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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대상(작품)이 아니다. 글로 쓴 대상을 공부하기 전에 글을 쓴 사람을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재현이 ‘누군가가 쓴 것’임을 인식하고,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 쓴다’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안정된 존재가 쓴 글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안정이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성립 가능하다면 그 안정은 기득권 속의 안정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정한(unstable) 상태를 존중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과 연대하고 싶다.

모든 언어는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시간차를 메우려는 예언자는 사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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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6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드포에 이어 정희진 읽는 대디 님, 좋네요! 후훗.
:)

DYDADDY 2023-11-16 12:16   좋아요 0 | URL
정희진 선생님의 책들을 읽다가 <페이드 포>를 읽었어요. 일하면서 틈틈이 읽다보니 속도가 잘 안 붙어서 하루에 한 편씩 읽는 다락방님이 부러워요.
:)
 

성매매는 남성이 여성을 동등한 경제 주체로 대하는 어떤 마법 같은 삶의 무대가 아니다. 다른 여성들이 하루나 일주일 만에 받을 돈을 성매매 여성들이 한 시간 만에 받는 이유는 여성들 자신이 인간 자위 도구로 이용되는 사실을 허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높은 수입은 성평등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건 돈을 버는 어려움을 반영한다. - P308

그 여성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할까? 첫째로, 무엇을 말하던지 부드럽게 말하겠다. 절박한 여성들에게 설교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가난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그 절박한 공포의 무게는 가난이 도달해서 느끼는 고통만이 넘어선다는 사실을 나의 삶으로 안다. 그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이 내게 말해주기를 바랐다고 말하고 싶다. 제발 이건 하지 마세요. 가지고 있는 것 중 마지막으로 남은 가치 있는 걸 팔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마지막으로 팔 가치가 있는 건 끝까지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성적 자아를 판 대가로 다른 것들을 살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그러면 그것들을 살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나? 고심하게 되는 이 판매는 자본주의 법칙을 넘어선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일이 어떻게 전개되던지 여기서 판 것을 다시 살 수 있는 수단을 결코 축적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여성 자신과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속하는 사적 자아 사이의 끊어진 연결을 다시 구축할 수 있는 통화가치는 없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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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악함을 선함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여기서 ‘선함‘이란, 알고 싶지만 그들 스스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해보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성매매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이 시도에는 선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성매매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드러냄에는 선함이 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밝혀 나타나는 광명이다. 있는 그대로 진실의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 필수적인 솔직함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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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가정 내 자기 실현, 결혼 거부와 저출산을 선택하는 여성들,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에 지친 여성들, ‘고양이, 알바, 여행’으로 상징되는 ‘소박한 삶’에 대한 욕구, SNS를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여성들… …. 이 시대 여성들의 근본적 고민은 여전히 남성과의 불평등 때문이다. ‘선택’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여성성의 신화》는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운다.

좌파가 다윈주의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좌파가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정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보기엔 ‘원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시스트나 파시스트나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차이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았다. 성별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인종 차별, 지역 차별, 공간 구조는 서구 제국과 다르지 않았고, 이는 이미 안토니오 그람시나 조르주 르페브르, 미셸 푸코 같은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통감한 바다. 근대 체제는 인간과 사회를 인식하는 데서 ‘생물학’과 ‘사회학’, 몸과 정신, 개인과 구조, 자연과 문화, 보편과 특수, 언어와 물질이 상호 배제적, 대립적 범주라는 이분법을 만들어냈고, 이는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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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1963년의 이 텍스트에서부터 맑스의 발견과 프로이트의 발견의 유사성을 내보이면서, 라캉의 작업에 대해 강렬한 찬사를 보낸다. "맑스는 ‘경제적 인간‘ 신화에 대한 거부에 근거해서 자신의 이론을세웠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인간‘ 신화에 대한 거부에 근거해서 지신의 이론을 세웠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해방시키는 단절을 보았고 이해했다. 라캉은 그 용어[단절]를 엄밀하게 취하면서, 그것이 중단이나 양보없이 그 고유의 결과들을 산출하도록 강요하면서, 충만한 의미에서 그 용어를 이해했다. 그는 모든 사람처럼 세부사항들 속에서, 나아가 철학적 지표들의 선택 속에서 방황할 수 있다. 우리는 그에게 본질적인 것을 빚지고 있다." 이러한 찬사 속에는 동시에 암묵적인 어떤 유비가, 이를테면 정신분석 이론의 영역 안에서의 라캉이 채택한 절차와 맑스 이론의 영역 안에서 알튀세르 자신이 채택한 절차 간의 두 번째 유비가 일어나는 것처럼 나타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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