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아직 오늘날에도 장엄하고 숭고한 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늙어가면서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리고, 세월과 인간들이 동시에 이 존경할 만한 건축물에 가한 무수한 풍화와 훼손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고 분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209)

대개 어느 나라에서나, 특히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경이로운 예술이 그렇게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그 파괴에서 세 가지 상해를 구별할 수 있는데, 그 세 가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깊이로 상처를 입히고 있으니, 우선, 세월은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 표면에 구멍을 내고 도처에 녹이 슬게 해놓았고, 다음으로 정치적, 종교적 혁명은 그 자체의 성격상 맹목이요 분노인지라, 소란스럽게 그것에 달려 들어, 조각물과 세공품의 풍부한 복장을 찢고, 원화창들을 도려내고, 아라비아식 장식과 작은 상()들의 목걸이들을 부서뜨리고, 자기들의 주교관을 위해 혹은 자기들의 왕관을 위해, 조상들을 뽑아내 버렸으며, 끝으로, 갈수록 기괴망측해지고 어리석어진 유행이었으니, 건축양식의 필연적인 타락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무정부주의적인 화려한 탈선 이래로 갖가지 유행이 바뀌었다. 유행은 혁명보다도 더 많은 해독을 끼쳤다. 유행은 뿌리째 뽑아내고, 예술의 뼈대를 침식하고, 형식에서나 상징에서, 논리에서나 미()에서, 건물을 베고 자르고 무너뜨리고 죽여놓았다. 그런 뒤에 유행은 고쳐 만들었는데, 세월이나 혁명은 적어도 그런 야심은 없었던 것이다.


(229-230)

그 꼭대기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착하는 구경꾼에게 그것은 맨 먼저 눈부신 지붕과 굴뚝과 거리와 다리와 광장과 종루 들이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깎아지른 듯한 합각머리, 뾰족한 지붕, 성벽 모퉁이에 매달린 소탑, 11세기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 15세기의 판암 오벨리스트, 아성의 꾸밈없는 둥근 탑, 성당의 장식 네모탑, 큰 것, 작은 것, 육중한 것, 경쾌한 것 등등. 눈길은 오랫동안 그 미궁 속에 깊이깊이 잠겨 드는데, 거기에는 저마다 제 나름의 독창성과 동기와 특성과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전면에 물감 칠과 조각을 하고, 바깥으로 뼈대가 불거지고, 문이 반궁륭이고, 위층들이 앞으로 불쑥 나온, 작디작은 가옥에서부터 당시에는 탑이 즐비했던 장엄한 루브르 궁에 이르기까지, 예술에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256)

그런데 현재의 파리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다. 그것은 여러 시대의 견본들의 집합체인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수도는 가옥들로만 커져가고 있거니와, 무슨 가옥들이 그 모양인가! 파리는 이대로 가다가는 오십 년마다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파리의 건축물의 역사적 의의는 날마다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기념적인 대건축물들은 더욱더 드물어져가고, 집들 속에 잠겨서 차츰 삼켜져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선조는 돌의 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자손은 회반죽의 파리를 갖게 될 것이다.


(262)

보통, 낮에 파리에서 풍겨 나오는 소음은 도시가 이야기하는 것이요, 밤에는 도시가 숨을 쉬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는 도시가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탑들의 총 합주에 귀를 기울이고, 오십만 인구의 중얼거림을, 강물의 영원한 하소연을, 바람의 끊임없는 숨결을,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상자처럼 지평선 언덕에 흩어져 있는 네 숲에서 멀리 들려오는 장중한 사중창을 그 모든 것 위에 퍼뜨리고, 마치 반음 속에서처럼, 중앙의 종소리가 가진 너무도 거칠고 날카로운 모든 것을 거기에서 부드럽게 하고, 그리고 말하라, 이 세상에서 이 종소리와 인경 소리보다도, 이 음악의 도가니보다도, 300척 높이의 돌 피리 속에서 한꺼번에 노래하는 이 수만의 청동 목속리보다도, 이제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불과한 이 도시보다도, 폭풍 같은 소리를 내는 이 교향악보다도, 더 풍부하고, 더 즐겁고, 더 금빛이고, 더 눈부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지를.


(324)

그 반면 연금술은 가지가지의 발견을 하였소. 다음과 같은 결과들에 나리는 이의를 내세우시렵니까? 1000년 동안 땅 아래 갇혀 있던 얼음은 바위 수정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납은 모든 금속들의 선조입니다. (왜냐하면 금은 금속이 아니고 빛이니까요.) 납은 각각 200년의 기간만 있으면 차례차례로 납의 상태에서 적비소(赤砒素)의 상태로, 적비소에서 주석으로, 주석에서 은으로 옮아 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작은 열쇠>를 믿고, 충만한 선을 믿고, 별들을 믿는다는 것은, 옛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꾀꼬리가 두더지로 변하고, 밀알이 잉어과의 물고기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란 말입니다!”


(332-333)

내 판단으로는, 그 사상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신부로서의 사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요인, 인쇄물이 대한 성직의 공포였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빛나는 인쇄기에 대한 성직자의 두려움과 경탄이었다. 그것은 인쇄된 말에 놀라는 강단과 수사본이요, 구두의 말과 필기의 말이었다. 천사 레지옹이 600만의 날개를 펴는 것을 보는 참새의 당황과도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해방된 인류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벌써 듣고, 미래에 지성이 신상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여론이 믿음의 자리를 빼앗고, 세계가 로마를 뒤흔드는 것을 보는 예언자의 외침이었다. 인쇄기에 의해 발산된 인류의 사상이 신정(神政)의 그릇에서 증발하는 것을 보는 철학자의 예언. 청동의 파성추를 살펴보고 탑이 무너지리라고 말하는 군인의 공포. 그것은 하나의 힘이 바야흐로 다른 힘을 이어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인쇄기가 성당을 죽이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337)

모든 문명은 신정(神政)으로 시작되고 민주주의로 끝난다. 통일성에 뒤이어 오는 이 자유의 법칙은 건축술에 쓰여 있다. 왜냐하면, 이 점은 강조해 두거니와, 벽돌 공사가, 신전을 건축하고 신화와 성직의 상징체계를 표현하고 그 돌의 책장들에 율법의 신비로운 일람표들을 상형문자로 옮겨 쓰는 데만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인류 사회에는, 신성한 상징이 자유사상 아래 닳아 없어지고 인간이 성직자를 피하고 철학과 제도들의 부속물이 종교의 얼굴을 갉아먹는 시기가 오게 되므로, 건축술은 인간 정신의 이 새로운 상태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책장들은 표면은 가득 차 있되 이면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 작품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 책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342)

이렇게, 구텐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건축술은 주요한 문자요 보편적인 문자이다. 동양에서 시작되고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의해 계속된 이 화강암 책은, 중세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썼다. 게다가 우리가 앞서 중세에서 관찰한 특권계급의 건축술의 뒤를 이은 이 민중의 건축술이라는 현상은, 인류의 지성에서, 역사상의 다른 위대한 시대들과 유사한 모든 운동과 함께 재현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모두 설명하자면 여러 권의 책이 필요할지도 모를 하나의 법칙을 간추려서 서술어 본다면, 원시 시대의 요람인 저 고대의 동양에는 인도의 건축술 다음에 아라비아 건축술의 풍만한 어머니인 페니키아의 건축술이 왔고, 고대에는 이집트 건축술(에트루리아 양식과 키를롭스 건축술들은 이집트 건축술의 변종에 불과하다) 다음에 그리스식 건축술이 왔고(로마 양식은 그리스식의 연장에 불과하되, 카르타고식 둥근 지붕을 이고 있는 점만이 다르다), 근대에서는 로마네스크 건축술 다음에 고딕 건축술이 왔다.


(347)

그러므로 인쇄술이 발명된 때부터 얼마나 건축술이 시나브로 여위어가고 오그라져가고 발가벗겨져 가는지 보라. 물은 줄어들고 진()은 밭아 들고 시대와 국민의 생각은 건축술에서 물러가는 것을 사람들은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가! 냉각은 15세기에는 거의 지각할 수 없다. 인쇄술은 아직 너무도 허약하여, 고작 해봤자 강력한 건축술의 잉여생명력을 우려먹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건축술의 병이 눈에 보이고, 건축술은 이미 절대적으로 사회를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고, 비참하게도 고전 예술이 되고, 갈리아의 건축술, 유럽의 건축술, 토착의 건축술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술이 되고, 진정하고 근대적인 건축술에서 의()고대적 건축술이 된다. 이러한 쇠퇴를 사람들은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화려한 쇠퇴다. 왜냐하면 고딕의 낡은 천재가, 마인츠의 거대한 인쇄소 뒤로 저물어가는 이 태양이, 아직 얼마 동안은 그 마지막 햇살로 라틴의 홍예와 코린트의 원주들로 이루어진 그 모든 잡동사니의 건축물 더미를 비춰주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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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명시의 말에 늦잠을 자던 알료샤가 슬그머니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세 여자의 대화 속에 레닌이나 스탈린이란 단어만 나오면 잔뜩 긴장하던 알료샤였다. 하지만 고리키라는 이름이 나오면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세 여자가 고리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했다. 알료사뿐만이 아니었다. 혁명 소설가 고리키에 대한 러시아인의 특별한 사랑은 석류 알갱이처럼 붉고 투명한 연어알절임과 당근 빛깔이 나는 묽은 야채수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것 같았다. 세 여자가 열차 식당칸에서 고리키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알아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역시 레닌의 나라였다. 관공서 어디를 가도 1년 전에 사망한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150-151)

내가 보기엔 당신네 공산당도 오십보백보요. 나는 사서삼경도 못 읽는 촌부이지만 당신네들이 자유시에서 조선인 독립군을 수천 명이나 학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네들은 이번에 중국인 지주들을 때려죽이자는데, 아니 지금 우리가 못사는 게 정녕 그 사람들 때문이란 말이오? 오히려 반대가 아니오? 그 사람들 아니면 우리는 벌써 첫해에 굶어 죽었을 거요. 일본 놈들을 물리치자는 말까지는 알아듣겠지만 그 이상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소이다. 나는 자기네가 권력을 잡으면 다 될 것같이 떠드는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겠소이다. 어느 놈 할 것 없이 백성의 고통을 팔아서 권세를 누리려는 것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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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3-11-07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글귀가 인상적이네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bookholic 2023-11-07 20:54   좋아요 0 | URL
네.. 잘 모르고 있던 분을 새로 알게 된 점도 좋았습니다~~^^
 
















(8)

어째서 수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을까? 수학은 어떻게 동전과 유전자, 주사위와 주식, 책과 야구 등 서로 상관없는 영역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수학이 생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된다.


(35-36)

하지만 수학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수학자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전략을 채용한다. 바로 심상 만들기다. 수학자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 본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기술적 세부 사항들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연결해 본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자들은 읽을거리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곳에서 즐거움, 유머, 결벽증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68-69)

비안네가 드무아브르의 정리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안네는 자신을 지식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만면 나의 통찰은 두꺼운 머리뼈 안에 갇혀 어눌한 혓바닥을 통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없는 수학자는 그날의 나처럼 자기 생각 속에 섬처럼 혼자 고립되어 남에게 닿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 자신이 아는 진리를 공유할 수 있는 수학자는 사람들에게서 감사의 마음과 영웅 대접을 받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121)

몸집이 큰 동물은 내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가 쉽다. 반면 작은 동물은 표면 비중이 높아서 체온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다. 손가락, 발가락, 귀 등 표면 비중이 높은 사지 말단이 추위에 제일 약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 북극곰, 물개, 야크(티베트산 들소-옮긴이), 무스(북미산 큰 사슴-옮긴이), 전설 속 설인 새스쿼치 같은 대형 포유류만 사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표면 비중이 높은 생쥐가 북극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중위도 지역에 사는 생쥐도 열 손실을 감당하려면 하루에 자기 체중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어야 한다.


(219)

나는 뭔가 냉철하게 판단하고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야. 밀수업자에 제국의 반란군이지. 나는 총을 누가 먼저 뽑느냐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람이야. 한 치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어야 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전쟁터의 참호에는 확률론 학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나는 평생 그런 참호 속에서 살아 왔고, 내 입장에서 보면 힘든 확률 계산은 마치 신경 쇠약에 걸린 황금색 로봇이 옆에서 계속 이렇게 떠드는 것만큼이나 거추장스러운 일이야. “맙소사! 선생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될까 모르겠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나와 비슷한 속성이 모두 조금씩은 있어.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평가가 필요할 때는 확률론이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객관화된 수치로 정당화할 수 없는 자신감이 필요할 때가 있어. 본능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확률만 따지고 있다가는 때를 놓친다고. 가끔은 수치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냥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336)

과학은 결과 절대적 확실성이나 슈퍼맨 같은 완벽함으로 정의되었던 적이 없다. 과학에서는 언제나 건강한 회의주의 시각에서 모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가능 중요했다. 이런 싸움에서 통계학은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이다. 통계학이 과학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데 한몫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한몫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459)

역사는 작은 규모에서는 단순하지만 큰 규모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하루 단위의 작은 규모에서는 거칠게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 평균하면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날씨와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역사는 코흐 곡선과 비슷해서 모든 수준에서 카오스가 등장하고 모든 규모에서 복잡성이 드러날까? 머릿속에서 이런 비유들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 마치 한 화면에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파일 세 개가 동시에 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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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32)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79)

이 세상에 아름다움은 대칭(조화로운 비례), 그 자체보다는 그 대칭 위에서 빛나는 빛에 있다. 이것이 거기에 매력을 부과한다. 사실 살아있는 얼굴 위에는 아름다움의 광채가 더없이 빛나는 반면, 죽은 얼굴 위에는 비록 살과 그 대칭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해도 그 광채의 자취밖에 없는 것은 대체 왜인가?”

<플로티노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p.86


(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143-144)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173)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교황의 주문인 만큼 교황의 의지가 분명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여기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담겼을 겁니다. 한 마디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교황의 취향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도 담겼다고 볼 수 있어요. 이는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을 이교도로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이들 역시 기독교의 영광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본다는 뜻이죠.


(195-196)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365-366)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397-398)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 7세 역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거든요. 황제의 공격으로 로마가 쑥대밭이 되고 교황의 세력이 약해지자 교황의 지원을 받던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도 동시에 약화됐습니다. 이 틈을 노린 것이죠. 반대파들은 피렌체 시민을 선동해 메디치 가문을 또다시 내쫓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주문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쫓겨났으니 헤라클레스 상도 제작이 멈췄지요.


(417)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422)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442-443)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너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534)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등장해 다른 건축 양식과 경쟁하고, 한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는 데는 단순히 미적인 가치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작동하지요. 그렇기에 서양미술사에서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양식이 경쟁했고 채택됐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결구에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남을 보며 시작했던 이야기는 결국은 나를 보게 한다는 점이 바로 미술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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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그 시절,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지리산이 그리웠다. 백운산을 뒷산으로, 지리산을 앞산으로 보고 자란 탓인지 모른다. 서울 살 때도 나는 언제나 산 밑에서 살았다. 집을 고르는 조건의 첫째가 산이었다. 돈 없던 대학원 시절에는 북한산 밑에 살았고, 그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이어지는 곳에 살았다. 등 뒤에 산이 버티고 있어야 숨이 쉬어졌다. 서울 사방이 산인데 가진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는 수배자가 왜 산에를 못 갔냐고? 그 시절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산에 가면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나 푯말이 붙어 있었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41)

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 중 둘은 미국에 있어 얼굴 보기 어렵고, 국내에 있는 친구들도 각자의 일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드문드문 안부 전화나 주고받는 정도다. 그래도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거나 어색한 날이면 포천에서 그날 밤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106)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162)

A와 나는 사람과 관계 맺는 방법이 다르다. 나는 참으로 더디다. 처음에는 높은 벽을 치고 문 열어줄 사람을 꼼꼼히 따져 고른다. 그 문이 나에게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 아니라 첫 문이다. 10년쯤은 만나야 아,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A는 처음에 훅 들어온다. 서로 살가워질 때까지 시간과 공력을 쏟아붓는다. 친구가 되었다 싶으면 긴장이 풀리고 그래서 처음보다 느슨해진다.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른 건 아니다. 그저 서로의 방식과 속도가 다를 뿐이다. 알면서도 이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관계를 처음 맺을 때는 A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나에게 서운했고,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내가 예전처럼 자주 오지 않는 A에게 서운했다. , 그러면서 조금씩 더 알아가고 더 친해지는 것일 테니 큰 상관은 없다.


(164)

이런 젠장, 달팽이가 존나 빨라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존나 빠른 달팽이는 시바스리갈 700밀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꽐라가 되었다. 가관이었겠지만 뭐 괜찮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A는 맥주 세 캔에 취해서 나보다 빨리 기억이 끊겼고, 내 기억도 끊겼으니,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쿨하게. 어디에 가닿건 존나 빨리는 달려보자.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195)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보다 깊고 넓다고 생각했던 A 또한 나와 똑같이 청춘의 허세를 부렸을 뿐이라는 걸. 청춘은 허세다. 그러니까 청춘이지. 스무 살 언저리의 A는 인생도 문학도 독고다이, 쓸쓸하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런 찬란하게 유치한 마음으로 홀로 걷고 홀로 마셨던 것이다.


(199)

다정한 제자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 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225-226)

2005년 여름, 북한을 방문했다. 남북작가대회의 일원으로. 남북의 문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5 12 13일이었다. 60년 만의 만남, 다시 말해 남과 북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 동안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이다. 금기의 땅을 합법적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로웠고, 우리나라 70년대 초의 풍경을 옮겨놓은 듯한 평양의 거리는 정겹지만 착잡했고, 거기서 만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같은 얼굴의 사람들은 감동적이었다. 같은 듯 다른 음식은 신선했다. 소박하고 슴슴한 옥류관 냉면은(요즘은 양념장을 써서 맛이 변했다는 말도 있지마)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 그때 소주를 마셨어야 했는데차마 소주 마셔도 되냐는 말이 나오지 않아 냉면만 먹었다. 평냉에는 소주인데, 옥류관 김치도 그립다. 물김치라기엔 물이 적고 김치라기엔 물이 많은, 고춧가루는 시늉으로만 뿌린, 그런데 기이할 정도로 시원하고 담백했던 그 김치를 남한 어디에서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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