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은 사진이 자동으로 업로드되는 구글 포토에 들어갔다가 한참 고민에 빠졌다. 업로드된 사진의 대부분이 일에 관련한 사진이고 핸드폰에서는 모두 찍은지 일주일 이내로 삭제된 사진들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일에 미쳐 사는 워커홀릭도 아닌데.
아니 에르노는 애인과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 벗어놓은 옷을 관계가 끝난 후에 사진으로 남겼다. 흐트러진 옷가지와 신발들. 왜 그들은 그 사진을 남기고 사진에 대한 글을 썼을까. 지금은 너무나 흔한 것이 사진이지만 필름 카메라밖에 없던 시절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감정의 기록이었다. 가족 사진, 놀러갔을 때의 사진, 입학이나 졸업 사진 등등. 아니 에르노의 사진은 생의 시점에서 하나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것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시기이기에 오히려 무의식적인 삶의 욕구인 성과 기록에 집착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책 제목의 사진의 용도는 시각(時刻, 視覺)의 기록이 아닌 시간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엄청난 자연의 광경을 보고도, 공연을 보러 가서도, 심지어 사고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동영상을 찍는다. 그 사진과 동영상을 다시 보는 빈도는 얼마나 될까. 삶을 마감할 때 주마등을 본다고 한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맞는 키를 꽂을 때만 서랍을 열어준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에 그 서랍이 한꺼번에 열리면서 기억이 밀려오는 것이 주마등이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다시 보지도 않을 사진과 동영상을 찍느라 핸드폰으로 시야를 가릴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어떤 열쇠를 만들어야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시간의 기록일 것이다.
오늘의 기록. 알게 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닮고 싶었던 사람이 이곳을 당분간 떠난다고 글을 남겼다. 열심히 댓글을 썼는데 저장을 누르고 나서야 다른 글에 댓글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 댓글에 담긴 마음을 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다른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사람의 글을 읽고 댓글로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