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마카롱 에디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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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번 감상은 이렇게 시작해보기로 합니다.


 부모님은 농사꾼이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종종하셨지만 닦달하지는 않으셨고, 당시 유행하던 백과사전을 한 질 들여놓은 걸 빼고는 특별히 책을 사주거나 읽으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첫 독서의 기억은 초등학교 도서관이었고, 선생님을 따라 그림책 따위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소공녀>를 처음 읽은 건.

 

 나중에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곤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축약본'의 존재죠. 

어린 기억으로는 얇고 쉬워서 만만히 여긴 책이건만 나중에 보면 얇지도 쉽지도 않아 당황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레 미제라블>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장발장> 한 권보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더 길었으니까요.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가뿐하게 해치울 요량으로 <소공녀> 읽기를 시작한 건, 참으로 오만한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오만은 이야기 속 '순수함'에 무참히 부서지죠.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소공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펑펑 우는 꼴 사나운 그런 어른이요.


 줄거리가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소녀가 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애지중지하는 아버지 손자 자라죠. 소녀는 어찌나 어른스럽고 성숙한 지 이제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았건만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 사는 곳은 인도입니다. 아버지는 소녀를 가르치려는 마음에 런던의 기숙학교에 맡기고 인도로 돌아갑니다. 소녀는 홀로 남겨진 순간에도 슬픔을 참고 견디며 눈물을 보이지 않죠. 소녀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얻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함께요. 하지만 소녀는 꿋꿋이 이겨냅니다. 소녀에게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주가 있었고, 절망이 닥쳐오더라도 희망적인 상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믿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소녀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린 데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된 거죠. 소녀는 한순간에 귀한 학생에서 부엌데기로 전락합니다. 온갖 괴롭힘과 멸시, 구박과 수모가 소녀를 덮칩니다. 그러나 소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직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한 줄로 줄거리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요.

"완벽한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죽는다. 시련이 찾아온다. 견딘다. 이겨낸다. 예전보다 더 완전해진다."


이런 이야기의 '어디'가 그렇게 슬퍼서 눈물이 났을까요.

적어보기로 합니다.

완전했던 소녀가 한순간에 세상에 둘도 없는 가엾은 소녀가 됐기에 단순히 불쌍해서 눈물이 난 건 아닙니다. 소녀의 처지가 비참해서도 아니고, 닮은 사람이 떠올라서도 아닙니다. 소녀가 타인을 대하는 모습,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소녀, 사라의 학교에는 베키라는 부엌데기가 있습니다. 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 아이들만이 누리는 특혜였습니다. 부엌데기는 처음부터 '다른 존재'로 여겼기에, 마주 보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같이 식사를 하거나, 동등한 잠자리를 얻는 건 불가능했죠. 사라는 그런 베키에게도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기꺼이 베풀죠. 부유할 때나, 가난해졌을 때나 변함없이요. 사라가 부엌데기로 전락한 후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이 극에 달한 데다 날씨마저 추운 날이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사라는 특기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 6펜스짜리 동전을 주웠다고 생각하며 배고픔을 달래죠. 그때 정말 기적처럼 4펜스짜리 동전을 줍게 됩니다. 보통의 아이라면 얼른 빵이든 뭐든 사서 먹었을 테지만 사라는 달랐습니다. 누군가 돈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를 걱정하죠. 빵집에 가서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가는 길에 자기보다 더 추레하고 배고파 보이는 거지를 보게 됩니다. 사라는 빵집 아줌마에게 돈을 잃어버린 사람을 아는지 묻습니다. 아줌마는 정말 배고파 보이는 아이가 돈을 주웠다며, 찾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묻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있다 해도 오래돼서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죠. 4펜스로는 빵을 네 개 밖에 살 수 없지만 아줌마는 배고픈 아이를 생각해 여섯 개를 담아 줍니다. 소녀는 빵집을 나서죠. 그리고 아줌마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배고파 보였던 아이가, 다섯 개의 빵을 거지에게 건네고는 단 하나만 가지고 가는 모습을요. 


 사라의 이런 마음을 이르는 말은 '연민'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라고 풀이돼 있고, 심리학에서는 극복해야 하는 감정적인 약점으로 여기곤 합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했기에 불쌍하게 여기게 되고, 연민을 통해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일종의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죠. 

 사라는 분명 연민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거지를 도와준 건 단순히 연민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믿음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 같은 거창한 걸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대의 도움을 주는 거죠. 그래서 사라는 보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딱딱하게 설명하자니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다니다 보면 감동이 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쓴 이야기라 현대의 상황이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죠. 

3개 국어를 하는, 어른스럽고 성숙한 데다 겸손과 배려는 물론 인내와 희생의 덕까지 갖춘 일곱 살짜리 아이라니. 상상할 수 있나요?

 아이를 노예나 다름없이 부리는 어른과 돌아가신 아빠를 대체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나타난다는 설정도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 기이한 점들도 감동을 깎아내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새벽까지 읽었기에 촉촉하고 무른 새벽 감성이 터져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라가 보여준 초인적인 미덕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결말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은' 게 아니라 동화죠. 

빨강머리 앤처럼,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실도피, 과대망상 소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얘기에 조금 보태자면 연민이 좋지 않은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 같은 세계를 꿈꾸다가 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현실적으로, 지금의 불행을 최대한 줄이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거죠. '미움받을 용기'같은.


 <소공녀>에서 사라가 보여주는 건 값싼 연민이나 허영, 과대망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희생과 인내, 그리고 배려입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더 많이 가진 자,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자가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게 당연하기에 사라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진실과 진심. 

사라를 움직이는 건 마음 깊은 데에 품고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거죠.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동화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소공녀>는 '악의 평범성'을 외치는 세상에 '선의 가능성'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우는 어른이 되고 말았지만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잃어버리고 말았던 소중한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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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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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 말하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로 말하려면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를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보게 되죠.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요.

 '나'를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노력'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정말 많은 노력'이 말이죠. 하나를 꼽자면,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일도 필요하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타인' 들, '관계'에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흔히 '페르소나'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나라고 믿는 나', '되고 싶은 나', '나일 수밖에 없는 나', '어쩌면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거죠. 연기하는 게 나쁘다거나, 페르소나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나'는 하나인 동시에 여럿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거죠. 많은 '나'가 있을 겁니다.

자,  '진짜 나'는 무엇입니까?


 사랑, 갈등, 미움, 바람. 

'나'는 많은 걸 경험합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성장하면서도 다시 경험을 거듭하죠. '같은 경험'은 두 번 찾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영원히 같아질 수 없으니까요. 유일한 경험들이 모여 '나'를 만듭니다.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들이요.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가 '나'를 찾는 과정에서 던지는 무수한 질문을 모아둔 상자였습니다.

 '나'를 만드는 과정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을 때 분열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균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나이지만 내가 아닌 나, 내가 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나, 나인 줄 알았지만 아닌 나, 나지만 세상이 부정하며 나와 떼어 놓으려는 나.

 하나의 존재,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기이기도 하죠.


<가면의 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가면의 생> 중

많은 사람이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를 꿈꿉니다. 하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게 하나 있죠.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 이전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빼고 싶다고 뺄 수 없는 '더해진 존재'이기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나에게서 타인과 세계를 빼는 게 아니라 더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밀 아자르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더하는 과정'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찾을 때까지, 무엇이 더해졌는지 모두 밝혀질 때까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

 에밀 아자르는 스스로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모두가 어그러진다'는 말이 있죠. 

'나'를 찾는 일에도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나'는 서툰 사람입니다. 

"무엇에?"하고 묻는다면, "많은 일에"라고 모호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죠.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이 한 문장을 타인에게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느냐?"하고 물어도, 다만 "어려웠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어려웠고, 어려웠던 이유에 '나'를 몰라서가 있었으니까요.


벌써 7년이나 된 이야깁니다. 

너무너무 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나를 찾아내라!'라고 매일 아우성이었죠. 

많은 경우 '나여야 하는 나'와 '나이길 바라는 나'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던 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제가 재밌었겠지만, 제게는 그들이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그들 안에서는 '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색한 연기를 거듭 지적받았죠. 

 진정 흥미로운, 인상적인, 어쩌면 기적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첫 단추는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푸는 것에서 시작한 셈이죠. 

 덕분에 지금도 그들과 만날 때면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지킬박사처럼 인격이 달라진다는 건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 하지 않는 말,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지 않은 말,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할 수 있게 되고, 하게 되고, 듣게 된다는 거죠.


 무엇보다 좋은 건 언제나 '더해진다'는 겁니다. 

그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나'에 더해져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뚜렷하고 분명한 '나'가 되는 경험. 이 경험은 무척 귀하고, 소중합니다.


 <가면의 생> 감상을 적으면서 다른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이유는 아무리 많은 가면의 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가면 뒤에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이면서 더해졌으므로 순수한 하나라고 할 수도 없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멈추지 못하는 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로 말해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게 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나'가 되어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겁니다. 

지겨울 만큼 많은 지독한 타인을 경험할 겁니다. 

오만해지기도 하고, 나약해지기도 하고, 비겁해지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이 더하기입니다. 그 모든 순간이 '나'입니다.


저는 여전히 '나'로 말하기에 서투른 편입니다. 하지만 노력을 하고, 애쓰는 중이죠.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고 적고, 진짜 나를 찾고 싶다고 말하며, 가짜인 나를 연기하는 모순을 반복합니다.

무엇이 진짜 '나'입니까?


 다시 적지만, 그 모든 게 '나'입니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런 사람일 겁니다. 

혹시나, 어쩌면, 아마도 말이죠.


오늘은 묘한 걸 적어버렸군요. 

그렇게 해서, 여기 한 페이지의 '나'가 더해집니다.

지금부터 '나'는 '오늘의 나'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죠. 

가면의 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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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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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

총, 칼은 무력 혹은 위력을 상징하고, 펜은 무력과 위력으로 억누를 수 없는 자유를 상징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펜을 지지할 겁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니까요. 

 표현의 자유 뒤를 '알 권리'가 따라갑니다. 그 결과 때로는 누군가의 자유와 권리가 치명적으로 침해되기도 합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의 불행처럼 말이죠.


 카타리나 블룸은 가정부이자 프리랜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매력적이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여성입니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를 두루 갖추었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어린 시절의 불행을 털어내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었죠. 하지만 카니발에서 만난 한 남자가 도주하는 걸 돕게 되면서 생활은 물론 존재에 까지 위기가 찾아옵니다. 

 검사는 '고의적으로 도주를 도운 것이 아니냐?' 혹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공범은 아니냐?'라고  거듭 추궁하며 카타리나 블룸을 몰아붙입니다. 

 '매력적인 여성', '뛰어난 능력', '공범'

 언론은 이 매력적인 사냥감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재고, 자르고, 오리고, 붙여서 지면으로 옮겨 놓죠. 

한 번 시작된 파문은 범위와 위력을 더해가며 퍼져갑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과거가 폭로되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유죄의 증거라고 보도되며, 이웃과 지인들의 말은 토막 난 후 모호하고 자극적인 기사에 덧붙여집니다. 급기야는 큰 수술 후 안정을 취해야 하는 엄마를 찾아가 사건 정황을 전하며 의견을 묻기도 하죠. 

 카타리나 블룸을 돕고자 하는 선의를 지닌 사람들도 언론의 표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별 것 아니었던 것들이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처럼 보도됩니다. 

결국 추측과 폭로와 모함. '아님 말고'를 넘어 '아닌 것도 되게' 만들려는 언론의 폭력적인 보도 행태는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카타리나 블룸은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젊고, 예쁘며, 능력도 뛰어나죠. 가정 사정으로 일찍 결혼하지만 결국 이혼하게 됐고, 이후 스스로 노력한 끝에 겨우 안정을 찾았던 겁니다. 유혹도 많았습니다. 부유한 고용인과 지인들이 호시탐탐 카타리나 블룸을 노렸던 거죠.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은 이런 유혹도 모두 뿌리칩니다. 

 그랬던 카타리나 블룸이었기에 카니발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집으로 들이고, 그 남자는 범죄자였으며,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이 무수한 추측과 억측의 빌미가 됩니다. 사실이건 진실이건 그건 상관없었죠.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을 기삿거리로 삼은 기자를 살해하고 자수하죠. 


범죄자의 탄생.

언론이 성실하고 선한 한 사람을 몰아세운 끝에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언론에서 쏟아내는 기사를 신뢰해서 의견을 갖거나 행동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실제로는 언론에서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거니까요. 

 예를 들어 이웃에 사는 정말 착한 사람이 있는데, 다음 날 그 사람이 어떤 범죄에 관련됐을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사람을 생각해볼 겁니다.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그 범죄와의 연결 고리가 있었는지 되짚어 보는 거죠. 

 생각 끝에 어떤 의혹이 발견된다면 이제는 착한 이웃이 아니라 위험한 이웃이 될 테고, 의혹이 없다면 잠재적인 경계 혹은 의심에 머물게 될 겁니다. 


 '에이, 그런 걸 누가 믿어?'라는 말을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부터 그 말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는 걸 아니까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언론의 폭력적인 태도를 주요 문제로 다룹니다. 하지만 언론만 사람들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일깨우죠. 

 언론은 대중을 부추깁니다. 대중의 반응은 언론을 부추기고요. 거기에 피해 당사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희생당하거나 실제 가해자가 되거나 하는 선택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앞둔 시기가 되면 언론은 이후의 권력 구도를 따라 움직이거나, 스스로 권력 구도를 재편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누군가 '그랬다더라'거나, '하려고 한다'거나, '잘했다'거나, '잘못이 있다'거나 의혹과 추측과 비방이 난무하죠.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질투심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서 두드러진 감정입니다.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인 카타리나 블룸이었기에 자신이 아닌 범죄자를 선택한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린 거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쩌면 너무 자주 말입니다.


 권위자, 가진 자, 높은 자들의 말은 너무 간단히 신뢰를 얻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처럼 가진 것 없고, 가난하며, 배우지 못했고, 다만 자기 삶에 성실하고 열심이었던 사람들의 말은 좀처럼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라면 더욱 더요. 

 사람들은 권력과 부와 명예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하곤 하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이유도 사실은 같은 걸 원했지만 자신은 얻지 못한 열등감에 기인합니다. 

 가정부로 일하는 하찮은 여자가 부유한 남자의 애정 공세를 거절했다고 누가 믿을까요? 가정부가 부유한 남자를 유혹했다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들리겠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속의 비극과 비참은 황색 언론만의 소행이 아니라 그에 동조한 대중들과 외면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한동안 '가짜 뉴스'로 소란스러웠고, 앞으로도 얼마간 더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것이 정말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것인가의 구분입니다. 

 

 바람은 다만 불어갈 뿐입니다. 

바람이 나무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나무가 바람에 휘둘리는 것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갈대입니다. 흔들릴 수 있고, 흔들리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흔들리는 것과 휘둘리는 건 다릅니다. 

흔들림은 유연함이라면 휘둘림은 혼란스러움이라는 거죠.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해서 흔들리지도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중심을 잃지 않기에 오래 굳건할 수 있죠.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중심을 잃지 마시길, 중심이 없다면 이제는 찾아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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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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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이름을 붙이자면 '부끄러움'이 어울리겠습니다. 

 솔직히는 이 부끄러움이 진심에서 나온 거라면, 어제나 그제 쓰던 방법과 다르지 않을 '오늘의 쓰기'를 포기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를 조금 잘 아는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얘가 오늘은 또 왜 이런대?'하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뜸 들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밝히기로 합니다. 

 오늘 부끄러움이 시작된 건 여기에서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정확한 말을 찾고 그 문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려 한다. 체를 치는 것처럼 섬세하게 가다듬는 과정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과정을 피할 수 없다. 글 쓰는 직업의 정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중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저는 글을 고쳐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글을 쓰는 방법이란 게 이런 식이죠.

"자, 써볼까?"로 시작합니다.

"끝, 다 썼다."로 끝납니다.

개요도, 퇴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휘갈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제 문제를 찾아봅시다.


 네. 줌파 라히리가 밝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제 쓰기 과정에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글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고 다만 배설하듯 쏟아내기만 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건 '쏟아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뒤처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책을 읽고 정리를 해나가다 보면 생각이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5년 전까지는 이지성 작가의 글 어디가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4년 전까지, '아프니까 청춘'인 줄 알았습니다. 그즈음에도 연금술사의 '우주가 도와주는 기적'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2년 전까지 김훈 작가의 글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요?

전부 뒤집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어제 한 말, 쓴 글을 '오늘의 나'가 부정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기'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형성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글을 휘갈겨놓고 수습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어제의 '불완전한 나'가 쓴 글을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불완전했던 모습을 증거로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 어떻게 고쳐 쓰면 좋은지 모른다는 대안의 부재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가 되겠군요.


 그렇게 5년 혹은 6년을 써오는 사이에 어쩌면 오만해졌던 거라는 생각이 부끄러움을 더 키웠습니다. 오만할 수 없는, 오만해서는 안 되는 존재의 오만만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또 있을까요.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퓰리처 상 수상자 줌파 라히리가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에 도전한 기록이자 도전의 결실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벵골 출신 이민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며 벵골어에도 영어에도 애착을 갖지 못한 채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마음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이탈리아어에 매료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언어'가 아닌 '갈망하는 언어'를 갖게 된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그야말로 '몰두'합니다. 마침내는 로마에서 살면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죠. 

 이런 질문을 아주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퓰리처 상 수상자, 영어 사용자의 최대 영광을 차지한 실력자가 왜 낯설고 생소한 언어에 도전하는가?"

명시적인 답이 없었던 건지, 가볍게 읽은 탓인지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얻고자 했던 건지는 알만 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통해 줌파 라히리를 얻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 서툴고 더디며, 기교도 수식도 없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진실된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죠.

 줌파 라히리는 분명 이탈리아어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고 느꼈을 겁니다.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겠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건너기'로 시작합니다. 

하나의, 제법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 한쪽에서 다른 쪽을 수영으로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늘 호수의 얕은 부분에서만 헤엄칩니다. 언제든 헤엄치기를 멈출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요. 어느 날에 이 사람은 한계를 느낍니다. 더는 얕은 데서만 헤엄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마음을 먹고 이쪽 편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150번쯤 팔을 저었을 때 호수의 가장 깊은 중심을 지나고 또 그만큼 팔을 저었을 때는 반대쪽에 닿습니다. 너무 쉽게, 간단히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좀 자신이 생깁니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은 호수를 가로질러 저쪽 편에서 이쪽 편으로 헤엄쳐 옵니다. 이쪽이었던 건 저쪽이 되고, 저쪽이었던 건 이쪽이 됩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모든 게 달라졌음을 이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혀나가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낍니다.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변신'


한 때 추방당했던 존재는 이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부딪힌 벽도 언젠가는 허물거나 뛰어넘게 될 겁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자발적인 변신에의 의지이고, 의지를 뒤따르는 노력입니다. 


 이미 충분히 뛰어난 작가인 줌파 라히리는 자기를 둘러싼 벽을 뛰어넘기 위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변신을 선택합니다. 불안해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완전하게 자기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갑니다. 

 진정 '글을 쓰는 사람'의 모범이 되어줍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제목은 줌파 라히리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포켓 사전 이야기 마지막에 적은 문장입니다. 

원제는 IN ALTRE PAROLE, 영어 제목은 IN OTHER WORDS인데 '다른 말로', '다시 말해서'쯤 되는 의미인데 책 내용에 비춰보면 '다른 언어로'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지 싶습니다.

 한국어 제목이 더 멋지긴 한데, 원제 쪽이 더 담백하고 명료합니다.


 뭐, 부끄러움으로 시작해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끝났군요. 

올해 목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고르고, 글을 가다듬는 일을 조금씩이나마 익혀나가야겠네요.


아, 이렇게 적었으면서도 쓰기를 마치면 들여다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올려버리겠죠. 

 구제불능성이 또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아져 가겠습니다. 처음에는 호수의 얕은 데서 헤엄치던 줌파 라히리처럼, 어느 순간에는 호수를 가로지를 수 있게 된 줌파 라히리처럼, 조금씩 그러나  순간에 변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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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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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배웠습니다. 동시에, 기이하게도 '성역할'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도 배웠습니다. 생활과 태도에서 암묵적 혹은 묵시적으로 '남자는' 혹은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라'며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지적과 반발을 유난스럽다거나 적응하지 못한다며 비난하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불이익을 주거나 모욕을 안기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상 속이니까요.

 

 기이한 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음에도 모른다는 겁니다. 

모호하게 '모른다'라고 말할 게 아니라 좀 더 나눠서 보자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경험하고 있지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거나, '다 그런 것이라고 넘겨 버리'거나,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거나 설득 당하'거나 하는 식으로 확장되고, 확산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습된 무기력


 자기 몸의 100배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벼룩을 그 절반 높이의 칸막이 안에 가둬두면 나중에는 칸막이가 없어지더라도 절반 이상으로는 뛰지 못하게 된다고 하죠. 

 어떤 사람들은 여성들이 현재의 사회 구조와 작동 방식을 따른다는 건 현재의 방식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어서'와 '그렇게 하는 게 좋아서'는 전혀 다릅니다. 설사 결과가 같다고 해도 둘은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거죠. 


 세상에는 생김새나 신체적인 특징 혹은 버릇보다 더 강력한 '유전 요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성별'이라는 거대한 유전 요인 말입니다. 남성은 남성의 지위와 행동 방식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를 계승합니다. 여성은 여성의 지위와 행동 방식, 사고방식을 계승합니다. 

 소위 '대물림'이라고 하는 일이 차이가 명백하다고 믿어지는 성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남자들, 모든 남성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하거나 부당하거나 두렵거나 끔찍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거나 '안다'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례한 일이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정기적인 모임을 함께 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임 외에는 어떤 상황도 공유되지 않는 모임의 '회원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루는 모임이 늦게 끝나 버스와 지하철 운행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상황이 시작됩니다. 다음 상황 중 여자의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상황'은 어느 것일까요.

1. 택시를 타고 간다.

2. 집에 연락해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혼자 기다린다.

3. 함께 모임을 한 남자 회원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1번이 가장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택시에서의 추행이나 범죄 사건이 워낙 자주 일어나다 보니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무서운 건 3번이 아닐까 싶어 졌습니다. 

 몇 번인가 모임에서 얼굴을 본 사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동행하겠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82년 생 김지영>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중략)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82년 생 김지영> 中

폭력은 폭력이고, 괴롭힘은 괴롭힘일 뿐입니다. 관심이나 애정표현을 괴롭힘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죠. 어쩌면 남자는 여자가 걱정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합의되지도, 공개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개인적인 의도일 뿐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상대방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되어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겁니다.


 '무지가 죄'라면 무지한 남자들은 잠재적인 '죄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죄인의 혐의를 벗는 유일한 방법은, 배우고 익혀서 알아가는 것뿐입니다.

<82년 생 김지영>은 우리 무지한 남자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할머니, 엄마, 누나, 여동생, 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속의 '차별'과 '공포', '불이익'과 '비정상'을 들추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의 불편이 아니고, 남자들을 향한 부당함이 아니고, 남자들의 불이익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비열한 행동입니다. 

 성차별,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기이하게도 불편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것도, 책임을 묻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저러한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식의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방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82년 생 김지영>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을 몇 가지 공유해보겠습니다.

1. 집안일과 살림, 육아는 여자의 일이다.

2. 남자는 집안일과 살림, 육아를 '돕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의 집이고, 남자의 살림이며, 남자의 아이를 키우는 일은 '도울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3. 남자는 여자에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자는 고생을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거다. 남자가 미안해할 건 고생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그 마음의 태도다.

4. 관심 있는 여자, 좋아하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에게 짓궂게 굴거나 괴롭히는 게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폭력'이다. 다른 이름은 없다.

5. 여자가 친절하게 대하고, 잘 해주면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안다. 극단적으로는 헤픈 여자로 여기고 막 대하기도 한다. 여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최선의 선택으로 웃음과 친절한 태도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착각은 자유지만, 거기까지만.

6. 합리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양성 평등이라거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앞과 뒤가 다른 이중 인격자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7. 여자가 너무 뛰어나고 잘나면 남자가 기가 죽는다. 그러므로 여자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왜 남자는 기가 죽으면 안 되는 건가, 그전에 여자가 '더 뛰어나면' 남자가 기가 죽는다는 말의 어디에 합리적인 논리가 존재하는지.

8.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남자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나? 저마다 이유와 사정이 있는 법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편견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9.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여성들을 위한 제도와 혜택도 많아졌다.라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빨간불에는 정지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신호를 위반하는 사람은 없다. 제도가 있어도 이용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 인식이 없다면 법이 아무리 잘 짜여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다.

10.  아이를 낳았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잃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본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82년 생 김지영> 中

여자는 거의 모든 걸 잃는다. 남자가 잃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직장 동료와의 맥주 한 잔 같은 것들.

11. 직장 생활을 하느라 아이를 남에게 맡겼을 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비난은 엄마를 향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죠. 아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건 엄마였습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타인에게 맡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비난이 부당한 이유입니다.

12. 모성애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적어도 사회가 '열녀비'처럼 떠받드는 모성애는 그렇다는 거죠. 우리는 강제 혹은 강요된 애정에 '위대하다'는 칭호를 붙이지 않습니다. 

13. 남편이 일할 시간에 한가롭게 커피 한 잔을 하는 여자는 자칫 '맘충'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아내는 결코 놀고먹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다만 씹어 뱉기 위해 날카롭고 치명적인 말을 던지는 사람들의 그 입에 저주가 내리길.

14. 남자의 '범죄 행위'가 있었을 때, '가정과 부모의 존재'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82년 생 김지영> 中

그러하다.

15. 이 모든 차별이 부당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문제이기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시스템, 구조, 관습들이 잘못되어 있는 거다. '혼란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우려와 혼란의 진짜 정체는 지금까지 누려온 우월함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치졸한 변명이다. 

 잃어버릴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다.


 많이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발견 한 건 고작 이 정도죠. 

오래전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왔지만 지금까지도 '이해는 하거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 외에는 얻은 게 없습니다. 

 남자로 태어나, 불편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해 왔습니다. 

누구도 '이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고요.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책임을 전가하며 모른 척 해왔을 뿐입니다. 

이것이 비겁한 행동이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비겁했고, 비열했으며, 무지했고, 무관심했던 것은 물론, 동조자였고, 방조자였으며,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82년 생 김지영>은 남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상을 그대로 지면으로 옮겨 적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82년 생 김지영>을 읽으며 충격을 받는 사람이 있을 거고, 읽기 전과 후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차별'과 '혐오'를 지칭하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열녀', '모성애', '엄마', '현모양처', '요조숙녀' 유사 의미 등등.

 당연하다고 믿어 온 것, 명예롭다고 떠받들어온 것, 남자들이 이용해온 칭호와 이름들.


 좋은 것만 물려주기에도 안쓰럽습니다. 

불행의 대물림, 상처의 연쇄. 

그 외침에, 울음에, 귀 기울여야만 멈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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