. 슈퍼마켓의 냉장고에 있다가 버려지는 음식들은 가공과 유통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폐기할 때도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옛날 분들은 음식 남기면 천벌 받는다고 하셨다. 이제 이 말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인류가 버리는 음식들로 기후변화와 생태재난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것을 천벌이라고 한다면 받아 마땅한 천벌이다. 멀쩡한 음식을 버리지 않고 잘 활용할 수 있는 생산과 유통 기술을 더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가장 먼저 연구해야 한다.


(233)

먹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먹는 이와 먹히는 이 모두 자연의 일부가 되고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다시 삶을 이어간다. 그것이 잔인한 폭력이 아니라 삶을 잇는 신성한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성찰과 절제가 필수적이다. 나에게 보시한 다른 생명의 무게를 알고 그 희생을 기억한다면, 어떤 음식도 함부로 하지 않고 귀하게 감사히 먹을 수밖에 없다. 음식은 누군가의 삶이다. 그 생명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잘 살아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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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02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좋네요. 여러 분들이 읽고 있어서 꼼꼼하게 이해하고 갑니다. ^^

bookholic 2024-04-04 00: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녹색평론>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8)

정상규는 말하는 세금은 지난 4 1일부터 적용된 중일전쟁특별세였다. 총독부에서는 중일전쟁에 대비하느라고 그 특별세만이 아니라 연달아 새로운 법들을 공포해대고 있었다. 2월에 중일전쟁특별세와 함께 육군특별지원령을 공포했고, 4월에는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관제를 공포했으며, 5월에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의 조선 적용을 공포했고, 6월에는 각 학교에 학교근로보국대 조직을 지시함과 아울러 각 도에 근로보국대를 조직하도록 명령했으며, 전국적으로 방공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창립시켰고, 전국의 사회주의 사상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전조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게 했고, 전국 교원들과 관공리들에게 제복 착용을 지시했다. 그 숨가쁜 조처들은 다름아닌 전조선의 전시체제화였다.


(23)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산산맥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우람하고 장엄했다. 천산산맥은 몸피가 거대하면서 길이도 끝없이 길었다. 그리고 능선은 톱니 모양으로 이어져 나가며 험준한 산줄기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천산산맥은 하늘을 가르며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마치 하늘에 도전하고 하늘에 제압하려는 것처럼. 천산산맥은 사람이 오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아득히 멀리 있으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천산산맥을 보고 압도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장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솟는 경탄의 소리와 함께 압도당했고, 계절의 변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순백의 자태를 드리운 만년설을 보면서 신비스러운 경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9)

조선족에게 쏘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쏘련은 왜 조선족을 이렇게 핍박하는가. 전인류적 해방을 외치고 있는 공산주의 모국 쏘련이 왜 이 모양인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쏘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다 거짓이고 위장인가? 아니, 강제이주를 시키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자. 우리에게 알릴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당하게 사람 대접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왜 할 일은 제대로 안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가. 제놈들에게 사람을 개 잡듯 죽일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아니, 짐승도 이렇게는 취급할 수가 없다. 흉악무도한 놈들! 인민해방, 인민혁명, 인민의 천국, 전인류적 해방, 약소민족의 독립 지원, 새빨간 거짓말! 도둑놈들! 사기꾼 집단!


(81)

사람들은 숯 굽는 일의 생소함이나 고달픔 이전에 숯 굽는 일 자체에 혐오감을 나타냈다. 일본세상이 되면서 숯은 장작이나 솔가리나무를 압도할 정도로 번창했다. 다다미방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일본사람들은 방마다 숯불화로를 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산속 숯가마에서 숯쟁이로 먹고 사는 조선사람들도 많아졌고, 숯장사로 떼돈을 버는 일본사람들도 많아지면서 목탄조합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짚불이나 솔가리불을 화로에 담아 쓰는 농부들로서는 숯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더구나 코밑은 물론이고 손이며 옷에도 숯검정을 하고 다니는 숯쟁이나 숯장수들을 농부들은 싸잡아 <숯쟁이>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그건 단순히 자기들에 비해 그들의 몰골이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그러는 것만이 아니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대대로 물려온 자부심을 은근히 품고 있는 농부들은 기껏 일본사람들한테 빌붙어 먹고 사는 숯쟁이나 숯장수들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105)

그동안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해왔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동료들이 여러 식민지국가들에서 봉직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계속 서신 교환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조선사람들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고 끈질깁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세계적으로 가장 가혹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상황 아래서 조선사람들이 가장 치열하고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가히 세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에서 23년을 살다가 쫓겨나는 제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진실한 말입니다. 제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중단하지 않은 죄로 쫓겨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천주교나 개신교나 조선사람들한테는 면목이 없고 미안함이 많습니다. 우리 양쪽 교단은 일본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세워놓고 3.1 운동 때도 방관만 했었지요. 그 결과 신자들이 격감하고, 장기간 교세확장이 안되었던 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로도 정교분리 원칙은 고수되었고, 신사참배 문제도 양쪽 교단의 몇몇 학교가 자진 폐교하긴 했습니다만 결국 총독부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호자는 것이었지 조선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실은 이 인터뷰에 응할 자격이 없습니다.


(182-183)

김원봉은 1938 9월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곧 중일 양국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이고 있는 무한 전선에 참전했다. 그러나 무한은 함락되었고, 조선의용대들은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 일본구 포로들의 신문, 일본군 점령지에서 첩보수집, 암살, 파괴활동 같은 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군의 보조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그런 역할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선독립군으로 무장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봉 앞에 닥친 현실은 냉엄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자기네 군대의 운영에도 정신이 없는 중국정부에서는 조선독립군의 지원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김원봉은 중국정부를 상대하는 현실과 대원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산주의 간부들이 이탈하면서 김원봉의 세력은 그 어느 때 없이 약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254)

어느 극단에서 만주를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그 극단은 여러 곳을 돌아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도문에 이르러 있었다. 도문에서 공연을 마친 단원들은 투숙하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넓고 넓은 대륙 만주의 수많은 거리에서 거리를 마을에서 마을로 바람에 실리듯 순회를 하고 다는 피로 탓인지 단원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잠이 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옆방에서 오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는 너무나 슬프고 절절해서 그 사람의 마음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인의 오열은 밤새껏 그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날이 밝자마자 여관 종업원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물어보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독립군에 가담했는데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두만강을 건너왔다가 남편이 이미 싸우다 죽은 것을 울며 새운 그 여인은 다음날 두만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안타까운 소식까지 듣게 된 그 사람은 굽이치는 두만강 물결을 바라보며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물 적은 두만강>이었다.


(286)

, 저는 중국과의 전쟁을 보면서 이번 전쟁의 답을 찾습니다. 중일전쟁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만 5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정부와 군부에서는 뭐라고 큰소리 쾅쾅 쳐댔습니까. 몇 개월이면 중국대륙을 완전 장악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몇 개월이 몇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중국대륙은 반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이 공업이 발달한 나랍니까?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랍니까? 다 아시다시피 농업국가에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 발달은 없습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많은 인구뿐이고 현대무기는 구라파 쪽에서 사들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한 일본은 예상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세월을 소모해 가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럼 영국은 어떤 나랍니까.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으켜 공업을 발전시켰고,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하고 있는 나랍니다. 미국은 또 어떤 나랍니까. 거대한 신대륙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영국의 공업기술을 받아들여 세계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라 아닙니까. 과학기술로 볼 때 중국은 영국과 미국에 비교조처 될 수 없는 원시상태의 나랍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겠습니까. 일본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패망합니다. 파쇼통치의 광기가 저지른 이번 전쟁으로 일본의 무고한 인민들만 희생의 제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외로 탈출해 인민구출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07-308)

만장하신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현하 세계정세는 독일과 일본을 적으로 하고 중국 영국 미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연합국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진작에 대일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 청장년들이 이 전쟁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심히 유감스러운 설()이 들려 우리 조선인들을 분노케 하고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신탁통치설입니다. 그건 연합국 중의 두 나라 대표인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종전 후 처리문제 중의 중대사인 아세아와 아프리카 식민지국가들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신탁통치란 무엇입니까!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연합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도 없고, 국가를 운영할 지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대국의 일방적인 횡포이며,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재론할 여지도 없이 신탁통치란 우리나라를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음모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석달 전인 지난 2월에 임정의 조소앙 외교부장께서 비판의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우리는 좌시할 수 없어서 오늘 이렇게 비판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를 통하여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신탁통치를 절대 거부하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결의를 만천하에 밝히고, 그리하여 처칠과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비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상으로 인사의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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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2003sus 국제 테러 조직 알 케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에서 출발해,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으며 세력을 넓혔다.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로, 집단 학살과 잔인한 테러를 일삼았다. ISIS IS(Islamic State)가 그들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2019년 현재 IS는 대부분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27)

삶은 흘러간다. 이라크인, 특히 야지디족 같은 소수 부족들은 새로운 위협에 잘 적응했다. 무너지는 나라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적응이라 하면 때론 아주 소소한 일들을 뜻한다. 우리는 꿈의 크기를 줄였다. 학교를 졸업하는 것, 농사일을 그만두고 덜 힘든 일을 하는 것, 제때 결혼식을 하는 것 같은 바람들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꿈은 이룰 수 없었다고 쉽사리 자신을 설득했다. 이따금 적응은 아무도 모르게 차츰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무슬림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었고, 낯선 이가 마을을 지나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또 공격과 관련된 TV 뉴스를 보면서 정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은 입 다물고 지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예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기도 했다. 매번 공격이 있을 때마다 남자들은 시리아에 면한 서쪽에서 시작해 코초 외곽 장벽을 연장했다. 어느 날 깨어 보니 성벽이 마을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남자들은 마을 주변에 참호를 팠다.


(49)

어린 시절 나는 내 나라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제재와 전쟁, 극악한 정치, 점령 등이 일어나는 행성 같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웃들은 서로 등을 돌려 버렸다. 이라크 북단은 쿠르드족이 독립을 원하는 지역이었다. 남쪽은 주로 시아파 무슬림들의 본거지였는데, 이들이 종교와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부에는 수니파 아랍족이 있다. 이들은 한때 수니파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 함께 주()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라크 침공 이후 지금은 시아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에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50)

코초의 북동쪽, 쿠르드 자치구의 남쪽 경계에는 아랍인과 쿠르드 인에 이어 제3의 민족인 투르크멘족이 산다. 무슬림은 투르크멘족 역시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뉜다. 기독교인들은-그중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아르메니아인-나라 전역, 특히 니네베 평원을 흩어져 산다. 기타 지역에는 아프리카인과 같은 마쉬 아랍족을 비롯해 카카이, 샤박, 로마니, 만다야 같은 소수 집단이 산다. 바그다드 인근 어딘가에는 아직도 이라크의 유대인 집단이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고 들었다.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두고서는 다양한 구분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쿠르드족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그들은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야지디의 경우는 종교를 믿는 이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이라크 아랍족은 시아파나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러한 복잡한 구분들이 오랜 세월 수많은 분쟁을 야기해 왔다.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이라크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


(102)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ISIS의 눈에 뛸까 봐 집 안에만 있었고, 그렇게 코초의 삶은 정지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서 지내니 이상했다. 코초는 밤늦도록 남의 집에서 친구들과 식사하고, 옥상에서 이웃끼리 떠들다 자는 일이 일상인 동네였다. 그러나 ISIS가 포위한 뒤로는 잠에 바로 옆에 누운 사람과 소곤대는 것과 위험해 보였다. 우린 최대한 눈에 안 띄려 했다. 그러면 ISIS가 우리를 잊기라도 할 것처럼. 점점 뼈만 남게 말라 가는 것도 자기를 보호하려는 방법 같았다. 곡기를 끊으면 결국 투명인간이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친척들은 살피러 가거나, 물품을 가지러 가거나, 아픈 사람을 도우러 갈 때만 집을 나섰다. 그때도 빗자루를 피해 달아나는 벌레들처럼 늘 피할 곳이 있는 쪽으로 잽싸게 걸었다.


(148)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야지디에서는 종교 지도자층의 일원을 종교적인 의미의 형제자매로 삼는다.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고 내세에서 우릴 도와준다. 나의 자매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아름다웠으며 야지디 교리를 매우 잘 알았다. 그녀는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을 했고, 친정에 돌아와 살면서 신과 종교에 자신을 바쳤다. 나의 자매는 ISIS가 집 가까이 오기 전에 탈출하여, 독일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이런 형제나 자매의 가장 중요한 소임은 우리가 죽은 뒤 신과 타우시 멜렉 곁에 앉아 우리를 변호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자는 제가 생전에 알던 사람입니다. 영혼이 지상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177-178)

IS 소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비야는 재산에 불과하므로소유자 뜻대로 선물로 주거나 팔 수 있다. 여인들을 자녀와 떼어 놓으면 안 되지만-그 이유 때문에 디말과 아드키는 솔라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말릭처럼 다 자란 자녀는 데려가도 무방하다. 사비야가 임신하거나 주인이 죽으면 사비야는 유산의 일부로 분배되었다. 또 주인은 노예가 성교에 접합하면 사춘기 이전이어도 성교할 수 있으며, 적합하지 않으면 성교 없이 즐기는 것이로 족하다라고 되어 있다.


(206)

지난 3년간 야지디 여자들이 ISIS에게 잡혀 성 노예가 된 사연을 많이 들었다. 대부분 같은 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이었다. 우린 시장에서 판매되거나, 신병 혹은 고위 지휘관에게 선물로 건네졌다. 그러면 그의 집으로 끌려가서 강간당하고 모욕을 받았으며, 대부분 폭행당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또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 쓸모가 다하고 죽기 전까지 이런 식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면 지독한 벌을 받았다. 하지 살만의 경고처럼 ISIS는 검문소에 우리 사진을 붙였고, 모술 주민들은 노예를 가까운 IS 센터에 신고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러면 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받는다고 했다.


(345)

왜 나세르는 선량한데 모술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 잔인했는지 모르겠다. 마음 깊이 선량한 사람이라면 IS 근거지에서 나고 자라도 여전히 선량한 것 같다. 강제 개종을 당해도 내가 그 종교를 믿지 않고 여전히 야지디인 것처럼. 그런 인품은 내면에 달려 있다. 내가 나세르에게 말했다. “조심해요. 몸을 잘 챙기고, 가능한 범죄자들과 멀리 지내요. , 헤즈니의 전화번호를 받아요.” 나는 헤즈니의 휴대폰 번호를 적은 쪽지와 그의 가족이 내준 택시비를 내밀었다. “언제라도 헤즈니에게 전해도 돼요. 내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가 말했다. “행복하게 살기 바라요, 나디아. 지금부터 쭉 멋진 인생을 살아요. 우리 가족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쓸 거예요. 모술에서 탈출하려는 여자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전화해요. 우리가 도와주려고 노력할게요.”


(383)

난 떨면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어떻게 코초가 점령당하고 나 같은 여자들이 사비야로 끌려갔는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반복해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다 결국 탈출했는지 설명했다. 오빠들이 살해당한 이야기도 전했다. 청중은 조용히 경청했다. 연설이 끝나고 나서, 나중에 한 터키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오빠 알리도 살해됐어요. 그 일로 온 가족이 충격에 빠졌어요. 어떻게 한꺼번에 오빠 여섯을 잃고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가족을 잃은 집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388)

막상 코초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헤어졌던 곳, 내 오빠들이 살해된 곳 말이다. 디말, 무라드(이즈음 무라드를 비롯한 야즈다 활동가들은 가족과 다름없었다)를 비롯해 일부 가족과 함께 있다가, 이제 코초에 가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자 함께 이동했다. 우리는 전투를 피해 먼 길을 돌아갔다. 마을은 썰렁했다. 학교의 창문은 깨지고 안에는 일부 시신이 남아 있었다. 지붕의 나무까지 빼앗겼을 정도로 우리 집은 약탈당했고, 남은 것은 뭐든 소각되었다. 신부 사진이 담긴 사진첩은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는 대성통곡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파괴된 곳이라고 해도 대문을 들어선 순간 그곳이 내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순간 ISIS가 들이닥치기 전에 느낀 감정이 되살아났다. 일행이 떠날 시간이라고 일러 주었지만, 나는 한 시간만 더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지디가 신과 타우시 멜렉에게 더 가까워지려고 금식하는 12월에는 코초에 있겠다고 맹세했다.


(389)

나는 간단히 연설했다. 내 사연을 말한 다음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연설을 잘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든 야지디는 ISIS가 집단 학살 죄로 기소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청중들은 세계의 약한 자들이 보호받도록 도울 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난 우릴 유린한 남자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연을 가진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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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화가 이우환은 어릴 적 어머니와의 대화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는 쌀을 씻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매일 똑 같은 쌀 씻기를 하면서 어떻게 즐거우실 수 있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똑 같은 쌀 씻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 일을 할 때마다 매일 다르게 느낀다고.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생기를 주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흥이 오르기도 한다고. 쌀과 물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잘 움직일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매일 쌀 씻는 것이 항상 새롭다고. 어린 후환의 눈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쌀 씻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쌀 씻기는 매일, 매 순간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예술적 행위라고 부른다.


(31)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평생에 이뤄지는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뿐인 일. 이 말은 차 마시는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다도(茶道)에서 쓰인다. 어제도 차를 마셨고 엊그제 역시 차를 마셨지만, 차를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임을 가슴에 새겨 차 한 모금을 아주 새롭게 음미한다는 마음의 자세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한 인간이 지닌 지성의 문제로,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알려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이 내면에 지닌 지성으로 해내는 일이다. 우리의 일상이, 삶이 아무리 매일 반복되더라도 매 순간은 진실로 새로운 순간이다. 우리가 지성을 발휘해 그 진실을 매일 매 순간 의식하려 노력한다면, 무미건조하게 여기던 것들 것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색과 형과 향을 지닌 꽃이 피어날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예술이 피어날지 모른다.


(51)

삶과 예술, 예술과 삶. 이 둘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술은 우주 어딘가에 지구로 떨어진 출처가 불분명한 운석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술은 분명히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온 아기가 엄마를 빼닮듯,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예술이 인간과 삶을 쏙 빼닮지 않을 수는 없다. 아이가 엄마의 정수를 담고 있듯, 예술은 인간과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


(62)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정말 <모나리자>를 봤는지, <모나리자>를 누가 언제 그렸는지,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떻게 살았는지, 화가가 살던 시대상은 어땠는지, 그를 후원해 준 사람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모나리자>라는 작품에서 파생되는 나오는지식을 알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모나리자>라는 그림 자체, 그 이미지 자체, 그 물리적 대상 자체를 진심으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기 위해 노력했는지 묻는 것이다. 예술작품 하나를 몸으로 만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심을 다해 보고 듣고 감각하며 생각하고 느끼는 체험을 했는가 묻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체험의 과정 속에서 당신만의 독창적인 의미가 내면에서 샘솟듯, 꽃피듯 생성되었다면, 그 작품은 평생 당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당신 스스로 창조한 의미와 함께 생생히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당신의 기억 속에 생생히, 또렷이 남아 있는 본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정신을,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구성할 것이다.


(70)

50대에 그의 내면을 물감으로 물질화한 이 자화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한껏 찌푸린 미간과 꼿꼿이 당겨 세운 하관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삶의 난관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가 엿보임과 동시에, 검고 큰 눈동자에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감지되어 때문이다. 중년이 되어 맞닥뜨린 어떤 난관의 거친 파도 앞에서 렘브란트는 전의를 불태우려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그는 그런 내면의 심정을 숨김없이 마주했고, 속속들이 자화상에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50여 년을 산 한 화가의 자아 성찰의 힘과 진정성을 발견한다.


(94)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무지한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영영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내가 누구인지알기 위해 스스로 번데기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 번데기 속에서 누군가는 자기만의 해답을 발견해 찢고 나와 나비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실패하기도 한다. 물론,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다면 끝내 나비가 될 수도 있다. 애벌레가 번데기 껍질을 까고 나와 나비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는 온전히 애벌레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 어디쯤에 있을까?


(112)

그렇다. 이 모든 행위는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것이다. 나태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행위에 골몰할 힘을 얻게 된다. 내 눈을 넘어 오감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뒤흔드는 작품을 만났을 때,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것을 영혼이 흠뻑 젖을 때까지 감각하고 생각하고 느낄 한없는 시간의 여유를 창조할 수 있다. 그 작품과 대화를 나눈 뒤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나태해지는 시간의 공터를 습관처럼 만들어놓을 수 있다면, 당신을 흔들었던 그 작품은 당신의 삶과 맞물리며 어느 날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 작품을 마음속으로 붙잡아 한껏 곱씹어 보며 진정 내 영혼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태한 시간이 모여 당신의 기억을 구성하고, 나아가 당신의 내면, 당신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구성할 것이다.


(148)

예술가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에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부터 예술이라는 삶의 꽃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겐 무언가에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대량생산된 물감으로 오밀조밀 칠해진 화면을 보며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버려진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그러모아 만든 독특한 구조물을 보며 색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62)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라는 평범한 이가 바다를 매 순간 낯설게 보고자 노력하며 그것의 숨겨진 미를 매 순간 새롭게 발견하고 감동하는 일상. 그 낯설게 보는 눈으로 미술관에 가 작품의 숨겨진 미를 새롭게 발견하며 미적, 지적 쾌감을 느끼는 일상. 그 눈으로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미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기쁨. 그 눈으로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고 항상 감사히 여기는 풍요. 그 눈으로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놀라운 마법.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마법 같은 일상과 삶이 먼 곳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낯설게 보고자 하면, 모든 것에서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샘솟아 나는 마법이, 예술이 펼쳐지니 말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237)

예술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 이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오직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체험뿐이라고. 내가 하는 체험만이 지금과 내일의 나를 빚는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251)

미술작품에는 정답이 없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작품이 어떤 것도 말해주기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품 스스로 이 작품은 이런저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이 지닌 이런 특징을 일상의 관성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것은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고,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면 되는지 즉각적으로 알려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느끼면 되는지까지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사소통 방식은 참 쉽고 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정신적 활동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고,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생각하고 느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거나 혹은 떠먹여 주기까지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는 것과 같다.


(261)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 예술을 창안해 낸 우리 인간의 삶 역시 정답이 없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예술이 무엇인지를 먼저 스스로 정의해야 하듯, 삶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당연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가르쳐둔다 한들 자신이 몸소 체험을 통해 깨닫지 않는 이상 삶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만의 삶의 정의를 체험하고 감각하며, 그 속에서 숱한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영감을 얻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해 가며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 예술가를 자기 나름의 예술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하듯, 삶을 사는 우리도 자기 나름의 삶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예술과 하나가 된다. 인간은 삶과 다르지 않은 예술을 삶 속에서 낳았다.


(267)

삶에서 하는 일 자체를 예술로 만든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자신만의 수단과 통찰로 진진하고 순수한 나만의 작품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세잔의 정신을 본다. 내가 미술관에 가서 만난 어떤 작품. 그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재료,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형태, 그만의 오묘한 에너지와 개성, 그만의 비범한 철학과 주장을 내 몸과 정신으로 직접 파헤쳐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 그러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그 작가만의 독창적인 미학과 감각을 외부로 표현해 낸 작품을 만났을 때 맞이하는 찬란한 기쁨.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예술가다.


(304)

한 차례 자발적 일탈을 감행했음에도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여전히 흐릿하다면, 두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그 후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불투명하다면, 세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화랑에서 일을 하다, 불쑥 기숙학교에서 선생을 하다, 불쑥 광산으로 간 빈센트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그 모든 불확실한 일탈의 감행이 모여 건강한 방황으로 정의되리라 믿는다. 그 일탈의 체험과 기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밝고 분명해지리라. 수많은 시도 끝에 점점 초점이 또렷해지는 피사체처럼.


(321)

예술인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삶에서 행한 어떤 행위가 행위자에게 정신적 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작업. 그것이 예술이다.” 겉으로 예술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가 실제로 정신적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그 행위를 왜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정신적 만족을 충성하게 누리는 예술이 되기 위한 해답은 결코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삶을 창조해 가야 한다. 그 어떤 외부의 압력과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자기 내면에서부터 끝없이 선명하게 울려오는 나만의 그림 그리기를 평생 흔들림 없이 행한 세잔처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행하는 삶.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만족을 동반한다. 그렇게 정신적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사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예술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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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노동자와 농민을 상대로 한 그의 꿈의 시도는 놀랄 만큼 빠른 효과를 나타냈다. 그건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활현실 속에서 요구하고 바라는 바와 자신들이 운동의 실천조항으로 내건 것들과 유감없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8시간노동제 실현, 차별대우 철폐, 임금인하 반대, 복지제도 완비, 이런 것들은 노동자들과 뜨거운 혈맥을 통하게 했다. 그리고, 소작료 5*5제로 인하, 소작권이동 반대, 무보수부역 철폐, 마름(농감)들의 횡포 근절, 이런 것들은 농민들의 마음과 맞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경찰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실패는 거듭되었고 결국 남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상처뿐이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면 쟁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요구조건을 관철시킨 것이었고, 사회주의 의식을 대중적으로 보다 넓게 확산시킨 점이었다. 일본경찰이란 가공할 살인집단이었다. 일본경찰력이란 무한대로 자행하는 폭력과 금력을 동원한 끄나풀들이었다. 모든 조직이 탐지되는 것은 그들과 농민의 탈을 쓰고 조직에 숨어들거나 조직원들 옆에 밀착해 정보를 빼내었다. 조선사람들을 잡아먹는 조선사람들, 그 인간들 때문에 일본경찰력은 날로 강대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군상들은 하나도 없었다면 일본경찰력이 그렇게 강해질 없는 일이었다.


(38-39)

도대체 민생단투쟁이란 게 뭔가?”

학습이 끝나고 노병갑은 홍완섭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래, 자네도 지휘간부로서 알아둬야 할 일이지. 그러니까 말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만주국이 세워지기 직전인 32 2월에 조선에서 용정으로 건너온 친일파 김성화가 왜놈들의 사주를 받아 <경성매일신보> 부사장 박선윤, 광명회의 정사빈 등과 연합해서 민생단이란 것을 조직했네. 그 단체는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주사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일치하는 거지. 그런데 속에 감춰진 목적은 북간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교란시키고 파괴하자는 것이었지. 다시 말하면 민생단은 대규모 밀정 스파이단체였던 거네. 민생단원들은 백색구역(일제 통치지역)의 친공산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적색구역(유격근거지)에까지 자원유격대원으로 가장해 잠입 침투해서 간도 자치며 생활 보장, 조선인 우대 등을 교사하며 내부분열 공작을 획책한 거네. 그러기를 5개월쯤 하다가 민생단은 해산됐지. 그런데 문제는 그놈들의 암약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유격근거지에서 조선사람이면 일단 민생단분자로 의심받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네.”


(76)

, 들어보게. 자네도 알다시피 왜놈들은 만주사변 이후로 조선땅에 군대를 강화하고 경찰들을 증원했네.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이 사회주의자들의 색출과 처벌이네.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이 사회주의자들의 색출과 처벌이네. 그건 왜 그렇겠나? 두 가지 목적 때문이지. 첫째는 조선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한 적을 완전히 말살시키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둘째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농민층과 노동자층이 끝없이 쟁의를 일으키면서 조선땅이 동요하는 것은 제놈들의 만주 장악에 치명적이기 때문이야. 조선의 안정이 만주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네. 그래서 왜놈들은 준전시체라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사회주의 세력의 말살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일세. 그놈들의 총력전은 효과를 거두고 있고, 사회주의자들은 그동안 만 6천여 명이나 검거되면서 악화일로를 걸어왔네. 참 시인하고 싶지 않지만, 냉정하게 판단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머지않아 거의 검거되거나 운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네. 나는 감옥에서 나와 감금상태에 있으면서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지. 또 잡혀서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하고 그전 식으로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방법밖에 없느냐 하면, 감금상태는 바로 운동의 중지상태니까. 그런데 운동을 계속하다가 잡히게 되면 재범이고, 재범은 중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지 않은가. 그것 또한 운동의 중지상태야. 이 대목에서 내 고민은 심해졌지. 왜놈들은 절대로 사회주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왜놈들은 절대로 사회주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왜놈들의 횡포는 계속되는데 과연 실현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주의 운동을 밀어붙이다가 부지하세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였지. 그 방법은 치열하긴 하지만 자폭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왜놈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네. 그런 측면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네. 왜놈들의 식민지 횡포가 계속되는 속에서 어떤 형태든 행동의 중지보다는 적극성이 떨어지더라도 행동의 지속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구상한 것이 개인적 사회주의화야. 다시 말해서 우리 집안의 농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집단농장의 경영이야. 단 사회주의라는 냄새는 일체 풍기지 않고 속으로 감추었으니까 경찰에서 볼 때는 평범한 지주에 불과하지. 허나 실제로는 소작제가 아니라 공동경영이고, 잉여재산으로는 딴 지주의, 특히 왜놈들 농장의 빚을 써서 논이 넘어가게 된 농부들의 빚을 갚아주고 흡수해 들이는 거네. 그럼 그 농부도 보호하고, 왜놈농장들이 토지를 장악해 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이중 효과를 발휘하게 되지.


(90-91)

차득보는 장타령을 흥얼거리며 열심히 피를 뽑고 있었다. 피들도 여름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극성스럽게 커올라왔다. 차득보는 농사를 지어갈수록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물보다는 식물이 더 강인한 것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강아지풀은 낫으로 싹 베버리면 삼사 일이 지나면서 잎들과 꽃술줄기가 어엿하게 솟았다. 하도 놀랍고 신기해서 다시 싹둑 베버렸더니 역시 거짓말처럼 또 제 모습을 갖추었다. 풀이 그렇데 빨리 자라난다는 것도 희한했고, 다시 제 모습을 갖추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다시 싹둑 베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서야 제 씨를 뿌리고 죽겠다는 강아지풀의 강인한 생명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몇번이나 그러는지 보고 싶었다. 다시 싹둑 낫질을 해버렸다. 그러기를 두 달 동안 했고, 강아지풀은 찬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풀들이 스러지는 그때까지 두 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 난쟁이로 끝끝내 꽃술줄기를 피워올리는 것이었다. 그 지독스러움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경이로운 일을 공허 스님한테 말했더니 , 니가 인자 득도를 허능구나. 그려서 부처님께서 살생허지 말라고 이르셨느니라. 그리혀서 생명이 지탱되는 동물은 이 시상에 없응게하며 대견해했던 것이다. 피라는 것도 강아지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리 열성으로 뽑아도 남아 있는 뿌리에서 또 새 잎과 죽기가 돋아오르는 것이었다.”


(126)

일본스파이 문제가 연해주의 조선사람들 사회에서 떠돌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다음부터였다. 조선사람들이 일본스파이가 되어 소련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조선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나보나 하며 별 관심 없이 들어넘겼다. 스파이라는 특이함도 특이함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도 더 관심 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혁명사회 건설이라고 하여 사회 전반의 제도와 바뀌고 있었고, 특히 농촌에서는 지주라는 것이 전부 없어지고 집단농장이 조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해주의 조선사람들도 만주의 조선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다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도 어김없이 논을 일구었지만 그 땅이 러시아지주들의 것인 점도 만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동안 소작인 생활을 겪어온 그들에게 지주 없는 집단농장이 만들어지는 것은 경이었고, 새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사람들은 그런 사회 건설을 그야말로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167-169)

왜 왔던고 왜 왔던고 만주벌판에 왜 왔던고

낯설고 물설은 만리타국 만주땅에 어인 일로 왔던고

삼천리라 금수강산 왜놈 발에 짓밟혀서 조선 해는 간곳없이 암흑천지 되었으니

뜻 굳은 남아로서 할 일이 그 무언고

빼앗긴 나라 되찾는 것 그것밖에 더 있는가

암흑천지에 불밝힐 일 그것밖에 더 있는가

옳소이다 옳소이다

그 생각이 옳소이다

그 길이 아니 가면 어찌 조선 남아리까, 어찌 조선 남아리까

그러허나 예로부터 옳은 길은 가시밭길

처자식도 생이별에

둘도 아닌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는 길

그 길을 택한 남아 몇몇이나 되었던가

하나뿐인 목숨을 초로같이 여기고서

의기 푸른 조선 남아들 만주땅에 진을 치니

장하도다 장하도다

하늘이 칭송한다

설한풍 몰아치는 허허벌판 만주땅에

풍찬노숙 몰아치는 허허벌판 만주땅에

풍찬노숙 뼈깎으며 왜놈들과 싸우기 그 몇몇 헤이던고

일년이 십년 되고 십년이 이십년 되어

고향땅이 그리워라 처자식이 목메어라

그래도 굽히지 않은 뜻 일편단심 구국이라

나라 찾아 깃발 날려 금의환향 하렸더니

에고오 어인 일로 갇힌 몸 되었는고

에고오 어찌타 옥사가 웬말인고

어화 원통해라

아이고 절통해라

이대로는 못가겠다 이대로는 못가겠다

원통하고 절통해서 이대로는 못가겠다


애간장 녹아내리게 하는 슬프고 처연한 가락은 절정으로 치달아오르며 달빛 푸르른 벌판으로 퍼져나가고, 난데없는 소리에 이끌려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혼백으로도 끝끝내 싸워 이길 터이니 나를 만주땅 뿌리거라

고결하신 그 뜻에 산천초목이 떨고

휘영청 밝은 저 달도 낙루하는데

어찌타 뒤따르는 자들이 그 뜻 모르오리까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하늘에 맹세하노니

다 못 이루신 뜻 정녕코 이루오리다

남기고 가신 한 기필코 풀겠소이다

굳게굳게 맹세하고 뒤따르오니

어화 님이시여, 님이시여

원통함을 푸시고

절통함도 푸시고

이 거친 만주벌판 떠돌지 마시고

춥고 어두운 구만리장천을 떠돌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시는 얼굴로

백화난만한 극락으로

상춘화창한 극락으로

왕생하오시라

극락왕생하오시라

비옵나니 비옵나니

극락왕생하오시라


(190-191)

그러나 양세봉 장군을 잃어버린 조선혁명당군들의 사기는 전만 같지 못했다. 그런데다 이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갔다. 반면에 일본군과 만주군들의 공격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승리하는 전투가 없어지면서 자꾸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총사령 김호석이 만주꾼에 체포되고 말았다. 조선혁명단군이 분산될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 위기 앞에서 손을 뻗친 것이 동북항일연군이었다.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연합군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자는 것이었다. 조선혁명당군들은 만주에 새롭게 등장한 항일세력인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혁명당군들은 동북항일연군 대원들로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힘이 약한 군대가 힘이 강한 군대에 흡수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건 조국해방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서로 연합하고 협동한 것이었다.


(277-278)

20만 조선사람들의 강제이주는 1937 8 21일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강제이주 결정사항 제1428-326cc호에 기록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사람들의 첩자행위 방지, 둘째는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이었다.

그리고 강제이주를 직접 명령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하바로프스크, 당지구위. 조선인들 이주 문제 – – 시기적으로 성숙했음.

이주 시기에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철저한 조치를 조속한 시일 내에 강구하기 바람.

                              당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1937 9 11 17 40


이것은 스탈린이 보낸 암호전보였다.

그 명령에 따라 연해주 일대의 조선사람 20여만 명은 9월 중순에서부터 11월 말까지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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