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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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나단 노엘.

직업, 은행 경비원.

나이, 50대.

소원,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여 남은 평생을 평화롭게 지내기.

가족 관계, 이민  누이동생.

친구, 특정한 인물 없음.

인생 최대 위기,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 아파트 복도에 들어와 있는 비둘기와 마주친 일.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세상이 끝나버린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약하다거나, 유난히 비관적인  아닙니다. 

단지,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며, 일상이라는 평화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뿐이죠.

일상이 너무 소중해서, 영원히 흐트러지지 않기를, 변하거나 끝나지 않기를 몹시도 바랄 뿐입니다.


 조나단 노엘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입니다.

오래전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누이동생과도 헤어진 뒤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아내였던 여자의 배신을 경험한 이후, 조나단은 더는 세상에 많은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박하고  소박하게, 다만 지금 살고 있는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30년 넘게 해온,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경비 일에서 퇴직하는 날을 기다리며,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죠.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건, 어느 평화로운 금요일 아침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장실에 가려던 조나단은 복도  복판에 앉아 있는 비둘기  마리에 얼어붙고 맙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

어디에나 있는 회색 날짐승 하나가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데 걸린 시간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조나단은 30년 넘게 살아온 집을 영원히 떠날 생각, 불안, 초조, 긴장, 좌절, 절망, 죽음까지를 생각하죠. 


  오래전에는, 사실은 얼마 전까지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조나단을 나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인데.'하고요.

조나단이 삶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둘기  마리 때문에 포기할 정도의 삶이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조나단은, 자기의 삶, 쓸쓸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닐까."


 다른 사람, 세상,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서 비참하게 느껴지는 삶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해서, 위태로워 보일 정도의 삶이라고 해도 말이죠.


나는 <비둘기>에서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무시하기 쉬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평소라면 너무나 당연했을, 그래서 고마움은커녕 번거롭고 귀찮게 여겼을 일들조차 소중하게 느끼게 됩니다. 

당연할 거라 믿었던 내일, 계속될 거라 믿었던 일상이 얼마나 간단히 부서질  있는지 깨닫습니다.

 순식간에 불안에 집어삼켜졌다가,   아닌 일을 계기로 회복할  있음도 알게 됩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행복이라고 이름 짓는 일들의 허허로움과 착각에 생각이 닿습니다.

행복은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 누군가의 일화를 더하면 감상을 얼마든지 늘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 두기로 합니다.

<비둘기>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시간, 길어도 하루면 충분히 읽을  있으며 어렵거나 복잡한 이해를 요구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집채만 한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도 우리는 간단히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넘어져 다치기도 하죠. 

하지만 너무나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보통은 조금 다치는 정도에서 털고 일어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작은 돌부리 덕에  바위를 피할 수도 있겠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기만 한 삶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가끔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 작은 위기들을 넘어서는 경험은 우리가 잊고 지낸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리게 도와줄 거예요.


다른   포기해도 좋습니다마는, 자신만은 간단히 포기하지 마세요. 

비둘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언제든 날아들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 누구를 훼방하거나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일상과, 나의 지금과,  모두를 더한 나를 사랑하시길 바라요.


불안도, 두려움도, 사랑도, 모두 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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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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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월도 끝.

여름은 시작도  했건만 자꾸 땀이 나고 낮에는 벌써 더위에 지친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얼음이나 추운 겨울을 떠올렸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떠올리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혼자 지내기 좋은 계절이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쩌면 한 걸음만 내딛는다면, 혹은 손만 내민다면 벗어날 수 있을 시간을 유예하고 있다. 마치 시간이 타버려서 재만 남기를 기다리듯, 마치 조금 뒤에는 시간의 재마저 흩어져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이. 
<미상> 시작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제대로  소설일 리가 없다. 그냥 꿈, 개꿈, 초여름밤의 신기루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꿈이 이유도 없이 괜히 꾸게   아니다. 이유는 있다.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느 소설?

하루키의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라고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이라고도 하는 소설이다.

지금도  이야기가 다른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해두지만, 같은 이야기다. 같은 작가가 쓴, 제목만 달리  같은 작품이다.


 처음과 두 번째는 『상실의 시대』로 읽었다.  2 무렵이 처음이었고, 찾아보니 2013년이  번째였다.

세 번째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었다. 같은 작품인데도 분위기가  다르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알아두면 좋을  같아 보태둔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뭐, 보나 마나 섹스 장면마다 침을 삼키며 종이가 뚫어져라 읽었으리라. 하지만 섹스 장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있었다. 

 화자인 '나', 와타나베의 성격과 태도다. 이런 인간이 현실에 존재할  없다고 생각될 만큼, 독특했다. 일종의 동경 효과겠지만, 그런 독특한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점을 발견했을  무척 반갑고 위안이 됐다.


 고등학생 때 와타나베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둘 있었다. 한 명은 기즈키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평범한 존재인 '나'와 기꺼이 어울리는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다른 한 명은 나오코다. 기즈키의 여자 친구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으며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틀림없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거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비극이 찾아든다. 고 2, 열일곱. 기즈키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어버린다. 자살이었다. 

 그 후로 2년, 와타나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나오코와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기즈키의 죽음이 와타나베의 일부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고, 와타나베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쿨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우연이었을까, 어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재회한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  사람은 오래, 많이 함께 걷는다. 도시 곳곳을, 여기저기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다만 걷고  걷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뭐,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으며 떠올린 생각 하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던 최대의 화두이자 바람이었던 소망이었으므로. 

 와타나베와 재회한 나오코는  가지 부탁을 한다. 그중  번째 부탁은 이런 거였다.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열여덟 소년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했다. 기억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바람을 잊고 살게 됐지만(정말, 기억되거나 잊히거나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잊고 지냈다), 그때는 그게  간절했다.


  다시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고등학교 시절들. 뭔가 뒤죽박죽 엉망이라서  순간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기억의 홍수' 같은 거였다. 지나갈, 그런 혼란이었다.

  

 와타나베 주변에는 기이한 인물이 유난히 많은데 나가사와라는 인물도 무척 독특하다. 도쿄대 생으로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도덕성이 대단히 결여된,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이기적인 동시에 완고하고, 누구를 신뢰한다거나 누구에게 의지할 줄도 모르는 그런 남자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는데, 나가사와는  이유를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이다.

 "나와 와타나베가 닮은 점은 말이야,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점이 다른 인간들하고 달라. 다른 놈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애를 태워. 그렇지만 나와 와타나베는 그렇지 않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 남은 남이라고."
『노르웨이의 숲』 중

 확실히 둘은 닮았다. 나가사와가 말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특히.  역시 나가사와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은 못 되는 존재였으니까. 재밌는  나가사와의 말에 와타나베가 보탠 말이  생각에 무척 가깝다는 거다.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로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노르웨이의 숲』 중

 이 정도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말 이해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는 너무나 힘들고 쓸쓸해지고 마는 거였다.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많은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고, 조금  참게   달라졌을 뿐이다.


 하루키 작품은 '가벼움'을 넘어 '경박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물이, 이야기가 그런 혹평으로 가치를 잃는 일은 없다. 

『노르웨이의 숲』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완전함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종종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중요한 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불완전한 타인 혹은 나를 동정하지 않는 거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사랑하는 거다. 


 사실 방법은 그것 하나다. 

사랑하는 것.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결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다만 허덕이며, 기억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시간은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지나간  돌아오지 않는다. 억지로 되돌리려 해도 점점  멀어질 뿐이고,  빨리 지칠 뿐이고, 공허해질 뿐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다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없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몰이해가 영원히 지속된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대로 '순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사와는 '이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넌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받기를 바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나가사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해는 '받고 싶다'라고 해서 받을  있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인 이상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불완전한 존재라도 이해받고 싶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아닌가? 

그렇게 바라는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바람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몹쓸 짓이었다. 

 이해는 바라거나, 구하는  아니라는 사실로 돌아가면 간단히 결론이 나오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전혀, 영원히 이해할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한순간 '그런 거였나?'하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경험. 그런 거다. 대부분의 이해는 그렇게 조금 늦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찾아든다. 슬퍼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바로 이해다.


  2013년에 감상을 남긴 나는 '10년 후에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를 궁금해했다. 

4년 후의 '나'가 느낀  지금까지 적어 두었다. 이제 2013년의 나에 이어 2017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6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전혀 모르겠다. 감도 오지 않는다. 상상도   없다.

그런 거다.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믿을  있는  모두 과거에 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도 달리 방법은 없다.

  

 기억해야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둘째, 불완전한 나지만 동정해서는  된다.

셋째,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넷째, 이해는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아니다. 

다섯째,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를.


 보통의 감상도 그렇지만  감상은 유난히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나를 위해 읽었고, 나를 위해 써낸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나의 편지와 다르지 않은 그런 이야기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상실의 시대』는 애초에 의미가 전혀 달랐고, 『노르웨이의 숲』도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노르웨이 목재 가구' 정도의 의미라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솔직히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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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9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독서모임 하루키가 책을 벌어다 주었네요 :>

대장물방울 2017-06-09 15:15   좋아요 0 | URL
오잉? 오, 몰랐는데 고맙습니당. ㅎㅎ
달궁독서모임 덕분이네요.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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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작가'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하나만 적어두기로 합니다.


'쓴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라고 해도 쓰는 건 '자기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독백'. 

쓴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중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글, 사실을 날조하고 기만하는 글, 핵심을 흐리고 선동하는 글을 쓰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쓰는 이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는 엄연히 읽는 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위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

진실된 글, 좋은 글은 감동도 주지만 안목도 높여줍니다. 

거짓과 기만이라는 진흙 속에서 사실과 진심이라는 진주를 알아볼  있게 하죠.


 조지 오웰의 글은 좋습니다.

매우, 몹시, 대단히 좋습니다. 

놀라운 건, 글보다  좋은  조지 오웰의 삶이라는 겁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남긴 많은 에세이에서 스물아홉 편을 뽑아 먼저  순서로 모아둔 책입니다.

제목이 '나는  쓰는가'라서 글 쓰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어 샀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그분들조차  착오, 착각이 기쁨이 됐을 만큼 오웰의 글은 아름다웠습니다.


스물아홉 편의 에세이에는 조지 오웰의 삶, 생각과 함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글이 좋은 이유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조지 오웰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가져다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사실만 담았다면 지금만큼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웰의 글에는 사랑과 애정이, 소외되고 잊힌 자들을 향한 진심이 담겨 있기에  좋아졌던 거죠.


 연대순으로 실린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때쯤 어떤 작품을 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확인해보면 어김이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인도에서 태어나 식민지 경찰로 버마에서 근무했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카탈로니아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조국 영국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무조건 감싸는  아니라 애정 어린 질책과 정당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취임  미국에서 다시금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1984년>과 대표작인 <동물 농장>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영국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균형 잡힌 시선과 넓고 깊은 사유, 과감히 현장으로 뛰어가는 결단력과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낼  있는 능력까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는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렵겠죠.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가 읽어도 좋겠지만,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한 정치, 누구를 위한 나라, 어떤 목적의 전쟁, 무슨 의도의 사상.

약자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조지 오웰의 따뜻한 마음을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감상문은 너무 쓰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무엇을 쓰는  능숙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으며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 탓입니다. 

벌써  번이나 쓰기를 그치고 다른 짓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숙함이 부끄럽지만 조금만  적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쓰는가>에서  문장만을 꼽으라면  문장으로  생각입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나는  쓰는가> 중


오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분명한  언어와 생각, 어느 것도 타락해서는  된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은 '어쩔  없다'며 자꾸만 생각의 타락을 정당화합니다. 타락한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하게 뒤틀린 언어를 가져다 쓰고는 합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고, 타락한 언어가 다시 생각을 타락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직시해 봅시다. 

조지 오웰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조국 영국을 직시한 것처럼요.

수년간 불가능할 것만 같던 비정상의 정상화. 

우리는 너무나 간단히, 허탈할 만큼 쉽게, 그러나 그만큼 기쁘게 변해가는  보고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진 것. 

모든 시작은 생각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를 봅시다. 

우리는 이제 이해할  있습니다. 

모국어처럼(이전의 그들도 물론 모국어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리는 간단히   있습니다.


유체이탈, 얼버무림, 횡설수설, 묵묵부답, 침묵일관. 

우리는 이러한 행동에 '비정상'이라는 언어를   있게 됐습니다. 


조지 오웰은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약자들, 노동자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1984년>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노동자들만이 희망'이라고 믿었듯 현실의 조지 오웰 역시 그들만이 희망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애정이 <나는  쓰는가>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나는 왜 읽는가?"

이런 만남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앎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반갑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쓰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 쓰는 이는 세계와 시대와 역사의 산물입니다. 

어떤 글, 무슨 이야기를 쓰는 많이 쓰는지를 보면  세계와 시대를 이해할  있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아픕니다. 

가볍고, 말랑하며, 위로와 위안, 힐링을 위한 언어가 넘쳐흐릅니다.

언어는 생각을 타락시킬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휘말려 다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만 합니다.


 무엇이 좋은 글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글인지.

어떤 글이 진실이고, 어떤 글이 거짓인지.

어떻게 진심과 기만을 가려낼지.

 판단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혼란한 시기일수록 안목과 통찰력이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어린 시절을 회상한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누가 저지르는 무엇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쓰는가> 중

불가항력처럼 착각이 강요되는 날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말 것이며, 세상의 밝음뿐 아니라 어두움, 표면과 이면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안목을 지니시기를.

 그 안목을 키우는데 오웰의 통찰이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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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마카롱 에디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영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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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유명한 소설 도입부에 적은 작가의 목소리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예상하고 계신가요?

 문장이 담긴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모자 그림. 
하나뿐인 장미. 
길든 여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기다림의 설렘과 떨림. 
정말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고, 비록 작가가 어린이였던 어른에게 바치기는 했지만 어린이들도 쉽게 읽을  있다는  생각하면 새삼 깊은 사유와 감성에 놀라게 됩니다. 

 인생책이라고 정말 좋다고 얘기하고 다녔으면서, 서너 번은 읽었으면서, 앞서 적은 문장이 마음에 와 닿은 순간이 없었다는 사실. 

이번에야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발견하고서는 '생텍쥐페리가 이런 말도 했네.'하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던 일.

  아닐 수도 있지만 조금은 충격적이라고 느꼈던 건, "잘 읽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뭐, 어떤 작품을 읽고 무얼 느껴야 하고, 어떤  발견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해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소망이랄까, 욕심이랄까, 아쉬움 같은  있어요.

좋은 작품이기에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람들요.


 워낙 좋은 작품이니 찬사를 보태봐야 신화에 덧칠하는 셈밖에 되지 않을 테고,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   같은 문장  개를 적기로 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사람들이  책을 건성으로 읽는  싫다."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는데 건성으로 듣는다면 속상하고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죠. 

솔직함이 두드러지는 문장이라, 새삼 생텍쥐페리의 순수함을 다시 떠올리게 되네요.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  있지만, 읽은 느낌이나 생각을 전해준다면  기분 좋은 그런 인지상정의 아주 기본적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지함.

 입이 하나고 눈과 귀가 둘인 이유는 적게 말하고 귀 기울이며, 두루 살피라는 의미라고 하죠.

읽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은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넌 모든 걸 혼동해…… 모든  뒤섞어버린다고!"입니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상태에서 수리는 진전이 없는데 어린 왕자가 장미꽃 얘기를 하자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얘기를 가볍게 넘겨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화가 나서 외치죠. "꼭 어른들처럼 말하네!"라고요.


어른들이 말할 때 모든 걸 혼동하고 뒤섞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이 마땅치 않을 때, 핑계나 변명이 궁색할 때 얼버무리듯 모호하게 말하곤 하죠. 

아이들은 그렇게 돌려서 말하거나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거나 애매하게 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료하죠. 

 대표적인 어른들의 말은 정치가의 말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표되는 결국 무슨 말인지 아무 말도 아닌 복잡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자주 쓰죠. 

뜨끔해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분들이 특히.


세 번째는 "나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없었다.  자신이 아주 서툴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어린 왕자에게 가닿을  있는지, 어디에서 그에게 다가갈  있는지   없었다. 눈물의 나라는 그렇게나 신비로운 곳이다."입니다.

 양이 장미꽃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장미꽃 한 송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태도가 일으킨 분노로 어린 왕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나'는 비행기 수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어린 왕자를 다독이고 달래죠. 

 특히 마음이 끌린 부분은 '눈물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눈물의 나라'는 뭘까요. 

눈물이 시작되는 곳? 아니면 눈물이 만나 섞이는 곳? 그것도 아니면 눈물의 근원이 되는 감정 혹은 위로?

결과적으로 보면 생텍쥐페리는 눈물의 나라에 닿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 왕자를 위로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위로하는  성공했으니까요. 

 친구가 됐죠. 기적처럼. 

솔직히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진정한 친구끼리는 눈물에 국경이 나뉘어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겠습니다. 슬픔의 근원, 아픔을 달래는 방법은 머리로 알아낼 수 없는 거겠죠. 마음을 담지 않고는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 

기억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번째는 "그가 가로등을 켜는  마치 별이나  하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아. 가로등을 끄면 꽃이나 별이 잠드는 거고. 아주 아름다운 일이야.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이고."입니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나요?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동의하기 쉬운 가요?

비슷하지만  생각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발견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근본이 어디에 있는 하는 문제입니다. 근본은 다른 말로는 의미 혹은 가치라고 적을 수도 있겠죠.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에서는 '쓸모'가 목적이고 아름다움이 결과죠. 

간단히 말하면 후자의 생각은 쓸모가 있는 것만 아름답다는 겁니다. 

 어린 왕자에 따르면 어른들의 생각이죠.

'장미꽃  송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장미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라는 식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의 '가치'입니다. 가치는 '부여하는 것'이죠. 

같은 것, 흔한 것이라도 내게 의미가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줬다면 아름다울  있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죠.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가 전해준 것이기에 아름다울  있다는 거죠.

  쓸모가 있기에 아름답다의 예를 생각해보면 이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가난해서 금반지도 겨우 선물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자라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죠. 절대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가  겁니다. 쓸모가  크니까요. 어떤 쓸모인가? 단순하게는 금전으로 환산할  있다는 쓸모의 차이부터 무척 큽니다. 비교하기 어렵죠. 

 하지만 금반지를 선물한 사람의 사랑이 더 작은 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동등하면 동등했지 어느 쪽이 작다고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 좋은 일'을 갖기를 원합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일은 편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죠. 하지만 보람 있고, 의미 있으며, 가치가 있는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즐겁게 계속할  있는 일을   있다는   행복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마지못해 해야 한다면 괴로움이  크겠죠. 단지 돈만을 위해 일한다면 자신이 쓸모 있는 일을 한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일'

평생을 이런 일들만 하며 보내고 싶은 바람입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갑니다. 소행성 B612호로요. 

장미꽃과 다투고 자기 별을 떠난 어린 왕자는 일곱 개의 별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성장하죠. 

  

 아이는 성장하면 바빠집니다.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너무 많아서  틈도 없죠. 그렇게 성장해서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해야  이유가 늘어나죠. 

  

 우리는 너무 많은  잊고 살아갑니다. 

소중한  보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정말 중요한  뭔지 알지 못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려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번은 그런 경험을 했을 테니, 모르는  아니라 잊어버린 셈입니다. 

사랑은 책으로 배우지 말라고 하죠. 

그렇더라도 사랑을 책으로 깨우지 못할  없을 겁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읽어서는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생텍쥐페리가 서운해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니까요.

"나는 사람들이 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게 싫다."


글자를 세심히 살펴 읽으라는 말이 아닐 테죠.

 안에 담은 마음을 들여다봐달라는 부탁 아닐까요.

간단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그런 의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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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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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선택을 하는 날입니다. 

 누구나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있을 테죠. 하지만 내가 선택한 후보가 반드시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내가 선택한 후보가 내가 기대한 결과를 보여줄 거라는 확신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든, 명분을 따른 것이든, 다른 사람을 좇은 것이든 선택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셈이기에 나름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런 분들도 계시죠. 

"나는 선택하지 않는  선택했다."라고 하시는 분들.

솔직히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죠.

"난 포기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후보가 없으므로, 누구에게 표를 던지든 의미가 없기에 행사하지 않겠다.'거나 '누가 되든 결국 도진개진인  아니냐,  선택에 의미가 없는  아니냐'라고 그럴듯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역시 허튼소리인  마찬가집니다. 

 후보는 개인인 동시에 집단이죠. '나와 일치하는 후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맹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습니다. 이해 가능 여부를 떠나서 이유와 명분이 있기에 그들은 당당할  있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도 가질  없습니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소중한 권리,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제학 카페>라는 책에 감상문을 쓰면서 시작하며 '선택'을 이야기한  오늘이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유시민 작가도 말하고 있지만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대통령 선거 역시 경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선택이 적게는 5년, 길게는 수십 년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이 정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고, 관련이 크기에 <경제학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부분을 공유합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빈부격차와 불황을 비롯한 온갖 경제적인 악을 제거할 것처럼 큰소리치는 정치가를 믿지 말라. 무식한 돌팔이가 아니면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 틀림없으니까.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우리는  선거 때마다 '저를 뽑아주시면'으로 시작해 '무엇 무엇하겠습니다'하는 약속을 무수히 받았습니다. 

믿지 못하면서도 찍고, 믿고 싶어서 찍고, 믿을  없어서 찍지 않는 일의 반복이었죠. 

 '저는   있습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경제의 문제, 외교의 문제, 정치의 문제라는  나만 잘한다거나, 내가 잘하고 싶어서 잘할  있는  아니라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행보와 태도, 의지를 보고 결정하려고 하게 됩니다.   나은 결과를 기대하면서요.


 때로 우리는 마법사의 출현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많은 순간에 그런 마법적인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능의 마법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을  없을 만큼 좋은, 바라 마지않는 공약은 언제나 공허한 약속으로 끝이 난다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죠. 

 물음에 대한 답은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는 '희망'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부자가   있다'는 희망에서라고요. 기이한  그런 희망이 거듭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도 마치 이제는 '포기'할  없어서,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이라는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못인  알면서도, 의심하면서도 계속할  있는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없습니다. 

 어떤 이득일까요?

'나만 이런 좌절, 실패, 분노,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이기심, 타인의 실패를, 좌절을, 분노를, 가난을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위안. 그런 뒤틀리고 비틀린 이득.


 지나친 생각일  있다는  압니다. 

사실은 나아지고 싶다, 나아질  있을 거다,  나아짐을  후보가 이루어줄 거다라는 기대에서 선택하고 있을 겁니다. 믿을  없지만, 여러 차례 배신당했지만 그럼에도 이젠 미운 정이 들어서라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있습니다. 혹은 해소되지 않은 연고주의, 지역주의, 사상과 이념의 문제를 용납할  없는지도요.


 중요한 건,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상당 부분이 '이기심'이라는 겁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므로 자기의 부를 희생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바, 생명에 치명적이어도 로비를 통해 판매 허가를 받고, 노동자가 위험에 노출될 걸 알면서도 외면하며, 실제로는 거의 같은 비용이 들더라도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을 운용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마다가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시장입니다.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그런 곳입니다. 개인, 기업의 이기심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기에 예측도 조정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계화, 국제화라는 불확정 요소가 더해지면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독재라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사람의 명령에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면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아주 잠시 동안은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 문제들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독재라는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법은 없습니다. 마법사도 없죠. 

변화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변화된 선택입니다.


 시장에서는 선택받은 상품, 기업만이 살아남습니다. 기업은 선택받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개발하며 생산합니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라면 결과적으로 최선의 상품과 기업만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자는 선택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선거에서 유권자가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왕이듯,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왕이다. 만약 그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정치가 엉망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유해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소비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당 기업의 상품을 불매함으로써 업계에서 추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에게는 그렇게   있는 힘이 있죠. 하지만 기업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상품 가격을 낮추고,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광고를 내보내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이벤트도 기획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수천 명의 소비자, 잠재적으로는 수만 명의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린 기업은 무사히 위기를 극복합니다. 


 정치도 닮아있습니다. 

나라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위기에 책임이 있는 정당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유권자라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런 정치인들과 정당을 퇴출시켜야 합니다. 선거에서 뽑아주지 않음으로써 유권자의 분노와 뜻, 힘을 보여줘야 하죠. 하지만 정당도, 정치인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우선 책임이 가장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오래된 논란, 논쟁을 끄집어내서 반대를 위한 반대, 반감을 되살립니다. 우리 밖에는 그들을 막을  없다고 호도합니다. 의외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납득합니다. 스스로는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경건한 마음도 먹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는  지켜보며 힘든 삶을  힘겹게 견뎌냅니다.


경제학은 '선택'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정치는 선택을 받는  최대의 문제죠.

둘은 무척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정경 유착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 테죠.(웃음)


 경제학은 최대의 만족, 최대의 효용을 이끌어내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연구를 하더라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최선이라는  단지 방향을 제시하고,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죠. 

 

 앞에서도 적었지만 선택의 핵심은 '이기심'입니다.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소비자의 기본적인 심리죠. 적어도 해가 되는 선택을 의도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이득이 되지 않아도 이기심은 작동할  있습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에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최대의 효용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최대의 효용의 기준과 요소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말이죠.


 소비의 문제에서 소비자는 어느 상품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해당 상품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면 단지 그뿐으로 자기 삶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정치의 문제는 다릅니다.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듭 투표를 했지만, 거듭 실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는 나아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선량한 유권자', '선의의 유권자'는 점점 투표의 의지를 잃습니다. 


그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어 질  있고, 희망도 기대도 없을  있습니다.

하지만  순간에도 다른 유권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 권력을 안겨줍니다. 

결국 절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던 후보가 당신의 삶을 좌우할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시달릴 의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항의 명분도 분노의 이유도 없습니다. 선택을 포기한 사람은 권리는 잃고, 의무만을 지게 된다는 겁니다.


경제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결국 정치로 귀결된 이유는 경제학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치와 닮아있고, 떼어놓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행사된 주권이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더디더라도 우리 사회는 나아질  있습니다.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있으니 이제 6시간 남짓의 시간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직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투표소로 향하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미래, 우리 아이의 미래, 우리 가족의 미래,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을 정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투표는 승리자를 정하는  쓰일 수도 있지만, 국민과 시민의 뜻을 전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마세요.

모든 마법은 당신의 손에서 시작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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