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템과 터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버지가 실질적으로 욕망을 금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그는 그것, 즉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근대인, 즉 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인간,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인간에게 제안하는 신화다.왜 프로이트는 이런 역설을 펼쳤을까?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어떻게 욕망이 훨씬 위험해지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금지가 더욱 필요해지고 엄해지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신이 죽은 이후 더 이상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종교의 승리>
존재는 갑자기 베일을 벗었다. 존재는 추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비공격적이던 모습을 잃었다. 존재는 사물이라는 조형물을 만들기 위한 찰흙원형 자체였고, 그 나무뿌리는 그런 존재 속에 빚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나무뿌리와 공원의 철책, 벤치, 듬성듬성한 잔디밭 등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물의 다양성이나 사물의 개별성은 가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표면을 바르는 칠에 불과했다. 그 칠이 녹아버리고, 괴물처럼 물컹거리고 무질서한 덩어리, 노골적이며 무섭고 추잡한 알몸의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희극적일 수는 없다. 가벼운 희극에 나타나는 어떤 장면과 어딘지 닮긴 했지만, 그 유사성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존재자들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존재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막연한 불안을 품으면서, 다른 존재에 대해 자신을 잉여로 느끼고 있었다.
죽어버린 수많은 이야기에 비하면, 그래도 한두 가지는 살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살아 있는 이야기가 줄어들 것이 두려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조심스레 그것을 떠올릴 때가 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건져 올려 배경, 등장인물, 등장인물의 태도 등을 되살린다. 그러다 갑자기 중단한다. 그것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 감각의 그물구조 아래 단어 하나가 두드러지는 것이 보인다. 그 단어가 결국엔 내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대신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즉시 멈추고 얼른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의 기억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헛수고다. 다음에 떠올릴 때는, 분명 많은 부분이 굳어 있을 것이다.
사물, 그것이 사람을 ‘만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사람은 사물에 에워싸여 살고 있다. 그것은 유용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고전의 정의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책의 존재와 주제에 대해 알고 있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이라는 것이다. 토머스 쿤의 이 책도 그런 고전의 반열에 발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소설도 아닌 과학에 관한 책이다보니 아무래도 읽은 사람의 수는 더 적을 것이다.이 책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인 ‘패러다임의 전환’ 개념은 발간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켰겠지만 현재의 우리는 각종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과학의 발견에 대해 이미 많이 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라부아지에, 돌턴, 뉴턴,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당시 새로운 이론이었던 양자역학까지 말이다. 물론 라부아지에나 돌턴은 조금 생소할 수도 있지만 모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책에서 그들의 이론에 대해 잘 설명해놓았다.‘패러다임의 전환’을 거칠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떠한 이론이 ‘정상과학’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이론의 정교화 혹은 교육을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시험기기를 발명하고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 ‘퍼즐풀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에서 주목할만한 계속된 오차나 이론과 자연 현상의 차이가 발생하면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고 바로 기존 이론의 폐기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기존의 이론을 보완, 수정하지만 그럼에도 누적된 위기 상황에 결국 새로운 이론이 대두되어 과학자간의 이론 분쟁이 시작된다. 그런 이론 분쟁에서 살아남은 이론이 다시 ‘정상과학’이 되어 이를 되풀이한다. 이런 순환에 대해 저자는 다윈의 진화론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지금은 그러한 면이 없겠지만 과학사에 보면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위기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보통 중세 카톨릭은 천동설을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갈릴레오 시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수정한 타이코닉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갈릴레오가 받은 종교재판은 사실 성체성사의 실체변화(미사 때 받는 빵은 그냥 빵이 아니고 예수의 살이 되고 포도주는 단순한 포도주가 아닌 예수의 피로 변한다는 종교 이론)를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과학은 외부의 영향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사실 이 책의 절반 이상을 뜻하지 않은 며칠간의 바다 여행에서 다 읽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내 책만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서재 친구분들이 나누던 대화 중에 있었던 ‘어떤 환경이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어 부수적인 깨달음도 있었다. 책을 모두 읽고 밤바다를 바라보다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패러다임이 변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 있는 과학자들이 바뀌는 것이라고. 자연은 변하지 않고 단어의 뜻 그대로 자연하게 그자리에 있다. 단지 그 자연을 해석하는 이론과 사람이 변하는 것일 뿐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며칠간 해산물을 먹으며 문득 일본이 정말 오염수를 방출하면 언제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혹은 아주 긴 시간동안 이런 음식은 먹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풀빌라라는 곳을 처음 갔는데 풀장의 창 밖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보이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며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자연은 그대로 있으려 하지만 자연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거부하고 욕심으로 괴리를 자초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